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스토 Six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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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스토 2세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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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스토 2세 교황.

① 식스토 2세(?~258) : 순교 성인. 교황(257~258) .축일은 8월 7일.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에 따르면, 그는 그리스에서 태어났고 '철학자' (philosophus)라는 호칭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 태생이라는 것은 불확한 사실이고, 철학자라는 호칭은 루피노(Tyrannius Ru-finus, 345~410)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스 출신으로 신피타고라스 학파이며 아우구스투스 황제(기원전2기 14) 시대에 살았던 섹스투스(Sextus)가 그리스어로 쓴 《명제》(Sentene)를 루피노가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이 책 서문에 섹스투스와 교황을 동일 인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노(354-430)도 루피노의 주장을 받아들여 섹스투스가 "로마 교회의 주교이며 주님의 순교자인 식스토" 라고 했다(《본성과 은총에 대하여》 65, 77). 그러나 예로니모(343~420)는 <크테시폰테에게 보낸 서한>(Epistolaad Ctesiphontem, adversus Pelagium)에서 이에 반대하였고, 아우구스티노는 훗날 《재논고》(再論考, Retractationes)에서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였다(2, 42).
(교황으로서의 활동] 257년 8월 30일 교황으로 선출된 식스토 2세는 전임 교황인 스테파노 1세(254~257)와 는 달리 '화해하는 교황' 이었다. 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당시, 선임 교황의 지나치게 비타협적인 자세 때문에 로마 주교좌는 아프리카와 동방 교회로부터 많은 반대를 받고 있었다. 이에 교황 식스토 2세는 교회의 재일 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디오니시오(190~265?) 역시 교황의 이 같은 노력에 적극 협력하였다.
우선 디오니시오 주교는 교황에게 세례에 관한 서한을 보내면서 스테파노 1세 교황이 취한 파문 조치를 전하였는데(에우세비오, <교회사> 5), 교황 식스토 2세는 디오니시오 주교에게 보낸 답신에서 삼위 일체의 이름으로 행해졌다면 이단자들이 집전한 세례 역시 유효하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교황의 이 같은 입장과 노력 덕분에 로마교회는 아프리카 교회와 소아시아 교회와의 관계를 개선시킬 수 있었다. 본래 교황 식스토 2세는 전임 교황과 같은 입장이었지만, 여기에서 약간 물러나 교회 일치를 위해 상이한 관습의 공존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치프리아노의 생애와 수난》(Vita et Passio Cypriani)의 저자 폰시오(Pontius, ?~260) 부제는 교황을 '평화를 사랑하는 착한 사제' 라고 표현하였던 것이다(14, 1)식스토 2세 교황은 단 한 번밖에 서품식을 거행하지 못하였는데, 이때 그는 2명의 주교와 4명의 사제 및 7명의 부제를 탄생시켰다. 한편, 이 당시 전례력에는 258년 6월 29일 카타콤바 안에 있던 베드로 사도의 유해와 오스티아 가도(ViaOsia)의 묘지에 있던 바오로 사도의 유해 이장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이 날짜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주장들이 대두되고 있으나, 여하튼 로마 교회는 식스토 2세 교황 재임기인 258년에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를 공경하기 위하여 6월 29일을 축일로 정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박해 상황과 순교] 교황 재임 초기 그리스도교에 우호적이었던 황제 발레리아누스(253~260)는 257년에 갑자기 우호적인 입장을 철회하였는데, 이 입장의 변화는 제국의 일치를 강화하려는 목적과 제국을 위해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에우세비오는 디오니시오 주교의 편지를 인용하면서, 발레리아누스는 이집트 출신 마술사들의 스승이며 지도자인 자의 낌에 빠져 신자들을 박해하고 죽이도록 했다고 하였다(《교회사) Ⅶ, 10). 