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8년 3월 21일 몰렘의 로베르토(Robertus Molesme, 1027?~1111)가 《베네딕도 규칙서》(Reglala Sancti Benedicti)를 더 충실히 지키기 위하여 설립한 수도회. 현재 이탈리아 · 오스트리아 · 프랑스 · 폴란드 · 브라질 · 베트남 등에 있는 13개의 연합회(congreatio)와 산하 수도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배경과 설립] 시토회의 설립은 클뤼니(Clun) 수도원의 개혁 운동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많은 지역의 수도원에서는 규칙이 지나치게 남용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성 베네덕도(480~547?)가 제시하였던 생활 형태도 충실하게 지켜지지 않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계속 늘어나는 재산으로 인한 수도자들의 해이를 경계하고, 초대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또 교황 레오 9세(1049~1059) 때부터 시작된 그레고리오 개혁(reformatio Gregoriana)도 수도회의 변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개혁적인 성향을 지닌 수도자들은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수도원을 세우고 자신들의 삶을 기도로 봉헌하기 위해 은둔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평판이 높은 은수사들에게 제자들이 모여들자 이들은 일종의 수도원 조직을 형성하여 4세기경의 수도 생활을 재현하려고 하였다. 더 나아가서는 이와 같은 은둔적인 요소에 베네딕도의 규칙을 도입하여 이를 완벽하게 지키려고 하였고, 그 규칙에 나타난 공동체적인 이상을 조화롭게 결합시키고자 하였다. 시토회는 이러한 상황에서 설립되었던 것이다.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 운동에 동참하였던 프랑스 몰렘의 베네딕도회 수도원 원장 로베르토는 수사들의 생활이 해이해진 나머지 더 이상 개선될 수 없음을 깨닫고 수도원장직을 사임하였다. 그리고 1072년에 자신을 지도자로 추대한 은수사들과 함께 몰렘 인근의 콜랑(Collan) 숲에 오두막집을 짓고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성 베네딕도의 규칙을 충실히 따랐으며, 특히 대규모의 수도원에 소속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몇 년 후 이 공동체가 점차 성장하면서 기부금이 늘어나자 수사들은 노동을 포기하고 편안함과 안일만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에 낙담한 로베르토는 그들을 떠나 홀로 은둔 생활을 하다가 1098년에 자신을 추종하는 20여 명의 수도자들과 함께 부르고뉴(Bourgogne) 지방 디종(Dijon) 인근의 시토(Citeaux)에 정착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평소 이상적인 수도 생활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을 실천에 옮겼다. 그들은 성 베네딕도의 규칙을 온전하게 준수하면서 일상 생활은 물론 전례와 예술에서도 단순함을 추구하였고, 동시에 세속적인 것과 단절한 상태에서 청빈 · 침묵 · 육체노동을 중시하였다. 이는 결국 초대 교회 때의 사막 교부들의 생활 방식과 규율을 충실하게 본받으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1099년에 교황 우르바노 2세(1088~1099)로부터 몰렘 수도원을 정상화시키라는 지시를 받고 몰렘으로 돌아가 수도원을 지도하였다.
[발 전] 몰렘으로 돌아간 로베르토의 뒤를 이어 알베릭(Albéric, 1099~1109)이 제2대 원장으로 선출되었는데, 당시의 교황 파스칼 2세(1099~1118)는 시토에 세워진 수도원을 교황의 보호권 아래 두었다. 전승에 따르면, 시토회 수도승들이 검은 색 스카풀라 밑에 위계를 나타내는 흰 색 혹은 회색 복장을 착용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고 한다. 이후 시토회 회원들은 '백의의 수도승 (White Monks)이라는 친근한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수도회의 체계를 세우는 데 이바지한 사람은 1109년에 제3대 원장이 된 영국 출신의 하딩(S. Harding, 1109~1134)이었다. 그가 수도원장으로 선출되었을 당시는 수도회 내부적으로 해결하여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으나, 개혁을 위한 계획과 뛰어난 지도력으로 그는 시토회를 보다 굳건한 반석 위에 올려 놓았다.
