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주 본당\

新義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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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교구 소속 침묵의 본당. 평안북도 신의주시 진사동(眞砂洞) 소재. 1922년 의주(義州) 본당 관할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가 1949년 폐쇄되었으며, 주보는 천주 성령. 관할 지역은 신의주시와 의주군 위화면 전지역이었다. 〔역대 신부〕 초대 박정렬(朴貞烈) 바오로(1922~1923. 10), 2대 박우철(朴遇哲) 바오로(1924. 1~1926. 5), 3대 번(P. Byrne, 方溢恩) 파트리치오(1926. 5~1927. 3), 4대 페티프렌(R. Petipren, 邊) 로이(1927. 3~1935), 5대 크레이그(H.Craig, 奇) 후고(1935~1940) , 6대 페티프렌(1940~1942. 2) , 7대 오기선(吳基先) 요셉(1942.2~1944. 5), 8대 홍건항(洪健恒) 갈리스도(1944. 5~1949.12).
신의주 지방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인천에 살던 김소사가 1910년에 이곳으로 이사해 오면서부터였다. 김소사는 이듬해 고향 인천에서 구네군다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한 후 다시 신의주로 돌아와 이곳 주민들에게 신앙을 전파하였고, 1912년에는 의주 본당 서병익(徐丙翼, 바오로) 신부가 이곳에 공소를 설립하고 미사를 봉헌해 주었다. 그 후 1922년에 신의주가 평안북도 도청 소재지가 되면서 교세가 크게 신장되자 본당 설립을 갈망하던 신자들은 합심하여 초음동(初音洞)에 부지를 마련하고 10여 칸의 한옥 성당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그 해 본당으로 승격되어 의주 본당 보좌 박정렬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고, 이어 2대 주임 박우철 신부는 신자수가 300여 명으로 늘어나자 진사동에 부지를 매입한 뒤한 · 양 절충식의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였다. 이때 부지 매입과 공사 감독 등을 주관했던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번 신부가 1926년 5월에 3대 주임으로 부임하였으나, 이듬해 평양 지목구가 설정되면서 초대 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평양으로 떠나고, 페티프렌 신부가 후임으로 부임하였다. 4대 주임 페티프렌 신부는 사제관을 신축하고, 본당 교세 신장에 주력하면서 인근 지방에 여러 공소를 개설하였다. 또 가난한 아동들을 위하여 야간 학교를 개설하는 등 교육 활동에도 힘썼으며, 수녀원 신축을 서두르는 한편, 의주의 메리놀 수녀회 수녀 3명을 초빙하여 시약소(施藥所)와 성모병원을 병설하고 의료 사업을 전개하였다. 특히 의학 박사인 메르시(Hirschboeck Meercy) 수녀의 헌신적인 빈민 의료 활동은 가톨릭에 무관심했던 이 고장 사람들에게 천주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심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선교에도 큰 효과를 보았다. 1930년에는 모리스(J. Morris, 睦怡世) 지목구장의 집전으로 성당 봉헌식을 거행하였고, 1935년에 휴가차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후임으로 크레이그 신부가 부임하였다.
5대 주임 크레이그 신부는 초등 교육 기관인 성심학교(聖心學校)를 개설하여 교육 사업에 힘썼고, 야학 운영체제를 재정비하였으며, 1936년 12월 13일에는 성모병원을 연와제 2층으로 확장하여 더 적극적인 의료 사업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에 힘입어 신의주 본당은 설립 15여 년 만에 신자수가 1,303명을 기록할 만큼 급성장하였고, 성심학교 학생수도 계속 증가하였다. 또 이 일대의 거주 인구수도 크게 증가하여 1939년에는 마전동(麻田洞) 본당을 분할하였는데, 이때 성심학교와 마전동 일대를 비롯하여 북하동 공소를 제외한 모든 공소를 이곳으로 이관하였다. 1940년에는 페티프렌 신부가 6대 주임으로 재부임하였으나, 이듬해 12월 8일 신의주와 마전동 일대에서 사목하던 메리놀 외방전교회 신부와 수녀, 그리고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수녀 2명이 신의주 경찰서에 감금됨에 따라 신의주 본당은 담당 신부가 없는 공석 본당이 되고 말았다.
1942년 2월 평양 대목구 사목권이 서울 대목구로 이양되면서 오기선 신부가 7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당시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신부들이 모두 신의주 본당 사제관에 감금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기선 신부는 우선 마전동 본당에 거주하면서 신의주 시내의 두 본당과 만주 및 안동 시내에 있던 본당들을 관할하였고, 성심학교 교장직도 겸하였다. 또 같은 해 4월 28일 마전동 본당에 있던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분원이 신의주 본당으로 이전한 데 이어 6월에 오기선 신부 역시 신의주 본당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마전동 본당을 신의주 본당으로 통합하였다. 오기선 신부는 재정 빈곤과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열성적으로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고, 신자들은 오랜만에 한국인 신부를 맞아 활기 찬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성심학교와 야학이 폐교되었고, 성탄 대축일 미사를 몰래 봉헌하던 오기선 신부와 그 자리에 참례 했던 신자들이 모두 붙잡혀 고문을 당하는 등 시련을 겪었다. 1944년 5월 홍건항 신부가 8대 주임으로 부임한 뒤 광복을 맞았으나, 소련군 진주와 공산 정권 수립으로 1949년에 성당과 부속 건물을 몰수당하였고, 같은해 12월 10일에는 본당 회장 이석태의 집에서 기거하며 미사를 봉헌하던 홍건항 신부마저 체포되면서 본당도 폐쇄되고 말았다. (→ 평양교구 ; 침묵의 교회 ; 마전동 본당 ; 의주 본당)
※ 참고문헌  平壤教區史 編纂委員會 編, 《天主教平壤教區史》,분도출판사, 1981/ 《가톨릭 사전》/ 김영걸, 《다시 보고 싶은 오기선신부》, 오늘의 말씀, 1992/ 《교회와 역사》 244호(1995. 9), 한국교회사연구소/ 《교회와 역사》 298호(2000. 3), pp. 13~17/ 《경향잡지》 823호(1936. 2. 12), p. 93 ; 844호(1936. 12. 28), pp. 754~755. 〔吳美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