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詩篇 [히]미가 [그]Bipaos 40046V [라]Liber Psalmorum [영]Psalms

글자 크기
8
마사다에서 발견된 73년경의 시편 단편.
1 / 3

마사다에서 발견된 73년경의 시편 단편.


구약성서의 성문서에 속하는 책으로 150편의 종교적인 시가(詩歌)들이 수록된 모음집. 하느님과의 직접적 · 간접적인 만남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이스라엘인들의 종교 심성을 시적으로 표현한 노래들을 모은 책이다.
: I . 명 칭
구약성서에 하나로 묶여 전해지는 150개의 시 또는 노래를 한국과 일본에서는 '시편' (詩篇)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편' (篇)이라는 글자는 시를 세는 단위인 동시에 시를 모은 책을 뜻하기 때문에, '시편' 은 개개의 시뿐만 아니라 150개의 시를 모은 책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 '시편집'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한다. 그런데 시편을 '시' 라고 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국어 사전에는 흔히 시편을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시, 시편집을 종교 시집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이는 정확한 해설이라고 할수 없다. 그 이유는 다른 언어권에서 사용하는 이름을 살펴보면 뚜렷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시편을 히브리어로 '터힐림' (ㅁ切)이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할렐루야' (可行)㈀라는 환호에 들어 있는 동사의 명사형으로 '찬양(가)들' 을 뜻한다. 칠십인역은 시편을 '머리글' 에 자주 나오는 히브리어 미즈모르 (一道)를 그리스어로 옮긴 '프살모스' (yowaying)로 표현한다. 이 단어는 본래 '하프 반주와 함께 불린 노래' 를 의미한다. 그리고 시편집을 일컬을 때는 '비블로스 프살몬' (Biphos Fowwiv) 또는 본래 '현악기' 를 뜻하는 '프살테리온' (yo.cepiovv)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이러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명칭은 시편의 두 가지 근본 성격 즉 찬양과 노래를 강조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시편의 기본 이해에 필수적인 세 가지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첫째, 시편은 시이기는 하지만 단순한 시가 아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시편을 문학 작품으로 창작하지 않았다. 시편은 시 이전에 기도이며, 시 또는 노래 형식으로 표현된 기도이다. 둘째, 시편은 종교적 시(혹은 노래)이다. 그러나 시편집은 이스라엘 민족 또는 구약성서의 모든 종교시나 성가를 한데 모은 시집 또는 노래책이 아니다. 예언 문학과 지혜 문학에서도 운문이 주종을 이루고, 산문으로 된 오경이나 역사서에도 시가 나온다. 또 1천 년이 넘는 구약성서 시대에 시편이 150개만 지어졌다고는 볼 수 없다. 수집과 편집 과정에서 150개로 정착되었을 뿐이므로 그 수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구약은 물론 신약성서에도 종교 노래들이 많다. 예컨대 모세의 승리 노래(출애 15, 1-8),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찬양 노래(1사무 2, 1-11), 세 젊은이의 노래(다니 3,52-90), 그리고 신약성서의 마리아의 노래(루가 1, 46-55), 그리스도 찬가(필립 2, 6-11), 어린 양 찬가(묵시 5,9-10) 등이 모두 훌륭한 시편이다. 셋째, 시편집은 여러가지 노래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결국은 찬미의 노래 모음이다. 그러나 찬양 시편의 수가 가장 많지는 않다.
시편들은 다양한 상황에서 갖가지 이유와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모두 주님에 대한 찬미로 향한다. 이 책이 찬양 시편들(시편 145편 ; 150편)로 끝남은 우연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시편을 '찬양가 라고 부르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 II . 위치와 번호, 구분 및 머리글
〔위 치] 율법서와 예언서 뒤에 오는 성문서 가운데 하나인 시편집은 구약성서 전체로 볼 때, 분량이 가장 많지도 않고 위치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 신약성서에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루가 24, 44)이라는 언급이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율법과 예언서' 또는 '율법' 으로구약성서를 지칭한다. 율법과 예언이 구약성서를 대표한 다는 뜻이다. 그러나 시편은 '구약성서의 요약집' 이라고 할 수 있다. 시편에는 율법 · 역사 · 교훈 · 예언 · 전례 등 구약성서의 모든 요소가 내포되어 있고, 이것들이 기도자들의 입을 통하여 다시 한번 하느님 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시편은 하느님께 응답하는 인간,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모든 것을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다.
[번 호] 히브리어 성서와 칠십인역의 시편 번호 매김은 서로 다르다. 양쪽 다 처음(1-8편)과 끝(148-150편)은 같다. 그런데 칠십인역은 히브리어 성서의 9편과 10편을 하나로 여긴다. 그래서 11편에서 113편까지 칠십인역의 시편 번호가 히브리어 성서의 시편 번호보다 항상 하나씩 적다. 칠십인역은 또 히브리어 성서의 114편과 115편을 113편 하나로 묶고, 히브리어 성서의 116편을 114편과 115편으로 나눈다. 그래서 117편부터 146편 까지 칠십인역의 시편 번호가 다시 하나씩 적어진다. 칠십인역은 또 히브리어 성서의 147편을 146편과 147편으로 나눈다. 그래서 마지막 148편에서 150편까지는 히브리어 성서와 칠십인역의 시편 번호가 같아지는데, 이를 정리하면 아래의 표와 같다.
