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純祖 1)에 일어난 조선 최초의 대대적이고 면적인 박해. 천주교 4대 박해 가운데 하나로, 1801년 1월 10일(음) 대왕 대비(大王大妃) 정순왕후(貞純王后) 김 씨의 금교령(禁敎令)으로 시작되어 12월 22일(음)에 반포한 <척사 윤음>(斥邪綸音)으로 끝났다.
〔배 경〕 신유박해가 발생하게 된 요인은 우선 사회적 배경에서 찾아야 한다. 조상 제사를 거부하는 천주교는 신해박해(辛亥迫害, 1791)를 계기로 지배층인 양반 유학자들에게 무부 무군(無父無君)의 종교로 인식되었다. 게다가 중인 이하 신분층에게 환영받은 천주교의 평등 사상은 성리학에 입각한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를 위협하는 것으로 비쳤고, 천주교가 만연할 경우 황건(黃巾)과 백련(白蓮)의 난리가 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양반 유학자들은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거듭 주장하였으나, 정조(正祖)는 정학(正學, 性理學)이 크게 밝혀지면 사설(邪說)은 스스로 꺾이고 말 것이라는 온건한 벽이단(闢異端) 정책을 유지하였다. 이러한 정조의 온건한 벽이단 정책은 천주교가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는데, 즉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가 1794년(정조 18) 입국하여 활동함으로써 천주교가 널리 확산되었고, 신유박해가 일어날 당시 교세가 1만 명을 돌파하였다. 그러나 이와 함께 집권 사대부들의 위기 의식도 고조되어 갔기 때문에 정조가 승하할 경우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발생할 것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있다.
또한 정치 세력들간의 대립과 갈등도 박해의 한 배경이 되었다. 당시 집권 세력에 참여하고 있던 남인들은 채제공 일파와 채홍리(蔡弘履) 일파, 신서파(信西派)와 공서파(攻西派)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였다. 채제공과 그를 따르는 세력 중에는 이가환(李家煥) · 정약용(丁若鏞, 요한) ·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등 신서파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공서파인 홍낙안(洪樂安) · 이기경(李基慶) · 목만중(睦萬中) 등이 천주교를 공격하였을 때 채제공은 자파의 피해를 우려하여 공서파를 핍박하였다. 그 결과 공서파는 채제공 일파와 날카롭게 대립하였고, 채제공 일파로부터 계속해서 핍박을 받은 공서파는 채제공 일파를 제거할 기회만을 엿보게 되었다. 그런데 채제공은 1792년(정조 16) 자신이 주도한 <영남 만인소>(嶺南萬人疏)와 이듬해 자신이 올린 상소에서 사도 세자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어야 한다는 임오 의리(壬午義理)를 남인의 공론으로 내세웠다. 또한 사도 세자의 죽음에 대한 영조(英祖)의 후회가 담긴 금등(金藤) 문자를 공개하는 등 신임 의리(辛壬義理)를 주장하는 노론 벽파에 강력히 대항하였다. 이때 남인 중에 채홍리 일파 계열의 홍수보(洪秀輔)와 그의 아들 홍인호(洪仁浩) 형제가 노론 벽파의 편에 서서 채제공을 공격하였고, 공서파는 정치적으로 홍수보 일파와 진퇴를 함께하면서 노론 벽파와 가까워졌다. 마침내 그들은 채제공 일파를 후원하던 정조가 승하하자 천주교 배척을 명분으로 내세워 채제공 일파를 제거하고 남인의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또한 수렴청정으로 정권을 잡은 대왕 대비 김 씨를 비롯한 노론 벽파는 이들을 앞세워 정치적 반대 세력인 남인시파와 노론 시파를 제거하고 세도 정권의 발판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전개 과정〕 1800년(정조 24) 6월 28일(음)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온건한 정책을 펴 왔던 정조가 승하하자 모든 정세는 천주교와 남인에게 더욱 불리해졌다.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섭정(攝政)이 되어 모든 정사를 마음대로 하게 된 대왕 대비 김 씨는 본래 노론 벽파에 속해 있었으므로, 집권하자마자 천주교 신자들과 남인 시파를 일망타진하려고 하였다. 국상(國喪)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대왕 대비 김 씨는 11월 하순(음)에 선왕(先王)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시파의 사람들을 모조리 몰아내고 그 자리를 벽파의 사람들로 채웠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천주교를 박해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서울에서의 박해 : 그 해 12월 17일(음) 중인 최필공(崔必恭, 토마스)이 다시 체포되었고, 12월 19일(음) 새벽에는 그의 사촌 동생인 최필제(崔必悌, 베드로)가 몇몇 신자들과 함께 서울의 큰길 옆에 있는 약국에서 기도를 드리다가 오현달(吳玄達, 스테파노)과 함께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이 무렵 두 양반 신자들이 양근(陽根)과 충주(忠州) 읍내에서 잡혔는데, 한 사람은 조동섬(趙東暹,유스티노)이었고, 또 한 사람은 이기연(李箕延)이었다. 1801년 1월 9일(음)에는 배교자 김여삼(金汝三)의 밀고로 서울의 회장 최창현(崔昌顯, 요한)이 체포되었다. 이러한 연이은 체포로 신자들 사이에는 공포심이 번져 나갔으며, 이러한 공포심은 대왕 대비 김 씨가 1월 10일(음) 공식 박해령을 내림으로써 현실화되었다.
