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주의 또는 신비 사상의 내용들을 신학적으로 다루는 신학의 한 분야. 신비 신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영성 생활의 회심에서 시작하여 관상을 거쳐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전 과정을 다룬다.
〔기원과 변천〕 이 용어가 처음으로 발견된 것은 4세기에 안치라(Ancyra)의 주교 마르철로(Marcellus, +374)의 저서에서였다. 그리고 5세기 요한 그리소스토모(347~407)의 제자였던 은수자 마르코(Marcus Eremita)의 작품과 6세기 초 아레오파지타의 디오니시오(Dionysius Areo-pagita)의 저서 《신비 신학》(Περί Μυστικής Θεολογίας)통하여 서방 교회에 도입되었다. 신비 신학을 하느님과의 일치를 통하여 얻은 하느님에 대한 매우 친숙하고 감추어진 거룩한 지식으로 본 디오니시오는, 그 지식이 오직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파악될 수 있는 지식이나 일반적으로 신앙에 대해서 가르치는 통상적인 이론보다 우월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본래 이 용어를 그노시스(gnosis)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한 듯하다. 따라서 종교적이며 비밀스런 어떤 개념과는 다른 요소, 즉 직관적이며 경험적인 지식의 요소가 이 용어의 의미에 덧붙여진 것 같다.
그 후 차차 그 의미가 변화되어 관상(觀想, contemplatio)이란 용어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또 이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등장하였는데, 이 작품들은 내용 면에서 추상적이고 학문적인 경향을 띠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디오니시오의 저서들을 통해 알려진 신비 신학이라는 용어가 라틴어로 유입되어 중세 신학자들에 의해 빈번히 사용되었고, 점차적으로 신학자들의 작품에서 기도 특히 관상 기도의 결과인 하느님에 대한 신비스러운 지식과 관련된 신학의 분야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하느님에 대한 지식 자체를 연구하는 실천 신비 신학(practical mystical theology)과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변 신비 신학(speculative mystical theol-0gy)으로 나누어졌다. 이러한 학문적인 체계화에 기여한 대표적인 인물 제르송(Jean Le Charlier de Gerson, 1363~1429)은 신비 신학의 이 두 분야에 대해 명확하게 정의를 내렸다. 그리고 14세기에 와서 신비 신학은 영성 신학(靈性神學, theologia spiritualis)과 분리되어 독립적인 신학의 한 분야가 되었다.
〔범위와 주제〕 수덕 신학과의 관계 : 수덕 신학은 전통적으로 정화와 조명의 길을 다루고, 신비 신학은 신비적인 현상이나 예외적인 은사의 여러 가지 현상들을 다룬다고 보아 왔다. 일반적으로 현대 신학자들도 신비 신학을 수덕 신학과 분리하여 다음과 같이 연구의 범위를 제한하고 있다. 첫째는, 주입 관상(注入觀想, contemplatioinfusa), 수동적 정화(受動的淨化, passiva purgatio) 그리고 변형 일치(變形一致, transfomatata unitas)의 단계를 연구한다. 둘째, 예외적 은총의 결과인 주입 관상과 가끔 이와 동반하는 부현상(副現象, epiphenomenon)들에 대하여 연구한다. 셋째, 일치의 길을 연구한다. 그러나 정화와 조명의 길은 수덕 신학의 분야로 남겨 둔다. 넷째, 성령의 은사를 받아 활동하는 영혼의 수동성을 연구한다. 신비 신학과 수덕 신학은 상호 연관성이 깊고 서로 일치할 때가 많지만, 신비 신학은 지속적으로 수덕 생활을 하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신비 현상들은 지속적으로 수덕에 정진하지 않으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으며, 수덕 생활에 정진하는 이는 어느 정도 신비 현상을 체험한다.
수동적 정화와 완덕의 길 : 신비 체험은 성령의 은사와 깊은 내적 기도 그리고 비정상적인 현상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리고 신비 신학에서 이를 다루는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깊은 내적 기도를 통하여 얻어지는 신비체험인 '수동적 정화' 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완덕에 초대를 받고 있다. 그리하여 정화와 조명과 일치의 길을 통하여 지상에서 최고의 단계인 변형 일치에 이른다.