구약성서의 '원어' 와 '원문' 의 중요성을 깨달은 지금, 히브리어 성서의 번호를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다만 가톨릭 교회에서는 히브리어 성서의 번호 뒤에 오랫동안 사용해 온 칠십인역과 라틴어역 성서(불가타)의 번호를 괄호 속에 넣어 함께 표기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된 또 다른 문제는 '머리글' 의 절수를 포함하는지의 여부이다. 공동 번역 성서는 머리글을 포함시키지 않는 반면에, 가톨릭 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머리글까지 절로 세는 다수의 전통을 따르므로 약간의 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공동 번역 성서》와 《구약성서새 번역-시편》 사이에는 많은 경우 절수가 하나씩, 그리고 51편 · 52편 · 54편 · 60편에서는 둘씩 차이가 난다.
[구 분] 시편집은 다섯 권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이는 각 권의 끝에 있는 이른바 '종결 찬송' 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제1권(1-41편)의 종결 찬송은 41편 14절이고, 제2권(42-72편)의 종결 찬송은 72편 18-19절이다(20절도 참조). 제3권(73-89편)의 종결 찬송은 89편 53절이며, 제4권(90-106편)은 106편 48절이고, 제5권은 107-150편이다.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늦어도 4세기부터, 시편집도 모세 오경에 상응하여 다섯 권으로 구분되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다른 가설들도 제시되어 왔지만 아직도 만족할 만한 설명은 없다. 분량이 서로 다른 다섯권(각각 41편, 31편, 17편, 17편, 44편)으로 나누어진 분명한 이유가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시편 1편은 시편집 전체의 서론 격이고, 150편은 구약성서의 거의 모든 악기를 동원하는 찬미가로서 시편집 전체를 종결 짓는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시편 2편은 시편전체의 메시아적 해석의 중요성을 말해 준다.
시편집에서는 또 다른 구분에 따른 작은 모음들을 볼수 있다. '머리글' 에 나오는 인명, 해당 시편에 사용되는 하느님의 명칭, 그리고 내용에 따라 다음과 같이 때로는 서로 중복되기도 하는 작은 시편집들을 분류해 낼 수 있다. 그래서 "다윗 시편" (3-41편, 시편 33편은 제외)과 시편에서 자주 사용되는 '야훼' (門切)기를 '엘로힘' (ㅁʼn(〉)으로 대체한 "엘로힘 시편"(42-83편), "코라 시편" (42-49 편), "다윗 시편"(51-72편, 시편 66편, 67편, 71편의 머리글에는 '다윗' 이라는 인명이 나오지 않는다. 시편 72편은 20절을참조), "아삽 시편" (50편과 73-83편), 각 시편이 할할렐루야 로 시작하거나 끝나는 "할렐루야 시편"(104-106편 ;111-117편 ; 135편 : 146-150편), "순례 시편"(120-134편)등이다. 이를 통해 처음에는 서로 독립적인 작은 시편집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들이 편집자들에 의해서,그리고 세월에 따라 여러 차례에 걸쳐 수집되고 편집되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중복되는 부분들이 더러 정리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기도 하였다(시편 14편 = 53편 :40편 14-18절 = 70편 : 57편 8-12절+60편, 7-14절 = 108편). 역사적으로 상당 기간에 걸쳐 이루어졌을 시편집의 편찬 과정을 추측만 할 수 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도 많은 부분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시편집은 늦어도칠십인역이 착수되고 마카베오 시대가 시작되기 전, 즉 기원전 3세기부터 현재의 꼴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머리글] 많은 시편들이 본문과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는 '머리글' 로 시작한다. 여기에 들어 있는 낱말들은, 예컨대 '마스킬' (〉”㎍함이니이나(나시면 32편 ; 42편) '미크탐' (ㅁР口)처럼〈시면 16편 : 56편) 뜻이 확실하지 않거나 의미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음역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또 "새벽 암사슴"처럼(시편 22편) 번역을 하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경우도 있고, 머리글이 없는 시편도 34개에 달한다. 머리글의 분량 역시 일정하지 않은데, 한마디 말로 된 것에서부터 시편 18편이나 60편처럼 두 절로 된 것도 있다. 머리글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첫째로, 시편의 유형을 나타내는 것으로
“시편”(一721), 57번) · "노래" (ㄱㄱ♡, 30번) · "기도" (一)タП, 5번) 등이 나온다. 둘째 음악 용어로 악기나 곡조(?) 등이 언급된다. 셋째 시편의 저자와 관련하여 히브리어의 전치사 "러(夕) + 인명"이 나오며, 넷째 전례용어로 "순례"나 "성전 축성" 등이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편 저작의 동기를 말하는 역사적 사건이 언급되어 있다.
