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우 申聖雨(1893~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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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우 신부.

신성우 신부.

수원교구 신부. 세례명은 마르코. 본관은 고령(高靈) .1893년 3월 10일 경기도 가평(加平)에서 신두휴(申斗休, 안토니오)와 김 안나의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나, 7세 때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書院面) 검두(琴垈里)로 이사하였다. 그의 가문은 3대째 천주교를 믿어 왔으며, 아버지와 둘째 형 비우(飛雨)는 대를 이어 공소 회장을 역임하였다. 13세 때인 1905년 9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한 신성우는 1919년 3 · 1 운동 때 교내에서 만세를 불러, 그 벌로 예정보다 1년 늦은 1920년 9월 18일 종현(鐘峴, 현 명동)성당에서 드브레(E.Devred, 俞世竣 주교의 주례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서품 직후 평양 관후리(館後里) 본당에서 사제 생활을 시작하였지만, 한 달 만인그 해 10월에 진남포(鎮南浦) 본당 3대 주임으로 전임되었다. 6년 동안 신부가 파견되지 못하였던 진남포 본당에서는 가톨릭 청년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침체 상태에 놓여있던 본당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 후 황해도 재령 본당 주임(1921. 5~1930. 6), 신천 본당 주임(1930. 6~1931. 5), 해주 본당 주임(1931.5~1933.5)을 차례로 역임한 뒤 경기도 개성 본당으로 전임되어 성당을 신축하였다. 그리고 1942년 2월에 춘천(현 죽림동 주교좌) 본당 9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가 1945년에 경성천주공교신학교(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경리 신부로 전임되어 4년 간 봉직하였다.
1949년 1월 소사(素沙) 본당 2대 주임으로 부임한 신성우 신부는, 가정 형편상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소녀들을 위해 1956년 4월에 '소명가정기술학교' (현 소명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였고, 1960년 10월 20일에는 200평 규모의 성당을 완공한 뒤 은퇴하였다. 이어 성가 수녀회(현 서울 성가 소비녀회) 지도 신부로 활동하였는데, 사목 활동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본당 자립을 위해 밭에서 직접 일했을 뿐만 아니라 고아들을 대학까지 입학시키는 등 신자들에게 이상적인 사제상을 심어 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1978년 10월 5일, 58년 간의 사제 생활을 마치고 86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포리(현 경기도 시흥시 포동)에 있는 소사 본당 교회 묘지에 묻혔다.(→ 소명여자중고등학교 ; 소사 본당)
※ 참고문헌  《교회와 역사》 67호(1981. 3), 한국교회사연구소, p.5/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황해도 천주교회사》, 황해도 천주교회사간행 사업회, 1984/ 《죽림동 본당 70년사》, 천주교 죽림동 교회, 1990/천주교 소사 교회 본당사 편 찬위원회 편, 《소사 본당 반세기》, 천주교 소사 교회, 1991/ 《素明三十年史), 소명여자고등학교, 1992.〔金成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