시온주의 - 主義 [라]Sionismus [영]Zio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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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주의 기구' 를 창설한 헤르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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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주의 기구' 를 창설한 헤르출.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고향이었던 땅, 즉 팔레스티나로 돌아가 유대인 국가를 세우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는 유대 민족주의 운동. 19세기 말 유럽 중부와 동부 지역에서 태동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배 경] '시온' 은 예루살렘을 지칭하는 단어이고, '시온주의' 는 예루살렘이 있는 약속의 땅 팔레스티나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다. 시온주의가 비록 19세기 중엽부터 유럽 지역에서 등장하였지만 그 기원은 구약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587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남부 유다 왕국이 멸망한 뒤, 바빌론으로 잡혀 갔던 유다 백성들은 야훼 하느님이 약속의 땅으로 그들에게 주셨던 땅, 특히 야훼 하느님이 계시는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열망하였다(시편 137편).
그러나 근대적 의미의 시온주의는 19세기 중엽부터 유럽의 중부와 동부 지역(주로 러시아와 루마니아와 폴란드)에 사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생겨났는데, 이는 당시 유럽의 정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881년 러시아에서 알렉산드르 2세 황제(1855~1881)가 암살된 후 유대인에 대한 대학살이 시작되자, 이러한 정치적인 변화에 대하여 유대인의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의 움직임과 그
와 반대로 오히려 유대인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더 나아가 유대 땅으로 이주하려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전자에 해당하는 것은 18세기 말부터 유럽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 사이에 퍼졌던 '하스칼라' (Haskalah) 운동을 가속화하는 것이었다. 이는 서방의 세속 문화에 적응하면서 살자는 것으로 이를 따르는 유대인들은 유럽 지역에서 정치적 · 사회적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과는 반대로 러시아 루마니아 · 폴란드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히바트 치온' (Hibbat Zion, '시온의 사랑' ) 운동을 일으켜 유대 국가 부흥과 '에레츠 이스라엘'(Erez Israel, '이스라엘의 땅 )로의 귀환을 지원하였다. 뿐만 아니라 '호베베이 치온' (Hovevei Zion, '시온을 사랑하는 자들)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팔레스티나로 귀환하는 유대인 농부나 예술가들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움 직임의 일환으로 1882년에는 터키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들이 리손레치온(Rishon le-Zion)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고, 루마니아 출신 유대인들은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 있는 로시피나(Rosh Pinnah)지역과 지중해쪽에 위치한 지크론야곱(Zikhmon Yaakov)에 정착하였다.
[정치적 시온주의] 초기의 시온주의는 동유럽의 유대인들 사이에 퍼져 있던 계몽 운동을 오스트리아 언론인이었던 헤르출(T. Herzl, 1860~1904)이 "시온주의 기구"(Zionism Organization)라는 단체를 창설함으로써 정치성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한편 1894년에 프랑스에서는 유대인이었던 드레푸스(A. Dreyfus, 1859~1935) 대위가 기밀 누설 혐의로 종신 금고형을 선고받은 사건을 계기로 유럽 전역에는 유대인을 배척하는 사회 풍조가 확산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나라에 동화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이에 헤르출은 유대인들이 각기 거주하는 유럽 국가의 문화에 동화되어야 하지만, 동유럽에서 확산되고 있는 반유대주의 아래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헤르출은 만약 유대인들이 국가를 형성해야 할 어떤 외압을 받게 된다면 유대인들이 하나의 땅에 모일 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개최된 제1차 '시온주의자 회의' (Zionist Congress)에서 헤르출은 "시온주의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티나 땅에 고향을 재건하는 것이 실현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고 선언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그는 첫째 팔레스티나로 유대인 농부와 공장 노동자들을 이주하려는 계획을 장려하였고, 둘째 각국의 법에 따라 적당한 기구를 조직하여 전체 유대인을 하나로 묶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셋째는 유대인들에게 유대국가 의식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넷째로는 시온주의자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곳에서는 각국 정부의 동의를 얻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시온주의 운동의 본부가 있는 빈(Wien)에서 헤르출은 주간지 《세계》(Die Welt)를 발행하여 시온주의 운동을 알리는 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 '시온주의자 회의' 는 1897년부터 1901년까지 매년 개최되었고, 그 후부터는 격년으로 개최되었다. '히바트 치온' 의 민중 운동은 헤르출에 의하여 시온주의가 민주적인 대중 운동으로 변화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제 기구로 변화되어 대규모의 정치와 교육과 정착을 준비하는 기구가 되었다. 또 헤르출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시온주의에 의하여 시온주의를 돕는 다양한 조직들이 생겨났는데, 특히 유대인들의 팔레스티나 정착을 경제적으로 돕는 기구들이 탄생되었다. 1899년에 설립된 '유대인 이주 신탁' (Jewish Colonial Trust)과1901년에 설립된 '유대 국가 기금 (Jewish National Fund)등은 유대인들에게 은행 역할을 하면서 그들이 팔레스티나에 토지를 구입하고 정착할 수 있는 자금을 지원하였다.