신자들을 박해하도록 부추긴 자는 황제의 스승 마크리아누스(Mac-rianus)였다. 257년 8월 황제는 첫 번째 포고령을 반포하여 모든 성직자들은 제국의 신들에게 제사를 바쳐야 한다고 하면서 지하 묘지에서의 집회 금지를 어길 경우에는 유배형에 처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투스코와 바소 두 집정관에게' (Tusco et Basso con-sulibus) 두 번째 포고령을 내렸는데, 이 포고령은 첫 번째 포고령보다 훨씬 더 잔혹하였다. 치프리아노는 아프리카의 주교 수체소(Successus)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 포고령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원로원에 보낸 답신에서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주교 · 사제 · 부제는 즉각 엄하게 책벌하고, 원로원들과 상류 계급의 시민들, 그리고 로마 기사들 중 그리스도인들인 경우에 그들이 갖고있는 직분과 재산들을 몰수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재산을 몰수당한 뒤에도 스스로 계속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면 참수형에 처하라고 하였습니다. 상류계급의 기혼 부인들 역시 재산을 몰수한 다음 유배형에 처하고, 궁전과 황제를 위해 일하는 관리들 역시 이전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였거나 현재 신앙을 고백한다면, 재산을 몰수한 다음 쇠사슬을 채워 황제의 사유지로 보내도록 명하였습니다"(〈서간) 80). 교황 다마소 1세(366~384)가 훗날 교황 식스토 2세의 무덤에 만든 비문에 의하면, 교황 식스토 2세는 258년8월 6일 자신의 주교좌에 앉아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던 중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참수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체포 장소에 대해서는 아피아 가도(Via Appia)에 있는 갈리스도 카타콤바라고 하기도 하고, 개인 장지인프래텍스타토(Pamaextamhans) 카타콤바라고도 한다. 다마소 1세 교황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머리를 맨 처음으로 봉헌하였다" 고 전하였고, 치프리아노는 "식스토 교황은 8월 6일 한 묘지에서 죽임을 당하였고, 4명의 부제들 역시 그와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서간> 80)고 하였다.
치프리아노가 교황과 함께 순교한 부제가 4명이라고 증언하는 반면에, <연대 교황표>는 6명이라고 하면서 그 이름까지 전하고 있다. 《베다의 순교록>(MaryrylologimBedae)도 <연대 교황표>의 기록과 같은데, <연대 교황표>에는 이 6명의 부제들이 모두 교황과 함께 갈리스도 카타콤바에 매장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기록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로마 순교자 증언록》(Depo-sitio martyrum)과 교황 다마소 1세가 교황 식스토 2세에게 봉헌한 시(詩)에서도 식스토 교황이 갈리스도 카타콤바에 매장되었다고 동일하게 언급하고 있다. 한편 교황 식스토 2세의 일화 중에는, 로마 교회 7명의 부제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 및 교회 재산 관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던 라우렌시오(2~258) 부제에게 교회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명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또 《로마 순교자증언록》을 비롯하여 《시리아 순교록》(Brevianium Syria-cum), 《카르타고 축일표》(Calendanio di Cartagine), 라틴 순교록들(martyrologigia latini), 성무 집전서들(sacramentin) 그리고 여행기들(inenan)에는 교황이 갈리스도 카타콤바에 안장된 것이 8월 6일이라고 전하고 있다. <연대 교황표> 역시 교황이 갈리스도 카타콤바에 안장되었다고 하였다. 반면에 7세기 문헌들인 <로마에 있는 교회들에 대한 공지>(Notitia ecclesiarum urbis Romae), <순교자들의 거룩한 장소에 대하여>(De locis sanctis martyrum), <로마의 성문들에 대한 공지>(Notiia portarum urbis Romae) 등에서는 교황의 무덤이 성녀 체칠리아 무덤 곁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교황의 시신은 정확하게 3세기 때 9명의 교황들이 묻힌 지하 묘지에 안장되었다.
