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선

共同善

〔라〕bonum commune · 〔영〕common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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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이익(commodum privatum)에 대비되는 개념. 공공 복지(salus publica)라는 개념으로 대치될 수 있다. 여러 명칭으로 불리는 이 개념의 내용은 공통적으로 "특정 생활 공동체의 구성원 전체가 정신적 · 물질적 만족을 최고도로 실현하는 것" (J. Riedel)이다.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 공동선이 무엇인가를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공동선이 무엇을 하는지에 관한 기능적인 묘사에 만족한다. 이러한 기능적 묘사는 '공동체 구성원 전체의 쾌적함과 사회 분쟁의 회피' 가 항상 핵심 요소를 이룬다.
공동선은 가톨릭 사회론의 핵심 개념으로서 교황 요한 23세는 공동선을 "(공동선은) 인류에서 각자 인격의 통합적 발전을 허용하고 염원하는 모든 사회 조건에서 형성되는 것이다"(어머니와 교사 65항)라고 정의하였다. 같은 회칙에서 인간의 완성과 관련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개개 인간이 사회 생활을 운영하는 모든 조직체의 기초이며 목적이며 주체이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인간이란 그 본성에 따라 사회적인 존재로서 고려되어야하며···초자연적인 질서에 올림을 받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동 219항).
〔역사적 발전 과정〕 서양 사상사에서 공동선이라는 개념은 플라톤(Platon)의 관념론까지 소급된다. 플라톤은 정의(正義)의 문제에 대하여 논하면서 완벽한 공동체의 바람직한 모습을 제시하였다. 완벽한 공동체란 각자가 전체의 복지를 위하여 자기의 몫을 다하는 공동체였다. 결국 플라톤은 개체와 단체의 이상적인 질서에서부터 문제를 풀어 나가면서 '각자는 자기 몫을' 성실히 수행함으로써 개인적인 삶의 목표를 실현시키는 동시에, 공동체를 위한 각자의 봉사 기능을 다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회 질서의 모범은 스토아(Stoa) 학파와 그 후 그리스도교 사회론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그대로 수용되었으며, 로마 제국이 취한 국가 이념의 핵심이 되기도 하였다. 치체로(Cicero)의 저작이나 로마 법전에서는 이러한 국가 이념으로서의 사회 질서가 모든 사람에게 이로우므로 항상 개인의 이익에 앞서는 것으로 당연시되었다. 로마 시대의 비문에는 황제의 공식 칭호가 약자로 BPN(bono publico natus)이라 표기되어 있다. 즉, '공동선을 위하여 태어난 자' 라는 의미이다. 타치투스(Tacitus)는 로마에서 윤리 도덕이 붕괴되었음을 한탄하면서, 그 구체적인 예로 공동선이 개인 이익의 뒷전으로 밀려난 점을 지적하였다. 세네카(Seneca)는 사회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인간을 규정하여 인간은 공동선을 위하여 태어난 존재이므로 죽을 때까지 공동선을 위해 투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온유함과 봉사 자세야말로 인간성과 공동선이 가장 잘 드러나는 태도라고 찬양하였다. 이와 같은 세네카의 공동선 규정은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그리고 대(大) 그레고리오를 통하여 서방 그리스도교계에 받아들여졌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떠한 사람이라도 공동선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면 선(善)할 수 없다고 확신하였다. 그래서 공동선을 공동체의 최후 목표로 여겼다(신학 대전 1,2,q. 90, a. 2). 토마스는 개인과 공동체의 유기적이고 조화로운 질서에서부터 그의 사고를 전개했다. 왜냐하면 부분과 전체는 서로 융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체의 복지가 보장되지 않으면 개인의 복지도 있을 수 없다(동 I,2,q. 47,a. 10. 2). 전체의 복지란 결국 하느님이다(S.con-tra gent. I, 89). 토마스는 공동선이라는 개념을 교도권의 신빙성 있는 가르침(authenticum)으로 받아들여 그의 저작에 계속 사용하였다. 그러나 공동선 개념의 본격적인 논의는 토마스의 제자이며 단테의 스승이었던 지롤라미(Fra Remigio de Girolami)가 1300년경 《공동선에 대한 논고》(Tractatus de bono communi)를 집필함으로써 비로소 시작되었다. 중세에는 공동선 개념이 교회나 시민 사회 모두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였기에 "공공의 업무가 개인 관심사에 우선한다"는 로마 관리의 격언이 교회법에서 교회 직책을 맡은 이들에게 적용되었다. 중세의 자유 도시 국가에서도 공동선에의 투신이 관리들의 의무 조항이 되었다. 예를 들면 독일 울름(Ulm)의 시장은 1379년 시장 취임식에서 다음과 같이 선서하였다. "부자에게나 가난한 사람에게나 공평한 사람이 되겠으며, 모든 일에 있어서 어떠한 전제 조건도 없이 공평 무사하겠노라."