당시 팔레스티나를 통치하던 오스만 터키 정부(1517~1917)는 헤르출의 팔레스티나 자치권 요구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터키와 대립 관계에 있던 영국 정부는 헤르출을 지지하였고, 1903년에는 동아프리카의 우간다에 있는 사람이 살지 않는 땅(15,400km)으로 유대인들이 이주하라는 소위 '우간다 계획' 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이 '우간다 계획' 은 시온주의자들에 의하여 거부되었지만, 이 때문에 "시온주의 기구"는 내부 분열에 직면하였다. 이때 시온주의 기구에서 분리된 '유대 영토 기구 (JewishTeritorial Organization)는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다가 1917년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 이후 해체되고 말았다. 그리고 '우간다 계획' 으로 심한내부 진통과 분열을 겪은 시온주의 기구는 1905년에 개최된 제7차 시온주의자 회의에서 팔레스티나 밖으로의 이주 계획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채택함으로써 우간다 계획으로 야기된 내분을 종식시켰다.
〔헤르출 이후의 시온주의] 1904년 헤르출이 사망하자 콜른(Koin)으로 시온주의 운동 본부가 옮겨졌고, 후에는 다시 베를린으로 이전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들이 러시아의 정치적인 이유로 시온주의 운동에 많이 참여하였으나, 그 지도자적 역할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에 사는 유대인들이 수행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에 유럽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시온주의 운동에 적극 참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다양한 계층의 유대인들은 시온주의 운동에 반대하였다. 특히 이디시어(Yiddish)를 사용하거나 자신들의 자치권을 얻기 위하여 투쟁해 온 러시아, 오스트리아 그리고 헝가리에 거주하는 유대인들도 시온주의 운동에 반대하였다. 이들은 '하스칼라' 운동의 영향으로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그 나라의 한 부분이 되어 자신들의 자치권을 위해 투쟁하였다. 동시에 이디시라는 자신들만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정치적 · 문화적으로 자신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시온주의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다. 또 종교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유대인들은 약속의 땅인 '에레츠 이스라엘' 로의 귀환은 어떤 정치적인 운동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야훼 하느님에 의해서 인도주의적으로 성취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시온주의 운동을 반대하였다. 시온주의 운동이 이렇듯 다양한 반대에 부딪히자 시온주의자들은 연설과 팜플릿 그리고 신문 등을 통하여 자신들의 이념과 운동의 목적을 선전하였으며, 예술과 문학에서는 "유대 문예 부흥"을 자극하여 유대의 정체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의 일환으로 생겨난 것이 현대 히브리어이다.
'정치적 시온주의자' 에 대한 비판은 약속의 땅 팔레스티나로 이주한 개척자들에 의해서도 강하게 제시되었다. 1905년 러시아 혁명 실패와 학살의 움직임, 그리고 박해는 수많은 젊은 러시아 유대인들을 주변 국가와 팔레스티나로 이주하게 하였다. 그 결과 1881년부터 1914년까지 260만 명의 러시아계 유대인들이 이주하였다. 특히 팔레스티나로 이주한 이들은 개척자로서 그곳에 정착한 이들로, '실천적 시온주의자들' (Practical Zionists)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들은 헤르출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시온주의자들' (Political Zionists)에는 반대하였다. 러시아를 중심으로 이주해 온 실천적 시온주의자들은 지속적으로 늘어나 1914년까지 9만여 명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티나로 이주했으며, 이들 가운데 13,000명이 농촌에있는 43개의 정착촌에 거주하였다. 이들은 주로 프랑스의 유대인 자선가인 로트실트(B. Rothschild)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실천적 시온주의자들에 대한 비판도 쏟아졌다. 특히 우크라이나 출신의 아하드 하암(AhadHaam, 1856~1927)은 팔레스티나는 대량 이주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흩어진 유대 국가의 모든 부분을 하나로 결집하기 위한 정신적 중심지의 역할을 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아하드 하암은 유대 국가는 정치적 시온주의 운동에 의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문예 부흥을 통한 영적 부흥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팔레스티나 지역에 유대 국가를 세워 모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과 모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아하드 하암의 비판이 있은 후 시온주의 운동의 이념화가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정치적 시온주의 운동에 대한 자체 평가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영국과 터키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자 독일은 터키를 지지하였고, 이로 인해 시온주의 운동의 지도권은 베를린에서 영국에 살고있던 러시아계 유대인에게로 넘어갔다. 그러나 1915년코펜하겐에 '시온주의 기구 연락 사무소를 개설하면서 영국과 유럽 대륙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당시 국제정치의 혼란 속에서 시온주의 기구의 지도자였던 와이즈만(C. Weizmann, 1874~1952)과 소코로프(N. Sokolow, 1861~1936)는 1917년 11월 2일 "영국 정부는 팔레스티나에 유대 정부 창설을 지지하며 이 목적이 달성되도록 최대의 노력을 할 것이다"라는 영국 외무부 장관 밸푸어(A.J.Balfour, 1848~1930)의 선언을 이끌어 냈다. '밸푸어 선언'은 유대인의 팔레스티나에서의 자치권 행사에 반대 견해를 보여 온 터키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 선언은 시온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이 선언을 계기로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티나의 도시와 농촌에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함으로써 완전한 자치 기구를 형성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유대 문예 부흥을 위하여 히브리어 교육을 강화하였다.
