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양요 辛未洋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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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4월 조선 원정에 나선 기함 콜로라도호(완쪽)와 지휘관들과 강화도 상륙 작전 회의를 하는 로저스 제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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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4월 조선 원정에 나선 기함 콜로라도호(완쪽)와 지휘관들과 강화도 상륙 작전 회의를 하는 로저스 제독.

1871년(고종 8)에 미국의 아시아 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한 사건. 미국 정부는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 사건을 계기로 포함 외교(砲艦外交)를 앞세워 조선을 개항시키고자 하였으나, 조선이 순순히 응하지 않자 도발을 자행하여 조선군이 미국 함대에 포격을 가하게 만들었다. 그런 다음 조선군의 선제 공격을 문제 삼아 반격을 가하여 군사 시설을 파괴하고 광성보(廣城堡)를 일시 점거하였다가 자진하여 물러간 뒤 외교적 교섭을 벌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의 완강한 쇄국 정책에 부딪혀 미국 군대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물러가고 말았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그 진상 조사〕 1866년(고종 3)에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에 이르러 통상(通商)을 요구하였는데, 영국의 메도우즈 상사(Meadows andCompany)가 빌린 미국 국적의 이배에는 선주 프레스턴(W.B Preston) 등 미국인 3명과 통역을 담당한 프로테스탄트 선교사 토머스(Robert JermainThomas) 등 영국인 2명을 비롯하여 중국인 13명, 흑인 2명 등 모두 19명이 타고 있었다. 전에 이미 조선 포교의 꿈을 품고 조선어를 익히고 조선 해역을 순방한 일이 있는 토머스는, 단순히 통역에 그치지 않고 조선과의 접촉을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병인박해(丙寅迫害) 등을 거론하며 조선에 위협을 가하는 등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때문에 조선은 제너럴 셔먼호가 영국 혹은 프랑스 국적의 선박이라고 오해하게 되었다. 이들은 또 평안 중군(平安中軍)을 납치하는가 하면, 식료를 약탈하고 많은 인명을 살상하였으며, 철수하는 대가로 많은 미곡· 금 · 은 · 인삼을 요구하는 등의 난동을 부렸다. 그러다가 현지 관민들의 화공(火攻)을 받아 침몰하였고, 승무원도 모두 살해당하였다.
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병인박해 때 조선을 탈출하여 중국으로 간 리델(F. Ridel, 李福明) 신부에 의해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 소식을 접한 북경 주재 미국 공사 벌링게임(Anson Burlingame)은 영국 · 프랑스와 공동으로 조선 원정을 단행할 것을 본국에 제안했다. 그러나 미국 존슨(Andrew Johnson) 행정부의 슈어드(W.H. Seward) 국무 장관은 벌링게임 공사의 제안을 수락하지 않았다. 이에 벌링게임 공사는 청나라 총리아문(總理衙門)을 통하여 조선측에 생존 승무원이 있으면 돌려보내 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미국의 아시아 함대 사령관 벨(H.H. Bell) 제독에게 전함을 파견하여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게 하였다.
벌링게임 공사의 요청을 받은 벨 제독은 중국 전통 문화에 남다른 인식을 갖고 있던 와추세트(Wachushett)호의 함장 슈펠트(Robert W. Shufeldt)에게 사건 진상 조사 임무를 맡겼다. 슈펠트 함장은 1866년 12월 황해도 장연에 도착하여 <장연 현감에게 보내는 편지>와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달하였다. 이들 서한은 조선이 서양 관원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접수한 문서 가운데 최초로 예의를 갖춘, 즉 외교적 수사를 사용한 문건이었다. 이전에 평안도 지역에서 조난되었다가 구조된 서프라이스(Surprise)호의 매케슬린(McCasin) 선장과 조선에서 탈출한 프랑스 신부들로부터 관련 정보를 사전에 치밀하게 입수한 슈펠트는 미지의 국가 조선을 하나의 주권 국가로 인정하고 그에 걸맞은 격식을 차렸던 것이다. 그러나 슈펠트는 섬 주민들로부터 "제너럴 셔먼호는 조선측의 항의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선원들이 불법적으로 상륙하여 불법적 폭력 행동을 자행하자 이에 격분한 조선 군민의 습격을 받아서 살해되었으며, 이 같은 일은 당국으로서도 제어할 도리가 없었다" 라는 말을 듣고, 조선 국왕의 회답을 받지 못한 채 1주일 만에 중국으로 돌아갔다.