여기에서 특히 시편의 저자와 관련해서 '러(') +인명' 이 문제가 된다. 머리글에는 "모세" · "솔로몬" · "해만" . "에단"이 각각 한 번, "코라의 자손들"이 11번, "아삽이 12번, "다윗"이 73번 나온다. 여기에서 대다수를차지하는 "다윗" 때문에 이미 구약 시대 말기부터 대부분의 시편을 이 다윗 왕의 작품으로 생각해 왔다. 그런데 문제는 이 히브리어 ''러' 의 의미가 매우 다양하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도 이 '러' 가 시편의 머리글에서 '..의' 를 뜻한다고 여겨 뒤에 나오는 인명이 저자를 가리킨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편이 내용상 다윗의 작품으로 보기가 어렵다. 예컨대 시편 5편 · 8편 · 63편 · 69편 등은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을 전제로 한다. 어떤 이들은 이 전치사를 '... 위한' 으로 이해하기도 하여 "러 + 다윗"은 '다윗을 위하여' , 또는 선조의 이름으로 집안과 자손들을 표현하는 관습에 따라 '다윗의 집안(자손)들을 위하여' 를 뜻한다고 주장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은 왕실 성소였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임금에 의한 또 임금을 위한 전례가 많이 거행되었다. 그래서 다윗이나 그의 후손인 임금을 위한 시편도 많았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머리글에 '코라' 나 '아삽' 이 들어 있는 시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코라의 자손들은 레위 가문의 성가대(2역대 20, 19) 또는 성전 문지기이다(1역대 9, 19). '아삽' 은 성전 성가대 또는 음악인이다(1역대 15, 16-17). 그래서 이들이 해당 시편들을 직접 짓고 관리하거나, 성전에서 그것들을 불렀으리라는 것이다. 아무튼 시편 머리글의 '러' 를 단순히 저자를 가리키는 표기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특히 다른 낱말은 없고 "러 + 다윗"만 있을 경우에(시편 25편 ; 28편 등) "다윗의 시(노래)”로 옮기는 것은 문제가 있으므로, 차라리 예로니모(343-420)처럼 그냥 "다윗" 으로만 번역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머리글은 전체적으로 시편 본문보다 후대에 붙여졌다. 칠십인역부터 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어로 번역되기 한참 전에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시편 본문의 중간에는 머리글과 비슷한 시기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셀라 (┯〉)라는 낱말이 나오는데, 이것의 확실한 의미와 용도는 아직도 알려져 있지 않다. 일종의 쉼표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고대 번역본들은 저마다 달리 이해하고 있다. 또 이 말이 일관성 있게 쓰인 것도 아니지만, 아무튼 39개의 시편에 71번(칠십인역에서는 92번) 나온다.
: Ⅲ . 저자 · 저작 시기와 배경
[저 자] 각 시편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확실히 말할 수 없다. 이미 언급한 대로 전통적으로는 대부분의 시편이 다윗의 작품으로 간주되어 왔는데, 이러한 전통은 구약성서에 그 바탕을 둔 것이다. 다윗은 사울 임금의 궁중악사로 채용되었으며(1사무 16, 14-23), 다윗이 사울과 특히 자기의 둘도 없는 친구 요나단이 전사하였을 때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었다는 조가가 전해진다(2사무1, 19-27 : 3, 33-34). 이렇게 성서의 전통은 다윗이 시인이며 악사이고 가수일 뿐만 아니라 악기까지 제작하였다고 한다(1역대 23, 5 : 느헤 12, 36 : 아모 6, 5). 그리고 쿨란에는 다윗이 3,600편의 시편과 450편의 노래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시편 머리글에 나오는 "다윗" 역시 이러한 전통의 한 부분이다.
다윗은 나라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임금으로서, 한 왕조의 시조로서, 노래와 악기 등 이스라엘의 음악 전반을 종합하고 신장시켰다. 더욱이 그는 이스라엘의 민족 종교를 국가 종교로 끌어올렸으며,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계약의 궤를 그곳으로 옮겨 이 도시를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또 성전 건축을 준비하면서 전례도 체계화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의 제의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는 시편이 자연스럽게 다윗과 연관된다. 이는 후대의 율법까지도 모두 모세와 관련 짓는 것과 비슷하다. 율법이라는 커다란 강 전체, 시편이라는 큰 흐름 전부를 그 근원인 모세 또는 다윗의 권위와 이름 아래 두는 것이다.
그러면 시편의 실제 저자들은 누구인가? 이스라엘 역사의 특정 인물이 이 시편 또는 저 시편을 지었다고 확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고대의 문학이나 예술 작품에서 흔히 보듯이 저자나 작가는 작품 뒤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도 더욱 그러하다. 여기에서 개인 시편들의 성격을 저자 문제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대부분의 시편은 양식사적 관점에서 볼 때 정형화된 표현과 어구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편마다 매우 개인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자기가 처한 상황과 상태,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 등에 대해서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 어떤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인물이나 사건을 추론해낼 수는 없다. 개인 시편에는 거의 항상 두 가지 움직임 곧 개인적인 것에서 공동의 것으로, 특수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의 움직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사람이 시편을 가지고 개인적으로 기도하더라도, 자기가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늘 자각하면서 이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기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이들도 같은 시편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공동화와 일반화가 시편들이 지어질 때부터 이루어졌는지, 아니면 기존의 개인적인 시편들이 서서히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이와 같은 연유로 이제 '누가 시편 저자인가? 라는 물음이 누가 가능한 시편 저자인가? 라는 질문으로 바닌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전제 사항이 있다. 첫째 고대 근동인들은 교육 수준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시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데 매우 능숙하였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이스라엘 민족의 생성기에 이미 알파벳이라는 극히 편리한 기록 수단이 발명되었다는 점이다. 이집트의 상형 문자나 메소포타미아의 설형 문자는 배우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글을 쓴다는 것은 일부 지식층의 전유물이었다. 그런데 알파벳이 발명되어 단 22자로 모든 것을 쓸 수 있게 됨으로써 문자와 문화의 민주화가 혁명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서는 기원전 1100년경 어떤 시골 젊은이가 기드온 판관의 명에 따라 즉석에서 수십 명의 이름을 적어 주었다는 일화가 매우 시사적이다(판관 8, 14).