헤르출 이후 시온주의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였는데,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시온주의 운동은 대중 운동으로 변모하여 시온주의자의 수가 급증하였다. '시온주의 기구 의 회원수는 1907년에 164,333명, 1913년에는 217,231명, 1921년에는 855,590명 그리고 1939년에는 100만여 명을 넘어섰으며, 1946년에는 215만9,840명이나 되었다. 이들 회원들은 '세켈' (shekel)이라는 회원비를 납부하였다. 유럽에서 시온주의 운동의 괄목할 만한 성장은 곧 많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티나로 이주하는 결과를 낳았다. 1925년 3월 팔레스티나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숫자는 108,000명이었으며, 1933년에는 238,000명으로 200% 증가했다. 그러나 히틀러(A.Hitler, 1889~1945)의 등장 전까지 팔레스티나로 이주하는 유대인의 수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증가로 아랍인들의 시온주의 운동에 대한 저항은 매우거세었고, 영국이 이들을 지원하였다. 1936년에는 '시온주의 기구 의 본부를 예루살렘으로 옮겼다.
히틀러의 등장과 유럽에서의 유대인 대량 학살이 발생하자 많은 유대인들이 피난처를 찾아 팔레스티나를 포함한 여러 나라들 특히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자연스럽게 모든 시온주의자들과 시온주의 단체들은 연합군을 지지하였으며, 팔레스티나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자원하여 군대를 조직하였고 영국군을 도왔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약 75,000명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티나로 이주하였고, 이러한 대량 이주로 유대인들과 아랍인들 사이의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이에 영국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미국과대화하였고, 1947년 11월 29일에 개최된 유엔에도 이 문제를 상정하여 팔레스티나를 아랍과 유대인 국가로 양분하며 예루살렘을 국제 도시화하자는 안을 제안하였다.
[이스라엘의 독립과 시온주의]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자 동시에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많은 영토를 차지하였고 80만여 명의 아랍인들을 추방하였다. 이로써 제1차 시온주의자 회의가 개최된 지 50년 만에, 그리고 밸푸어 선언이 있은 지 30년 만에 시온주의는 팔레스티나에 유대 국가의 형성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주변 아랍 국가들을 자극하여 그후 많은 중동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유대 국가를 형성한 후 시온주의 운동은 전세계 유대인들에게로 확산되었다. 이스라엘의 건국은 유대 국가의형성 이라는 추상적인 목표가 구체화됨으로써 전세계 유대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상징이 되었고, 따라서 유대인이 살고 있는 전세계에 '시온주의 기구 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온주의 운동 기구가 결성되었다. 이 기구들을 통하여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경제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특히 이들은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많은 유대인들을 팔레스티나로 이주시키는 데 필요한 재원을 담당함으로써 이주를 촉진시켰다.
뿐만 아니라 몇 차례의 중동 전쟁과 이의 복구에 필요한 재원의 많은 부분도 이들이 담당하였다. 여러 기구 중 1897년에 제1차 회의를 시작한 '시온주의자 회의' 는 지금까지 지속되면서 시온주의 운동을 이끌고 있다. 특히 1968년 6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예루살렘을 통합한 후 예루살렘에서 개최된 제27차 시온주의자 회의에서는, 전세계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들에 관한 문제가 중심의제가 되어 이스라엘 정부의 이민부(Ministy of Immigrant Absorption) 설치안을 승인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 유대민족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한 히브리어 교육과 유대인의 영적 · 문화적 가치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기로 의결하였다.
오늘날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시온주의자들은 극단적인 국수주의자들로서 이스라엘 정부의 대 아랍 정책과 이민 정책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1980~1990년대 러시아와 에티오피아 지역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한 이주민들의 정착에 필요한 재원의 일부를 지원하는 것도 이들의 몫이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이스라엘 정부의 중동 평화 정책에 가장 큰 걸림돌 가운데 하나이기도 한데, 이들은 중동 평화에 반대하여 각국의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거나 이스라엘로 원정 시위를 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또 정착촌을 건설하거나 구입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랍 사람들로부터 땅을 구입하기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1- 게토 ; 반유대주의 ; 유대인 ; 이스라엘)
※ 참고문헌  S. Almog ed., Zionism and the Arabs, Jerusalem, 1983/M. Buber, On Zion : The History ofan Idea, New York, 1973/ A.A. Cohen,The Jews, Alabama, 1980/ B. Halpern, The Idea of the Jewish State, NewYork, 1961/ A. Hertzberg ed., The Zionist Idea, 1960/ G. Kressel et al, (EI)16, PP. 1031~1 162/ -, Zionist Congresses, (EJ) 16, PP. 1163~1178/ G.Shimoni ed., Zionist thought Today, Jerusalem, 1992/ N. Sokolow, HistoryofZionism 1919~1968, vols. 2. [朴俊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