슈펠트와 동행했던 중국인으로부터 서양인 2명과 중국인 2명이 조선에 생존해 있다는 소문을 전해 들은 미국은 다시 셰넌도어(Shenandoah)호의 함장 페비거(J.C.Febiger)를 보내 진상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이에 1868년(고종 5) 3월 대동강 하구에 도달한 페비거 함장은 삼화 부사(三和府使)를 통하여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달하였고, 이에 대해 조선측에서는 직접 대원군 봉서 (大院君封書)를 전달하였다. 그러나 대원군 봉서에 만족하지 않은 페비거 함장은 평양에 서양인 2명과 중국인 2명이 억류되어 있다는 소문을 확인하고자 조선의 승인도 없이 군함을 이끌고 평양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침략 행위를 자행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그 소문을 최초로 발설한 김자평(金子平)을 잡아다가 대질 신문해서 미국이 전해 들은 것이 헛소문이었음을 확인해 주었다. 결국 페비거도 제너럴 셔먼호 승무원들은 모두 살해되었으며, 그 까닭은 그들이 한국인들에게 성급하고 난폭하게 행동한 데 있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중국으로 되돌아갔다.
〔신미양요의 전개 과정〕 페비거가 조선에 왔다 간 후 미국에는 존슨 정부를 대신해서 그랜트(Ulysses Grant) 정부가 들어섰고, 북경 주재 공사도 로우(Frederich F. Low)로 바뀌었다. 그리고 새 정부의 국무 장관 피시(Hamilton Fish)는 상해 총영사 슈어드(George F. Seward)의 제안을 받아들여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과 조난 선원 구휼 협약을 체결하되 가능한 한 조선과 통상 조약을 체결할 것을 결정하였다. 또 이를 수행하기 위해 로저스(John Rodgers) 제독이 인솔하는 아시아 함대를 동원하되 협상은 문관인 로우 공사가 담당하게 하였다. 이는 일본을 개항시킨 페리(Matthew C. Perry) 제독의 포함 외교를 본뜬 것이었다.
로우 공사는 아시아 함대의 출발과 조선 방문 목적 등을 담은 공한(公翰)을 청나라를 통해 사전에 조선 정부에 전달하였는데, 그 내용은 조선과 조난 선원 구휼 협정을 맺기 위하여 미국의 공사를 파견할 것이니 조선은 고위 관료를 선임해서 국경에서 협상을 갖자는 것이었다. 1871년 4월 군함 5척으로 구성된 미국 함대가 조선 해안에 정박하자, 미국 선박이 올 것을 예상했던 조선 정부에서는 유원지의(柔遠之義) 즉 먼 데서 온 사람들에게 최대한 관용을 베푼다는 원칙에 따라 이들을 접대하기 위해 3명의 관원을 기함(旗艦) 콜로라도(Colorado)호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로우 공사는 조선 관원들의 직급이 낮고 정부의 신임장을 휴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내세워 접견을 거부하고 드루(E.B. Drew) 서기관에게 대신 접대하게 하였다. 드루 서기관은 미국 특사인 로우 공사와 대등한 고위 관료를 파견할 것과 로우 공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미국의 소형 함정이 탐측(探測) 작업을 전개할 수도 있음을 통고하였다.
