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 참배 神社參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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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사에 참배하기 위하여 메이지 신사에 모인 일본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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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사에 참배하기 위하여 메이지 신사에 모인 일본인들.

신도(神道)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사(神社)에 참배하는 것. 특히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에게도 신사에 참배할 것을 강요하여 문제가 되었다.
〔신 사〕 신사란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다신교적인 신들을 모셔 놓고 그것을 재장(齋場) · 교장(敎場)의 성스러운 터전으로 믿으면서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신사에서 제사를 지내는 '가미' (神)는 자연신들을 총칭하는 것인데, 가미라는 말은 대개 신적인 존재를 가리키지만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는 성스러운 힘 또는 초월적인 권능을 지니고 있거나 카리스마적인 힘으로 가득한 존재들도 포함한다. 그래서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어떤 것, 즉 인간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하는 자연 현상이나 경이적인 자연물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리고 신화적 인물이나 역사적인 인물, 특히 위인이나 조상의 영(靈)들도 가미로 숭배되었으며, 절대적인 권력을 지녔던 자도 가미로 받들어졌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이것들을 총칭하여 '아호요로즈노가미' 즉 팔십만신(八十萬神) 혹은 팔백만신(八百萬神)이라고 한다.
이런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사는 본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숲이나 산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므로 따로 신전을 만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건축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신체(神體) · 어령대(御靈代) · 신보(神寶) 등을 안치하고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모여서 결재(潔齋)를 하기 위한 건물이 세워졌다. 그 후 전자는 혼덴(本殿)으로 발전하였고, 후자는 하이덴(拜殿)으로 발전하였다. 이외에도 혼덴과 하이덴을 둘러싸고 있는 담과 신역을 표시하면서 그 입구를 나타내는 도리이(鳥居), 신찬(神饌)을 조리하는 미게덴(御饌殿), 신관(神官)들의 사무 처리소인 샤무쇼(社務所) 등 여러 가지 시설이 더해져서 신사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역사적 배경〕 19세기 말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막부 체제(1603~1867)가 무너지고, 고대로의 복귀 즉 왕정 복고(王政復古)를 주장하는 하급 무사 계급 세력이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권을 세운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 일어났다. 이들은 자신들의 취약한 계급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하여 정치적으로는 무력하였으나 일본인들에게는 온화한 가부(家父)였던 천황을 정면에 내세우고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기 위해 신도를 국교화하였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초기부터 강력히 추진된 신도 국교화 정책이 서유럽의 종교 사상 유입과 불교계를 비롯한 종교계의 반발과 저항에 부딪히자, 메이지 정부는 신사 신도(神社神道)의 비종교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즉 1882년 메이지 정부는 "신사 신도는 국가의 제사이며 종교가 아니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신사 신도를 '국가의 제사' 로 규정하여 일반 종교로부터분리시켰다. 즉 제사와 종교를 분리시킨 것이다. 또한 종교성이 분리된 신사 신도를 교파 신도 · 불교 · 그리스도교 등과 같은 종교들을 초월하는 위치에 군림시켰다. 즉 국가 신도로서의 신사 신도는 더 이상 종교에 해당되지 않으므로 정치와 종교의 분리 원칙에는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또 근대 국가 이념으로 문제가 되었던 신교의 자유와 정교의 분리에 대한 비판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신사 참배와 천주교회〕 1910년에 일제가 강점할 당시 한반도에는 약 30개의 신사가 있었는데, 이 신사들은 일본인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으므로 한국인과는 관계가 없었다. 일본에서와 같이 사격(社格) 제도도 없이 산재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사 참배가 한국에서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총독부가 설치되면서 한국인을 제국 신민화하고,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기반으로서 신사 제도를 확립하면서부터였다. 1910년 이후 총독부가 한국에서 추진한 신사 정책은 일본 거류민들이 설립한 기존의 민간 신사를 제도적으로 관 · 공립화하거나 새로이 관 · 국 폐사(官國幣社)를 창설하는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조선 총독부는 1915년 8월 16일 부령 제82호인 <신사 사원 규칙>을 반포함으로써 한국 내 기존의 민간 신사를 제도적으로 관 · 공립화하는 동시에 신사를 '국가의 종사(宗祀)' 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1917년 3월 22일에는 총독부령 제21호로 <신사에 관한 건>을 발표하여 소규모의 신사까지도 보호 · 육성하고자 하였다.