대왕 대비 김 씨는 사학이 서울에서부터 기호(畿湖)까지 날로 더욱 치성해지고 있음을 거론하면서 회개하지 않고 엄한 금령을 어기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역률(逆律)을 적용하여 역적으로 다스리라고 하였다. 아울러 오가 작통법(五家作統法)을 엄히 시행하여 천주교 신자들을 철저하게 색출하고 처벌하라는 하교를 내렸다. 이러한 엄명이 내린 상황에서 명도회(明道會) 회장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의 책 궤짝 사건이 1월 19일(음) 발생하였다. 전년에 있었던 양근 지방의 박해를 피하여 서울에 와 있던 정약종은 천주교 서적과 성물(聖物) 및 주문모 신부의 편지 등이 들어 있는 책 궤짝을 보다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고 하였다. 그래서 자기의 사환인 임대인(任大仁, 토마스)을 시켜 아현(阿峴)에 있는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의 집으로 옮기는 도중, 한성부(漢城府)관원에게 발각되어 임대인은 체포되고 책 궤짝은 압수되었다. 이 책 궤짝 사건으로 신자들은 박해가 크게 확대될 것을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하였으나, 채제공의 외조카인 포도 대장 이유경(李儒慶)이 더 이상의 보고를 하지 않았으므로 10여 일 간은 별다른 일이 없었다. 그리고 2월 2일(음) 새로 부임한 포도 대장 신대현(申大顯)도 옥에 가득 차 있는 배교자들을 모두 석방하고, 최필공 · 최필제 · 최창현 · 임대인 등 충실한 신자 4명만 남겨 놓았다.
그러나 사학을 배척한 공이 인정되어 아경(亞卿)으로 승진한 지 얼마 안된 소북(小北)의 박장설(朴長卨)과 노론의 이서구(李書九), 남인의 최현중(崔顯重) 등이 잇달아 상소를 올려 신자들을 반역죄로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고, 또 신자들을 가볍게 처리한 신대현도 아울러 처벌하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크게 노한 대왕 대비 김 씨는 신대현을 잡아 가두게 하고, 포도청에 갇혀 있던 네 사람을 의금부(義禁府)로 옮겨 반역죄를 적용하게 하였다. 아울러 2월 9일(음)에는 이가환 · 정약용 · 이승훈 · 홍낙민(洪樂敏, 루가) 등을 잡아다가 국문(鞫問)하기 시작하였고, 11일(음)에는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과 정약종을, 14일(음)에는 정약전(丁若銓)을, 16일(음)에는 이기양(李基讓)을 잡아다가 의금부에 가두었다. 남인의 중요한 지도자들과 천주교 지도급 인물들인 이들의 국문은 2월 10일(음)에 시작하여 26일(음)까지 계속되었다. 이들 가운데 정약종 · 홍낙민 · 최창현 · 최필공 · 이승훈 등 5명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하였고, 이가환과 권철신은 옥사하였으며, 이기양은 함경도 단천(端川)으로, 정약용과 정약전은 장기현(長臀縣)과 신지도(薪智島)로 각각 유배당하였다.
