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 로마 제국 神聖 - 帝國 〔라〕Sacrum Imperium Romanum 〔영〕Holy Roman Emp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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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은 카알 대제가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로마인들의 황제' 로 공식 인정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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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은 카알 대제가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로마인들의 황제' 로 공식 인정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현재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중세 유럽에 정치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친 정치 체제 또는 국가.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의 분열로 9세기 초에 세워져 19세기 초까지 약 10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중세 시대 유럽의 통합을 상징하는 보편적 군주국가였으나, 정치 구조의 특수성 때문에 유럽의 지배권을 놓고 교황과 자주 갈등하고 충돌하였다. 이 국가의 명칭은 12세기 중반 이후에 "신성 제국" (sacrum imperium)이라고 불리다가 15세기부터는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이라고 불렸다. 신성 로마 제국은 가톨릭 교회의 도덕적 지원 아래 부활된 로마 제국이라는 뜻으로, 중세 유럽 세계에서 교황권의 세속적 동반자이자 동맹체였다.
〔제국의 성립과 대 이탈리아 정책〕 신성 로마 제국의 기원은 프랑크 왕국의 카알 대제(768~814)가 교황으로부터 '로마인들의 황제' 로 공식 인정을 받은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799년 로마에서 일어난 소요로 교황 레오 3세(795~816)가 곤경에 빠졌을 때, 카알 대제는 소요를 진압하고 교황의 권위를 회복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에 교황은 800년 예수 성탄 대축일의 저녁 기도 때 카알 대제의 머리에 관을 씌우면서 "신에 의해 대관하게된 아우구스투스이며 평화를 가져온 위대한 로마인들의 황제" 라고 선포하였다. 이는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최초의 서방 세계 황제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동시에 게르만족 왕국이 그리스도교 국가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진정한 신성 로마 제국의 성립은 작센 왕조(919~1024)의 제2대 왕인 오토 1세(936~973)에 의해 이루어졌다. 오랜 전투를 통해 많은 강력한 가문들을 누르고 왕권을 확고히 다진 오토 1세는 제후들에게 국가에 대한 봉사와 순명을 강요하였고, 성직자들에게도 왕에게 순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반면에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에게 왕의 땅을 나누어 주었고, 독일 지역의 땅도 교회에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왕국을 통합한 오토1세는 이탈리아 지배 정책에 착수하였다. 10세기 중반 교황을 비롯한 많은 이탈리아인들은 강력한 외부 세력이 나타나 이탈리아 내부의 혼란을 가라앉히고, 마자르족(Magyar)과 사라센(Saracen)의 침략을 막아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이탈리아의 정세가 신성 로마 제국 내부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돌아가자 오토 1세는 이탈리아 원정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951년 제1차 원정 때 '이탈리아 왕' 이라는 칭호를 받은 그는, 새 왕국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961년에 다시 이탈리아를 침입하여 이듬해 로마를 점령하였다. 로마 귀족들의 억압에서 해방된 교황 요한 12세(955~963)는 감사의 뜻으로 그에게 황제의 관을 주었고, 그의 제위는 비잔틴 제국으로부터도 인정을 받았다. 이로써 카알 대제의 전통이 부활하였으며, 진정한 의미의 신성 로마 제국이 성립되었다.
〔제국의 전성과 쇠퇴〕 973년 오토 1세가 사망한 뒤부터 1056년에 이르는 동안 오토 1세의 정책을 계승한 5명의 황제들은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독일 지역에 있어서 제후들의 독립성은 억제되었고, 교회와의 제휴는 잘 이루어졌다. 역대 황제들은 성직자인 가신(家臣)들을 통하여 이탈리아 지배를 확고히 다졌다. 11세기 중반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는 더욱 크게 확장되어 오스트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스위스, 덴마크, 스웨덴, 동프랑스 및 중앙 이탈리아 지역에까지 달하였다. 동쪽으로의 확장도 순조로워 1056년에는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도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에게 대항하는 세력들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먼저 독일 지역의 제후들이 제국의 권위에 도전하였는데, 그들은 토지를 늘리며 농민층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였고, 수도원의 설립을 통하여 로마 교회와의 독자적인 제휴를 모색하였다. 한편 황제의 권한이 점차 약화된 데에는 황제 즉위가 선출제로 이루어지는 오래된 관습에 그 원인이 있었다. 10~11세기에는 역대 황제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선출제 대신 세습제를 수립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도 귀족들은 황제권 및 외세의 지배에 저항하였고, 신흥 상업 도시들은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였다. 이외에도 서쪽의 프랑스 왕과 동쪽의 슬라브 제후들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확장 정책에 대항하였다. 더욱이 11세기 중반부터 13세기까지 황제들은 끊임없이 유럽의 패권을 주장하여 교황권과 충돌하였다.