종교개혁 시대에는 국가가 관여하는 사회 복지와 교육 복지의 최초의 형태인 '공동 기금' (gemeines Pfennig)이 조성되고, '모금함' (gemeines Kasten)이 설치됨으로써 공동선이 실천되었다. 루터는 영주가 토지와 주민을 사유 재산으로 여겨서는 안되며, 어떻게 해야 그들에게 편리하고 유용할까를 궁리해야 한다고 항상 강조하였다(Von weltlicher Obrigkeit, 루터 전집 11, 273). 헤센(Hessen)의 필립 백작의 궁정 법률가였던 아이저만(Johannes Eisermann[Ferrarius])은 그의 저서 《공동 복지에 대하여》(von dem gemeinen Nutze, 1533)에서 공공 업무(respublica)와 공공 복지(Gemeinnutz)를 동일시하였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한 도시나 다른 공동체가 공통적으로 가지는 좋은 질서이며, 어떻게 하면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올바른 방향으로 유지하면서 평화를 보존할 수 있는가를 궁극적으로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르하르트(Johann Gerhard)는 공공선, 공공의 안녕(salus reipublicae), 공공의 필요(necessitas reipublicae) 등의 개념을 사용하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공동체의 기본적이고 최고의 목표(finis principalis et summus)로, 공공선을 최고의 목표를 향해 가는 수단이 되는 중간 목표(finis intermedius)로 이해하였다(Loci theol Ⅵ, 329). 그는 국가 복지와 공공 복지를 동일시하며 전제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독일 행정학의 태두인 젝켄도르프(Veit Ludwig von Seckendorff)도 국가 목표의 이분법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영광을 최고의 목표로 하였고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복지' 를 부차적인 목표로 삼았다. 그런데 볼프스(Chr. Wolffs)는 세속화가 진행되어 가는 전형적인 단계로 국가의 목표를 세속적 차원에 국한시켰다. "공동 복지와 공공 안전은 공동체에게 있어서 최고, 최종의 법률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공동체에 대하여 지켜야 할 규칙은 다음과 같다 : 공동 복지가 요구하고 공공 안전을 보존하는 것을 행하라. 반면에 공동 복지를 방해하고 공공 안전에 장애가 되는 것은 피하라" (Vernuenftige Gedanken von dem gesellschaftlichen Leben der Menschen··· 1721, 429~430쪽).
절대 왕정의 실시와 함께 공동선이라는 개념은 잘못 쓰이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군주들은 "짐이 국가이니라"(L'état'c est moi)라는 기본 명제에 맞추어 '공공의 최선'을 개인적인 관심사의 앞잡이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후 근대 자유주의 사상이 발전함에 따라 개인의 소비 욕구를 최고로 만족시키는 것이 공동선과 동일시되었고, 개인 관심사에 대한 자각' 과 이타주의(利他主義)의 조화로운 균형이 바람직하게 여겨졌다. 한편 루소(Jean Jacques Rousseau)와 맑스(Karl Marx)는 자유주의를 반대했는데, 루소는 일반 의지(volonté générale)를 내세움으로써 개인의 관심사와 전체의 관심사의 대립에 균형을 이루려 했다. 반면 맑스는 계급 투쟁과 개인 이기주의가 팽배한 시민 사회에서는 평화로운 조화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계급이 없는 미래의 잉여 사회에 가서야 비로소 공동선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실현되리라는 것이었다. 헤겔(Hegel)은 정치적 지배를 합리화하는 두 가지 기본 유형의 종합에 힘썼다. 그는 국가를 법의 집행자인 동시에 공동선의 보증인으로 이해하면서, 국가란 합법성과 도덕성의 합일이라고 보았다(Grundlinien der Phil. des Rechts 336). 개인 복지와 공공 복지는 필요 불가결하게 상호 보완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목표를 요구하면서 동시에 일반적인 목표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목표는 또다시 나의 목표를 요구한다"(186).
공동선에 대한 나치즘식 설명에 의하면, 독일법과 로마법의 심각한 본질적인 차이는 로마법이 개별 관심사를 공동 관심사에 선행시키는 반면, 나치즘은 입법을 통하여 '공공 복지를 개인 복지에 우선' 하도록 한다는 점이다. 사실 이러한 생각이 법 실증주의의 기반이 되었고, 입법 활동의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독재 체제가 '국가의 안녕과 질서' 와 같은 허울을 앞세움으로써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시킨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전제 조건이 특정 부류의 정치적 무기로 변하여 '전체의 복지' 를 위한 징수 · 수용, 근로 의무, '복리 민복(福利民福)의 손상' 에 대한 징벌 등은 독재가 공공 복지를 핑계로 내세운 정치적 흉기였다. 즉 공동선이라는 형태가 개인 권리의 제한에 악용되었다.