이 두 명의 수도원장이 주도하였던 개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개혁적 성향의 베네딕도회와는 다른 시토회의 단일성, 모든 봉건적 수입을 거부하면서 수도승들이 스스로 육체 노동을 통해 수도원을 운영하는 태도를 보여 준 것이었다. 더욱이 당시 베네딕도회에서 행해지던 성대한 수도원 전례뿐만 아니라 제의를 비롯한 각종 교회 비품 역시 단순화시킬 것을 규정하였다. 이는 하딩이 1119년에 정한 <사랑의 헌장>(Charta Caritatis)이라는 시토회의 정관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 헌장에서는 극단적인 한계까지 청빈을 요구하였고, 성당의 외부 및 내부 장식의 화려함을 금지시켰으며, 기증과 십일조 헌금의 소득, 그리고 사유 교회의 소유와 수도원 재산의 임대를 포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모든 시토회의 성당은 수도회의 수호자인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하게 하였고, 아빠스는 모원이 있는 시토에서 매년 개최되는 수도회 총회에 반드시 참석하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내용들은 훗날 다른 수도회의 모범이 되었다.
1113년에 라 페르테(LaFerté) , 1114년에 풍티니(Pon-tigny), 1115년에 성 베르나르도가 수도원 원장이 되었던 클레르보Claivaux)와 모리몽(Monimond)에도 수도원이 설립되어 시토의 수도원과 함께 이 수도원들은 시토회 전체 수도회의 기간(基幹) 수도원(linec)이 되었다. 하딩이 <사랑의 헌장>을 제정한 것도 이 수도원들 사이의 애덕과 권력 관계를 유지하고 조정하기 위해서였다.1112년 4월 시토회에 입회한 르나르도(Bernardus de Clairvaux, 1090~1153)는 시토회를 개혁과 확장의 대중 운동으로 발전시키면서 초기 시토회의 개념을 정착시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중세 그리스도교의 신비학과 영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12세기에 시토회가 신자들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는 수도회가 되도록 많은 활동을 하였다. 또 그는 성전 기사 수도회를 위하여 회칙을 작성해 주었고, 1147년 십자군의 성립도 대부분 그의 설교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교회 내의 정치적인 세력과는 관계를 맺지 않았으며, 교황청의 폐단과 성직자들의 세속화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비판을 가하였다. 시토회의 여자 수도원은 1120년경 시토 인근에 있는 타르(Tart)에 처음으로 설립되었으나, 시토회 산하에 받아들인 것은 12세기 말에 와서였다.
1134년 하딩이 사망하였을 때 80개의 수도원을 보유하였던 시토회는 1153년 성 베르나르도가 사망하였을 당시에는 343개로 증가하였고, 13세기 초에는 525개, 17세기에는 742개를 헤아리게 되었다. 더욱이 프랑스에 국한되지 않고, 1120년에 이탈리아, 1123년에는 독일에 수도원을 건설하는 등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쇠퇴와 개혁] 14세기에 들어 시토회는 점차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다가 15세기로 들어서면서 그 쇠퇴의 조짐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는데, 주요 원인은 대외적인 충돌이나 르네상스의 영향이라기보다는 교황들의 아비뇽 시기(1309~1376) 동안에 시작된 외부적인 간섭 때문이었다. 즉 수도승들이 자신들의 아빠스를 직접 선출하지 못하고 교황이나 세속 군주들에 의해 수도원에 소속되지 않은 인물이 아빠스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임명된 아빠스들이 수도원 내에 거주하면서 일반 수도승들을 지도하고 통제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이들은 단지 수도원 재산의 운용에만 관심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수도승들의 자질을 저하시켜 교회와 수도원을 황폐화시켰으며, 궁극적으로는 많은 수도원들이 약화되고 심한 경우 폐허가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 다른 이유로는 백년 전쟁 등과 같은 유럽 민족들의 전쟁,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 나타난 종교 전쟁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독일에서는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프로테스탄트에 의해 수도원 제도가 거의 파괴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은 영국과 스코틀랜드, 스칸디나비아 등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토회를 보호하기 위한 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나, 이 개혁은 시토회 내부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각 지역에 기초를 두고 약간의 차이가 있는 제도 및 교육 방식을 지닌 다소 독립적인 연합회(Congregaio)가 형성되었는데, 그러한 연합회들 가운데 하나가 프랑스의 장 드 라 바리에르(Jeande la Barrière, 1544~1600)에 의해 주도된 피양(Feuillants) 연합회였다. 이 연합회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있던 많은 수도원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1586년에는 교황 식스토 5세(1585~1590)의 허가를 받아 완전히 독립적인 수도회로 발전하였다. 그러다가 프랑스 혁명 중에 몰락하고 말았다.
