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信仰 〔그〕πίστις 〔라〕fides 〔영〕faith

I. 성서에서의 신앙

II. 윤리 신학에서의 신앙I. 윤리 신학에서의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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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가 하느님이 인간에게 오는 길이라면, 신앙은 인간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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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가 하느님이 인간에게 오는 길이라면, 신앙은 인간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다.

하느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인 응답. 인간과 하느님이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나아가 일치하기 위하여 인간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자세이다.
사도 신경에서 "저는 믿나이다" 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결정짓는 말이다. 신앙은 종교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이며, 그리스도인이 취할 기본 행위 가운데 하나이다. 인간은 삶을 영위하면서 행복을 추구하지만 결코 만족하지 못하며, 더욱 많은 것을 알려 하지만 모르는 것이더 많음을 깨닫게 된다. 이렇듯 인간은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체험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행복을 추구하며, 진리와 정의에 목말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행복이나 진리 혹은 정의를 충족시킬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게 되고, 결국 삶 자체를 신비로 규정하고 그 신비를 통해 더 큰 신비인 하느님께로 향하게된다.
"하느님께로 향함" , "하느님을 앎"은 인간의 존재 문제, 세계의 의미 문제를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이 인간 생명의 시작이요 마침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분이 인간의 주인임을 고백하고 상응하게 응답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느님을 아는 것은 행복과 진리와 정의를 추구하는 인간에게 절대 절명의 요청이다. 그러나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한 하느님을 다 알 수는 없다. 인간이 하느님을 알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찾으려 하면 할수록, 그분은 우리에게 신비로 머무르는 분이시다.
그런데 성서에 의하면 하느님은 인간에게 가까이 오고, 말씀과 행위를 통하여 자신을 알게 하며, 자신의 존재를 인간에게 드러낼 뿐만 아니라, 자신이 야훼(출애 3,14)임을 알려 주어 모든 이를 구원 공동체로 초대하고 받아들이시는 그런 분이다. 역사 안에서 하느님은 일정한 시대, 일정한 장소, 일정한 인간들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있다. 그 계시의 절정이 바로 하느님이며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러한 계시가 하느님이 인간에게 오는 길이라면, 신앙은 인간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다. 즉 신앙은 인간과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이며, 하느님께로 향하는 인간의 기본 자세이다.
I . 성서에서의 신앙
〔구약성서〕 어원 : 신앙을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자세" 라고 정의한다면, 구약성서에서는 일차적으로 신앙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성서는 인간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우선 하느님에 관해서 말하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에서 신앙이란 항상 하느님의 행위(actio)에 대한 인간의 응답(reacio)이다.
구약성서에서 '신앙' 을 가리키는 용어는 여러 가지인데, 그중 자주 사용되는 낱말이 “아만”(אָמַן)이다. '견고하다' , '항구하다' , '신뢰다 등의 의미를 갖고 있는 이 말은 오늘날 전례에서 "아멘" 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바타" (בָּטח)는 '안전하다' , '안전하게 느끼다' 라는 의미이고, 이 밖에 "하사" (חָשָׁה,) 피난처를 구하다, 자신을 숨기다)와 "카와" (כָּרָה), 기다리다, 긴장하다) 등의 낱말이 있다. 이 용어들의 어휘 연구를 통하여 성서에서 신앙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음이 밝혀졌는데, 하나는 성실한 상대자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이고,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실재를 말과 표징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해 방법이다.