〔그리스도교 사회론의 가르침〕 공동선의 개념은 그리스도교 사회론에서 핵심 개념 중의 하나이며,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공동선의 개념과는 다른 독특한 의미를 갖는다. 일반적으로 공동선을 논할 때 재화의 공정한 분배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리스도교 사회론에서는 더욱 포괄적인 의미에서 이 개념을 사용한다. 가톨릭의 사회적 가르침에서 공동선의 개념은 최근에 정립되고 발전되었다. 교회의 공식 문헌에는 공동선과 동의어로 공동 관심사, 공동 복지, 공동 이익(종교 자유 6항), 진보, 발전(민족들의 발전 14항)과 같은 용어들이 등장한다. 교황 레오 13세의 재위 기간(1878~1903) 중에 토미즘의 부흥과 함께 공동선에 관한 근대적인 이해가 교회 내부에서 거론되고 발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서 공동선이라는 개념을 현대 사회의 다양한 요청과 저마다 다른 수준의 발전 단계에 맞추는 것이 사회 회칙들의 주요 과제가 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교황들은 공동선의 보장이야말로 국가나 위정자가 해야 할 가장 우선의 임무라고 반복하여 말했다(레오 13세, Immortale Dei, 1885. 11. 1 ; 베네덕도 15세, 포르투갈 주교단에게 보낸 서한, 1919. 12. 18등).
국가가 공공 복지에 최선을 기울인다면 그 정부의 형태는 교황들의 문헌에서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레오 13세는 근대적인 의미에서 교회 최초의 공식적인 대 사회 문헌인 <노동 헌장>(Rerum Novarum, 1891)을 반포하였다. 교황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공동선을 거론하면서, 공공 재화와 사유 재산의 공평한 분배를 추구한다는 취지에서 공동선에 입각한 입법 논의를 활성화시켰다. 비오 11세는 회칙 <사십 주년>(Quadrage-simo Anno, 1931)에서 사회주의와 자유 방임주의의 양 극단을 피하는 수단으로 '교환 정의' (iustitia commutativa)를 제안하고 그리스도교적인 사랑과 결부시켰다. 그리고 사회 정의의 규칙이 공동선의 요구에 합치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또 회칙 <교회와 사회주의 운동>(Mit brennender Sorge, 1937)에서 "국민에게 이로운 것은 올바른 것"(Recht ist, was dem Volke nuetzt)이라는 독일 나치 정권의 주장을 거리낌없이 비난하였다. "이러한 진술은, 진정한 공동선이란 최종적으로 개인의 권리와 사회적 관계가 조화로운 균형을 갖추고 표출되는 인간의 본성을 통하여 확립된 공동체의 목표에서부터 규정되고 인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교황은 국가의 도덕적 권위가 하느님의 권위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전통적인 가르침을 거듭 강조하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회칙 <어머니와 교사>(Mater et Magistra, 1961)에서 처음으로 개별 국가의 테두리를 넘어서 국제적 차원으로 논의의 범위를 확대시켰다. 그는 이 회칙에서 '모든 민족들의 공동선'(commune cunctarum gentium bonum)과 민족들간의 전세계적인 연대를 요청하였다. 교황 바오로 6세는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1967)에서 요한 23세가 말한 국제적 차원의 공동선 개념을 더욱 심화시키면서, 한 국가에 국한되는 공동선과 보편적인 공동선을 구분하였다. 바오로 6세의 문헌에는 공동선 개념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는 역사성과 역동성에 대한 인식이 일관되게 나타난다. 즉, 도식적인 법규에 연연하여 기존의 법 질서만을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현대 다원 사회의 요청에 제대로 부응하려는 시도이다(바오로 6세, 노동 헌장 반포 75주년 기념 연설, 1966. 5. 22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 헌장, 1965. 12.7).
가톨릭 사회론에서는 수십 년 동안 개인과 사회의 관계, 개별선과 공동선의 관계가 활발히 토론되었다. 두가지 조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공동선의 우선권을 주장하는 '공동체주의자' (communitarist : Welty, de Koninck, Utz)들이고, 또 하나는 개인의 인격을 신뢰하며 기본적으로 개별선을 앞세우는 '인격주의자' (personalist : Gundlach, Maritain, Eschmann, Wildmann)들이다. 그러나 이 두 사상은 연대성이라는 공통 인식 안에 통합된다. 즉 개인주의와 집합주의 를 모두 극복하고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각 개인의 공동 의무라는 원리 원칙을 강조한다(von Nell-Breuning).
