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 본당

新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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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광주대교구 소속 본당. 광주시 광산구 송정동 916-3 소재. 1967년 2월 29일 원동(元洞) 본당에서 분리·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녀 베로니카. 관할 구역은 도산동, 송촌동, 장록동, 요기동, 송내동, 황룡동, 도호동, 복룡동, 유계동, 하산동, 본덕동, 용곡동, 용봉동, 신흥동전 지역과 송정2동, 월전동, 장록동 일부 지역. 〔교 세〕1967년 1,691명, 1972년 1,882명, 1977년 2,512명,1982년 2,572명, 1987년 3,398명, 1992년 3,919 ,1999년 3,802명. 〔역대 신부〕 초대 장지권(張志權) 요한(1967. 2~1971. 10), 2대 정규완(鄭圭完) 토마스 아퀴나스(1971. 10~1975.9), 3대 박영웅(朴榮雄) 가브리엘(1975.9~1979. 8), 4대 정형달(鄭亨達) 바오로(1979. 8~1983. 1) 5대 김정용(金正用) 베드로(1983. 1~1989. 8), 6대 김양회(金良會) 요한 보스코(1989. 8~1993. 2) , 7대 배행기(裵幸基) 모세(1993. 2~1998. 2), 8대 이천수(李淺水) 라자로(1998. 2~1999. 8), , 9대 장세현(張世現) 미카엘(1999. 8~현재) .
1966년 당시 원동 본당 5대 주임 마귀르(D. Maguire, 梅) 신부는 신자수가 크게 늘어나자 송정읍 서부 지역에 새 성당을 건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교구에서 현 성당 부지 1,860평을 매입해 주었으나 성당 건축비를 마련하지 못하자, 당시 광주대교구장 헨리(H. Henry, 玄) 대주교는 미국에서 성당 건축비를 모금하였는데, 한 미국인이 건립비 전액을 기증해 주어 그 해 11월 성당과 사제관 기공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당 공사 중이던 이듬해 2월 신동 본당이 설정되면서 초대 주임으로 장지권 신부가 부임하였다. 장지권 신부는 부임 후 성당 신축 공사를 진행시켜 같은 해 4월 16일 성당(135평)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으며, 1969년 10월에는 본당 뒤편에 수녀원을 신축한 뒤 '포항 예수 성심 시녀회'의 분원을 마련하였다. 이어 2대 주임으로 부임한 정규완 신부는 본당의 제반 실정을 파악하고자 전 교우 가정을 방문하였으며, 지역 사회에 대한 봉사를 담당할 십자회 · 애덕회 등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광주대교구 정의 평화위원회 위원장을 겸직하고 있던 4대 주임 정형달 신부는 신자들이 내적 신앙을 사회적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사목하였다.
이후 본당 신자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자 5대 주임 김정용 신부는 성당 증축을 위해 '건축 상임위원회' 를 구성한 뒤 1985년 4월 공사에 착수하여 같은 해 8월 성당을 증축(458평)하고 봉헌식을 가졌다. 이와 함께 이듬해 성모 승천 대축일에는 성모상 주변에 성모 동산을 조성하였다. 1987년 6월에는 또다시 성당 확장 공사를 하였고, 1988년 9월에는 수녀원과 교리실의 신축 공사를 시작하여 그 해 12월 완공하였다. 6대 주임 김양회 신부는 신자 재교육을 위하여 1992년 11월 380평 규모의 교육관을 신축하였으며, 7대 주임 배행기 신부는 계속되는 공사로 자칫 소홀해질 수 있는 신자들의 신심 강화를 위해 다양한 재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1996년 1월에는 본당 관할의 평동(平洞) 공소가 그곳 신자들의 요청에 따라 설립(1955년 3월)된 지 40여 년 만에 준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1997년 10월 본당 설립 3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마련하였던 신동 본당은 소공동체 모임과 각 단체의 활성화를 통하여 본당의 내실화를 이루고자 노력하고 있다. → 광주대교구 ; 원동 본당)
※ 참고문헌  천주교 광주대교구 편, 《광주대교구 50년사》, 빛고을출판사, 1990. [편찬실]
② 대구대교구 소속 본당. 경북 칠곡군 지천면 신리 367 소재. 1968년 2월 1일 왜관(倭館) 본당으로부터 분리 ·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관할구역은 칠곡군 지천면 전 지역과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일부 지역이며, 관할 공소는 하빈, 지천, 연호 3개소. 〔교 세〕 1968년 707명, 1972년 764명, 1977년 1,000명, 1982년 1,208명, 1987년 1,418명, 1992년 1,251명, 1997년 1,161명, 1999년 1,188명. 〔역대 신부〕 초대 이경우(李慶雨) 가브리엘(1968. 2~1969. 11), 2대 슈레플(C. Schräfl, 周聖道) 코르비니아노(1969. 11~1973. 1), 3대 에그너(R. Egner, 왕묵도) 레지날도(1973. 1~1975. 10),4대 서상우(徐相瑀) 요한(1975. 10~1976. 9), 5대 헤네켄(B. Henneken, 현익현) 바르톨로메오(1976. 9~1992. 2), 6대 라스터(S. Raster, 나현승) 스테파노(1992. 2~1997.5), 7대 박근배(朴根培) 알렉시오(1997. 5~1998. 4), 8대 이성근(李聖根) 사바(1998. 4~현재).