내용 : 이스라엘과 야훼와의 관계(계약, 신앙)는 제삼자를 배척하는 배타적인 관계로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고, 신뢰해야 하며,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그분의 약속에 대한 신앙이 이 관계를 잘 증명하고 있다. 야훼가 다른 신들을 섬기던 아브라함을 불러 그에게 땅과 후손을 약속하였을 때(창세 12, 1-2), 그는 모든 의혹을 물리치고(로마 4, 19), 하느님과 그분 말씀을 믿었다(창세 15,6). 그는 부르심에 순종하고 이 약속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으며, 더욱이 약속의 성취로 얻은 아들마저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아브라함은 모든 인간적인 가능성들에 희망을 두지 않고 약속을 실현할 것이라는 하느님의 성실성과 전능을 믿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은 모세를 불러 자신을 드러내고 이집트에서 불행하게 사는 백성을 복된 땅 이스라엘로 데려가기 위해 "그와 함께 계실 것"(출애 3, 1-15)을 약속하였다. 모세는 "보이지 않는 분을 마치 보는 듯이 굳게 매달리는" 신앙으로 하느님께 순종하였고, 하느님은 백성과의 계약을 통해서 당신 말씀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였다(출애 19, 3-9). 이와는 대조적으로 광야 전승은 이스라엘의 불신앙(민수 14, 11 ; 신명 1, 32)과 불순명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신앙이 부족하여 하느님께 순종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말씀은 듣는 것' 은 순명이며 믿음을 의미한다(신명 9, 23 ; 시편 106, 24 이하). 또한 모세 전승에서는 구원 체험에 대한 응답으로서 이스라엘의 신앙을 말하고 있다.
이사야는 신앙 수호의 선구자들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이스라엘 역사를 신앙의 역사라고 한다면, 이사야서 7장은 그 신앙 역사의 절정을 말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정한 신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백히 제시했기 때문이다. 바빌론 유배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은 자신의 신앙을 지켜 나가는 데 있어 많은 난관과 유혹(우상 숭배, 형식적 예배, 군사력에 대한 신뢰)이 있었다. 이사야는 아하즈 왕이 정치적 위기에 처해 두려워 떨며 갈등하고 있을 때, 두려워하지 말고 외세에 의존하지도 말며, 지체 없이 다윗 가문에게 한 약속을 지키실 야훼를 신뢰하라고 촉구했다(이사 7, 4-9 ; 8, 5-9). 신앙은 값싼 낙관론이 아니기 때문에, 야훼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자신의 계획과 행동을 단호히 바꾸어야 한다. 야훼의 계획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사람만이 참된 신앙의 자세를 지닐 수 있다. 이와 같이 신앙은 생각의 변화, 즉 회개를 전제로 하며 분명한 결정을 요구한다. 유배 중에 이스라엘은 예언자들이 던진 신앙의 호소를 거의 듣지 않았다. 옛날 이스라엘이 모세를 믿었듯이(출애 14, 31), 우선적으로 예언자들을 믿어야 했지만 거짓 예언자들의 출현, 어려운 조건으로 인한 신앙 실천의 어려움 등 장해 여건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하느님 약속의 성취는 계약으로 보아 백성의 신앙에 달려 있으나, 역사상 이스라엘은 이러한 신앙을 지니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미래에 신앙의 본보기가 될 야훼의 종(이사 50, 6 ; 53장)을 예견하였다. 또 현인들은 구원받기 위하여(잠언 20, 22) 야훼께만 의지해야 함을 알았으며, 경건한 이들의 기도는 곤경 중에도 한결같이 하느님 약속을 믿고 그분만을 기다린다는 증거를 보여 주었다(시편 33, 20-22 : 57, 2 ; 116, 10 비교). 구약성서의 신앙은 알 수 있는 진리들의 참됨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행하고 말씀하시며,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것이다. 다른 어떤 것에서 도움을 구해서는 안되며, 그분께만 온전히 신뢰하고 계약의 요구에 순종하여야 한다.
〔신약성서〕 어원 : 신약성서에는 '믿음' 또는 '신앙'이라는 의미의 명사 "피스티스"(πίστις)와 '믿다' 라는 의미의 동사 "피스테우에인"(πιστεύειν)이 자주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들은 히브리어 "아만"의 그리스어 번역이다. 신앙은 구약성서에서 언급하였듯이 신약성서에서도 역사 안에 자신을 계시하는 하느님께 대하여 인간이 갖추어야 할 기본 자세를 뜻한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전환하였다고 해서 신앙 내용이 전혀 새롭게 변형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구약성서와 달리 신약성서에서는 더 일관되고 더 의식적으로 '신앙' 이 진술되고 있다. 구약의 경건한 사람은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행위에 대한 체험에 근거하여 미래의 하느님 행위를 기대하였으나, 신약의 신앙인은 역사 안에서 행하신 하느님의 행위를 주시하였다. 즉 신약의 신앙은 예외적이고 유일한 과거지사인 그리스도 사건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분 말고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도4, 12).