일제는 강점 직후부터 관공서나 각급 학교에 천황의 사진을 배부하고 행사 때마다 경례를 하게 하였다. 또 관 · 공립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신사 의식에 참석해야하며, 관료들은 일과 시작 전에, 군 장교들은 지휘권 행사 전에 신사에 의무적으로 참배해야 한다는 규정을 시달하였다. 일제의 이러한 정책에 대하여 한국 천주교회는 신사에 참배할 수 없다는 입장을 문헌을 통하여 공식으로 밝혔는데, 즉 1923년에 발행된 《서울교구 지도서》(Directorium Missionis de Seoul) 제22항과 1925년에 초판 발행된 《천주교 요리》(天主教要理) 제2권을 통하여 신사 참배를 금지하는 지침을 모든 사제들과 신자들에게 내렸던 것이다. 신사 참배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신앙을 증거했던 사건은 1924년 강경(江景)에서 일어났다. 이것은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에 공식적으로 항거했던 한국 최초의 사건이었다. 1924년 10월 16일 강경공립보통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천주교 학생 전원이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교장의 명에 불복하자 퇴학당하였다. 그리고 신사에는 참석하였지만 절은 하지 않았던 프로테스탄트 학생들은 학교 당국이 신사 참배 거부를 옹호한 여교사 김복희를 퇴직시킨 것에 반발하여 수업을 거부하다가 주동 학생들이 퇴학당하였다.
1925년 10월 25일에 거행된 '조선 신궁 진좌제(鎭座祭)를 전후해서는 대구의 효성여학교를 비롯한 가톨릭계 학교들이 진좌제에 관련된 행사에 불참하였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입장은 1931년에 개최된 한국 최초의 공의회에서도 유지되었고, 이 공의회의 결정 사항을 담아서 이듬해 9월 26일 전국 교구장 공동 명의로 반포된《한국 천주교 공용 지도서》(Directorium Commune Missionum Coreae)에도 나타나 있다. 이 지도서 제466항에서는 신사 참배를 미신으로 규정하고 신자들의 참석을 금지하였다. 하지만 신사 참배에 대한 한국 교회의 반대 입장은 일본 주재 교황 사절과 일본 주교 회의의 결정에 의해 바뀌었다.
일본에서는 1932년 5월에 죠치 대학(上智大學) 학생들에 의해 신사 참배 거부 사건이 일어났고, 한국에서는 같은 해 9월 평양에서 만주 출정 전몰 장병 위령제 참석 거부 사건이 일어나 일제와 교회가 정면으로 대립하였다. 그렇지만 일본의 가톨릭 교회는 신사 문제에 있어 한국 교회와는 전혀 다른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일본의 가톨릭 신자들은 신사 참배를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선량한 일본인' · '훌륭한 애국인' 의 대열에 서지 못하였고 '비국민' 으로 비난받았으며, 신도 의식으로 거행되는 친척이나 동료의 장례식과 결혼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한편 히로시마 대목구장 로스(J. Ross) 몬시놀은 <신사 참배에 참여하는 것에 대하여>(Deommunicatione in Jinja Sam-pai)라는 글에서, 당시 교회법 1258조 2항의 이교 예식에 대한 가톨릭 신자들의 참석에 대한 규정을 근거로 신사 참배를 종교적인 것이 아닌 애국적인 것에 수동적으로 참석하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동시에 그는 신앙 탈선의 위험이 없으며 불참할 경우 불이익을 당하게 되는'중대한 이유' 가 있다고 하였다. 또한 죠치 대학 학생들의 신사 참배 거부 사건을 계기로 발표된 문부성 차관의 성명에 의하면, 신사에 참배하는 것은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애국심과 충성심의 표현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가톨릭 신자들의 수동적인 참석은 묵인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당시 일본 주재 교황 사절이었던 무니(E.F.Mooney, 1882~1958) 대주교는 로스 몬시놀의 글을 일본 제국 내의 모든 교구장들에게 보내어 신사 참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지침이 되도록 하였다.
〔신사 참배 반대〕 로스 몬시뇰의 글에 대해 한국 교회는 선교회에 따라 상이한 반응을 드러냈다. 파리 외방전 교회의 경성 대목구장 뮈텔(G. Mutel, 1854~1933) 주교는 신사 참배를 금지하였던 《천주교 요리》의 같은 항목을 1932년 판에서는 수정하여 신사 참배를 용인한 반면에, 평양 지목구장 모리스(J.E. Morris, 1889~1987) 몬시놀을 비롯한 메리놀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신사 참배를 계속 반대했다. 평양 지목구의 중화 본당 주임 콜만(W.J.Cole-man) 신부는 모리스 지목구장의 허락하에 <신사 참배에 대하여>(De Jinja Sampai)라는 제목의 반대 의견서를 작성하여 무니 대주교에게 제출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종교적 행위에 참여하는 것이 애국심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면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으므로 신사 참배는 용인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종교적인 면과 애국적인 면 사이의 구분을 부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당국자의 성명으로 '새로운 상황' 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 성명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아 신뢰할 수 없으며, 사제들과 외국인들에게는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국민들간에는 초자연적인 개념을 갖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상황' 으로 볼 수 없다고 덧붙였다. 또 애국심 결여로 고발당한다는 로스 몬시 놀의 의견에 대해서는 애국주의와 민족주의가 일종의 종교일 수 있고 애국심은 그 선악이 증명되어야 하며, 가톨릭 신자들이 신사에 참배한다면 이교 신자들이 볼 때 가톨릭이 쉽게 미신을 묵인하는 것으로 비칠 소지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콜만 신부는 '중대한 이유' 에 대해서도 오히려 선교사들이 추방되거나 가톨릭계의 학교가 누리고 있던 특권들을 잃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혹은 그 리스도인들의 생활에 위험이 오기 때문에 신사 참배 거부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냐고 따졌다.