[공 경] 교황 식스토 2세는 초기 순교자들 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축일 전례예식 역시 상당히 대중적으로 행하여졌다. 교황의 이름은 4세기 중반 로마 전례력에서도 발견되고, 미사의 감사 기도 제1 양식(Canone romano)에도 교황의 이름이 삽입되었다. 그리고 교황이 순교한 장소에는 '순교 기념경당' (cella memoriae)이 세워졌다. (-) 라우렌시오)

※ 참고문헌  L. Duchsene, Le Liber Pontificalis, Texte, Introduction etcommentcire, ed. E. De Boccard, Paris, 1955/ J.N.D. Kelly, The Oxford Dictionary ofPopes, Oxford Univ. Press, Oxford, 1986/ 《ODCC》, pp.1507~1508/ Eusebio di Cesarea, Storia Ecclesiastica e I Martiri della Palestina, traduzione e note di Giuseppe del Ton, Desclée & C. Editori Pontifici, Roma, 1964/ D. Farmer, The Oxford Dictionary ofSaints, Oxford Univ. Press, Oxford, 3nd ed., 1992/ A. Lopes, I Papi, La vita dei pontefici attraverso 2000 anni di storia, Futura Edizioni, Roma, 1997/ J. Quasten,
Patrologia, vol. 1, trad. di Nello Beghin, Marietti, Roma, 1992/ L. Tripepi, Ritratti e Biografie dei Romani Pontefici, Tipografia della Pace, Roma,1879/ É. Amann, (DTC) 28, Pp. 2194~2195/ A. Amore, KECM J. Barmby, (DCB)/ A. di Berardino, (DPAC》I S. Carletti, Bibliotheca Sanctorum, Istituto Giovanni XXIII della Pontificia Università Lateranense, Roma, 1968/ M. Christol, Dizionario Storico Papato, diretto da Philippe Levillain, trad. di F.S. Sardi, Bompiani, Milano, 1996. 邊宗宗燦]
② 식스토 4세 (⇨ 르네상스 교황)
③ 식스토 5세(1521~1590) : 교황(1585~1590). 본래 이름은 펠리체 페레티(Felice Feretti). 1521년 12월13일 안코나(Ancona) 관구 아스톨리 피체노(AstoliPiceno) 근처의 그로탐마레(Grotarmmme)에)에서 가난한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나 12세 때 몬탈토(Montalto) 부근에 있는 끈벤뚜알 성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으며, 1534년에 착복식과 서원을 한 뒤 페라라(Ferrara) · 볼로냐(Bologna) · 리미니(Rimin) · 시에나(Siena) 등지에서 공부하였다. 1547년 시에나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이듬해페르모(Femo)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설교가로서도 명성을 얻었다. 또 로올라의 이냐시오(1491~1556)와 필립보 네리(1515~1595) 등과 친분을 나누었고, 1552년에는 프란치스코회의 후원자였던 카르피(Capi)추기경의 주선으로 로마에 갔다가 그곳에서 훗날 교황 비오 5세(1566~1572)가 된 기슬리에리(M. Ghislier)를 만났다. 한편 그는 로마에서 한 사순절 강론으로 유명세를 타 여러 차례 강론을 의뢰받기도 하였다.
[교황 선출 이전의 활동] 1557년 교황 바오로 4세(1555~1559)에 의해 베네치아의 감찰관으로 임명된 페레티는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고 저돌적인 성향 때문에,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과도 적대적이었다. 결국 교황 바오로 4세가 사망하자 몬탈토로 되돌아갔다가, 그 후 카르피 추기경의 중재로 후임 교황 비오 4세(1559~1565)에 의해 1560년에 다시 베네치아의 감찰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베네치아인들은 그를 '로마의 보편 감찰성' (Romanae Universalis Inquisitionis Congrega-tio)으로 소환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페레티는 그 해 6월 다시 로마로 돌아갔고, 교황 비오 4세는 기슬리에리 추기경의 요청으로 그를 로마의 감찰 전문 위원(consultor)에 임명하였다.
1561년 카르피 추기경의 후견으로 끈벤뚜알 성 프란치스코회의 로마 주재 대표(procurator generalis)가 된 그는, 이때 포시오(A. Potius)와 함께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 편집본을 공동으로 작업하였고, 《그라시아노 법령집》 (Decretum Gratiani)의 신판 작성을 위한 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그리고 1565년에는 기슬리에리 추기경의 배려로 훗날 교황 그레고리오 13세(1572~1585)가 된 본콤파니(Boncompagmi) 추기경을 따라 신학자의 자격으로 스페인에 갔다. 본콤파니 추기경은 스페인 이단 심문소가 이단자라고 단죄한 톨레도(Toledo)의 대주교 카란자(Caranza)에 대한 재판을 감찰하기 위해 파견되었었다. 그러나 이 위원회의 활동은 교황 비오 4세의 사망으로 중단되고 페레티는 혼자 로마로 돌아왔다.