호엔슈타우펜(Hohenstaufen) 가(家) 출신의 황제들(1138~1254)은 이탈리아의 지배를 둘러싸고 교황과 싸움을 벌여 세력을 탕진하였다. 반면에 역대 교황들의 개혁은 교회와 성직자들이 세속화를 벗어나도록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개혁은 이념적으로는 세속의 지배자가 그 리스도교의 지배자라는 사상에 도전하는 것이었으며, 실제적으로는 성직자 계층과 교회 재산에 대한 세속적인 지배를 반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개혁의 두드러진 최초의 전환점은 개혁 지향적인 황제였던 하인리히 3세(1039~1056)가 독일인 레오 9세(1049~1054)를 교황으로 임명하면서 이루어졌다. 새 교황의 지도 아래 교회의 개혁이 시작되었고, 다수의 개혁 성향을 지닌 성직자들이 로마에 모였다. 이 개혁의 중심에는 1059년 로마 교회의 대부제로 선출된 힐데브란트(HiIdebrand)가 있었는데, 그는 정치력을 발휘하여 개혁을 과감하게 단행하였다. 그 결과 1059년에 개최된 라테란 교회 회의에서는 주교급 추기경들에 의해서만 교황이 선출되도록 하였다. 이로써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추기경단의 결정을 승인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1073년에 힐데브란트가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1085)로 선출되었다. 그는 교회의 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하였으며, 1075년에는 황제 또는 제후들과 군주 등의 세속 지배자들에 의한 성직 서임(聖職敍任)이 불법이라고 천명하였다. 그러나 성직 서임은 예외 없이 교회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 주장은 기존의 봉건 질서에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것이었고, 유럽의 군주들 특히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들과 '성직 서임권 논쟁' (Controversia deinvestituris)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성직 서임권 논쟁과 카노사 사건〕 서임권 논쟁은 독일에서의 황제권 전성기와 교황권 전성기가 중복되는 역사적 전환점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이 당시는 독일에서 봉건 사회의 형성, 즉 독립적인 귀족 세력이 대두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1075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1056~1106)가 성직 서임권을 둘러싸고 충돌한 카노사(Canosa) 사건이 발생하였다. 밀라노 교구장의 임명이 그 발단이었다. 이 주교좌가 이탈리아에서의 황제권 유지를 위해 매우 중요한 자리였으므로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의 주변 인물을 주교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교황은 이러한 조치가 교회법을 위반한 것임을 강력히 경고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이에 불복하자 1076년에 교황은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독일 제후들에게 새로운 황제를 선출하도록 촉구하였다. 곤경에 빠진 황제는 이듬해 1월 북이탈리아의 카노사 성에서 속죄하고 있을때 교황에게 3일 동안 눈 속에서 용서를 청한 끝에 파문을 취소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로 돌아간 황제는 반대 제후들을 진압한 후 군대를 거느리고 침략하여 로마를 점령하고,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였다. 결과적으로 그는 승리했지만, 이후 많은 적들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 후에도 황제와 교황 사이의 논쟁이 계속되다가 마침내 하인리히 5세 황제(1106~1125) 때인 1122년에 보름스 정교 조약(Concordatum Wormatiense)이 체결되어 양자간에 타협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세력은 점차 쇠약해진 반면에, 교황권은 더욱 확대되어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 때에는전성기를 맞았다.
