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론 神論 〔라〕De Deo 〔영〕Doctrine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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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유일한 주제는 하느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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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유일한 주제는 하느님이다.

교의 신학의 한 분야. 성서의 계시를 통하여 드러난 창조주이며 예수의 아버지이고 모든 역사의 목적인 하느님의 내적 실재, 즉 본질 · 속성 · 섭리적 작용 및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성부 · 성자 · 성령의 삼위 일체(三位一體) 신비에 대하여 연구하는 학문이다.
〔학문적인 전망〕 하느님은 신학의 유일한 주제이며 동시에 신학을 하나로 묶어 주는 주제이다. 신경이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고백으로 시작되듯이, 전통적으로 신론은 교의 신학의 첫째 부분을 차지하면서 신학과 신앙의 영역에서 하느님에 관해 견실하게 논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고 있다. 하느님은 말씀과 업적을 통해 계시된다(계시 2항). 따라서 하느님은 하느님에 관해 언급되는 모든 내용들 안에서 구체적으로 그리고 혼동될 수 없는 방식으로 명백하게 확인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하느님이 자신을 계시한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주어진 가능성, 즉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리고 하느님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되는 신비를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이러한 질문은 그 형태로 보아 하느님 인식 가능성의 조건들에 대한 철학적 · 인간학적인 질문이지만, 신론을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인간이 하느님을 향해 창조되었고 그분과의 공동체로 부름을 받았다고 하는 특성은 하느님을 하느님으로서 인정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다. 철학이 어디까지 고유의 신론을 정립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고, 신학적 신론은 인류의 가장 심오하고도 궁극적인 질문들이 하느님의 존재를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자한다. 하느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이 일종의 대중 현상이 되어 버리고, 소위 사신 신학(死神神學)이라는 이름 아래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신(神)을 더 이상 필수 불가결의 존재로 보지 않게 된 이 시대에, 하느님의 존재와 존재 방식 그리고 인간의 현재 삶과 역사와의 상관성 등에 대한 질문은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역사적 변천〕 그리스도교 초기에 신론을 포괄적으로 다루었던 사상가는 오리제네스(185~254)와 아우구스티노(354~430)였다. 오리제네스는 자신의 저서 《원리론》(De Principis)에서 신론을 우선적으로 다룸으로써 신론이 조직 신학 안에서 지니는 위치를 확립하였다. 아우구스티노의 경우에는 그가 여러 저서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아프리카 루스페(Ruspe)의 주교였던 풀젠시오(Fulgentius, 462/468~527/533)가 교의 신학 개론서인 《신앙에 대하여》(DeFide)에서 체계화하여 초기 스콜라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니사의 그레고리오(335?~395?)는 전체교의 신학 안에서 하나의 고유한 신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교리 교수법 강론》). 신론의 그리스 전통을 스콜라 신학에 중개한 인물은 요한 다마세노(675?~749)였다. (《정통 신앙에 대하여》).
중세 신학 저술가들의 저서에 나타난 신론의 구성은 다양하였다. 베드로 롬바르두스(1095~1160)는 하느님의 본질과 특성들을 삼위 일체론 안에서 통합하여 다루었고,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신학 대전》(Summa Theologiae)에서 하느님에 관한 신앙의 가르침을 철학적으로 접근 가능한 통찰로써 다루었다. 즉 그는 이러한 통찰들을 신-본질에 대한 신학적 사색에 첨부하여 정리하고, 계시를 통해서 밝혀진 성부 · 성자 · 성령 안에 하나인 하느님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본질을 구체화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은 견고한 구도를 가지고 있기는 하나 주로 형이상학적인 통찰로 이루어졌다는 맹점을 드러냈다. 물론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도 모든 것을 규정하는 상위의 원칙, 즉 하느님이 자신의 본질에 부합한 선성(善性)에 근거해서 자유로이 결정하고 실행한다는 최상의 원칙은 성서적 계시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1a, 13q, 2a참조).