경기도 · 충청도에서의 박해 : 박해는 지방에서도 일어나 지도층 신자들이 대거 순교하였다. 충청도에서는 '내포(內浦) 지방의 사도(使徒)' 였던 이존창(李存昌, 루도 비코 곤자가)이 2월 5일(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그 해 2월 26일(음) 정약종 등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다시 공주(公州)로 이송되어 참수당하였다. 또 이 무렵별로 알려지지 않은 한 신자와 청주(淸州)에서 잡힌 이종국도 공주에서 처형당하였다. 경기도 포천(抱川) 지방에서는 홍교만(洪敎萬,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이 아들 홍인(洪鑌, 레오)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는데 그도 2월 26일(음) 정약종 등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였다.
여주(驪州)와 양근에서는 1800년에 이미 잡혀 온 신자들이 서울로 압송되어 결안(結案)이 확정된 뒤 각기 고향으로 이송되어 참수되었는데, 즉 1801년 3월 13일(음) 여주 성문(城門) 밖에서 원경도(元景道, 요한) · 임희영(任喜永) · 최창주(崔昌周, 마르첼리노) · 이중배(李中培, 마르티노) · 정종호(鄭宗浩) 등 5명이 처형되었고, 이때 같이 잡힌 조용삼(베드로)은 옥사하였다. 또 양근에서도 같은 무렵에 유한숙(兪汗淑)과 윤유일(尹有一,바오로)의 동생 윤유오(尹有五, 야고보) 등 13명이 처형되었고, 4월 2일(음)에는 정약종의 아들 정철상(丁哲祥,가롤로)과 최필공의 사촌인 최필제, 중인 정인혁(鄭仁赫), 정광수(鄭光受)의 처 윤운혜(尹雲惠), 정복혜(鄭福惠, 칸디다)와 이합규(李鴿逵) 등 6명이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주문모 신부의 자수와 박해의 확산 :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3월 12일(음) 주문모 신부의 자수로 더욱 가열되었다. 주문모 신부는 조선에 입국한 이래 주로 강완숙(姜完淑, 골롬바)의 집에 거처하면서 활동하였는데, 포졸들이 그의 거처를 탐지하고 덮쳤으나 이를 미리 알아차리고 다른 곳으로 피신하여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 중국으로 피신하려고 황해도 황주(黃州)까지 갔었으나 다시 서울로 돌아온 주문모 신부는, 자신의 도피로 집주인 강완숙 일가와 신자들이 잡히자 자신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 자수하였다. 그리고 4월 19일(음) 군문 효수(軍門梟首)의 판결을 받고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하였다. 주문모 신부의 유해가 땅에 묻혔을 때 신자들은 그 유해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자리를 보아 두었으나 파수꾼들이 몰래 유해를 다른 곳으로 이장했기 때문에 그의 유해가 묻힌 자리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박해는 주문모 신부와 관계했던 인물들로 확대되었다.
우선 주문모 신부를 한때 궁 안으로 피신시킨 사실과 세례받은 은언군(恩彥君) 이인(李䄄)의 처 송 마리아와 그의 며느리 신(申) 마리아가 3월 17일(음) 사사(賜死)되었고, 그 여파로 강화(江華)에 유배 갔던 은언군도 그곳에서 사사되었다. 또 주문모 신부의 진술로 입교 사실이 밝혀진 노론인 양반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의 종형 김백순(金伯淳)과 많은 종교화를 그린 이희영(李喜英, 루가)이 3월 29일(음)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하였고, 김건순도 4월 20일(음) 같은 장소에서 참수당하였다. 5월 22일(음)에는 주문모 신부를 6년 간 헌신적으로 도왔던 여성 회장 강완숙과 궁녀 강경복(姜景福, 수산나), 전 궁녀 문영인(文榮仁, 비비안나) 최인길(崔仁吉, 마티아)의 동생 최인철(崔仁喆, 마티아), 김범우(金範禹)의 일곱째동생 김현우(金顯禹, 마태오), 이희영의 조카 이현(李鉉) , 홍필주(洪弼周, 필립보)와 가까운 친척인 홍정호(洪正浩), 김연이(金連伊, 율리안나), 한신애(韓新愛, 아가다) 등 9명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하였으며, 김범우의 셋째 동생 김이우(金履禹, 바르나바)도 이때 포청에서 고문을 받다 죽었다. 또 이날 정광수의 누이 정순매(鄭順每), 윤유일의 사촌 누이 윤점혜(尹占惠, 아가다) 평산(平山) 출신의 고광성(高光晟), 음성(陰城) 출신의이국승(李國昇), 봉산(鳳山) 출신의 황(黃) 포수 등도 사형 언도를 받았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고향인 여주 ·양근 · 평산 · 봉산 · 공주로 각각 이송되어 처형당하였다. 이들 외에도 이 시기에 공주에서 문윤진이라는 여종이, 양근에서는 배석골 전주 이씨 양반 집 이재몽과 이괘몽, 그리고 이들 중 한 사람의 두 딸, 지여울 사는 양반집안 출신 김원성, 이광헌(李光獻, 아우구스티노)의 먼 친척이자 이동지(李同知)의 딸인 이 아가다 등 많은 사람이 참수를 당하였다. 양근에서 순교자가 특별히 많았던 것은 군수 정주성(鄭周誠)이 잔인하게 신자들을 박해했기 때문이었다.