프로테스탄트의 공동선에 대한 대표적인 노선은 다음과 같다. 세계 교회 협의회(W.C.C)가 개최한 1948년의 암스테르담 총회와 1954년의 에반스톤 대회(Evanston Assembly) 이후 '책임 있는 사회' 라는 표어가 프로테스탄트의 사회 윤리적 노력의 기본 노선이 되었다. 내용상으로는 가톨릭 사회론에서 말하는 공동선에 해당된다. 인류에 대한 개인의 책임 있는 유대, 현대 산업 사회에서 인간의 단세포화와 기능화 대신 동반자 관계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벤들란트(Wendland)는 《사회 윤리 입문》(Einfuehrung in die Sozialethik)에서 '공동선' 과 '책임 있는 사회' 라는 개념을 결합시켰다. 그는 가톨릭에서 말하는 공동선 개념이 전도되고 경직되었다고 비판하였지만 폐기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사회를 서로 남을 대신하는 상호 봉사 관계의 조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가블렌츠(von der Gablentz)는 "책임 있는 민주주의와 다원화된 현상 속에서 사회적 일치를 이루는 공동체를 원한다면 공동선이라는 척도를 배척할 수 없다" 고 말하며, 공동선을 "정치의 중심 개념" 으로 보았다. 물론 공동선이 완전히 인식되고 당장에 실현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더라도, 기왕에 주어진 어떤 것이며 부분적으로 실현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윤리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즉 '정치적으로 해석된 공동선이라는 용어가 정말로 전체의 복지를 의미하는가, 아니면 몇몇 사람들이나 특수 집단에 한정된 관심사를 위장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비판적인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문제가 올바로 규정된 후에라야 지구의 환경 보호를 위한 생태학적인 관심사라든가, 제3세계 개발을 위한 다국적 차원의 원조 문제 등이 사심없이 논의될 수 있는 공동선의 새로운 차원이 실현될 수 있다.
〔결 론〕 공동선의 보편성이 국제적인 차원에서 잘 드러난 것으로는 1948년 12월 10일 선포된 <세계 인권 선언>과 이 선언에 기초하여 작성된 <유엔 인권 협정>이 있다. 오늘날의 사회에는 저마다의 이해 관계가 상충되는 개인들과 단체들의 관심사가 많다. 그래서 저마다 다른 관심사를 정리하여 협력 관계로 전환시키고, 강조점을 일치시키고, 선후 관계를 정하는 일 등이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공동선이란 목표가 사회 속의 분쟁을 해결하여 평화를 가져오는 필수 불가결한 방편을 제공한다. 현대 민주 사회를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 중에 봉건 사회로부터 유래하는 의식을 그대로 지닌 개인이나 단체가 공동선을 실현한다는 명목으로 부당한 소유를 하거나 교육을 독점할 수는 없다. 정당한 방법과 절차를 거쳐 국민으로부터 선출된 대표자가 특정단체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의 떳떳한 양심에 따라서 공동선을 실현해야 한다. 그러나 공동선의 실현 과정은 정해진 도식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다. 실천 도중에 인간적인 실수나 오류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라도 공동선 자체가 평가 절하되거나 위축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공동선이야말로 인간의 사회 행동에 있어서 마지막 보루가 되는 척도이기 때문 이다. 공동선의 개념을 이미 주어진, 절대적으로 유효한, 항구 불변하는 이상 사회의 모습으로 본다든가 또 이미 실현된 사회 형태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오해이다. 공동선은 규범적 원리의 최소한, 더 이상 제한되고 양보될 수 없는 원리 원칙, 어떠한 사회에서도 내칠 수 없는 사회 구성의 필수 요소이다.
※ 참고문헌  Heinz-Horst Schrey, Gemeinnut/ Gemeinwohl, 《TRE》 12, 1984, pp. 339~346/ 교황 레오 13세, 한국 천주교 정의 평화위원회 교육분과 역, <노동 헌장>(Rerum Novarum, 1891), 성바오로출판사, 1987/ 교황 비오 11세, 오경환 역, <사십 주년>(Quadragessimo Anno, 1931),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87/ 교황 요한 23세, 이해남 역, 〈어 머니와 교사>(Mater et Magistra, 1961),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85/ 교황 요한 23세, 정규만 역,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 1963), 한 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83/ 교황 바오로 6세, 김남수 역,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1967),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67/ 교 황 요한 바오로 2세, 성염 역, <사회적 관심>(Sollicimudo Rei Socialis, 1987),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1/ 《가톨릭 사전》/Donal Dorr, 오경 환 역, 《가난한 이를 위한 선택》, 신학 총서 27, 분도출판사, 1987/ 박 일영, <공권력과 공동선>, 《경향잡지》 1453호(1989. 4), pp. 31~35/ A. Nemetz, 《NCE》 4/ H.J. Wallraff, Gemeinwohl, 《LThK》, 4(1960), pp. 357~358. 〔朴日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