신앙이란 신뢰하는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것과 미래를 예견하는 것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지닌다. 미래의 희망은 현재까지 성취되지 않은 것을 고대함을 뜻하나, 그렇다고 하느님의 새로운 행위만을 기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구원을 그리스도의 재림 때 다시 볼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마태 24, 3 ; 2데살 2, 8 ; 2베드 3, 4).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마지막 행위이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 들어올림을 받으신 분, 주님과 함께 성취된 모든 것은 바로 하느님의 구원 행위이다. 이 모든 내용이 성서 안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공관 복음서의 신앙 : 공관 복음서에는 "피스티스" 와 "피스테우에인"이 요한 복음서와 바오로 서간들에 비해 비교적 적게 사용되었다. 신앙에 관한 진술들은 예수의 활동과 밀접히 연관되어 나타나며, 특히 그분의 선포에서 나온다. 예수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마르 1,15)라고 요구하였는데, 회개와 신앙은 계명으로서 하느님의 다스림을 어떻게 해야 올바로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것인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우선 회개의 계명은 인간이 잘못된 길을 중단하고, 주님이신 예수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구원 사업과 행적을 통하여 인간에게 가까이 오시는 하느님께로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또 "복음을 믿으시오"라는 계명은 복음을 받아들여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 "복음을-믿음"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신앙이며, 구원사적으로 하느님의 다스림을 도래하게 하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고, 구원을 주시는 예수께 대한 신앙이다.
신앙은 "예수를 따르라"는 계명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예수는 제자들의 태도를 신앙이라고 일컬었고(루가 22, 32 ; 마르 4, 40 : 9, 42 ; 11, 22), 백부장의 고백(마르 15, 39)은 신앙의 자세와 추종의 자세를 이해하게 하였다. 예수는 당신을 따르려는 백성과 제자들에게 자신을 거부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생명을 잃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마르 8, 34-38 ; 9, 35-37 ; 10, 35-45). 예수를 따름은 회개와 믿음의 요청에 대한 특별한 응답이며, 예수께 대한 순명이다. 또한 신앙은 기도와 불가분적인 관계에 있음을 보여 준다(마르 9, 14-29 ; 11, 22-25). 예수는 제자들에게 신앙과 기도를 요청하였다. "기도하며 청하는 것은 모두 받는다고 믿으시오"(마르 11, 24 ; 9, 24. 29 비교). 물론 여기에서 신앙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다. 즉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하느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크시고, 사랑이시고 전능하시며,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창조되었고 그분의 손안에 있음을 믿는 것이다. 산을 옮기는 힘은 믿는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니라, 믿음으로 청할 때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힘인 것이다.
한편 신앙과 불신은 권능 행위와의 관계에서 자주 발견되고 있다(마르 8, 11-13 : 15, 32). 예수는 가시적인 표징을 요구하는 신앙을 경고하였는데, 이러한 신앙은 불신이며,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린 하느님의 아들을 모욕한다. 예수는 병자를 데려오는 이들과 자신에게 오는 병자들에게 신앙을 일깨워 주거나 신앙을 요구하였다(마르 2. 1-12 : 5, 25-34 ; 10, 46-52). 여기서 신앙은 수많은 시련과 장애를 극복하고 예수에게 도움을 청하는 자세이다. 신앙은 기적을 행하는 예수에 대한 신앙 그 이상의 것으로서, 예수의 선포와 활동 안에서 현실이 되는 하느님 다스림에 대한 신앙이다.
바오로의 신앙 : 바오로는 '신앙' 더 정확히 말하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신앙' 을 자신이 주장하는 신학의 핵심으로 삼고, 그 신앙의 의미를 전개시켰다. 일차적으로 그는 '신앙' 을 초기 교회가 실천한 신앙을 기초로 하여 "복음을 받아들임" 으로 이해하였다(로마 10, 14-17). 이는 곧 복음에 순명하는 것이다(로마 1, 5). 그리고 "믿음의 말씀"(로마 10, 8)은 철저한 회개(1고린 1, 18-31)를 요구한다. 신앙은 신앙의 대상에 대한 고백이며(로마 10, 9) 앎이다(2고린 4, 14 : 5, 1). 그리고 신앙과 뗄 수 없는 것은 주님의 날(1데살 5, 2 ; 1고린 15, 28 ; 필립 3, 21)을 인내하며 기다려야 하는 희망(갈라 5, 1-10)이다.