〔공소 시대〕 신동 본당의 역사는 유서 깊은 두 공소, 즉 신나무골 공소와 웃점 공소에서 시작되었는데, 그중 신나무골 공소는 대구(현 계산동) 본당의 첫 성당 터이자 영남 교회의 선교 요람지로 알려진 곳이다. 한편 웃점 공소에 신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1860년 이후부터였으며, 1925년에 14명, 1932년에는 60여 명의 신자들이 교우촌을 형성하였다. 그 후 웃점 공소는 가실(佳室,현 낙산) 본당 관할에서 1932년 왜관 본당으로 이관되었고, 이곳 공소 신자들은 신동(현 신리) 508번지에 공소강당을 마련한 뒤 신앙 생활을 계속하였다.
한편 한국 전쟁 이후 베네딕도회 신부들이 왜관에 정착한 것을 계기로 신나무골 공소와 신동 공소의 병합이 논의되자, 공소 신자들은 1959년 1월 현 성당 터를 매입한 뒤 같은 해 12월 6일 공소 강당을 완공하고 왜관 수도원장 비테를리(T. Bitterli, 李聖道) 몬시놀의 집전으로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이때부터 두 공소 신자들은 매 주일 베네딕도회 신부들의 방문을 받으며 신동의 새 공소에서 주일 미사를 합동으로 봉헌하였고, 성모회 등 단체를 구성하여 교세를 확장한 결과 1968년 2월 1일 마침내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성장과 변모〕 초대 주임 이경우 신부는 청소년 교육과 신자들의 재교육에 힘써 주일 미사 전에 구약성서를 가르쳤으며, 예비 신자 교리에도 열성을 보였다. 2대 주임 슈레플 신부는 1970년 3월 가난해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을 위해 상록학원을 설립하였고, 나환우촌에 있는 연호 공소를 칠곡(漆谷) 본당으로부터 이관받아 환자들을 돌보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또 3대주임 에그너 신부는 부임하자마자 가정 방문을 실시하여 그 해 탁아소를 설치하였는데, 이 탁아소는 현재 샛별유치원으로 바뀌어 운영되고 있다. 부임 1년 만에 암 선고를 받은 에그너 신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 적극적으로 사목 활동을 하다가 1975년 11월 5일 사망하고 말았다. 이어 4대 주임으로 부임한 서상우 신부는 신앙 쇄신 운동과 본당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면서 그 일환으로 1976년 1월에 주보(週報)를 창간하였으며, 1979년에 신용 협동 조합을 창립한 5대 주임 헤네켄 신부는 하빈공소와 지천 공소가 설립 30주년을 맞자 다양한 행사를 가졌다. 6대 주임 라스터 신부 때는 본당 설립 25주년을 맞아 특별 헌금을 모금하였고, 본당의 역사를 담은 《신동 본당 25년사》를 발간하였다. 7대 주임 박근배 신부는 짧은 재임 기간이었지만, 교육관을 완공하고 청소년 미사를 시작하는 등 중 · 고등부 주일학교를 활성화시켰다.