전라도에서의 박해 : 전주에서는 3월(음)부터 박해가 시작되었는데, 전라도 지방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은 박해 초에 체포된 즉시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유항검의 동생 유관검(柳觀儉), 윤지충(尹持忠, 바오로)의 동생 윤지헌(尹持憲), 유항검 집안과 인척간인 이우집(李宇集)등이 체포되어 3월 28일(음)부터 전주 감영에서 문초를 받았고, 중인 김유산(金有山)도 유관검의 고발로 붙잡혀 4월 26일(음) 문초를 받았다. 또한 이들의 고발로 전주 · 금산 · 고산 · 영광 · 무장(茂長) · 김제 등 여러 고을에서 200명 이상의 신자들이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다. 이때 이우집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서양 선박을 불러들이려는 계획이 탄로되었고, 이 계획에 유항검 · 유관검 · 윤지헌 · 이우집 등이 관련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배교자들은 석방하거나 귀양보내고 중요한 인물들만을 의금부로 압송하여 판결을 받게 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서양 선박을 불러들이려는 계획과 무관한 양반 집안 출신 한정흠(韓正欽, 스타니슬라오), , 유항검 집의 종 김천애(金千愛, 안드레아), 최여겸(崔汝謙, 마티아) 등은 7월 13일(음) 사형 선고를 받고 고향인 김제 · 전주 · 무장으로 각각 이송되어 처형당하였다. 그리고 서양 선박을 불러들이려는 계획과 관련된 유항검 · 유관검 · 윤지헌 · 이우집 등은 9월 11일(음) 사형 선고를 받고 전주로 압송되어 처형당하였다.
백서 사건 : 신유박해는 황사영의 <백서>(帛書) 사건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황사영은 정약용의 고발로 2월 11일(음)에 체포령이 내렸으나, 7개월이 넘도록 붙잡히지 않고 도피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는 피신 중에 만난 김한빈(金漢彬, 베드로)을 따라 충청도 배론으로 피신하여 김귀동(金貴同)의 집에 은거한 뒤, 그곳에서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과 김한빈 등을 통해 수집한 박해 과정을 기록하면서 교회의 재건 방안을 구상하였다. 이때 황심(黃沁, 토마스)이 김한빈을 만나기 위하여 제천(堤川)으로 찾아왔다. 황사영은 8월 26일(음) 황심을 만나자 박해로 폐허가 된 조선 교회의 실정과 조선 교회의 재건과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서양 군함의 파견 등을 요청하는 내용의 <백서>를 작성하여 북경 주교에게 발송하려고 하였다. 황심은 중국을 여러 번 왕래한 옥천희(玉千禧)와 함께 <백서>를 북경에 가져 가기로 결정하였으나, 옥천희가 북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책문에서 잡히고 옥천희의 고발로 황심이 9월 15일(음) 체포됨에 따라 발각되고 말았다. 이 <백서> 사건으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크게 일어났는데, 황심의 고발로 황사영과 김한빈이 9월 29일(음) 제천에서 잡혔고, 동래(東萊) 앞바다에 정박한 외국 배에 올라가 본 적이 있는 역관(譯官) 집안 출신 현계흠(玄啓欽)도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아울러 정약용 · 정약전 등도 황사영과의 공모여부를 캐기 위하여 다시 체포하였다. 백서 사건 관련자들 가운데 김한빈과 황심은 10월 24일(음) 판결을 받고 이튿날 참수당하였으며, 황사영 · 옥천희 · 현계흠은 11월 5일(음) 처형당하였다. 그리고 정약용 · 정약전 등은 공모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강진(康津)과 흑산도(黑山島)로 각각 유배당하였다.