바오로는 예외적으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이루는 구원 은총을 특별히 신앙과 연계시켜 이해하였다(갈라 2.16). "사람이 율법의 행업과는 상관없이 신앙으로 의롭게 됩니다" (로마 3, 28). 인간의 태도 가운데 하나인 "성취하다" (ποιἐίν)라는 말은 신앙과 일치하지 않는다(갈라3-5장 ; 율법과 복음). 신앙은 말씀 안에서 만나는 하느님의 은총에 온전히 의지함이며, 이 은총은 구체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행위를 의미한다(갈라 5, 2. 8). 이 신앙의 본보기가 율법 없이 신앙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이다(로마 4장 : 갈라 3장). 신앙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은사가 아니라, 은사는 모든 믿는 이에게 선사된다(1고린 12, 9). 그것은 인간 스스로의 능력에 의해 특권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다(필립 2, 29). 한편 '신앙' 은 "신앙에로 옴" (세례를 통해 신앙 공동체에 들어옴 : 갈라 3, 26-29) "믿음 안에 있음" (2고린 13, 5), "그리스도 안에 있음"(2고린 5, 17), 또는 "성령 안에 있음" (로마 8, 9)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요한 복음서의 신앙 : 요한 복음서는 공관 복음서가 가르치는 신앙을 수용하는 동시에 한걸음 더 나아가 신앙을 발전시켰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 그분이 가져다 준 구원의 계시에 대한 결정과 태도를 신앙의 기본 자세로 이해하였고, 이 신앙을 독자들을 위하여 새롭게 설명하였다. 공관 복음서에서 예수는 회개를 요구하였지만 요한 복음서에는 회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이기 위해 사랑의 계명을 강조하고 있다(요한13, 34-35 : 15, 12-17). 믿음과 사랑이 요한에게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고, 신앙을 명백하게 신학적으로 숙고했다는 점에서 그는 바오로와 가깝다. 바오로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에 대한 신앙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요한은 예수의 지상에서의활동과 세상에 머무르시는 계시자와의 만남 안에서 신앙을 설명하였다. 이것이 바오로와 요한의 차이점이다.
① 신앙과 구원 : 요한의 신앙은 믿는 이에게 구원을 약속하는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었다. "아들을 믿는 이는(죽음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 36 ;비교 : 요한 3, 15. 16 ; 6, 40. 47 ; 20, 31 ; 1요한 5, 13). 믿는 이는 죽음의 영역에서 하느님의 생명의 영역으로 넘어간다(요한 5, 24 ; 1요한 3, 14). 또한 믿는 이는 어둠에 머무르지 않고(요한 12, 46) 빛의 자녀가 된다(12,36). 이러한 표현들은 비구원 영역에서 구원 영역으로 넘어감을 의미하며, 인간이 구원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이 필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요한은 역사 안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신앙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믿는 이들에게 위로부터의 탄생과 영원한 신적 생명을 보장하였다.
② 신앙의 생성과 성장, 시련과 보증 : 요한은 신앙 공동체에 신앙을 촉구하였는데, 이는 그들의 신앙이 항상 공격을 당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1요한 2. 18 이하). 그는 독자들의 그리스도 신앙을 견고하게 하려고 하였다(요한 20, 30 이하). 신앙의 길은 다른 이들의 증거에의해(1, 35-51) 열리고,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 신앙이 깨우쳐지고 성장한다(11, 21-27. 40=마르타 ; 20, 27 이하=토마스) . 요한은 신앙 생활 중에 있을 수 있는 모든 동기(믿음이 생겨나고, 성장하고, 또는 인간이기에 믿음이 부족하고, 시련을 당하고)를 제자들의 신앙에 의거하여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는 제자들이 주님의 이 세상 삶에서 이해하지 못한 것을 부활에 비추어 이해하도록 배려하였고, 마침내 성령을 통하여 예수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하였다. 그러므로 후에 믿는 이들은 제자들의 증거와 성령의 증거를 통하여 믿음에 도달하게 된다. 베드로는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물러가겠습니까? 주님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계십니다" (6, 68)라고 하였다. 믿음은 계시자와 의 깊은 인격적 관계이며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③ 신앙은 은총 : 요한은 신앙 못지않게 '불신' 이라는 어두운 사실에 주목하면서 "신앙은 은총"이라고 밝혔다 그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습니다" (6, 44), "하느님에게서 난 ol"(8, 47), 목소리를 알고 따르는 사람들(10, 27 ; 18,37)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신앙 공동체를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기신 사람들로 이해하였다(17, 6. 9-24 ; 1요한 2, 19). 따라서 요한에게 있어 믿음의 결단은 인간 스스로의 성취가 아니라 예수의 계시에 대한 응답이며, 이는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 실현된다.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롯되었다" (1, 17).