오늘날까지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개혁은 17세기 초 프랑스에서 나타난 엄률 수도회(Ordo Cistercien-sium Strictioris Observantiae)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로 인해 시토회는 두 개의 수도회로 완전히 분리되었다. 하나는 프랑스 내 대다수의 수도원을 포함하면서 보다 완화된 계율을 유지하려는 시토 수도원으로 대표되는 일반 수도회였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 내의 몇몇 개혁적 공동체들을 결합시키면서 시토회가 창설되던 시기에 강조되었던 본래의 규율을 재건하려는 목적을 지닌 라 트라프(LaTrappe) 수도원 중심의 엄률 수도회(Trappists Order of Cistercians of Strict Observance)였다. 이 수도원의 이름 때문에 이후 엄률 수도회는 "트라피스트회" (Trappists)로 불렸다. 초기에 양측은 대립과 갈등을 겪었지만, 1662년 교황 알렉산델 7세(1655~1667)의 중재로 개혁을 온전히 유지하면서 완화된 계율을 받아들일 것에 동의하였다. 이는 결국 양측의 고착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엄률 수도회는 시토회 설립자의 이상을 지속적으로 완벽하게 실천하는 동시에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 나가야하는 이중적인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현대의 상황은 그들로 하여금 보다 내면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 내에서 또한 세계 속에서 그들의 본질적 기능은 그들이 자신들의 삶을 통하여 신앙을 전하고, 또 엄률 수도회의 경우 최초의 시토회가 보여 준 명상적인 경향을 엄격하게 지켜 나가기를 요구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영성과 예술] 영성과 신학 : 시토회에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기음 드 생 티에리(Guiilaume de Saint-Thiery, 1085~1148) 등과 같은 저명한 인물이 있었으며, 이들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자신들의 저술을 통해 시토회를 중세적 수도 생활의 전형으로 비치게 한 학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시토회 수도승들은 문화 · 양식 · 예술 · 종교적생활 및 헌신이라는 상당히 광범위한 측면에서 영향을 끼쳤다. 13세기의 수많은 시토회 수도승들은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서 종종 세속적인 학문들로부터 유리되었고 그 학문들을 비난하기도 하였다. 또 이들은 학교에서 강의를 담당하였고 자유로운 예술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토회 학문 활동의 혁신적인 측면은 오히려 르네상스 시기의 학문보다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시토회 수도승들은 고대의 저술들을 활용하면서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종교적인 사고를 서술하려는 경향을 보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구성 예술과 형식의 조화, 시 등을 통하여 그 권위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성서의 본문을 상당히 중요한 자료로 인식하였는데 서간 해석을 위하여 그리스 교부와 라틴 교부들의 저술을 자주 참조하고 인용하였다. 하딩은 라틴어역 성서를 교정하기 위해 유대인 학자들을 초청하였으며, 성 베르나르도는 강론에서 오리제네스(?~254)를 인용하였다.