시편의 가능한 저자들은 세 부류이다. 첫째, 일반 사람이다. 예컨대 어떤 이가 곤경에 처하였을 때 탄원 시편을 지어 성전에서 기도하고, 곤경을 벗어났을 때에는 감사 시편을 지어 하느님을 찬미하고 나서 그 시편들을 성전에 바쳤을 수 있다. 사실 고대 이집트 신전 같은 데에는 벽에 감사의 말씀을 새겨 놓기도 하였다. 둘째, 성전에서 봉직하는 이들이다. 곧 사제 · 전례 예언자 · 성전 음악가 등이다. 이들이 직접 저작하였거나 기존의 시편들을 관장하면서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기도서' 로 빌려 주었을수 있다. 셋째, 임금이다. 사실 어떤 학자들은 대개의 시편이 임금들의 것이거나 임금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시편들은 본래 왕립 성소였던 성전에서 임금에 의해서 임금을 위해서 불려지다가, 후에 일반인도 쓸 수있도록 허용되었다는 것이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에서 누구도 처음부터 배제할 수 없고, 또 누가 유일한 저자라고 주장할 수도 없다. 그리고 여기에서 유념해야 할 점은 '누가 시편 저자인가? 보다는 '어떤 사람인가? 이다. 시편 본문에서 우리는 저자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인지, 어떠한 상황에서 어떻게 응답하고, 하느님과 어떻게 대화하고, 그분과 어떻게 친교를 이루었는지를 알 수 있을 뿐이다. 사실 이것이 더 중요하다.
[저작 시기] 이 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설명이 제시되지만 항상 가설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여기에는 가능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두 가지 근본적인 사실이 있다. 첫째, 시편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성소를 중심으로 지어지고 불려졌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원주민들의 주요 성소들을 이어받아 거기에서 자기들의 하느님인 야훼를 경배하였다. 경신례는 행동과 말로써 거행되는데, 이 말 의 일부가 시가 곧 시편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스라엘인들은 그 시편들을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와 가나안 종교시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자기들의 신앙에 입각하여 독창적으로 지어 불렀다. 둘째, 다윗 왕조의 탄생과 함께 궁전, 특히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시편의 저작과 편집이 활발하 였다는 점이다. 솔로몬의 성전이 장엄하게 들어선 뒤 전례도 거기에 걸맞게 거행되었는데 여기에서 시편이 그 일익을 담당하였으리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현재의 시편집에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둘로 가르는 기원전 586년의 유배 이전의 것도, 그 이후의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개별 시편들을 유배 앞과 뒤로 명확히 구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유배 이후의 귀향과 더불어 제2 성전에서 시편의 수집과 편집과 창작이 전례의 복구와 함께 이루어졌다. 그래서 시편집 전체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핵심 부분은 이 제2 성전의 '성가집' 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느 시편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시편을 시대별로 나누기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살아있는 말씀이라는 사실에 있다. 한 번 창작되어 불려짐으로써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기도로 애송된다. 그래서 문구가 고정되지 않고, 필요할 때에는 시간과 함께 변화된 상황에 맞추어 바뀌기도 한다. 이러한 유동성 덕분에 시편은, 인간의 역사는 흐르지만 늘 같으신 하느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생생한 기도문이 된다.
〔저작 배경] 기도의 시초는 무의식적인 탄식이나 경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기막힌 일이 닥쳤을 때 사람은 무심코 "맙소사!"라는 탄식의 소리를 낸다. 신앙인은 이러한 한탄을 자기 믿음의 대상이면서 인간사와 역사의 주님이신 하느님을 향해 토로한다. "하느님, 맙소사!" 또는"하느님, 감사합니다"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단발적인 탄식 또는 경탄이 인간의 의식적인 사고와 언어 작업을 거쳐서 한두 문장으로 된 짧은 기도로 발전한다.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예컨대 기도를 드리는 이유라든가, 기도자가 처한 상황과 감정까지 설명하고 고백하는 상대적으로 긴 기도문이 생겨난다. 이러한 기도문을 옛날 사람들은 운문으로 표현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시편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편이 생겨나고 활용된 자리가 성소나 성전이다. 성전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종교 생활에서 중심이었다. 예컨대 집단이나 개인으로 하느님께 간청이나 감사를 드릴 경우, 새 임금의 즉위식과 같은 특별한 기회에, 성전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의식이 거행되고 아울러서 특별히 창작된 시편이 일정한 곡조로 악기의 반주에 맞추어 불려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시편들은 다음 기회를 위해서 성전에 보존되었을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성전은 '하느님의 이름이 현존하는 곳이다. 하느님이 인간을 만나 주시는 특권적 장소이기 때문에 종교 시가인 시편 역시 성전을 중심으로 생성 · 이용 · 발전 · 보존되었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현존이 성전에만 국한될 수는 없다. 성전을 지은 솔로몬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1열왕 8, 27).