야고보의 신앙 : 야고보는 한 번도 '신앙' 을 정의하지 않았지만, "참된 신앙" 을 얻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제시하려고 하였다. 그는 구약성서와 유대교의 유산을 교회 안으로 받아들였다. 귀기울여 들으시고 도와 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 사랑의 실천을 통해 드러나는 믿음의 "증명"이 야고보 신앙의 특징이다. 그의 믿음은 종말론적 구원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며(야고 2. 14), 참된 믿음은 시련을 견뎌 내야 하고, 이웃 사랑의 실천이라는 행함을 통하여 증명될 수 있어야 한다(2. 18). 행함이 없는 신앙은 죽은 것(2, 17)이라고 말한 야고보는 신앙의 열매로서 선행을 요구하였는데, 그에게 있어서 선행은 신앙의 자세이기 때문이었다.
히브리서의 신앙 : 히브리서 11장은 구약의 "구름처럼 많은 증인들"의 신앙을 그리스도인들의 정형으로 제시하면서 그리스도인은 이 증인들을 본받으려고 노력해야 한다(6, 12-15)고 하였다. 구약성서의 의미에서 신앙의 본질은 순명(11, 8)과 신뢰(11, 7 이하)이다. 신뢰는 약속에 대한 믿음이며, 동시에 희망이다. 이 희망하는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하게 하며(11, 7), 바로 그 보이지 않는 것은 약속된 미래와 천상적 현실이다(11, 1). 이러한 신앙은 지상적 세계에서 천상적 세계로 눈을 들게 하며(11, 7. 13 이하), 인내롭고 충실하게(10, 36 : 12, 1) 완전한 전형인 예수만을 바라보게 우리를 변화시킨다(12, 2) .
※ 참고문헌  H. Fries, Fundamenentaltheologie, Styria, 1985/ Katholi-scher Erwachsenenkatechismus, Das Glaubensbekenntnis der Kirche, Hrsg. v. der Deutschen Bischofskonferenz, pp. 7~431 Theologisches Begrif-fslexikon zum Neuen Testament I , hersg. von Lothar Coenen, Wuppertal, 1971/ A. Weiser, πιστενω, 《ThWNT》 6, p. 174f/ K. Haaker, Glaube,《TRE》 12, p. 279f/ X, Léon-Dufour, Vocabulaire de Théologie Biblique, Paris, 1977(《성서 신학 사전》, 광주 가톨릭대학 전망 편집부, 1984)/J. Jeremias, Neutestamentichche Theologie, Guetersloh, 1971(김경희 역, 《예수의 선포》, 분도출판사, 1999)/ 김학무, <성서에 나타난 신앙>, 《사목》 126호(1989. 6),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p. 4~271 R. Schnacken-burg, 김병학 역, <요한 복음의 신앙>, 《신학 전망》 32호(1976. 봄), 대건신학대학 전망 편집부, pp. 70~97/ 一, Glaube, 《LThK》 4, pp.914~917/ C.H. Picker, 《NCE》 5, pp. 792~7961 조철현, <신약에 나타난 신앙의 본질 1>,《신학 전망》 71호(1985. 겨울), 광주 가톨릭대학 전망 편집부, pp. 4~32/ ㅡ, <신약에 나타난 신앙의 본질 Ⅱ>, 《신학전망》 72호(1986. 봄), pp. 2~23. 〔金學武〕
II . 윤리 신학에서의 신앙
〔개 념〕 국어 사전에서는 신앙을 "신불(神佛) 등을 굳게 믿어 그 가르침을 지키고 그에 따르는 일"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한편 종교 생활의 의식적인 측면에서 신앙은 "초자연적인 절대자, 창조자 및 종교 대상에 대한 두려움 · 경건함 · 자비 · 사랑 · 의뢰심 등을 갖는 신자 자신의 태도"를 지칭한다. 그러나 유사한 단어인 '신용'(信用)은 믿는 행위의 대상이 어떤 사물이나 사실일 때보다는 어떤 인물일 때 사용하고 있다.