다음날 미국은 일방적으로 소선 4척과 포함 2척을 동원하여 염하(鹽河) 일대를 측량 · 정찰하였다. 함대가 염하를 측량한 뒤 손돌목을 지나 광성보로 나가려고 하자 연안을 경비하고 있던 우리 포대에서 포문을 열고 공격하였고, 덕진진(德津鎮)과 초지진(草芝鎮)에서도 합세하였다. 조선군은 200여 발의 포탄을 미국 탐측 함대에 집중 포격하였지만, 미국 함정은 한 척도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단지 2명의 부상자만 냈을 뿐이었다.
손돌목 포격 사건 뒤 로우 공사는 해변에 꽂아 둔 장대에 미국 군함의 탐측 항행의 정당성과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진상 규명을 비롯한 조난 선원 구휼 문제를 위한 협의의 필요성을 강조한 편지를 매달아 두었다. 이에 조선정부는 강화도 진무사(鎭撫使) 정기원(奠岐源)의 명의로 작성한 문서를 통하여 우리 영토를 불법 침입한 것을 문책함과 동시에 통상 조약 교섭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로우 공사는 드루 서기관의 이름으로 된 반박서를 보내 무단 공격의 책임은 조선 군민의 망동에 있고 3~4일 내에 협상할 뜻을 보이지 않으면 자유 행동을 취할 터이니 각오하라고 협박하였다.
조선측에서 협상의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자 로우 공사는 무력 행사가 불가피하다고 보고 무력 공격을 단행하였다. 미국군은 초지진과 덕진진을 차례로 점령한 뒤 진무 중군(鎮撫中軍) 어재연(魚在淵)이 경군(京軍)을 거느리고 엄중히 수비하고 있는 광성보를 함락하고 성조기를 내걸었다. 어재연이 거느린 군사들은 필사적으로 항전하였으나 절대적인 화력의 열세로 완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미국군은 전사자 3명과 부상자 10명의 피해를 입었지만, 조선군은 전사자 350명에 부상자 20명의 피해를 입었다. 이 승리로 조선측에 대한 당초의 계획, 즉 위협과 보복이 달성되었다고 보고 미국군은 하루를 더 머무른 뒤 광성보에서 자진 철수하였다.
비록 전투에서 졌지만 조선 정부는 지구전을 전개할 경우 끝내 미국군을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민심을 결속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였다. 우선 결연한 척화(斥和) 의지를 담은 국왕의 교서(敎書)를 전국에 반포하여 민심을 단결시킨 다음, 서울의 종로와 8도 각 지역에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으면 곧 화의인데,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이라는 글자를 새긴 척화비(斥和碑)를 건립하여 척화 사상을 고취시켰다.
조선 정부는 패전에 당황하여 곧 어떤 의사 표시를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로우 공사에게 도리어 미국의 강화도 상륙 작전을 비난하는 부평 부사(富平府事) 이기조(李基祖) 명의의 공문을 보냈다. 이에 대해 로우 공사는 드루 서기관 명의의 답서를 보내 부평 부사의 주장을 반박하고, 아울러 조선 국왕 앞으로 보내는 공한을 전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기조는 자기는 일개 지방관으로서 로우 공사의 문서를 국왕에게 전달할 자리에 있지 않다고 하면서 공한 수리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드루 서기관에게 보낸 마지막 답신에서 손돌목 포격은 불법 침입한 외국 군함에 대한 조선의 정당한 조처였고, 이에 대해 조선측이 유감의 뜻을 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강화도 상륙 작전을 감행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아울러 로우 공사가 조선 국왕과 동등한 자격으로 편지를 보낸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며, 조난 선원 구휼은 그 동안 조선 정부가 변함없이 시행하던 원칙이므로 새로운 조약 체결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 정부는 외교 교섭에 응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또 로우 공사와 로저스 사령관은 당시의 보유 병력으로 대규모의 군사 행동을 강행할 처지에 있지 않았고, 그러한 행동은 본국 정부로부터 받은 훈령에 벗어난 일이었다. 그래서 드루 서기관의 이름으로 이기조에게 공문을 보내 조선측이 외교 교섭의 책임을 갖고 있는 특사의 접견을 거절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밝히고, 장차 미국 국민이 조선 내에서 조난되었을 경우에는 구조 · 보호해 달라고 요청한 뒤 다음날 아시아 함대를 이끌고 조선 해역을 떠나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소식이 서울에 알려지자 관민들의 의기는 충천하였고 배외 의식도 강해졌다.