더군다나 이스라엘인들은 신성 불가침의 장소로 여기던 성전이 파괴된 상황에서, 또 성전이 없는 이국 땅 유배지의 독특한 환경에서 살아야 하는 쓰라린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의 현존이 성전이라는 인간의 조형물에 얽매일 수 없음을 통감하였다. 결국 성전의 좁은 테두리를 초월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에 따라 시편들도 성전의 울타리를 넘어섰다. 그리하여 시편집에는 비단 성전의 의식과 관련된 시편들만이 아니라 이와 전혀 관계가 없는 것들, 심지어 성전 의식의 중심인 제사를 비판하는 시편들(40, 7: 50, 7-15 : 69, 31-32)까지도 실리게 되었다. 시편은 하느님과의 직접적 · 간접적인 만남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이스라엘인들의 종교 심성을 시적으로 표현한 노래이다. 그래서 성전과 전례 외에 구약성서를 이루는 다른 주요 구성 요소들도 모두 시편을 통하여 다시 한번 하느님 앞에서 불려지는 것이다.
: IV . 유 형
150개에 달하는 시편들을 일별할 때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길이가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이다. 짧게는 2개의 절에서(시편 117편) 길게는 176개의 절에 달하는(시편119편) 노래들이 뒤섞여 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떤 일정한 규격 없이 매우 자유롭게 길고 짧은 시편을 지어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시편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내용도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이 노래들은 여러 배경에서 갖가지 까닭과 목적으로 탄생하였다. 이러한 생성 요인들을 '삶의 자리' 라고 한다. 시편들이 지어지고 불리며, 하나의 문학적 생명체로서 발전하고 때로는 쇠퇴하는 곳을 가리킨다. 비근한 예로 애가나 상엿소리, 또는 결혼 행진곡이나 축가 등은 장례나 혼인을 기해서 지어지고 불린다. 그리고 장례와 혼인이 되풀이되면서 이러한 노래들의 가사와 가락이 변화된 상황에 맞추어 변경되기도 하였다. 장례나 혼인이 애가나 축가의 '삶의자리' 인 것이다. 이렇게 내용만이 아니라 그것과 유기적인 관계에 있는 '삶의 자리' 를 바탕으로 시편의 종류가 드러나게 되는데, 이를 '유형' 이라고 한다.
〔탄원 시편] 시편을 유형별로 분류하면 '탄원 시편' 이 가장 많고, 이 유형을 다시 기도하는 사람의 수에 따라 '공동 탄원 시편' 과 '개인 탄원 시편' 으로 나눈다. 물론 개인과 집단이 명확히 구분되는 현대의 기준으로 고대의 문학 작품을 구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또 이스라엘에서는 임금이나 사제가 국가나 전례 공동체를 대표하여 단수 일인칭으로 기도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시편 본문에 나오는 '우리' 와 '나' 를 공동과 개인 시편의 분류 기준으로 삼아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어느 민족이고 천재지변을 겪으면서 살게 마련인데, 이스라엘인들도 이런 공통된 생존 조건 속에서 살았을뿐만 아니라, 특히 여러 강대국 사이에 낀 약소 민족으로서 많은 국난을 당하였다. 재난을 당할 때에 이스라엘은 성소에 모여 '탄원의 전례' 를 거행하면서, 하느님께 고통을 하소연하고 구원을 간청하였다. 야훼는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셔서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시고 가나안 땅에 정착시키셨으며 당신을 그들의 보호자로서 그들과 결합시키셨다. 또 역사를 통해서 당신을 그들의 구원자로 드러내셨다. 이제 다시 곤경에 빠진 이스라엘은 공동탄원 시편으로, 예전에 구원을 베푸셨듯이 지금도 다시 한번 자기들을 고통에서 구원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간청하는 것이다(시편 44편 : 80편 등).
전체 시편의 3분의 1 이상이 개인 탄원 시편 유형에 속하는데, 이 시편들은 개인이 곤경에 처하였을 때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이다. 이 곤경은 대부분의 경우 대인 관계에서 유발된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혈연으로 결속된 씨족 사회 안에서 신분의 차이 없이 근본적으로 평등하게 살아왔다. 그러다가 왕정의 도입과 도시 및 상업의 발달 등으로 사회가 다양해지면서 계급과 신분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귀족과 평민과 노예, 부유층과 중산층과 빈곤층이 생겨난 것이다. 이와 함께 사람들간의 긴장과 갈등과 싸움도 심화되고 빈번해졌다. 우리는 이 개인 시편들의 배경과 시편 기도자들이 말하는 적과 원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모르는 바가 많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위에서 말한 시편의 공동화와 일반화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분명한 것은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 자신이고, 인간 관계에서 또한 '이 세상에서의 지옥' 이 조성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시편의 기도자들은 특히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죄인이고 인간 관계에서는 악인들인 적들이 야기하는 고난과 고통 속에서 구원자 하느님께 구원을 청한다(시편3-4편 : 59편 ; 61편 : 140-141편 등). 이렇게 대부분의 경우에 적 또는 원수가 기도자들이 겪는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 곧 제1 원인은 하느님 자신이다. 고난과 고통, 심지어 죽음까지도 그분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모든 것의 원인인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이런 범원인론' 적 생각이 시편 기도의 바탕을 이루고있다. 그러므로 적들이 기도자들에게 아무리 큰 악행을 저지른다 하여도 종국에 가서 모든 것을 결정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이분만이 홀로 인간의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행동하시는 분, 즉 유일한 '행동자' 이시다. 이러한 하느님을 마주한 시편 저자들에게 적이나 원수들은결국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부차적인 존재일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지난 고통을 회상하는 감사 시편에서는 그들의 역할이 더욱 미미하게 드러난다. '행동자' · '결정자' 가 하느님 혼자이시기 때문이다.