황사영과 관련자들을 신문하는 동안 동지사(冬至使)가 출발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자 조정에서는 <백서>가 발각된 이후 청국인(淸國人) 주문모 신부의 처형 사실이 청나라에 알려질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에서는 진주사(陳奏使)를 파견하여 신유박해 전반에 관한 청나라의 이해를 촉구하고, 주문모 신부의 처형에 따른 청나라측의 반발을 예방하고자 하였다. 조정에서는 조윤대(曹允大)를 동지사 겸 진주사로 임명하고, 가지고 갈 <토사주문>(討邪奏文)을 대제학 이만수(李晚秀)에게 작성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주문(奏文) 내용을 입증할 증거로 <백서>의 사본도 가지고 가기로 하였는데, 그것은 불리한 내용을 삭제한 소위 <가백서>(假帛書)였다. 진주사 조윤대의 파견은 황사영의 <백서> 사건을 외교적인 측면에서 마무리 짓는 것이었다.
이렇게 황사영의 <백서> 사건이 일단락되자 대왕 대비 김 씨는 천주교를 박해한 일을 종묘(宗廟)에 고유(告由)하게 하고, 아직도 죄상을 추궁하지 못한 사학 죄인에 대한 신문도 연말까지 끝내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박해의 전말과 그 당위성을 알리는 반교문(頒敎文), 즉 <척사 윤음>을 12월 22일(음) 반포하였다. 이에 따라 12월 22일(음) 귀양보냈다가 다시 체포한 유항검의 처 신희(申喜), 며느리 이순이(李順伊, 루갈다)와 유관검의 처 이육희(李六喜), 아들 유중성(柳重誠, 마태오)에 대한 사형 선고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출신지인 전주로 압송되어 처형당하였다.
그리고 12월 26일(음) 16명에 대한 사형 선고가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 이윤하(李潤夏)의 아들 이경도(李景陶, 가롤로) · 손경윤(孫敬允) · 김계완(金啓完, 시몬) ·홍익만(洪翼萬, 안토니오) · 최설애(崔雪愛) · 김의호(金義浩) · 송재기(宋再紀) · 장덕유(張德裕) · 변득중(邊得中) 등 9명은 서울에서 처형되었다. 또 정광수는 여주에서, 김귀동과 황일광(黃日光)은 홍주(洪州)에서, 김일호(金日浩)와 권철신의 양자인 권상문(權相問)은 양근에서, 한덕운(韓德運)은 광주에서, 홍교만의 아들 홍인은 포천에서 각각 처형당하였다. 이렇게 해서 가혹하고 잔인했던 신유박해는 막을 내렸다.
황사영이 전한 바에 따르면, 신유박해 때 서울에서 희생된 신자들의 숫자는 정식으로 처형된 자와 옥중에서 죽은 사람을 합하여 300여 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숫자는 지방에서 희생된 신자는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결국 이들까지 포함할 경우 신유박해 때 희생된 신자들의 숫자는 300여 명보다 훨씬 더 많았음이 틀림없다.