〔대공위 시대와 황금 문서〕 프리드리히 2세(1215~1250)가 사망하면서 호엔슈타우펜 가문은 단절되었고, 제위는 이전부터 황제로 칭하던 빌헬름(Wilhelm von Hol-land, 1247~1256)에게로 넘어갔다. 그러나 그가 사망하자 황제 선출을 둘러싸고 제후들은 두 파로 갈렸고, 결국 두 명의 황제가 선출되었지만 두 사람 모두 독일 지방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결과적으로 1256~1273년은 실질적인 황제가 없는 '대공위 시대' (大空位時代, Magnum Interregnum)가 되었다. 1273년 합스부르크(Habsburg) 가의 루돌프(1273-1291)가 즉위함으로써 대공위 시대는 끝났지만, 게르만 민족간의 통합은 무산되었고, 황제권은 극도로 약화되었으며, 제후들의 분립주의 경향이 강해지기 시작하였다. 역대 황제들은 이탈리아 지배 정책에 몰두하였고, 대공위 시대에 황제의 권위가 실추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독일 지역의 제후 세력은 강해지고 사실상 독립적 지위를 누리는 영방(領邦)들이 형성되었다. 영국이나 프랑스의 중앙 집권화와는 달리 당시 독일에서는 수많은 영방을 단위로 한 지방 분권화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선출도 점차 몇 명의 강력한 영방 제후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1356년 카알 4세 황제(1346~1378)는 황제 교체시의 분쟁 방지와 황제 선출시 교황의 개입을 배제할 목적으로 '황금 문서' (黃金文書,Golden Bull)를 공포하였다. 이 내용에 따르면, 마인츠 ·트리어 · 쾰른의 대주교, 팔츠 백작, 작센 공작, 브란덴부르크 후작, 보헤미아의 왕 등의 7명에게 신성 로마 제국황제의 선출권을 부여하였다. 이 선제후(選帝侯)들은 자신의 영역 내에서는 독립된 재판권 행사와 같은 최고 주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막강한 선제후들의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는 15세기부터 1806년까지 거의 대부분 합스부르크 가문이 세습하였다.
〔해체와 역사적 의의〕 16세기에 신성 로마 제국은 이탈리아에 있는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였다. 또 종교 개혁기간 중에는 가톨릭 교회 편을 든 황제들과 프로테스탄트 편에 가담한 제후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져 17세기까지 종교 전쟁은 계속되었다.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Pax Westfaliensis)으로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자신의 영토 내에서 주권을 행사하게 되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명목상의 우두머리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쇠잔해진 신성 로마 제국은 1806년 프랑스의 황제인 나폴레옹 1세에 의해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이때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프란츠 2세(1792~1806)는 나폴레옹의 압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은 라인 연방(Rheinbund)으로 개편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건국 자체가 게르만 국가와 교황권의 상호 제휴에 따른 소산물이었다. 그것은 유럽 중심부를 지배하게 된 게르만족 왕국은 도덕적 기반이 약했던 반면에, 교회는 강력한 세속적 세력의 뒷받침이 필요한 시기에 탄생하였다. 한마디로 정치적 세력과 도덕적 권위와의 결합이었다. 그 후 유럽의 유일한 정치 세력으로서 신성 로마 제국은 약 10세기 동안 가톨릭 교회와 함께 중세 서방 세계에서 영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나, 중세후기 특히 13세기 가톨릭 교회의 전성기 이후에는 분립된 영방 국가들을 하나의 집권 체제로 결합시키는 구심점이 되지 못하였다. 그 결과 19세기 초에 이르도록 오랫동안 근대적인 독일 국가 형성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독일 ; 베스트팔렌 조약 ; 보름스 정교 조약 ;성직 서임권 논쟁 ; 카노사 사건)
※ 참고문헌  Uta-Renate Blumenthal, The Investiture Controversy :Church and Monarchy from tne Ninth to the Twelfth Century, 1988/ J. Flec-henstein, Early Medieval Germany, trans. by Bermanrd S. Smith, 1978/ H.Fuhrman, Germany in the High Middle Ages. c. 1050~1200, trans. by T.Reuter, 1986/ J.K. Hyde, Society and Politics in Medieval Italy The Evolu-tion ofthe Civil Life. 1000~1350, 1973/ K.J. Leyser, Medieval Germany andits Neighbors. 900~1250, 1982/ A.J. MacDonald, Hildebrand : A Life of Gregory Ⅶ, 1932/ T.C. van Cleve, The Emperor Frederick II of Hohens-taufen : Immutator Mundi, 1972. 〔車河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