1566년 1월 7일 기슬리에리 추기경이 교황 비오 5세(1566~1572)로 선출되었다. 교황은 선출된 지 얼마 안된그 해 1월 14일 페레티를 끈벤뚜알 성 프란치스코회 총대리(vicario generale)로 임명한 데 이어 11월 5일에는 나폴리 공국에 있는 고트인들의 산트 아가타(Sant'Agta dei Goti) 주교로 임명하였다. 페레티는 1568년까지 총대리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이 무렵부터 그는 '몬탈토' 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570년 5월 17일 추기경이 되었고, 이듬해 설치된 '금서 목록 개정 및 서적 교정성' (Congre-gatio de reformando indice et corrigendis libris)에서 활동하다가 '주교 및 수도자성' (Congregatio super consultationibus Episcoporum et Regularium)으로 옮겨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1571년 12월 17일 고트인들의 산트 아가타 교구에서 페르모 교구장으로 전임되었으나, 1577년 여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와의 관계에서 빚어진 어려움 때문에 다시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교황이 추기경이었던 시절에 몬탈토는 그와 스페인에서 함께 감찰관으로 있으면서 의견 대립이 많았는데, 당시 본콤파니 추기경은 수도자들은 자신들의 수도원에서 생활하여야 하고 교회 내에서 큰 직책을 맡아서는 안된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몬탈토 추기경은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에스컬리노에 지은 '페레티 빌라 VillaFerett)라는 자신의 저택에서 성 암브로시오 작품의 새 편집본을 준비하면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교황 재임시의 활동] 1585년에 교황으로 선출된 몬탈토는 자신처럼 프란치스코회 회원이었던 식스토 4세(1471~1484)의 이름을 따 식스토 5세라고 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최고 수장으로서 가톨릭 신앙과 교회 개혁 및 사도좌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데 헌신하였다. 교회 교의의 보존 : 교황 레오 1세(440~461) 때부터 각교황들이 발표한 헌장들의 출판을 독려하여 1586년에케루비니(L. Cherubini)에 의해 <교황 칙서집》(Bullanium)이 출간되도록 하였으며, 교회 교의에 강한 성서적 기반을 주고자 성서 편집본을 장려하여 1587~1588년에 칠십인역 성서의 그리스어 원본과 라틴어 번역본을 출판하였다. 아울러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의 결정에 따라 불가타 성서 개정 작업위원회를 구성하였지만, 작업속도가 더딘 것을 참지 못하고 결국 자신이 직접 참여하여 1590년 5월 2일 개정판을 출판하였다. 그렇지만 이 개정판은 오류가 많아 그가 사망한 후 교황 글레멘스 8세(1592~1605)에 의해 다시 수정 작업이 이루어져 식스토 5세 이름으로 개정판이 출판되었으며, 교회 내에서 오랫동안 표준 성서본으로 사용되었다. 교황은 또 《성무일도서》도 새롭게 개정하도록 하였다.
내적 개혁 및 기구 개편 : 교황 식스토 5세의 가장 큰 관심은 가톨릭 교회의 내적 개혁이었다. 열정적이면서 굽힘이 없는 성격의 소유자였던 교황은 우선 족벌주의(nepotismus)를 근절하고자 하였다. 교황은 한때 조카의 아들인 알레산드로(Alesondo)를 15세 때인 1585년 5월 13일에 추기경으로 임명하는 단 한 번의 족벌주의 정책을 허용한 적이 있었지만, 이후 자신의 친척들에게 교회 내 주요 직책이나 어떠한 교회록도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1585년 7월 23일에는 세가(Pilipe Sega de Plai-sance) 주교와 오티넬리(Jules Ottinelli de Castro) 주교에게 로마에 있는 모든 성당과 신학원에서 부정 행위를 발견하는 즉시 엄히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고, 12월 20일에는 회칙을 통해 '교황청 정기 방문' (ad liminaApostolorum)의 의무를 재제정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2월 3일 회칙 <포스트람 베루스>(Postquam verus)를 통하여 추기경들의 품위 · 의무 · 각 민족에 따른 선출 등을 서술하면서 그 숫자를 70명으로 제한하였는데, 이 숫자는 교황 요한 23세(1958~1963)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1587년 11월 16일에 열린 추기원 회의에서 교황은 로마의 성직자들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개혁되어야 한다고 확언하였다. 