신앙에 기반을 두고 있는 신론에 대하여 이성적으로 접근하려는 모든 노력을 안셀모(1033/1034~1109)는 "하느님을 인식한 사람은 하느님이 불가해(不可解)하다는 것을 이성으로 파악하게 된다"(《모놀로기온) 64)라고 표현하였다. 신론은 하느님에 대해서 특정한 말을 할 수 있으나, 신론이 진리에 입각해서 하느님의 신비에 접근하게 될 때 어쩔 수 없이 부정 신학(theologia negativa)의 방식을 따라서 침묵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하느님이 무엇이 아닌지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말할 수 있으나 긍정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무한성 때문에 그저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뿐, 정확하게 파악하여 말할수 없고, 유비(類比, analogia)를 통해서 언급할 수 있을뿐이기 때문이다.
《신학 대전》의 신론이 16세기 이래 신학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16세기 이래 신론은 현실적으로 일반적 신론(de Deo uno)과 삼위 일체론(de Deo trino)으로 이분화되었다. 이러한 이분화로 인해 사람들은 일반적 신론 안에서 삼위 일체적 삶을 도외시하고 한 분인 하느님에 대해 어려움 없이 다룰 수 있다는 오해를 하게 되었다. 신스콜라학의 신론에서는 일반적 신론이 철학적 서술에 가까운 것으로 간주되었고, 삼위 일체론은 그 자체로 고귀하지만 일상을 규정 짓는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별로 소용이 없는 부가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삼위일체론은 구약의 창조 신학과 역사 신학과 더불어 철저하게 하느님의 위격적 특성을 이끌어 냈고, 동시에 하느님과 세상이 대립적임을 분명히 하였다. 삼위 일체인 하느님은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운 분, 절대적인 초월로 인식되었다. 하느님은 무한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 어느 창조물과도 비교될 수 없다. 그러나 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하느님은 자신 안에서 넘쳐흐르는 사랑이며 그 사랑으로부터 모든 것을 창조하는 분이기도 하다.
〔과제와 전망〕 철학적 신관의 극복 :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론을 답습해 온 가톨릭의 전통적인 신관(神觀)이 그리스 철학에서 영향을 크게 받아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스콜라 신학의 형이상학적 신관에 입각한 신은 인간 자유의 역사와는 무관한, 불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로서 부각된다. 그리스 철학은 그 부정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와의 만남을 통하여 하느님 인식에 있어서 나름대로 공헌하였다는 것도 사실이다. 언어학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으나, 칠십인역 성서에서 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오는 야훼 하느님의 이름을 그리스 철학의 존재 개념에 입각해 번역함으로써 신학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교부들의 신론은 한편으로는 하느님에 관한 철학적 인식의 진리 내용을 선별하여 수용하면서 동시에 계시의 내용과 구별되는 점을 찾아내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실제로 철학의 도움을 통하여 계시의 내용이 사색적으로 수용되고 통합되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불변성(不變性)이라는 공리(公理)와 관련하여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가 초래되기도 했다. 하느님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은 325년 제1차 니체아 공의회부터 1870년에 끝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하느님의 불변성으로 일관되었다. 이 철학적인 공리는 변화하는 세상과는 대조적으로 더 이상 클 수 없을 하느님의 완전성을 표현해줄 수 있었다. 그러나 철학적 사고가 안고 있는 경직된 추상성 때문에,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피조물에게 나누어 주고 피조물의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할 수 있는 하느님의 능력을 제대로 표현하지는 못하였다. 하느님의 완전성에 대한 지나치게 경직되고 추상적인 이상(理想)은 근대에 들어와서 범신론(汎神論, pantheismus) 혹은 변신론(辯神論, deismus) 문제와 연계되어 무신론(無神論)으로 넘어가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있다. 따라서 계시의 하느님은 세상의 고통과 무관한 분이 아니라 역사의 주인(主人)으로서 인간과 운명을 같이하며, 인간과 세상을 그 유한성과 역사적인 소외로부터 구원하는 분임을 밝히는 것이 신론의 긴급한 과제가 되었다.