[감사 시편] 하느님의 도움으로 고난을 벗어났을 때 이스라엘인들은 '감사 시편' 으로 고마운 마음을 노래하였다. 이 유형에 속하는 시편들 역시 탄원 시편처럼 '공동 감사 시편' (시편 124편 : 129편 등)과 '개인 감사 시편' (시편 30편 ; 32편 : 92편 등)으로 나누어진다. 감사함은 단순히 고맙다는 말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히브리어에는 엄격한 의미로 '감사하다' 에 해당하는 낱말이 없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가 어떠한 곤경에 처하여 어떻게 고통을 겪었으며, 하느님께 어떠한 기도를 드려서 그분이 어떻게 자기를 구원해 주셨는지 '고백' 함으로써 그분께 감사를 드린다. 감사드림은 '당신께서 저에게 이렇게 해주셨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때로는 탄원 시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기도 하는 회상을 통해서, 감사 시편이 탄원 시편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음이 드러난다. 더 나아가 탄원 시편에서 감사 시편이 시작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느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기도자는 고난속에서도 그분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와 함께, 구원뒤에 이루어질 감사와 찬미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탄원 시편과 감사 시편의 수가 같은 경우가 이상적이겠지만 실제로는 감사 시편이 탄원 시편에 비해 그 수가 상당히 적다. 그 이유를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인간의 기본 성향 때문이다. 인간은 간청에는 부지런하고 열심하지만,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사실은 흔히 깨닫지 못하거나 곧잘 잊어버리는 본성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둘째는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 조건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인생에 고통과 고난이 더 많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므로 감사할 일보다 탄원할 일이 더 흔하다는 것이다. 구약성서의 시편도 인간의 이러한 일반적인 생각과 그에 따른 삶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찬양 시편] 하느님께 대한 고마운 마음의 고백은 감사 시편으로 끝나지 않고 '찬양 시편' 으로 이어졌다. 감사 시편은 공동체나 개인이 최근에 체험한 하느님의 구원에 대한 고마움을 노래하였으며, 이러한 구체적인 구원 행위들을 통해서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당신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드러내 보여 주셨다. 하느님은 특히 성전이라는 매개를 이용하여 당신 백성에게 가까이 계시면서 그들과의 역사를 통하여, 당신을 세상의 창조주, 역사의 주님, 인간의 구원자, 선을 베푸시는 분, 그리고 진정한 임금으로 계시하셨다. 찬양 시편은 이러한 내용에 따라임금이신 야훼님을 노래하는 '하느님의 통치 시편' (시편96편 ; 97편 등), 온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창조 시편' (시편 8편 : 104편 등), 성전이 자리잡은 산 "대왕님의 도읍" 시온과 그곳에서부터 당신의 권능을 온 세상에 펼치시는 하느님을 기리는 '시온 시편' (시편 48편: 87편 등)으로 나뉜다.
이스라엘인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이러한 하느님을 노래하였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데에는 나와 너, 우리와 너희의 구분이 없다. 더 나아가서 우주적이고 보편적으로 선하신 하느님을 찬양하는 데에는 이스라엘과 이민족, 인간과 자연, 땅과 하늘의 구분과 차이조차도 없어진다. 찬양 시편의 주요 구성 요소 가운데 하나가 '찬미로의 초대' 이다. 모든 존재가 하느님을 찬양하도록 부름을 받는다. 모두가 찬미의 동지인 것이다(시편 65편 : 145편 :147편 ; 149-150편 등). 이렇게 탄원 시편은 감사 시편으로, 감사 시편은 찬양 시편으로 이어진다.
[그 밖의 작은 유형] 이스라엘이 선택된 민족으로서 하느님에 대해서 지니는 가장 기본적인 마음가짐 가운데 하나가 신뢰이다. 신뢰가 없으면 그분과의 관계도 성립될 수 없고, 신뢰 없이는 시편 기도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신뢰는 탄원 시편의 근본을 이룬다. 그래서 거의 모든 탄원 시편에서 기도자들은 하느님께 자기들의 신뢰를 고백하였다. 탄원 시편의 기본 구성 요소인 이 신뢰가 독립해서 하나의 작은 유형을 이루기도 하는데, 이러한 노래를 '신뢰 시편' 이라고 한다(시편 23편 : 131편 등).