시토회의 영향이 가장 비중 있게 나타난 분야는 영성 생활이었다. 시토회의 규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사랑의 헌장>에서 기원하였는데, 이는 다른 모든 수도회의 구성원들까지도 사랑으로 일치시키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시토회의 각 수도원들은 '사랑의 학교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그곳에서 "예술 중의 예술"을 배우게 하였다. 기음의 표현에 의하면 그 예술은 사랑하는 예술이었다. 다양한 금욕주의적이고 영적인 수행들은 수련자들로 하여금 사랑 안에서의 위계를 익히게 하였다. 이와 같은 시토회의 영성은 이후 수 세기에 걸쳐 나타난 신비 신학의 본질적인 특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시토회의 영성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하느님에 대한 인식에 이르는, 성상(聖像)으로부터 그 원형인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는 영혼의 여정을 보여 준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여정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토대로 전혀 다른 것에서 닮은 것으로 이르게 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인성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말씀 즉 그리스도에 대한 묵상, 하느님과의 결합,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는 데에 도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기음은 "사랑의 세 시기"인 사랑을 시작하는 시기 · 사랑이 발전하는 시기 · 완전한 사랑의 시기에 대해 연구하였는데, 이는 사랑의 발전 단계와 연속적인 신앙의 전개 순서를 드러내는 것이었으며, 나아가 삼위 일체의 신비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영성은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시토회가 "시대의 태양"이라는 칭송을 받게 한 토대가 되었다.
건축과 예술 : 시토회의 영성은 수도원 건축을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다. 모든 수도원 건축 중에서 시토회의 수도원 건축에 필적할 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예술사 분야에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시토회 수도원은 주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계곡의 물길을 따라 건설되었다. 이 수도원은 일반적으로 성당의 남쪽에 위치한 회랑을 중심으로 마찬가지의 양식으로 배열된 건물들이 밀집된 형태를 띠고 있으며, 건물은 항상 토지의 형세가 그 건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방향을 정하였다.
시토회의 예술은 클뤼니 수도원의 세련된 장식과 같은 동양적인 화려함을 배제하였다. 그리고 비록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필요하더라도 종종 시선을 고정시키고 수도승들의 주위를 산만하게 할 위험성이 있는 이미지와 상징들도 제거되었다. 베르나르도는 내부로부터 솟아 나오는 변화와 변형도 중요하지만 외적인 세련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절도 있는 표현 역시 강조하였다. 돌 위에 사치스러운 장식을 하는 것은 연설이나 서술에서의 지나친 수식과 마찬가지이므로 거부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결국 모든 장식물은 쓸데없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단지 영혼의 사원만이 아름답게 장식된 지성소이고, 그러한 영혼을 소유한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는 지성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토회 수도사들이 발명한 유리화(stained glass)와 채색 타일은 바로 이러한 지성소를 장식하는 도구였다.
[의 의] 시토회는 서양 중세의 가장 이상적인 수도원 제도를 실현한 수도회 가운데 하나였다. 시토회의 특징은 두 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나타나는데, 그 하나가 사랑을 통한 만장 일치의 원칙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시토회에 소속된 여러 수도원들의 완벽한 중앙 집중화를 보장하는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자율권을 갖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이 요소는 이후 다른 많은 수도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또 다른 요소는 수도회 조직을 영성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하여 뛰어난 능력을 지닌 수도승들이 하느님과의 신비적인 일치의 교리를 확립하였다는 점이다. 이 교리는 라틴 교부들과 그리스 교부들의 사상을 종합한 것으로 사상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로베르토, 몰렘의 ; 베르나르도, 클레르보의 ; 트라피스트회)
※ 참고문헌 A. Dimier . P. Deseille · M.-M. Davy, 《EU》5, pp. 935~941/ L.J. Lekai, INCE》 3, Pp. 885~8891 K. Bihlmeyer, Kirchengschichete,rev. H. Tuchle(대신학대학 교회사 연구회 편역, <교회의 역사》, 1984, pp. 426~429)/ K. Spahr, (LThK) 2, pp. 1208~1209/ A. Franzen,Kleine Kirchengechichie(ze 역, <교회사> 신학 총서 22, 분도출판사, 1982, pp. 222~223). [邊燦]
시토회 - 會 [라]Cistercienses, Ordo Cisterciensis [영]Cistercians, OrderofCisterci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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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토회의 수도 회칙을 인가하는 교황 파스칼 2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