이러한 주장에 따라 1934년 5월 15일 메리놀 평의회회합에서는 학교의 학생들을 신사에 참배시키지 않겠다는 것을 문서화하였다. 평양 지목구의 반대가 계속되자 부담이 커진 평양 지목구장 모리스 몬시놀은 1935년 6월 동경을 방문하여 주일 교황 사절 마렐라(P. Marella)대주교와 면담을 한 뒤, 신사 참배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수정하였다. 그리고 연례 교구장 회의에서 다른 교구장
들과 '애국적 의식' 의 참석에 대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한편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는 1933년 연례 회의에 "동경에서 용인되는 실천 사항들은 한국에서도 용인하도록 하라" 고 결정하면서 로마로부터의 결정이 있을 때까지는 아무것도 공표하지 못하도록 단서를 붙였다.
〔신사 참배의 수용〕 메리놀 외방전교회 부총장 드라우트(J.M. Drought) 신부의 서한에 따르면, 당시 교회에는두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우선 예식들 안에서 애국적인 요소와 종교적인 요소들의 한계를 정확히 구분 짓는 것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일본 의례의 주체들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다른 하나는 종교와 비종교를 구분하는 정확한 기준을 지니고 있지 못한 일본의 관리들이 교회의 신사 참배 거부를 정치적인 문제로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어려움이었다. 그래서 교회는 신사 참배 문제가 신앙의 증거자가 될 만큼 즉 순교를 할 만큼 중요한 가치가 있지 않으며, 일본 제국 내에서 교회의 미래를 바꿀 만큼 중대한 사안이 될 수도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신사 참배 즉 신사에서 신도 의식으로 이루어지는 국가 의식에 가톨릭 신자들은 수동적으로 참배할 수 있다는 결정을 내렸다. 교회의 직권자들은 교회의 참여가 종교적인 것에 대한 참석이 아니라 정치적인 참석에 불과함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1936년에는 포교성성(현 인류 복음화성)에서 훈령 〈플루리에스 인스탄테르궤〉(Pluries Instanterque)를 통하여 로스 몬시놀을 비롯한 일본 주교들과 주일 교황 사절의 견해를 받아들여 '일반의 인식과 관계 당국의 성명' 에 의해 신사 참배가 더 이상 종교적인 특성을 지닌 것이 아니므로 신자들의 수동적인 참석을 허락하였다. 신도 의식으로 이루어지는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의 참석 역시 같은 범주에서 허용되었다. 이 훈령이 발표된 후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는 1936년 6월 12일 대구에서 있었던 회합에서 《한국 천주교 공용 지도서》의 신사 참배 부분을 수정하여 신사 참배를 허용하였다. 그리고 일반 신자들에게는 마렐라 교황 사절의 <국체 명징(國體明徵)에 관한 교황 사절의 감상(感想)〉이라는 글을 통하여, 신사에 참배하는 것은 이교 의식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애국적인 의식에 참석하는 것이라는 교회의 가르침을 전달하였다.
〔평가와 의의〕 포교성성의 훈령 이후 한국 교회는 신사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에 참여하였지만, 이를 거부하다가 구속되거나 직장을 떠난 이들도 있었다. 또한 여러 명의 신부가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가 1944년에 구속되기도 하였고, 병원이나 학교에서 근무하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 가운데에도 신사 참배 문제로 병원이나 학교를 그만두어야 하였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신사 참배와 관련하여 일본인 신자들과 한국인 신자들이 처한 상황과 정서가 달랐으며, 신사 참배에 대한 교회의 결정이 한국 교회를 위한 결정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로 인해 교회가 '친일 행각' 을 했다는 비판과 함께, 민족의 정서를 거스르면서까지 교회를 지키기에 급급하였다는 평을 받게 되었다. 교회 역시 민족이 지배되는 상황에서 억압과 강요를 받은 피해자였다는 견해도 있다. 그렇지만 "민족의 비극에 교회가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못할 때 그것은 곧 교회의 비극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신사 참배가 주는, 민족과 교회와의 관계를 자리 매김하는 교훈일 것이다. (→ 신도 ; 한국 교회사)
※ 참고문헌  Directorium Commune Missionum Coreae Jussu Concilii Regionalis, Nazareth, 1932/ W.J. Coleman, M.M., De Jinja Sampai, 미국 메리놀 본부 문서 보관소, 1934/ J. Ross, De Communicatione in Jinja Sampai, 일본 상지대학 광보과, 1932/ M. Küenburgh, Comprehensive Report on Yasukumi Incident, 4-491, 일본 상지대학 광보과, 1933/ J.Cadars, Petits confesseurs de la foi et cuillerees de riz, Les Mission Catho-lique 58, 1925/ 이정순 엮음, 《목 요안 신부》,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1994/ 정동훈, <일제 강점기하의 한국 천주교회와 신사 참배에 관한 고찰>,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석사 학위 논문, 1994.〔鄭東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