이를 흔히 '영적 혼인' (spiritual marriage)의 단계라고 한다. 여기에 이르기 위해서는 수동적 정화 과정인 감각의 밤과 영(靈)의 밤을 거쳐야 하는데, 신비 신학에서 주로 다루는 것도 이 단계들이다. 이에 대하여 자신들의 체험을 바탕으로 상세히 기록하여 전해 준 이들로는 십자가의 성 요한(Joannes a Cruce, 1542~1591)과 성녀 아빌라의 데레사(Theresia ab Avila, 1515~1582)를 들 수 있다.
성녀 데레사가 체험한 다섯째 · 여섯째 궁방(宮房)에 해당되는 것으로 수동적 정화에서 이루어지는 감각의 밤과 영의 밤은 그리스도인들이 상대적인 완덕에 도달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변형일치' 가 이루어지는 일곱째 궁방과 성덕의 절정인 영적 혼인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나 예외 없이 거쳐야 한다는 것이 신비 신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이를 매우 강조한 이유는, 본질상 영혼이 자신의 모든 약점과 비참한 것들을 완전히 정화하기 전에는 하느님과 결합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정화는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수동적 정화에 대해서는 고정된 규정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하느님과 맺는 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오로지 하느님의 인도함에 달려 있을 뿐이다. 그리고 완전한 정화를 거친 이후에야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룰 수 있고, 그 과정은 길고도 두려운 시련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 따르면 이는 단순히 정화라기보다는 욕망의 정화나 제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감성 면의 결함과 무질서는 모두 영에 그 힘과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고 나쁜 습성들이 뿌리째 정화되기까지는 감성의 반란과 사악이 잘 제거되지 않는다(《어둔 밤》 제2 · 3편). 이러한 정화의 과정이 영의 밤에서 얻을 수 있는 고유한 효과이다.
성녀 데레사는 《영혼의 성)(Las Moradas o Castillo Interior,1577)에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수덕적 단계와 신비적 단계를 상세히 기술하였다. 신비적 단계는 주입 관상에서 변형 일치의 기도까지인데, 넷째 궁방에서 이 신비체험이 시작된다. 이때의 기도는 초자연적인 기도로서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움으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위로부터 오는 힘이 있을 때 이 기도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정적(靜寂, quietas)과 잠심(潛心, recollectio)의 기도가 일어난다.
정적의 기도는 주로 의지(意志)에 영향을 미친다. 이 기도를 통해 의지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친밀한 인식에 사로잡히게 되고, 육신은 형언할 수 없는 감미로움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어 관상적 침묵과 휴식을 취하게 된다. 하지만 다른 기능들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어 열성적으로 생활을 할 수 있다. 영적으로 큰 자유를 누리며 하느님에 대한 자녀다운 경외심과 효성스러움을 지녀 죄를 피하고, 하느님을 향한 신뢰심이 강하게 일어난다. 또 극기와 고난을 사랑하며, 깊은 겸손과 현세적 쾌락을 무시하는 마음이 생겨나며, 모든 덕행에 성장하는 효과를 누리게 된다. 한편 잠심의 기도는 주로 지성(知性)에 영향을 미치며 이 영향을 받은 지성은 다른 기능으로부터 멀어져 오직 하느님 안에만 잠기게 된다. 이런 영혼 안에서는 다음과 같은 현상들이 일어난다. 첫째는 감사로, 하느님께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감사는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가짐을 보다 깊게 넓혀 준다. 둘째, 생각을 적게 하고 주님의 현존 안에 잠기면서 깨어 있도록 청원의 기도를 드린다. 셋째,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나 조용하고 평화스러우나, 고통스러운 것은 이기심과 인간의 노력이 가미된 것이므로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맡긴다. 넷째, 영혼은 하느님의 영광만을 앞세우고 자신의 이익이나 취미는 포기한다.