우선 교황은 성직 매매(simomia)를 하는 이들과 교회록을 중복해서 받는 이들을 엄벌에 처하였고, 수도원의 규칙을 어기는 것을 금하였다. 또 트리엔트공의회에서 발표한 훈령에 따라 주교들과 본당 신부들 그리고 추기경들 역시 자신들의 정주(定住) 의무(obliga-tio residentiae)를 엄격하게 적용시켰다. 1588년 1월 22일에는 회칙 <임멘사 에테르니 데이>(Immensa aeterni Dei)를 발표하여 추기경을 장관으로 하는 15개의 성(省)을 재조직하거나 신설하였는데, 이 개편은 교황 비오 10세 (1903~1914) 때까지 유지되었다. 각 성들은 매주 회합을 가져야 했고 각 성들의 추기경들 역시 매주 교황과 함께 회의를 가짐으로써, 교황과 함께 교회를 통치하는 데 추기경들이 참여하게 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수도회 지원 : 교황은 또 수도회에 관심이 많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스페인에서 예수회 회원들에 대한 감찰과 개혁적인 예수회 회원들 때문에 혼란이 야기되었을때, 교황은 1588년 11월 10일 예수회 회원 한 명을 포함한 10명의 신학자들로 구성된 위원회로 하여금 예수회 회칙을 재검토하고 잘못된 점들을 수정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위원회가 결정한 판결문은 전반적으로 예수회에 호의적이었다. 한편 예수회 본래의 이름인 '예수의동반자' (Compagnie de Jésus)에 거부감을 느껴 오던 교황은, 결국 1590년에 예수회 총장 아과비바(C. Aquaviva,1581~1615)에게 총장 스스로 수도회 이름을 변경하도록하는 훈령을 선포하게 하였다.
교황 식스토 5세는 특별히 작은 형제회에 가장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자신이 같은 회의 회원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많은 작은 형제회 회원들을 주교품에 올렸고, 1588년에는 평수사였던 디에고 데 알칼라(Diego de Alcala, 1400~1463)를 시성하였으며, 신학자였던성 보나벤투라(Bonaventua, 1217?~1274)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또 로마에 끈벤뚜알 성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을 위한 '성 보나벤투라의 프란치스코회 신학원' 을 설립하였다. 아울러 교황은 도미니코회에도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 1586년에 도미니코회 회원인 베르트란도(L.Bertranus, 1526~1581)를 시성하였고, 베르니에리(G. Ber-nieri)는 추기경에 임명하였다.
선교 활동 지원 : 교황은 교황 사절들을 파견하여 중부 유럽에서의 가톨릭 개혁의 증진과 이단들의 억제를 시도하였다. 그리고 오랫동안 주교가 임명되지 않았던 헝가리 주교좌에 주교들을 임명하였고, 1588년에는 그라츠(Graz)에 대학을 세워 예수회에 그 운영을 위임하였다. 또한 스위스와 독일에서 가톨릭 교회가 재건되는 데 많은 기여를 하였고,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예수회 회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도미니코회 회원들과 작은 형제회 회원들이 필리핀과 남아메리카에서 선교 활동을 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동방 교회와 이집트 롭트 교회를 로마 교회와 일치시키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국제 관계 및 정치 활동 : 교황은 국제 문제에 있어서도 폭 넓은 관심을 보여 주었다. 터키인들을 몰아내고 성묘(Sanctum Sepulcrum) 옆에 그리스도교 국가를 세우기 위해 십자군 운동을 계획하였지만, 이를 위해서는 많은 자금과 군대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교황은 먼저 폴란드의 왕 스테판 1세 바토리(Stephen I Bathory, 1576~1586)로 하여금 러시아를 굴복시키게 한 뒤 폴란드와 러시아의 군사력과 페르시아와 몽골의 도움을 받아 터키인들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1586년 12월 12일 스테판1세가 갑자기 사망하고 말아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또 아프리카의 바바리아족들과의 대규모 전쟁과 이집트 점령도 생각하였으나, 스페인의 펠리페 2세(FelipeII , 1556~1598)의 도움을 얻지 못하여 이것 또한 실행하지 못하였다.
