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의 올바른 관계에 관한 교도권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재임 기간 중 13번째로 1998년 10월 15일(9월 14일 서명)에 발표한 회칙으로, "신앙과 이성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바라보려고 날아오르는 두 날개와 같다"는 말로 시작되고 있다.
이 회칙은 "러 자신을 알라"는 서문에 이어 일곱 장의 본문과 결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문은 제1장 하느님 지혜의 계시, 제2장 알기 위하여 믿다, 제3장 믿기 위해 이해한다, 제4장 신앙과 이성의 관계, 제5장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교도권의 입장, 제6장 철학과 신학 사이의 협력, 제7장 오늘날 요구되는 과제들 등으로 되어 있다.
〔내 용〕 입문 : 역사가 시작된 이래 모든 문화 속에서 인간은 인생의 의미와 진리에 관한 심오한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아왔다. 이 물음들이 인간 조건에 관한 공통된 이해를 낳고 있으므로, 이러한 탐구는 이성에 토대를 둔 함축적인 '철학' 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궁극 의미를 파스카 신비 안에서 찾으며, 하느님의 계시를 준거로 삼아 모든 진리를 판단한다. 따라서 신앙은 진리 추구를 위한 또 하나의 수단이다. 회칙 <신앙과 이성>은 이러한 철학적 탐구의 두 방법이 지닌 관계를 개괄하고 있다. 교황은 이 두 방법이 서로 동반자가 되어야 하는데, 철학적 오류로 이를 혼란시켜서는 안된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교황은 궁극적인 진리에 대한 시야를 잃어버린 현대 철학의 오류를 간결하게 지적하였다. "기술이 모든 것을 지배하여야 한다는 그릇된 믿음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실험 자료에 기초를 둔 실용적 척도써 판단되고 만다. 이성은 진리를 향한 방향을 가리키지 못하고 존재의 진리를 바라볼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근대 철학은 존재에 관한 탐구를 포기하고 인간의 인식 활동에 관심을 집중시켰으나, 인간의 진리 인식 능력의 한계와 조건만을 강조하여 왔다. 이것은 철학적 탐구를 회의주의의 수렁 속에서 길을 잃게 만든 여러 형태의 불가지론과 상대주의를초래하게 하였다. 이것은 오늘날 진리에 대한 신뢰의 결핍을 드러내 보여 주는 증후의 하나이다"(5항) 신앙과 이성 혹은 신학과 철학의 협력 관계 : 교황은 이러한 철학적 담론의 불행한 경향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며, 신앙과 이성이 어떻게 협력하여야 하는지를 제시하였다. 인간 이성은 진리를 찾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인 진리는 이성만으로는 찾을 수 없다. "계시는 인간 실존의 신비를 깨우치는 데 결코 소홀해서는 안되는 하나의 기준을 역사 속에 설정하였다. 그러나 이 지식은 인간의 정신으로는 결코 다 깨달을 수 없고 다만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신비로 끊임없이 되돌아간다"(14항).
구약성서의 지혜 문학은 수많은 고대 문화 속에서 철학자들이 몰두하였던 진리와 의미 탐구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또 신약성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의 어리석음이 온갖 세속 철학의 지혜를 극복하였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지혜의 추구는 바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고, 따라서 교황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선포는 신앙과 철학의 연결 고리가 거기에 걸려 깨어질 수 있는 암초이지만, 이는 또한 그 둘 다 진리의 끝 없는 대양을 향하여 출발할 수 있는 바위이다" (23항). 진리(인생의 의미)의 탐구는 본질적으로 하느님을 찾는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진리 탐구는 성령의 영감을 받으며, 또한 성령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다. 진정한 탐구자는, 예를 들어 철학자가 과학자에게서 배우듯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운다. 따라서 철학자와 신학자는 서로 협력하는 관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오리제네스(Origenes Alexand-riae, ?~254) 같은 교부들은 세속 철학의 가치에 회의적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부들은 철학적 담론의 방법과 그 통찰을 평가하고, 인간 조건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이해를 넓히는 데에 철학을 활용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Hipponensis, 354~430)는 플라톤 철학의 그리스도교적인 이해에 지대한 공헌을 했고, 안셀모(Anselmus Cantuariensis, 1033/1034~109)는 철학을 그리스도인들의 정신 활동으로 보는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에게서 결정적으로 신앙과 이성의 관계가 명료해졌다.