신론의 역사에서 보면 하느님의 본질을 너무 이성적으로 접근하여 파악하려는 데에서 오류가 생기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느님을 초월적인 힘을 지닌 신적인 존재로 보고, 인간은 그 앞에서 무력한 존재로서 하느님의 처분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모호한 종교적 감성에서 오류가 생기기도 한다. 이교도적 운명 신앙의 배경에서 '숨어 있는 하느님' (Deusabscon-ditus)은 불안과 경악을 자아내는 하느님이라는 의미에서 절대적 능력(potentia absoluta)을 지닌 분이다. 하느님의 자유를 극단화해서 사고하는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s)에서도 이와 유사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사야서 45장 15절에 따르면, 하느님은 드러나지 않게 숨어 있으면서 구원을 베푸는 분이시다. 계시된 하느님(Deus revelatus)은 당신이 정해 놓은 질서에 따라 행동하는 분(potentia ordinata)이므로, 그 마음속을 꿰뚫어 볼 수 없더라도 그분에게 의지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하느님의 계시를 넘쳐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로 확실하게 믿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예정설(豫定說)에 관한 문제와 관련하여 자의적(恣意的)인 하느님 해석으로부터 오는 오류들에 맞서 루터(M. Luther, 1483~1546)는 '십자의 신학' (theologia crucis)을 통하여 하느님의 마음에 다가가고자 하였다. 루터는 불신앙은 십자가에 못박힌 분 안에서 하느님의 분노를 보지만, 신앙은 계시된 하느님 사랑의 증거를 본다고 하였다.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자기 능력에만 의존할 때 엄습해 오는 불안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삼위 일체인 하느님은 인간의 자립성을 위협하는 제한을 의미하지 않고,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무한한 사랑이다.
다신론과 범신론의 극복 : 역사적으로 가장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종교관으로 다신론(polytheismus) 들 수 있다. 이러한 신 표상은 그리스도교 영역 안에서 혼합주의적인 종교관 형태로 살아 있다. 그리스도교적 신론은 여러 신적 원리들의 모순성에 대하여 철학적으로 지적해야 한다. 또 '우상 숭배' (이사 44장 : 지혜 13-15장)에 대한성서의 비판에 입각해서 모든 다신론에는 종교적인 근본 오류, 즉 인간이 세속적 가치들을 절대화할 때 자신의 불안 표상들과 소원 표상들을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숨어 있음을 밝혀 내야 한다. 하느님의 유일성에 대해 일신론적으로 고백하는 경우, 있는 힘을 다해 한 분의 선한 하느님을 섬기게 된다. 인간은 자기 마음을 두고 있는 그 현실이 곧 그에게 '하느님' 이 된다는 점을 루터는 지적하였다. 이것은 인간은 누구나 초월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말해 주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하고 있듯이 이러한 초월 관계성은 다신론적 종교들안에서도 이미 참된 하느님에 대한 추구를 발견할 수 있는 기반을 제시하고 있다(비그리스도교 2항 ; 교회 16항).
다음으로 극복되어야 할 신 표상은 범신론이다. 범신론적인 사고가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이유는 모든 사물들이 궁극적으로 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사상, 그리고 이 일체성 안에 모든 것이 하나가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 역시 하느님의 유일성을 해치지 않는 한 그리스도교적 신론 안에 수용될 수 있다. 하느님은 "전부이다"(집회 43, 27). 따라서 하느님은 당신의 생명을 표현하기 위해 세상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고유성을 인정해 주신다(하느님의 초월성). 뿐만 아니라 인간은 그분 안에서 움직이지만 그분안에 용해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다(하느님의 내재성). 유비를 통해서 하느님의 이 초월성과 내재성이 중재되고 범신론적인 표상들이 극복될 수 있다.