스테판 1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교황은 왕의 후계자 임명 문제에 개입하게 되었다. 처음에 교황은 가톨릭 신자가 폴란드 왕위에 오르기를 원했다. 그러나 1587년 3월 31일 교황은 안니발(Annibal de Capoue) 대사에게 합스부르크 가(家) 출신의 오스트리아 대공을 왕위에 올리라는 연락을 보냈는데, 이는 그의 도움을 받아 십자군 계획을 실현하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교황의 원의와는 달리 그 해 6월 30일부터 개최된 의회에서 그니에즈노(Gnicmo)의 대주교 스타니슬라오(StanillusKarnkowaki)와 자모이스키(Zamoski)는 8월 19일에 스웨덴 출신의 지그문트 3세(Zygmunt Ⅲ Vasa, 1587~1632)를 폴란드의 새로운 왕으로 선포하였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에 반발하여 8월 22일 막시밀리안(Maximinian) 대공을 폴란드의 왕으로 선출하였지만, 1588년 1월 24일에 막시밀리안이 패배하여 감옥에 갇힘으로써 지그문트 3세가 폴란드의 왕이 되었다. 교황은 3월 12일에 지그문트 3세가 적법한 왕임을 재확인하였다.
한편 교황이 프랑스와의 관계에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앙리 3세(1574~1589) 치하에서 일어난 나바라(Navarra)의 앙리(1553~1610, 훗날의 앙리 4세)가 이끄는 위그노파(Huguenots)를 반대하는 내전과 앙리 드 귀즈(Henide Guise, 1571~1640)가 이끄는 가톨릭 연합을 통해서였다. 앙리 3세로부터 도움을 요청받은 교황은 왕에게 프랑스의 왕권은 그의 후손에게 계속 이어질 것임을 약속하였고, 1585년 9월 21일에는 나바라의 앙리가 이단자이므로 왕위에 오를 자격이 없다는 내용의 파문장을 공표하였다. 그러자 이에 반발한 앙리는 같은 해 11월 6일 교황의 파문이 무효라는 답서를 로마로 보냈다. 그런데 파문에 처한다는 교황의 발표가 있은 후 내전은 더욱 치열해졌고 나바라의 앙리가 결국 프랑스 왕이 되었다. 이에 교황은 프랑스를 점령하려는 스페인의 계속적인 압력 앞에서도 앙리 4세가 교회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막고 싶지 않다는 열망을 표현함으로써 스페인의 압력을 저지하였다. 교황은 유럽의 정치적인 균형을 도모하고자 스페인이 주도권을 잡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교황령의 질서 확립 : 사보이(Savoy)의 공작 엠마누엘(Charles Emmanuel, 1580~1630)이 제네바를 공격하여 자신의 왕국에 편입시키자, 교황은 교황령의 질서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를 계기로 1585년 4월 30일에 교황은 칙령을 내려 무기를 가지고 다니는 것을 금하였는데, 당일 이 법을 어긴 4명의 젊은이가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 받았다. 또 당시 교황령에 도둑질이 극성을 부리자 교황은 도둑질하는 이들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천사의 성' (Castel Sant'Angelo) 앞에 두 개의 사형대를 준비하도록 하여 많은 도둑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하였다. 로마의부유한 가문 출신인 두목들도 처벌에 있어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교황은 또 1586년 1월 5일에 발표한 회칙을 통해 점성술 및 미신 행위들을 금하였다. 매매춘, 간음,낙태, 사기, 신성 모독, 거짓 정보의 유통, 거짓 맹세, 근친 상간, 남색(sodomia) 도박, 주일에 쉬는 계명을 어기는 것 등의 윤리적인 죄들도 단죄하였다.
교황령 내에서 질서를 회복한 것에 만족하지 않은 교황 식스토 5세는 해상에서의 안정, 특히 터키 해적들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던 해안의 안정을 되찾고자 하였다. 그래서 교황은 치비타베키아(Cinivavectria)에 기지를 둔함대를 만들었고, 1587년 1월에 이를 담당하는 성(省)을 두어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외에도 경제와 재정 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식료품 가격을 일정하게 조절하고 늪지를 초지로 바꾸었으며, 농업과 면이나 명주를 만드는 일을 장려함으로써 경제 계획을 많이 실현시켰다. 선임 교황이 빈 채로 남겨 두었던 교황청의 보고(寶庫)를 다시 채우는 데도 성공하였다. 이렇듯이 교황령의 안정을 확립하면서 교황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군주로 발판을 굳혔고, 재정적인 독립도 가능하게 되었다.