철학 문제에 대한 교도권의 입장 : 중세 이후부터 철학사는 신앙과 이성의 분리라는 중대한 국면을 보였다. "근대 철학 발전의 대부분이 점점 더 그리스도교 계시로부터 갈라져 나가 명시적으로 정반대의 입장에 서게 되었다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46항). 교회는 고유한 철학을 가지고 있지 않고 또 어떤 특정 철학을 내세우지도 않지만, 철학자들이 더욱더 생산적인 탐구의 길로 나아가도록 이끌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대립적인 철학적 견해들이 계시 진리들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을 위협하게 될 때, 중대한 오류들의 씨앗을 심는 거짓 되고 단편적인 이론들이 하느님 백성의 순수하고 간명한 신앙을 혼란시키면서 점차 광범위하게 퍼져 나가기 시작할 때, 분명하고 강력하게 대응한다"(49항). 따라서 신앙의 빛 안에서 교도권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견해들과 철학들을 권위 있게 비판적으로 식별할 수 있어야 한다. 교도권의 이러한 식별과 개입은 진리를 올바로 성찰하는 이성을 수호하며 철학적 탐구를 증진하고 격려하기 위한 것이다. 세속 철학의 건전하지 못한 경향을 바로잡지 않으면 그것이 '공통 정신' 이 되어 그릇된 인생관을 형성해 버리기 때문이다. 교황은 절대 진리를 부정하는 후기 현대 철학의 사조가 허무주의로 나아가고 있다고 개탄하였다. 교황 레오13세(1878~1903)가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Aeterni pat-ris, 1879. 8. 4)에서 이미 100년 전에 만연하였던 철학에 대한 불신을 경고하였듯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성에 대한 불신이라는 그릇된 경향이 수십 년 동안 지속되어 왔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치유책으로 토미즘을 제시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창조주와 피조물, 하느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율이라는 양극단에 직면하여 어느 한 극단으로도 기울지 않았다. 오로지 균형 잡힌 이성만이 현실뿐만아니라 현실을 가능하게 한 초현실도 있는 그대로 볼 수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토마스 철학의 균형이 이성의 자율이라는 위대한 결과를 낳았다. 이성의 탐구 능력은 하느님의 특별한 조명을 요청하지 않고도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며, 이 진리 인식 능력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이성의 본능이다. 따라서 신앙이 넘쳐 광신이 되지 않고 이성이 교만에 빠지지 않는다면, 양자는 결코 모순될 수 없다. 신앙이 이성적 탐구의 검증을 받아들이고 이성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면, 신앙과 이성은 비록 다른 길을 걸을지라도 동일한 목적지에 이를 것이다. 신앙과 이성, 둘 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행 요구와 과제 : 현대 철학의 오류를 바로잡고 신앙과 이성의 진정한 동반자 관계를 회복시키려면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 교황은 세 가지 필수 요구를 언급하였다. 첫째, 철학계가 허무주의의 유혹을 떨쳐 버리고, '의미의 위기' 속에서도 궁극적으로는 인생이 의미가 있다는 의식을 회복하여야 한다. "철학이 하느님의 말씀에 일치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삶의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그 지혜의 차원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81항) 둘째, 철학자들은 인간의 진리 인식 능력-스콜라 철학자들이 말하는, 사물과 지성의 일치를 통하여 객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인식 가능성-을 인정하여야 한다. 이성의 기능은 완전히 종속적인 것이 아니며, 실재의 총체적이고 결정적인 진리 또는 인식 대상의 본질 자체를 지향하고 있다. "성서는 언제나, 인간이 비록 이중성과 거짓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기는 하지만, 명백하고 단순한 진리를 인식하고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82항). 셋째, 철학자들은 자신의 탐구에서 '진정한 형이상학'의 영역을 재발견하여야 한다. 곧 철학적인 이성은 드러난 사실의 틀을 넘어, 경험 자료를 초월하여 궁극의 신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형이상학은 신학적 탐구에서 본질적인 매체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형이상학적 지평이 없는 신학은 종교적 경험의 분석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고, 또 계시 진리의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가치를 일관성 있게 설명하는 '신앙의 이해' 를 가능하게 해주지도 못할 것이다"(83항).