구원 경륜과 삼위 일체론 : 그리스도교적 신론은 하느님에 관한 계시 내용의 해석이어야 한다. 계시 내용의 중심은 하느님이 모든 인간의 창조주요 구세주라는 사실이다. 역사 안에서 이루는 하느님의 구원 활동 안에서 사람들은 그분이 내면적으로 어떤 존재인지를, 즉 사랑(1요한4, 8)임을 체험한다. 결국 그리스도교적 신론은 '구원 경륜' (οικονομία)과 '신학' 이라는 두 전망이 결합되어 완성되는 것이다. 우선 하느님의 창조 활동과 구원 활동은 그분의 존재와 신원(身元)을 밝혀 주며, 동시에 하느님의 위격에 대한 인식이 깊어짐에 따라 세상의 역사와 삶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이 더욱 명백하게 드러난다. 신약성서는 구원 경륜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하느님의 창조 활동을 포함한 목적이 뚜렷한 구원 활동을 표현하였다(에페 1, 10 ; 3, 9). 그리고 이레네오(130~200)는이미 이 개념을 기초로 전체 신학을 구세사적으로 정리하였다. 하느님의 역사적 활동에 대한 서술은 하느님의 내적인 신비를 가리키는 특별한 의미의 '신학' 으로 표현되는 두 번째 전망을 이끌어 낸다.
'신학' 은 '구원 경륜' 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되지만, '구원 경륜' 은 '신학' 을 통해서 밝혀져야 한다. 여기에서 연결 고리가 되는 것은 창조와 구원의 중보자로서 그리스도의 구원 경륜적 위치이다. 이 위치는 하느님-세상의 관계 안에서만 그 의미를 다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내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선물인 성령과 다른 두 위격들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도 제기된다. 그래서 교부 시대 신론의 중심에는 삼위 일체교리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삼위 일체 교리가 그리스도교적 신론의 특수성이라고 할 때, 이것이 구약성서의 일신론과 일치한다는 점을 제시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오히려 삼위 일체 교리가 구약성서의 일신론의 가장 내면적인 경향을 밝혀 주고 완성하고 있다는 점을 제시하여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신론의 전체 역사 안에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어 오는 과제이기도 하다.
수많은 근대의 도전들에 직면해서 세상의 원인으로서의 어떤 최상의 존재에 대한 이론적이고 피상적인 증명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된 시대에, 신론은 하느님이 인간들을 위해 애쓰는 그 역사의 무대 안으로 들어와 있음을 말해 줄 수 있어야 한다(사목 19~22항). 신비로이 활동하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신앙의 자유로운 응답으로 이해하고 정립할 수 있는 그만큼, 우리는 하느님의 하느님다움을 더 가깝게 사고할 수 있다. 신론은 인간의 체험들만으로 만족해서는 안되고 그 중심을 그리스도 사건 안에서 찾아야 한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다가오는 길은 곧 예수 그리스도임을 인식하여야 하고, 따라서 신론은 그 뿌리에서부터 삼위 일체적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론적인 교의가 신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예수가 자신의 삼위 일체적 위격 고유성 안에서 아들로서 아버지를 계시하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참 인간인 예수 자신에게 있어서도 끝이 없는 신비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한 인간으로서 이 신비를 신뢰와 사랑의 일치 안에서 인간적으로 대면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인간이 성령 안에서 아버지에게로 가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 교의 신학 ; 삼위 일체 ; 신학)
※ 참고문헌  G. Gutiérrez, 황종렬 역, 《생명이신 하느님》, 분도출판사, 1994/ 심상태, 《續 그리스도와 구원》, 성바오로출판사, 1984, pp. 15~169/ 이제민, 《우리 아버지 하느님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성서와 함께, 1998/ G. Hasenhiittl, 심상태 역, 《하느님-과학 시대를 위한 신론 입문》, 성바오로출판사, 1983/ 한국사목연구소 편, 《신관의 토착화》, 사목 연구 총서 7,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1995/ W. Breuning, 《LKD》, pp. 229~231/ 一, 3, pp. 923~927/W. Kasper, Der Gott Jesu Christi, Mainz, Matthias-Grünewald, 1982. 〔金榮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