이스라엘 백성은 500여 년 동안 군주 제도 아래 살았다. 이스라엘의 임금은 이웃 나라들의 제왕과는 달리 하느님의 대리인으로서 그분의 백성을 다스렸다. 임금은 국가와 국민의 존립과 안녕에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 의식 역시 백성의 대표인 임금에 의해서, 임금을 위해서 거행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의식 중에 임금을 위한 노래 또는 임금의 노래들이 불렸는데, 이들 중 일부가 '군왕 시편' 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시편 20-21편 : 45편 : 72편 등). 그런데 임금은 하느님이 다윗에게 내리신 약속(2사무 7장)을 통해서 당대의 통치자로 그치지 않고, 하느님의 약속을 완전히 실현시킬 이상적인 임금 곧 메시아에 대한 희망의 발판이 되었다. 그래서 군왕 시편은 군주 제도가 사라진 뒤에도 장차 올 구세주를 노래하는 시편으로 계속해서 애송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해진 때에 성전으로 순례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지방에 따라서는 며칠씩 걸리는(루가2. 41-52) 여행 길에 그들은 이른바 '순례 시편' 을 노래하였다(시편 84편 : 122편 등). 그리고 성전에서 의식이 본격적으로 거행될 때 그것과 관계되는 '전례 시편' 들을불렀다(시편 15편 ; 24편 등).
이러한 유형들은 대부분 성전과 직접적 · 간접적으로 관련되는 시편들이다. 성전과 무관한 시편들로 대표적인 것이 '교훈 시편' 또는 '지혜 시편' 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에서 옛부터 성행한 지혜 문학의 영향 아래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려는 의도로 지어진 시편들이다(시편 1편 ; 37편 : 49편 등). 마지막으로 '율법 시편' 이 있는데(시편19편 후반부 ; 119편), 이 시편은 법 조항으로서의 율법이 아니라 하느님이 베푸신 가르침의 총체로서의 율법을 기린다.
시편 전체를 유형별로 정리하면 아래의 표와 같다. 이러한 유형 분류는 시편 이해에 필수적이지만 분류작업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학자마다 관점과 기준이 달라 시편의 실제 분류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드러난다. 유형의 명칭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떤 시편이 어느 유형에 속하는지에 대해서도 서로 의견이 다른 경우가 많다. 근본적인 문제는 현대의 기준으로 2천 수백 년 전의 작품들을 분류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어떠한 분류도 모든 시편을 빠짐없이 일정한 유형들로 나누지 못하는 이유는 복합적인 삶을 어떤 이론에 완전히 맞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시편이라는 일종의 실제 삶이 먼저 있고 나서,훨씬 뒤에 이를 조직화 · 단순화하는 유형들이 생겨난 것이다.
시편의 다양한 유형들은 서로 밀접한 관련 아래 형성 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이 처하게 되는 여러 정황의 상호 관련성에 기인한 것이다. 신앙인은 자기가 믿고 의지하는 하느님과의 관계 아래, 크게 세 가지 상황 속에서 살아간다. 곧 고난과 고통으로 야기되는 탄원과 감사와 찬양이다. 이 셋을 시편의 주요 '삶의 자리' 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구체적인 삶 전체를 내포하는 이 '삶의 자리' 에서 시편의 세 가지 주요 유형, 그리고 여타의 작은 유형이 생성하고 발전하며 변화하는 것이다.
다음의 도표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시편은 하느님께 대한 찬양으로 결집된다. 이 점은 다른 한 가지 사실로도 확인되는데,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시편집의 각 권(시편1-41편 : 42-72편 ; 73-89편 : 90-106편 : 107-150편)이 '종결 찬송' 으로 끝을 맺는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말마디를 조금씩 달리하지만, 공통적으로 "하느님/주님께서는 찬미받으실지어다" 로 시작하는 짧은 찬양이다. 그리고 마지막 시편 150편은 독립적인 노래라기보다는 시편집 전체를 끝맺는 종결 찬양 노래이다. 이것들은 물론 시편집의 최종 편집자(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이는 새로운 사실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시편들의 전체적인 흐름을 더욱 선명히 드러내 줄 뿐이다. 인생살이에 고통과 고난이 더 많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고통 속에서도 그분에 대한 감사와 찬미를 향해 나아간다. 이는 하느님 앞에서의 온전한 삶을 향해 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하느님과의 친교적 생활, 그분과 하나 됨은 완전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고, 완전한 생명은 찬양으로 표출된다. 결국 하느님 앞에서의 삶은 찬양의 삶이다. 시편의 저자들은 바로 이러한 삶을 '지금 여기에서' 맛보면서 그것의 완전한 실현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완전한 생명에의 참여와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인 찬양을 향해 나아가는 시편들을 읽을 때, 이들이 지니는 개별성과 개체성, 그리고 동시에 공통성과 전체성을 명심하여야 한다. 특히 같은 유형에 속하는 시편들 사이에는 유사점들이 많이 있으면서도, 각각의 시편은 별개의 문학적 창조물로서 다른 시편들과 혼동될 수 없는 유일한 가치를 지닌다. 이는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자녀들, 설령 쌍둥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서로 바뀔 수 없는 고유한 개별체이듯이, 각각의 시편은 서로 독립된 존재이다. 그러나 또한 이 개체들은 '삶의 자리' 와 유형이라는 공통성과, 하느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노래하는 찬양을 향하는 통합성을 지니고 있다. 시편들은 다양성을 지닌 개별적인 시가들이면서도 동시에 하느님 앞에서 누리는 삶의 노래로서, 통일성을 지닌 노래들인 것이다. 이렇게 유형별로 나뉘는 시편들은, 예컨대 우리가 쓰는 성가책처럼 종류별로 배열되어 있지 않다. 물론 어떤 부분에 특정한 유형의 시편들이 많이 배치된 점이 없지는 않지만-예컨대 '머리글' 에 나오는 이름에 따라 다윗 시편' 이라고 불리는 시편 3-41편에는 개인 탄원 시편이 주종을 이룬다-전체적으로 일정한 원칙이 없이 나열되어 있다. 이는 이스라엘인들이 시편들을 종류별로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시편집은 예를 들어 유형별이나 시편들이 불리는 축제별로 정리되지 않고, 기존의 작은 시편집들을 모아서 특별한 업 없이 붙임으로써 지금 우리에게 전해진 꼴을 갖추게 된 것이다.