결문 : 교황은 현대 철학의 길을 어지럽히고 있는 일부 사조(思潮)나 주의(主義)들, 곧 절충주의 · 역사주의 · 근대주의 · 회의주의 · 과학주의 · 실용주의 · 허무주의 등에 경고를 보내며, 철학을 그리스도인의 과업으로 회복시키라고 촉구하였다. 그리고 이 회칙을 마무리하면서 철학자들과 신학자들과 주교들에게 명확한 그리스도교 철학을 회복하려는 노력에 동참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교회는 신앙과 이성이 '서로서로 지지하고 있다' 고 확신한다”(100항). "철학적 사고의 중요성과 진정한 차원을 강조하는 가운데, 교회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옹호와 복음 선포를 촉진시켜 왔다. 오늘날 이런 과제들을 완수하기 위해서 그 어느 것보다 시급한 과제는, 사람들이 진리 인식 능력을 발견하고 인생의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의미를 찾게 하는 것이다"(102항). "철학은 민족들의 문화를 반영하는 거울과 같다. 신학적 요구들이 제기하는 도전에 응답하고 신앙과 일치하여 전개되는 철학은 문화의 복음화 곧 새로운 복음화의 일부이다”(103항). 교황은 또한 참된 철학의 빛나는 표상인 "마리아와 함께 철학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이 회칙은 다음과 같은 기도로 끝을 맺고 있다. "상지의 좌이신 마리아께서 진리 탐구에 몸바치는 모든 사람에게 확실한 천국이 되시기를 빕니다. 모든 인식의 확실하고 궁극적인 목표인 지혜를 향한 그들의 여정이, 진리 자체를 낳으시고 당신 품에 안아 그 진리를 온 세계와 영원히 함께 나누신 분의 전구로 온갖 장애물로부터 해방되기를 법니다."
〔평가와 의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의 첫 회칙<인간의 구원자>(Redemptor hominis, 1979. 3. 4)에서 제시한 노선을 따라, 이 회칙에서도 이성이 신앙에서 벗어나는 철학적 재앙을 경고하며, 그리스도교 철학의 가장 좋은 본보기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을 제시하였다. 인
간 이성에 대한 만연된 불신과 철학적 비관론을 불식하고자 하는 의도가 명확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언급은 그리스도교 철학의 지평을 토미즘에 국한시킨다는 오해를갖게 할 수도 있다.
자신의 교황직을 오로지 '진리 · 자유 · 사랑' 의 토대위에서 수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이 회칙에서 드러내고자한 교황은, 모든 사람의 지적인 삶에서 '연대' 를 촉구하고 있다. 이 말은 지난 세기 후반에 폴란드 민족이 매우 소중하게 여기던 가치이기도 하다. 진리를 찾는 길에서 이루어지는 철학과 신학의 협력, 신앙과 이성의 연대는 새로운 천년기의 사상계를 위협하는 절망과 비관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다. 이 회칙은 또한 현대 철학의 지나친 경향, 곧 방법론적인 회의를 통하여 이성의 인식 능력을 극도로 불신하게 된 실용주의에 대한 명확한 답변이기도하다. (→ 신학 ; 그리스도교 철학 ; 스콜라학 ; 신앙 ;신학사 ; <영원하신 아버지> ; 이성 ; 토미즘)
※ 참고문헌 Ioannis Pauli PP. Ⅱ Summi Pontifici Litterae Encyclicae FIDES et RATIO cunctis Catholicae Ecclesiae episcopis de ecessitudinis natura inter utramque, Libreria Editrice Vaticana, 1998/ 이재룡 역,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관하여 가톨릭 교회의 모든 주교들에게 보내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회칙 '신앙과 이성'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9/ Fides et Ratio : The Dialogue Between Fatih and Reason, Documentation Service, vol. 11, Theological Centrum, Metro Manila, Philip-pines, 1998. 10. 10/ 이재룡, <신앙과 이성 사이의 조화-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신앙과 이성' 해설>, <사목> 247호(1999 8),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p. 6~21. 〔姜大仁〕
<신앙과 이성> 信仰 - 理性 〔라〕Fides et Rat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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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신앙과 이성의 관계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결정적으로 명료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