이 단계를 거친 영혼은 한 단계 높은 다섯째 궁방으로 넘어가 하느님과의 합일(合一, commumio)이 이루어지는 주입 관상 기도의 단계에 들어간다. 여기서는 기억과 상상을 포함한 모든 내적 기능이 점차적으로 하느님에게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외적이며 신체적인 감각들은 자유롭게 활동한다. 이어서 영혼은 영적 약혼이 이루어지는 여섯째 궁방에 들어가게 된다. 이 단계에서 하느님이 영혼을 더욱더 지배하여 당신의 빛과 위로로 충만하게 해주면 영혼은 탈혼(脫魂)의 경지에 몰입되어 수동적 정화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제 영혼은 자신의 수행으로는 불가능하여 하느님의 몫으로 남겨 놓은 큰 시련과 고통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른 영혼은 오직한 남성에게만 마음을 두고 있는 처녀가 다른 남성들을 조금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처럼 어떠한 희생과 고통이 뒤따른다 해도 한 번 마음에 둔 그 사람과 결혼하기만을 고대하므로 그 증표로서 하루빨리 약혼하기를 원한다. 이런 영혼에게는 육체의 병이나 타인에게서 오는 속임수, 온갖 험담, 박해, 심지어는 고해 신부로부터 받는 수모도 있으나 마지막 일곱째 궁방에 들어가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자 소원이므로 그 모든 것을 인내하며 참아 낸다. 이때 영혼은 기도 중에 황홀감을 맛보기도 하고 말씀(locutio)이나 현시(visio)와 같은 여러 가지 신비 현상을 동시에 체험하기도 한다. 이어서 영혼은 마지막 방인 일곱째 궁방으로 안내된다. 이 방에서 영혼은 그토록 고대하던 소원이 이루어져 사랑 자체인 하느님과 영적 혼인을 한다.
임금이 있는 그곳은 제2의 천국이며 두 개의 촛불이 하나로 결합되는 곳이다. 빗방울이 강물에 떨어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듯이 하느님 안에 몰입되는 영혼도 그와 같이 되어 버린다. 성녀 데레사는 자신의 체험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영혼이 느끼는 흐뭇한 기쁨은 하느님 곁에 있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단 하느님이 영혼을 당신께 합쳐 주시면 모든 능력이 마비되기 때문에,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영혼의 성》, 제7 궁방 1, 5). 여기서 온전한 일치 즉 감히 필설로는 표현할 수 없는 변형 일치가 이루어지며, 영혼은 완전한 행복과 평화를 누리게 된다. 이는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단계로서 장차 천국에서 누릴 지복 직관(至福直觀, visiobeatifica)의 상태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의 높은 단계가 있을 수 없는 그런 상태이다. 여기서 영혼은 삼위 일체 하느님을 지적(知的)으로 직관하고 상호 통교(相互通交)를 나누며 인성(人性)을 갖춘 그리스도와 직접 상봉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상태는 이제까지 신앙으로 믿어 온 바를 깨달음으로써 직접 알게 되는 그런 상태인 것이다. 여기서 영혼은 모든 고난과 눈물이 기쁨으로 변화되는 것을 실감하면서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가는 그리스도교의 중심 사상을 깨닫게 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사로잡혔던 사도 바오로처럼 "나는 살아 있지만 이미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십니다"(갈라 2. 20)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성녀 데레사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나에게는 사는 것이 곧 그리스도이고 죽는 것이 이익입니다"(필립 1, 21)라는 성서 구절을 인용하였다. 이런 체험을 하는 영혼은 하느님이 만물의 주재자임을 신앙으로 알뿐 아니라 실제 체험을 통하여 깨닫기 때문에 "아, 내 생명의 생명이시여! 이 몸을 받치는 받침이여"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
이제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언(요한 17,20-23)을 깨달아 삼위 일체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된다. 뜨거운 사랑의 정신으로 불붙은 영혼은 자신을 전적으로 사랑의 제물로 바치게 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로서 사도직에 몰두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관상과 활동은 양분될 수 없으므로 주님과 일치하여 살아가는 영혼은 겸손과 사랑으로써 공동체를 위하여 전적으로 봉사의 삶을 살게 된다. 다시 말해서 주입 관상에서부터 신비적 체험이 일어나 순응 일치와 변형 일치의 기도 단계로 상승하는 것은 사랑 자체인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최고 행위 내지는 극치라고 할 수 있다. 그 자체가 하느님의 은총이므로 이 세상에서도 천상 영광(지복 직관)을 미리 맛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Hipponensis, 354~430)는 이를 본고향에 이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1고린 13, 12) 상태이며 그분을 닮아(1요한 3, 2)완덕의 보편적 초대(마태 5, 48)가 성취되는 상태이다. 동시에 사도 바오로가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를 원하니···(필립 1, 23-25)라고 한 상태이다. 그러므로 이 상태에서는 인간의 이상과 염원인 행복이 완전히 충족된다.