〔천주교 박해〕 신미양요의 발발로 인하여 대원군의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네 번째의 큰 고비를 맞게 되었다. 강화도 전투에서 화력의 열세로 완패를 당한 뒤 대원군은 서울 종로와 8도 각 지역에 척화비를 건립하여 척화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미국 함대가 떠나간 뒤인 5월 24일에도 고종은 좌 · 우포도 대장(左右捕盜大將)에게 교서(敎書)를 내려 천주교 신자들을 더욱 남김없이 잡아죽이도록 명하였다. 이러한 교서에 따라 미국 함대가 떠나간 후에도 천주교 신자들이 잡혀 좌포도청에서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박해의 추세는 이듬해 말까지 이어졌다. 그리하여 1871년부터 1872년까지 2년 동안 체포된 신자들의 숫자는 <포도청 등록》(捕盜廳謄錄)과 《일성록》(日省錄)등에 수록된 것을 기준으로 해볼 때 63명에 달하였다. 1871년에 39명, 1872년에는 24명이 체포되어 형벌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전과 같이 지방 관아에 의해 신자들이 체포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조야(朝野)의 상소에 따라 1873년 12월 24일(음 11월 5일) 대원군이 정계에 서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親政)을 시작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거의 끝을 맺게 되었다.
〔병인양요와의 차이점〕 신미양요는 병인양요(丙寅洋擾)와 마찬가지로 포함 외교를 구사하는 자본주의 열강이 군함을 앞세워 불법적으로 조선의 영토를 강점한 침략이었지만, 서로 다른 점도 있었다. 첫째, 조선의 영토를 강점한 후 조선군이 최후 통첩을 보낸 이후에나 자신들의 목적을 알린 프랑스군과는 달리, 미국군은 출발하기 이전에 중국을 통해서 조선 정부에 자신들이 조선에갈 것임을 알렸다. 둘째, 조선 영토에 장기 주둔하고 강화도 내의 비전투 시설 등에 대해 약탈 · 파괴를 일삼은 프랑스군과는 달리, 미국군은 광성보를 점령하여 일시 성조기를 게양하기도 하였지만 즉각 철수했고 공격도 전투 시설에 한정되었다. 셋째, 병인양요를 계기로 조선과 비우호적인 실질 관계로 악화되었고, 이후에도 이러한 관계를 해소할 의도가 없었던 프랑스와 달리, 미국은 비록 신미양요를 거쳤지만 조선과 비우호적인 관계는 원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이러한 차이로 말미암아 신미양요가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과 미국의 관계는 비우호적인 관계로 악화된 것이 아니라, 신미양요 과정에서 양국이 공식 문서를 교환함으로써 실질 관계는 더욱 진척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진척된 실질 관계 바탕 위에서 조선은 서양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최초로 미국과 1882년(고종 19)에 조미수 호조규(朝美修好條規)를 체결하였던 것이다. 이때 파견된 미국의 전권 대신은 서양 관원이 조선에 보낸 공식 문건 중에서 최초로 예의 있는 문서를 작성했던 슈펠트였다. (⇦ 제너럴 셔먼호 사건 ; → 병인박해 ; 병인양요 ;척화비)
※ 참고문헌  《捕盜廳謄錄》/ 《日省錄》 金源模, 《近代韓美交涉史》, 弘盛社, 1979/ 송병기, <쇄국기의 대미 인식>, 《한국인의 대미인식》, 민음사, 1994/ 延甲洙, <大院君 執權期(1863~1873) 西洋勢力에 대한 대응과 軍備增强〉, 서울大學校 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998/李光麟, 《韓國史講座》 V (近代篇), 一潮閣, 1982/ 柳洪烈, 《高宗時代西學受難의 研究》, 乙酉文化社, 1962. 〔徐鍾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