건축 활동 : 교황은 건축과 예술에도 뛰어난 후원자였다. 그의 건축 사업으로 로마는 뛰어난 바로크식 도시로 바뀌었으며, 7대 순례식 성당을 연결하는 큰 도로가 건설되었다. 또한 베드로 대성전 광장 · 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대성전 광장 · 라테란 대성전 광장 · 성모 마리아 대성전 광장 등에 십자가를 왕관 형식으로 만든 기념탑들을 세웠고, 포르타(G. della Porta, 1537~1602)에게 베드로 대성전의 지붕을 돔으로 완성하도록 하였다. 새로이 바티칸 궁전과 퀴리날레(Quiinale) 궁전, 라테란 궁전을 증축하였으며, 라테란 대성전 옆에 유명한 '거룩한 계단'(Santa Scala) 성당을 세운 것을 비롯하여 많은 로마의 성당들을 재건축하였다. 또 1586년에는 교수 기숙사를 새롭게 개축하는 등 로마 대학 건물에도 새로운 융성을 도모하였고, 페르모 · 그라츠 · 귀토(Quito) 등에는 대학을 세웠다. 그리고 바티칸 도서관을 확장하였고, 바티칸 인쇄소를 만들어 바사(D. Basa)에게 관리를 위임하였다. 교황은 '복된 물' (acqua felice)이라고 일컬어지는 상수도 공사도 단행하였는데, 이 물은 로마에서 약 20마일정도 떨어진 곳에서부터 끌어 온 것이었다. 또한 자신이태어난 지역에 특별한 관심을 쏟았던 교황은, 볼로냐에 마르케(Marche) 주 출신의 젊은이들을 위한 몬탈토 기숙사(collegio Montalto)를 세웠고, 마체라타(Macerata)에는 최상급 법원(tibunale supremo)을 세웠다. 페르모 교구를 대주교좌로 승격시켰으며, 몬탈토 · 산 세베리노(S. Seve-rino) · 톨렌티노(Tolentio) · 로레토(Loreto) 등은 주교좌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로레토에서는 새 요새 건축을 포함한 중요한 공사를 시행하였다. 말라리아에 걸린 교황식스토 5세는 1590년 8월 27일 자신이 재건한 라테란 궁전에서 사망하여 성모 마리아 대성전에 안장되었다.
[평 가] '철의 교황' (ironpope)이라고도 불렸던 식스토 5세 교황은 교황령의 질서 확립 및 체제 정비, 국제적인 관계 개선을 위하여 많은 활동을 한 대표적인 교황 중 하나였다. 교황의 사망 소식을 듣고 캄피돌리오(Campi-dollio) 광장에 몰려든 군중들이 교황의 상(像)을 부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오지만, 교황은 교회의 발전과 질서 확립과 재정적인 확보 및 보호에 많은 노력을 쏟았고, 선교 정책에 힘썼으며 예술과 학문을 숭상한 교황으로 평가되고 있다. 1- 교황령 ; 바티칸 시국 ; 일본 ; 작은 형제회 )

※ 참고문헌  J.N.D. Kelly, The Oxford Dictionary of Popes, Oxford Univ. Press, Oxford, 1986/ A. Lopes, IPapi, La vita dei pontefici attraverso 2000 amuni di storia, Futura Edizioni, Roma, 1997/ 《ODCC), p. 1508/ L. Barone von Pastore, Storia dei Papi, vol. 10, vers. Italiana di Pio Cenci, Desclée & C. Editori, Roma, 1928/ L. Tripepi, Ritratti e Biografie dei Romani Pontefici, Tipografia della Pace, Roma, 1879/ G.B. Picotti, (EC) M. Rosa, Dizionario Storico Papato, diretto da Philippe Levillain, trad. di F.S. Sardi, Bompiani, Milano, 1996/ A. Teetaert, (DTC) 28, Pp. 2217~2238. [邊宗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