〔의미와 영향〕 신유박해는 조선의 교회나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첫째, 신유박해로 인하여 조선의 교회는 큰 타격을 받았다. 물론 신유박해 이전에도 박해가 있었지만 그것은 일부 신자들에 국한된 부분적인 박해였다. 그러나 신유박해는 조선 교회에 가해진 최초의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박해로 교회를 거의 폐허화시켰고, 어렵게 영입한 주문모 신부가 순교함으로써 유 파치피코(余恒德) 신부가 1834년(순조 34)에 입국할 때까지 목자없는 교회여야 했다. 또 지도층 신자들이 거의 다 순교또는 유배되거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산간 벽지로 피신함에 따라 교회는 거의 빈사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더욱이 천주교와 신자들에 대하여 '매국노' · '불효' ·'마술자' · '풍속 사회 안녕 질서의 문란자' · '방탕' 등으로 규정한 반교문의 반포로 천주교를 언제라도 박해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마련됨에 따라 다시 교회를 재건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둘째, 신유박해를 계기로 천주교 신앙이 보다 더 넓은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살아 남은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경기도 · 충청도 · 강원도 · 경상도 등의 산간 지방으로 숨어 계속 복음을 전하였다. 또한 죽음을 앞둔 신자들의 용기와 귀양간 이들의 인내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어 조선의 구석진 시골까지 천주 신앙이 빠르게 전파되었다. 결국 신유박해는 일시적으로는 교회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오히려 천주교가 더욱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셋째, 신유박해를 거치면서 천주교가 민중 신앙으로의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물론 신해박해를 계기로 중인 이하 신분층의 신자들이 차지하는 교회 내의 역할과 비중이 이전에 비해 크게 확대되었지만, 여전히 양반 신자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유박해를 계기로 양반 신자들의 대부분이 순교 또는 배교하고 귀양감에 따라 스스로 양반 지위를 포기한 민중적 양반이나 중인 이하의 신분층이 교회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로써 교회의 민중적인 성격은 더욱더 뚜렷하게 드러났다.
넷째, 신유박해를 겪으면서 서양의 발달된 과학 기술까지도 탐구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서양 군함 등을 요청하여 신교의 자유를 얻고자 하는 황사영의 <백서> 내용이 드러나면서 천주교는 무부 무군의 패륜적인 종교라는 인식에 반국가적인 종교라는 인식을 더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천주교는 물론이고 발달된 서양 과학 기술까지도 배척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의 과학 기술은 낙후된 상황을 면치 못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근대화의 기회도 놓치고 말았다. 다섯째, 신유박해를 계기로 세도 정권이 수립되었다.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으로 정권을 잡은 대왕 대비 김 씨를 비롯한 벽파는 천주교 배척을 명분으로 채제공 일파를 제거하고, 남인 공서파를 이용하여 정치적 반대 세력인 남인 시파와 노론 시파를 제거하고 세도 정권의 발판을 구축했다. (→ <가백서> ; 박해 ; <백서> ; 벽이단론 ;서소문 밖 ; 주문모 ; 한국 천주교회 ; 황사영)
※ 참고문헌 趙珖, 《조선 왕조 실록 천주교사 자료 모음》,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1974/ ㅡ, 《신유박해 자료집》 1~3,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1999/ 《邪學懲義》, 한국교회사연구소, 19771 《黃嗣永帛書》, 한국교회사연구소, 1966/ <추안급국안> 25, 아시아문화사, 1978/李基慶, 《闢衛編》 한국교회사연구소, 1978/ <달레 교회사》 上, pp.357~619/ 최석우, <天主敎의 迫害〉, 《韓國天主教會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pp. 98~105/ 陳仁權, <辛酉邪獄에 關한 研究>,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박사 학위 논문, 1986/ 尹敏求, <신미년(1811)에 조선 천주교 신자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연구>, <논문집》 2집, 수원 가톨릭대학, 1990/ 여진천 편, 《황사영 백서 논문 선집》, 기쁜소식, 1994/ 趙珖, <周文謨의 朝鮮入國과 그 活動〉, 《敎會史研究》 10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pp. 45~921 車基眞, 《星湖學派의 西學認識과 斥邪論에 대한 研究》,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 학위 논문, 1996/ 一, 〈朝鮮後期 천주교 신자들의 聖職者迎入과 洋舶請來에 대한 연구>, 《敎會史研究》 13집, 1998, pp. 19~71/ 河聲來, <潢嗣永의 敎會活動과 殉敎에 대한 研究>, 《敎會史研究》 13집, 1998, pp.73~144/ 方相根, <황사영 '帛書 의 분석적 이해>, 《教會史研究》 13집, 1998, pp. 145~175/ 이원순, <천주교의 수용과 전파>, <한국사> 35, 국사편찬위원회, 1998. 〔徐鍾泰〕
신유박해 辛酉迫害
글자 크기
8권

1 / 2
신유박해는 음력 1801년 1월 10일 정순왕후의 금교령(왼쪽)으로 시작되어 12월 22일에 반포한 반교문 즉 <척사 윤음>으로 끝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