신앙이라는 용어는, 그리스도가 바로 "신앙의 창시자이며 완성자"(히브 12, 2)이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신비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태도를 의미하기 위하여 채용한 것이다. 물론 신비에 대해 이해한 신앙과 그 신앙의 행동은 한 인격 안에서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한편 이 신앙은 스스로 노력이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마음을 움직여 하느님께로 돌이키시고, 정신의 눈을 뜨게 하시며 또한 진리를 찬동하고 믿는즐거움을 모든 이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과 성령의 내적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 (계시 5항)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신앙은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완전한 투항이며, 계시된 교리를 받아들이고 의지적으로 은총에 복종하며 하느님의 약속에 신뢰하는 것(DS 1527, 3008, 3010 ; 계시 5항)이다.
신학적인 입장에서 신앙은 성서가 담고 있는 계시와 교회가 믿어야 할 교의로 제시하는 교리에 대한 동의라 할 수 있다. '믿음' · '신앙' 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피스티스"(πίστις)와 라틴어 "피데스"(fdes)를 어의론적으로 분석해 보면, "굳은 신념"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결국 보이지 않고 증명되지 않지만 다른 이의 신빙성에 대해 확인하지 않은 채 얻어진 진리들을 한 인격이 동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영성적인 의미로는 어떤 증인이나 증언을 인격적으로 수락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신앙 체계에 대한 동의보다는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느님의 자기 계시와 그것에 대한 어떤 인격의 응답을 의미하고, 더 나아가서는 이 만남을 통한 인격적인 일치를 의미한다. 물론 이때의 인격적인 응답은 어떤 지적 발견에 대한 반응과는 차이가 있다.
〔신앙과 지성〕 어떤 목격 증인에 대해 신뢰하고 진실임을 믿는 신앙 행위를 묘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소, 즉 지성적인 요소와 신뢰적인 요소가 필요하다. 비록 신뢰적인 요소가 지성적인 요소보다 더 강조되지만, 우선권은 지성적인 요소에 있다. "피스티스"에서 유래한 수동태 동사 "페이토"(πέιθω)는 '납득되다' 라는 의미인데, 이는 단순한 지성적 이유들보다는 도덕적인 의지의 명령에 대한 지성적인 동의 행위를 지칭한다. 더 나아가 어떤 신앙의 행위는 진리로서 그 무엇을 수락함을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신앙은 진리를 필요로 한다. 그렇지만 진리는 지성의 필수적인 대상이다. 그래서 지성은 진리의 존재를 인식하고 지성의 작용 결과로 확신을 갖게 함으로써 신앙을 가능하게 하며, 지성은 그 신앙에 더욱 큰 확신을 제공한다. 신앙의 행위에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미신이요 허구이다. 더욱이 맹목적인 신앙은 심리학적으로도 불가능하다. 더 나아가 수학 또는 자연 과학의 연구로 어떤 한 인격체를 안다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어떤 의지적인 결단으로서의 신앙이 한 인격체의 존재와 그의 세계에 참여하게 하고 비로소 그를 아는 길로 열어 준다. 그래서 더 잘 알기 위해 믿는다는 말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계시가 있는 한 신앙과 지성은 상호 보충 관계이며, 이질적인 영역의 것들은 아니다.