: V . 표현 양식
각 언어의 시마다에는 특색이 있는데,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 전체의 시문학을 특징짓는 가장 기본적인 사항이 병행법이다. 이는 어떤 묘사나 서술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또는 세 번 하는 것이다. 한 내용을 둘이나 세 관점에서 서술함으로써 그 대상을 입체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방식이다.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병행법에는 먼저 '동의적 병행법' 이 있다. "어찌하여 민족들이 술렁거리며 겨레들이 헛일을 꾸미는가?(시편 2. 1)라는 구절에서 주어가 서로 다르고 행동도 다르게 서술되기 때문에, 두 주체의 두 가지 행동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민족들" 과 "겨레들"은 같은 주체이고, 그들의 '술렁거림' 과 '헛일을 꾀함' 은 같은 행동이다. 이러한 동의적 병행법은 똑같은 내용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면을 덧붙이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민족들의 술렁거림이 결국 헛일을 꾸미는 것임을 말한다.
"악인들의 결의대로 걷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시편 1, 1)에서 "죄인들"과 "오만한 자들"은 "악인들"의 또 다른 두 가지 면을 부각시키는 명칭이다. 이 구절은 또한 6절에 나오는 "의인들"의 한 가지 삶
의 자세를 세 번에 걸쳐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동의적 병행법 때문에 히브리어는 예수님 탄생 이전부터 이미사용되지 않았던 옛말임에도 동의어가 상당히 발달되어 있다.
병행법에는 또 한 가지 내용을 정반대되는 입장에서 서술하는 '반의적 병행법' 이 있다. "의인들의 길은 주님께서 알고 계시고 악인들의 길은 멸망에 이르기 때문이로다" (시편 1, 6)에서는 "의인들"과 "악인들" "의인들의 길과 "악인들의 길", '주님께서 알고 계심' 과 '멸망에 이름' 은 각각 반대 개념이다. 이 대목은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하나의 사실을 한 번은 의인들쪽에서, 한 번은 악인들쪽에서 서술한다.
병행법으로 이루어진 말마디와 시편의 절은 통상 서로 일치한다. 위의 예에서도 각각의 병행법은 모두 한 절로되어 있다. 이로써 번역문에서 보통 둘 또는 세 줄로 정리되는 ''절' 이 히브리어 시의 기본 단위이다. 물론 모든절이 병행법으로 되어 있지도 않고, 또 병행법이 늘 완벽히 성립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히브리어 시의 기본 단위인 절과 기본 법칙인 병행법을 염두에 두면 시편에 더욱 친근해질 수가 있다.
이 밖의 여러 표현 양식 가운데 '알파벳 노래' 가 있다(시편 9-10편 : 25편 ; 34편 : 37편 ; 111-112편 ; 119편 :145편). 이는 시편의 각 줄 또는 절의 첫 글자를 22자로 되어 있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순서에 따라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번역문에서는 이를 재생시킬 수가 없어서 보통 본문 옆에 그 줄이나 절을 시작하는 히브리어 알파벳을 음역해서 표기하는 것으로 그친다. 각 줄이나 절을 알파벳 순서에 따라 일정한 글자로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알파벳 노래에서는 시를 전개하는 데에 제약이 따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종의 언어 유희를 통해서도 이스라엘인들은 자기들의 종교 심성을 하느님께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에는 또 22글자를 다 거침으로써, 글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을 충분히 또는 전부 다 말하였다는 의미도 들어 있다. → 구약성서 : 성문서 ; 시편 성가)
※ 참고문헌  L. Sabourin, The Psalms. Their Origin and Meaming, NewYork, Alba House, 2nd ed., 1974/ H. Gunkel . J. Begrich, Einleitumg in die Psalmen. Die Gattumgen der Religiosen Lyrik Israels,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3. Auf., 1975/ H.-J. Kraus, Psaimen 大學 1~ I(Biblischer Kommentarr XV/1-2),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Verlag, 5. Auf.,1978/ -, Psalmen I(Biblischer Kommentar AT XV/3), 1979/ C. Westermann, Lob und Klage in den Psalmen,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5. Auf., 19771 G. Ravasi, Il Libro dei Salmi I-Ⅲ. Commento e Attucalizacione, Bologna, Edizioni Dehoniane, 1981~1984. [任承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