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 시대의 교우촌. 대구 본당의 첫 본당 터이자 영남 교회의 선교 요람지. 경북 칠곡군 지천면 연화동 57번지 소재.
경상도에 처음으로 복음이 전해진 것은 1790년대 후반경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1798년 황일광(黃日光, 알렉시오)이 신앙의 실천을 위해 영남 지방으로 이주했다는 기록과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의 〈백서〉(帛書)에 피난한 신자들이 경상도에 살고 있다는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박해를 피해 경상도로 내려간 신자들은 처음 청송(靑松) · 진보(眞寶) · 영양(英陽) · 안동(安東) · 상주(尙州) · 순흥(順興) 등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생활하였고, 1830년대에는 언양(彥陽) 등 남부 지역에까지 교우촌을 형성하였다. 그렇지만 신나무골에 언제부터 교우촌이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815년 을해박해로 청송 · 진보 · 영양에서 체포된 신자들이 대구로 압송되자, 그 가족 및 일부 신자들이 피난지로 알려진 신나무골로 이주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신나무골 신자들은 여러 박해를 겪으면서도 꾸준히 신앙 공동체를 유지해 나갔고, 1866년 병인박해 때 일시 흩어졌으나 박해 후 이이전(李梨全, 안드레아) 등 신자들이 돌아오면서 다시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신나무골은 박해 시대의 교우촌으로서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의 선교 거점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로베르(A.P. Robert, 金保祿) 신부는 1885년 11월경부터 1887년 3월까지 신나무골에 머물다가 대구의 새방골[新坊谷]로 옮겨 대구 본당을 창설하였고, 보두네(F.X.Baudounet, 尹沙勿) 신부는 1887년 3월부터 1889년 전주 본당을 설립할 때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또 조조(M.Jozeau, 趙得夏) 신부는 신나무골에서 1년 동안 머무른 뒤 1890년에 부산 본당을 창설하였고, 파이야스(C. Pail-Ihasse, 河敬朝) 신부는 1894년 3월부터 가실 본당을 창설한 9월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따라서 신나무골은 대구 · 가실 · 전주 · 부산 본당의 산실로서, 특히 영남 교회의 선교 요람지라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1883년에 세워진 연화 학당(蓮花學堂, 일명 신나무골 학당)은 1920년까지 신 · 구학문과 천주교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지역 사회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한편 신나무골은 1973년부터 성지 개발 사업이 추진되었는데, 1977년 7월에 제1차 성역화 사업이 완수되면서 '대구 천주교 요람지' 라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어 1984년에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이하여 1861년 신나무골에 살다가 한티(경북 칠곡군 동명면 득명동)에서 순교한 이선이(李先伊, 엘리사벳)의 묘소를 이 곳으로 이장하였고, 아울러 로베르 신부의 사제관과 흉상, 신나무골 학당, 전시관 등을 건립하여 대구 본당의 첫 본당 터로 복원하였다. 현재 신동(新洞) 본당에서 신나무골을 개발 · 관리하고 있다. (→ 로베르, 아실 폴 ;신동 본당 ② ; 을해박해)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달레 교회사》 中, pp. 51~59/ 윤광선,<대구교구의 요람지 신나무골>,《교회와 역사》 109호(1984. 7), 한국교회사연구소, pp. 8~91 차기진, <조선 후기 천주교의 영남 전파와 그 성격>, 《교회사 연구》 6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8/ 마백락, 《경상도 교회와 순교자들》, 대건출판사, 1989, pp. 602~617/ 최석우, <대구 본당의 설립과 정착 과정>, 《신부 전달출 회장 화갑 기념 논총》, 매일신문사, 1992. 〔方相根〕
신나무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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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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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무골의 이선이 순교자 묘소(왼쪽)과 1977년 7월에 세워진 '대구 천주교 요람지' 순교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