〔신앙과 의지〕 학자들은 인간의 정신 작용을 지성과 의지의 활동으로 규정하였는데, 이는 독립된 별개의 작용이 아니고 한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능이다. 이러한 정신 작용 안에서 신앙 행위는 지성이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것을 의지로써 결단을 내리게 한다. 즉 어떤 명제를 인정하면서 그 반대 명제의 성립 가능성에 대한 불안감을 완전히 극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의지가 개입하여 불안한 지성을 보충하는 이유는 신앙의 대상인 하느님의 동시적 · 이중적 성격 때문이다. 즉 그분은 전지 전선(全知全善)하시기에 의지의 대상인 선(善) 자체이며, 지성의 대상인 진리 자체이기 때문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도 신앙이 하느님 은총의 충동을 받은 의지의 명령에 의해서 지성이 하느님의 진리를 파악하고 승인하는 것(《신학 대전》 Ⅱ-Ⅱ , q.6, a.1)이라고 하였다. 즉 하느님은 믿는 사람들에게 인간 지성으로 아직 파악되지 않은 계시 진리를 인정하도록 결단을 내리게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래서 지성과 의지의 동시적 작용이다.
〔신앙과 대신덕〕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속에서 그분과 완전히 일치하도록 자극하는 신앙은 성령의 도움과 은총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열매 맺게 한다. 신앙은 이렇게 대신덕(對神德), 즉 신덕과 망덕 그리고 애덕을 통해 구원으로 가는 첫째 조건이다.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으며(마르 16, 16), 이 신앙을 통하여 의화되고 생명을 얻게 된다(로마 1, 17).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신앙의 행동과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희망의 인내"(1데살 1, 3)를 기도하였다. 그러나 신앙에 의한 구원이 현실화되려면 사랑의 계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미래의 영광과 구원을 기다리는 희망 행위는 자연스럽게 신앙 안에 내포되어 있지만, 사랑의 행위는 새삼 강조할 필요가 있다. 신앙이 관념적인 정신 작용으로 축소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는 사랑을 의화의 필수적 조건으로 가르쳤다(DS 1561). 다시 말해 신앙으로 시작된 인간의 의화는 희망으로 유지되고 사랑으로 완성된다.
〔신앙 행위의 조건들〕 엄밀한 의미에서 신앙은 정신 작용으로서 어떤 신앙 체계에 대한 동의만이 아니다. 우선적으로 하느님과의 만남이며, 그분이 자신을 드러내신 대로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인격적인 자기 투항이다. 이러한 신앙 조건 때문에 신앙의 대상은 하느님과 그분의 뜻이고, 신앙의 동기는 하느님이 먼저 주도적으로 신앙의 주체인 인간에게 자신을 알려 준 계시이다. 여기서 알게 된 하느님의 전지(全知), 전능(全能), 전선(全善) 그리고 완전한 신용이 신앙 행위를 이끈다. 물론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직접 접하기 이전에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신앙 행위는 시작될 수 있다. 그럼에도 한 인간이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주도적인 은총이 없으면 시작이 불가능하다.
신앙의 내용은 구약과 신약에 서로 차이가 있다. 구약의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그분의 선성이 신앙의 내용이었지만,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이 신앙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하느님의 계시가 가장 완벽하게 드러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분의 존재가 계시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담고 있는 하느님의 계시 진리내용은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본받으려는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계시의 내용을 가장 완전하게 동의하고 수락, 그리고 응답하는 것이다.