비정상적인 신비 체험과 식별 : 성령의 은사들(1고린 12장)과 비정상적인 현상들도 신비 신학에서 다루어지는데, 이 현상들은 신비가들에게 종종 일어날 수 있는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비정상적인 현상을 의미한다. 그 자체가 성화 은총과 덕행 및 성령의 선물과는 다른 초자연적인 원인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 이러한 현상들은 정상(正常)에 버금가는 현상(paranormalis manifes-tatio)이거나 부현상에 속한다. 또 이러한 현상들은 비정상적인 은총으로서 타인의 선익을 위해 주어지거나 교회의 사명을 이루고자 하느님이 어떤 신비가의 성덕을 탁월하게 공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식별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 de Loyola, 1491~1556)는 《영신 수련》(靈身修鍊,Exercitia Spiritualis)에서 선신과 악신의 식별에 대하여 많은 언급을 하였는데, 십자가의 성 요한이나 성녀 데레사도 이 점에 있어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교회 안에서도 종종 논란이 되어 온 사적 계시(revelatio privata)와 연관되어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영의 식별이 필요하며,어떤 경우에는 악령의 작용이나 인간적 영(human spirit)이 선을 가장하여 출현해 사람들을 충동질하기 때문에 더욱 영의 식별이 필요하다.
영은 하느님의 영 · 악령 · 인간적 영으로 구분되며 각 영의 결과는 다음과 같은 경향이나 결과로 드러난다. 하느님의 영에서 오는 것은 진리 · 신중성 · 계몽 · 순종성 · 분별력 · 겸손 · 평화 · 하느님께 대한 확신 · 순수한 지향 · 극기 · 순박성 · 이기심 없는 사랑 · 그리스도를 모방하려는 열망 등으로 드러나고, 악령으로부터 오는 것은 거짓 · 병적 호기심 · 혼란 · 불안 · 깊은 우울증(의기소침) · 완고함 · 교만과 허영 · 거짓 겸손 · 절망 · 불순종 · 위선 · 감각적 위로에 대한 지나친 집착 · 대의명분을 지나치게 앞세움 등으로 드러난다. 인간적 영은 인간본성을 말하는 것으로, 대개는 자기 만족을 추구하고 굴욕 · 보속 · 포기 · 희생 · 극기 등을 싫어하는 경향이 많으며 자기 중심적이거나 이기적이다.
비정상적인 신비 현상들이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악령중 어디에서 오는지를 정확하게 식별하기 위해서는 신학적인 지식도 중요하지만 영안(靈眼) 혹은 신안(神眼)이 열려야 한다. 영안 그 자체가 하느님의 선물이다. 통상적으로 영의 식별은 결과를 통하여 쉽게 이루어진다(마태7, 15-20). 식별 방법은 신비 현상의 내용이 교리와 윤리에 타당한가, 신비가의 윤리 생활이 정상적인가, 그리고 은사를 받은 사람의 삶에 있어서 진실 · 참된 겸손 · 순종 · 시련과 모함 중에도 강한 믿음과 충실성의 여부 · 거짓 겸손 · 경솔함 · 속임수 · 헌금 강요 등과 신비가의 삶이 기쁨 · 평화 · 사랑 · 정의로운 삶 등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적인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가는가 하는 것 등을 알아보는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인 식별은 교회의 사명을 유권적으로 해석하는 교도권(敎導權)에 의해 이루어진다. → 데레사, 아빌라의 ; 성령의 은사 ; 수덕 신학 ;신비 ; 신비주의 ; 신학 ; 영성 신학 ; 요한, 십자가의)
※ 참고문헌 J. de Guibert, ascetique et mystique, 《DSp》 1, pp. 1011~1014/ 전달수,《신비 체험과 현상》, 가톨릭출판사, 1997/ Jordan Auman,Spiritual Theology, London, Sheed & Word, 1982(이홍근 역, 《영성 신학》, 분도출판사, 1987). 〔田達秀〕
신비 신학 神秘神學 〔라〕theologia mystica 〔영〕mystical 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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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십자가의 성 요한과 성녀 아빌라 데레사는 신비 체험을 상세히 전해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