2000년 11월 현재 8대 주임 이성근 신부를 중심으로 요셉회 · 성모회 · 성우회 · 데레사회 · 이냐시오회 · 엘리사벳회 · 대건회 · 효주 아스회 · 청년회 · 연령회의 단체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관내에 있는 신나무골 사적지를 개발 관리하고 있다. 또한 이 지역은 선조들의 뜨거운 신앙이 오늘에 이어져 주민 중 신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 지역 사회 안에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 대구대교구 ; 왜관 본당 ; 신나무골)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천주교 대구대교구 편, 《교구 총람》, 대구대교구 홍보국, 1986/ 천주교 대구대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大邱本堂 百年史》, 대건출판사, 1986/《신동 본당 25년사》, 천주교 신동교회, 1993/ 윤광선, <대구교구의 요람지 신나무골>, 《교회와 역사》109호(1984. 7), 한국교회사연구소, pp. 8~9/ 마백락, 《경상도 교회와 순교자들》, 대건출판사, 1989/ 《옛 공소들의 어제와 오늘》, 영남교회사연구소, 2000/ 김구정 편, 《대구의 순교자들》, 천주교 대구대 교구,1981. 〔吳美娜〕
③ 전주교구 소속 본당. 전북 익산시 신동 804-5 소재. 1986년 1월 22일 창인동(昌仁洞) 본당으로부터 분리 ·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 이명서 베드로. 관할 구역은 신동 전역과 남중동 1가 · 모현동 1가 · 계문동 일부지역. 〔교 세〕 1986년 1,256명, 1991년 2,009명, 1995년 2,254명, 1999년 2,403명. 〔역대 신부〕 초대 박종상(朴鍾祥) 가브리엘(1986. 1~1990.5), 2대 김병운(金柄韻) 베네딕도(1990. 5~1994. 1), 3대 김기수(金基洙) 사도 요한(1994. 1~1997. 8), 4대 정양현(丁良鉉) 베드로(1997. 8~현재).
1986년 초 전주교구에서는 교구 설정 50주년 기념 사업의 하나로 세 곳에 본당을 신설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때 선정된 곳이 북일동(北一洞) 본당 · 인후동(麟後洞) 본당 · 송천동(松川洞) 본당이었다. 이에 따라 그 해 1월 22일자로 창인동 본당에서 289세대 952명의 교적을 이관받아 북일동 본당이 설립되었고, 초대 주임으로 박종상 신부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북일동 본당은 교구 결정에 따라 2월 6일 이름을 신동 본당으로 바꾸었다.
같은 해 2월 4일 박종상 신부는 남중동 1가 531-21번지 지하에 50평 규모의 임시 성당을 마련한 데 이어 2월 12일에는 신동 795-6번지 목화 연립 204호에 임시 사제관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성당이 마련된 직후부터 여러 쁘레시디움을 창단하였고, 사목회 · 교리 교사회 ·성가대 · 복사단 · 제대회 · 연령회를 조직하는 등 각 사도직 단체들의 기본적인 틀을 마련하였다. 1987년 2월 4일에는 현 성당 부지 460평을 매입하였고, 4월 11일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11월 27일 성당(345평)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1988년 3월에는 까리따스 수녀회 수녀들을 초청하였으며, 7월에는 본당 내에 사제관(56평)을 마련하였다.
2대 주임 김병운 신부는 본당 공동체의 활성화에 주력하였고, 이어 부임한 3대 주임 김기수 신부는 선교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는 한편, 정기적으로 외짝 신자들의 모임을 갖고 입교를 권유하였다. 또 1996년 4월 25일에는 신동 804-9번지 일대의 건물과 부지를 사제관으로 쓰기위해 매입하였고, 9월 15일에는 옛 사제관을 철거한 뒤 주차장으로 사용하였다. 4대 주임 정양현 신부는 1999년 3월 10일 신동 804-8번지와 804-9번지의 부지 130평을 추가 매입하였는데, 앞으로 성당 인근 부지를 연차적으로 매입하여 교육관을 건립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본당에서는 관내에 위치한 상지원 · 무지개 가족 · 작은자매의 집 등 복지 시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등 나눔실천에도 앞장서고 있다. (→ 전주교구 ; 창인동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호남교회사연구소 편, 《천주교 전주교구사》 II , 천주교 전주교구, 1998/ 김진소 엮음, 《전주교구사 연표》, 호남교회사연구소, 1993.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