〔구원에 필요한 최소한의 신앙〕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도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은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세 가지로 언급되었다. 첫째, 성 아우구스티노(354~430)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따르는 이들은 최소한의 신앙을 네 가지 기본 진리, 즉 하느님의 존재, 상선벌악(賞善罰惡), 삼위 일체 그리고 강생(降生)의 신비를알고 믿어야 한다고 보았다. 둘째, 근래에는 상선 벌악과 인격적인 하느님의 존재를 믿으면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삼위 일체와 강생의 신비를 알고 믿는 것은 자기 탓 없이 사회적 · 정치적 · 문화적인 이유로 하느님에 대해 전혀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이교인들에게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셋째, 불교인나 유교인과 같이 인격적인 하느님을 모르는 이에게는 신성한 절대자의 존재와 사후(死後)의 응보에 대한 함축적인 신앙을 기본으로 하고, 윤리적으로 선악을 구별하고 선행의 의무를 책임 있게 하는 것을 최소한의 신앙이라고 간주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비그리스도교인들도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포함되어 있다고 가르쳤다. 유대인, 창조주를 인정하는 이들, 모르는 신을 어떤 상징물과 표징 속에서 찾는 이들,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으며 양심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하느님을 명백히 인정하지 않지만 올바로 살아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교회 16항). 결론적으로 선함과 신성함에 대한 윤리적 의무를 인식하고 실천하는 것이 최소한의 신앙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신앙의 의무〕 신앙은 인간적인 노력 또는 공로와는 상관없이 하느님의 주도적이고 자유로운 계시에 대한 자기 투항이기에 은총으로 주어진다. 이렇게 은총의 선물로 받은 신앙이므로 여기에는 몇 가지 의무를 동반하게 된다. 첫째, 신앙의 계시 진리를 알아야 할 의무로서,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신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사대 교리(四大敎理), 십계명, 성모 승천, 기본적인 교회 규정(연례 영성체와 고해성사, 단식과 금육, 교회 유지비 부담 등), 그리고 필요한 성사들(세례성사, 고해성사, 성체성사, 혼인성사 등)을 생각할 수 있다. 둘째, 신앙을 고백할 의무이다. 신앙을 외적 · 내적으로 부정하지 말아야 하며, 적극적이고 공개적으로 고백해야 할 때도 있다. 셋째, 신앙을 전파할 의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 명령이 있었고(마태 28,19-20),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용서의 기쁜 체험을 나누려는 내적 원의(마태 13, 44-46) 때문에 선교를 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에 의한 하느님의 직접 계시를 모르는 이들은 교회의 은총과 진리의 보고(寶庫)에 자유롭게 접근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교 활동의 열매로 선교사 자신의 신앙이 강화되기도 한다(〈구원의 사명> 2항). 넷째, 신앙을 보호해야 할 의무이다. 자신의 신앙과 그 신앙의 가치를 위협하는 사회의 전달 매체와 교육 기관에서 신앙이 보호받을 권리를 지켜야 한다. 물론 타종교에 대한 상대주의나 혼합주의도 경계하여야 한다. 다섯째, 신앙의 일치를 촉진해야 하는 의무이다. 교회 일치를 위한 대화는 하나의 교회를 세우신 그리스도의 뜻과 일치하는 필연적인 요구이다. 마지막으로 여섯째, 교도권에 대한 순명의 의무이다. 신자 각 개인은 올바른 신앙과 공동체에 맡겨진 선익을 얻기 위하여 교도권의 권위에 대한 순명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말씀의 권위 있는 해석과 신앙 조문에 대한 올바른 이해, 그리고 전문가적인 윤리적 판단을 제공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을 거스르는 죄〕 하느님을 하느님답지 못하게 대하는 것은 십계명의 제1 계명과 제2 계명을 거스르는 것이다. 신앙의 가장 큰 부정은 하느님의 뜻과 다스림에 복종함을 거부하는 것으로서, 하느님께 대한 불신(不信)과 교만으로 나타난다. 이 두 가지 죄는 서로 상승 작용을 하는데, 불신이 교만을 낳고 교만은 또 불신을 키운다. 불신은 외적으로 무신론과 세속주의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런 불신은 더 적극적인 형태로서, 미신 행위 · 우상 배 · 점술 · 마술에 대한 신봉으로 나타난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직접적으로 거스르는 죄들로는 불신앙 · 이단 · 열교 · 배교 등이 있고, 나아가 신성 모독과 불경(不敬)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동기와 지향 및 역사적 상황 등 개인이 처한 모든 조건의 경중(輕重)을 총체적으로 고려해서 윤리적인 판단을 해야한다. (⇦ 믿음)
※ 참고문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69/ 《가톨릭 교회 교리서》 3 · 4편, 천주교중앙협의회, 1996/ 최창무, 《윤리 신학》 II , 가톨릭대학교, 1995/ Duplacy, 《성서신학 사전》, 광주 가톨릭대학 전망 편집부, 1984, pp. 353~358/ K.H.Peschke, 김창훈 역, 《그리스도교 윤리학》 2, 분도출판사, 1992/ C.H.Pickar · A.R. Jonsen · T. Urdanoz · P.K. Meagher, 《NCE》 4, pp. 792~804/ D. Mongillo, Virtù teologali, Nuovo Dizionario di Teologia Morale,Paoline, 1990. 〔李東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