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 정치 神政政治 〔라〕theocratia 〔영〕theocr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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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이스라엘 백성 통치 역시 신정 정치였다.

모세의 이스라엘 백성 통치 역시 신정 정치였다.

신이 직접 지배한다는 사상이지만 실제로는 신적인 권위에 기초한 군주가 지배하는 형태. 정치 권력자가 자신의 권력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절대적 권력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국민의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정치 체제이다.
〔발전 역사〕 고대 사회 : 원시 사회에서 사회 생활을 전적으로 규제한 것은 종교였다. 따라서 종교적 원리에 의거하는 정치 즉 신정 정치가 일반적인 정치 형태였으며, 권력은 종교적 · 정신적인 것으로서 그 구성원을 구속하였다. 그 구성원은 원시적인 공동체에 인격적으로 완전히 매몰되어 있었고, 윤리의 규범성은 의식화되지 않고 일상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원시 사회에서 사회의 지도자는 주술사(呪術師) · 사제 · 신관(神官) 등이었고, 명령적 지휘자로서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그들은 사회에 가치를 부여하는 질서의 형성자로 존재하였으며, 질서와 권력의 정통화에 결정적인 기능을 종교가 담당함으로써 원시 사회의 안정을 가능하게 하였다. 원시 사회가 붕괴한 뒤 형성된 고대 국가에서도 원시 사회의 신정 정치는 정치 사회의 통제에 유효한 원형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신정 정치가 거대한 동양 제국(帝國)에 있어서는 통치를 위한 권력 기구인 관료제를 형성하게 하였다. 여기서 공공 규범과 백성의 윤리는 명백히 구별되어 공공 규범은 황제의 신격화(神格化)로 변화되었다. 반면에 백성의 윤리는 종족적 공동체의 습속이나 관습으로 원시 사회에서처럼 일상화된 형태로 존립하였는데, 여기에서도 종교는 여전히 큰 힘을 발휘하였다. 황제의 신격화에 따른 황제 숭배와 예배 또한 거대한 권력 기구를 유지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황제의 강제적 물리성에 의한 권력 지배로는 백성의 반항만을 초래할 뿐이므로, 비폭력적인 종교나 가족 윤리를 통해 그 정통성을 인정받고 심리적인 보완을 이루고자 하였던 것이다. 백성의 정치에 대한 심리적 보완에 있어서 가장 적절하고 설득력 있는 것이 종교와 가족 윤리를 기본으로 하는 인륜적 윤리(人倫的 倫理)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시 국가인 폴리스(polis), 즉 그리스와 로마의 도시 국가에서의 정치와 윤리는 동양 제국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초기 폴리스에서도 습속이나 관습은 신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도시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었고, 윤리는 폴리스적 윤리로 정착되었다. 폴리스는 시민의 공동체였지만 그곳에서 생활하던 노예와 외국인은 폴리스에서 소외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인간다운 생활은 폴리스에서만 가능한 것이었고 폴리스 없이는 인간은 신 아니면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지만 폴리스의 붕괴로 폴리스적 윤리의 존속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알렉산더 제국은 동양 제국의 전통을 계승해서 황제를 신격화하고 황제 예배로서 권력을 유지하려고 하였으나 그 기간은 잠깐 동안에 그치고 폴리스의 전통은 로마로 이어졌다. 그러나 헬레니즘 시대에 와서 개인은 더 이상 '정치적 동물' 일수 없었다. 다시 말해 이 당시 스토아 철학에서의 개인은 세계 시민(cosmopolités)이었고, 폴리스적인 관습과 관계없이 이성화된 개인 의식의 표현이었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서 진정한 국가는 신적 이성이 지배하는 코스모스(cosmos)이며, 코스모스에서는 국가의 대립, 인종이나 귀천의 차별과 같은 불합리한 것들은 철폐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성서와 교회에서의 신정 정치 : '신정 정치' 라는 용어는 유대계 역사가 요세푸스(F. Josephus, 37/38~100)가 자신의 저서 《아피온 반박문》(Contra Apionem)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는데, 여기에서 그는 모세의 이스라엘 백성 통치를 설명하면서 "우리의 입법자는 우리의 정부를 하느님에게 권위와 권력이 있는 신정 정치 체제로 규정하였다" (2. 16. 165)라고 하였다. 이스라엘의 왕정 시대나 바빌론 유배 시기부터 마카베오 시대까지 고위 성직자 계급에 의해 다스려지던 형태 역시 신정 정치였다.
또한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는 공권력은 하느님께로부터 온다고 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위에 있는 공권에 복종해야 합니다. 어떠한 공권도 하느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으면 있을 수 없으며 기존하는 공권은 하느님께로부터 명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공권에 반항하는 이는 하느님의 명령에 맞서는 것입니다" (로마 13, 1-7 ; 참조 : 1베드 2, 13-14 ; 디도 3, 1). 반면에 체사르의 권력은 합법적인 것이며, 하느님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견해도 있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 주시오. 그러나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 드리시오"(마태 22, 21).
교황 젤라시오 1세(492~496)는 영적인 권위와 정치적 권력을 구분하였지만,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1085) ,인노첸시오 3세(1198~1216), , 보니파시오 8세(1294~1303)등에 의해 이 두 가지 권력의 혼합이 이루어져 많은 연구자들은 이 교황들을 신정 정치적 왕조라고 일컬었다. 사실 교회의 정치 이론에서는 정치적인 힘의 자치를 인정하고 있지만, 위에 언급한 교황들에게 있어서는 예외였다. 중세부터는 영적인 부분을 거스른 정치적인 합법적 권력이 확대되면서 교회의 영적인 권위는 쉽게 손상되었다.
중세와 근대 사회 : 신정 정치는 종교적 원리로 정치를 하는 것이고, 이는 다시 말해 종교가 가장 큰 사회적 기능을 발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회적 분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종교와 정치의 결합이 무너졌고, 특히 종교 개혁을 통하여 양자의 분리가 요구되었다. 즉 세속화 과정을 통한 근대 사회의 성립이 그것이다.
한편 뮌처(Thomas Münzer, 1489~1525)는 세계적인 삶을 정신적인 삶으로 선회하고자 하는 종교적 정치의 조류들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신화된 인간은 세속적 공동체인 국가의 구성원이 아니며, 이미 정치적 동물도 아니다. 종교적 정치는 정치적 세력들이 정신적인 힘을 다시 독점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 어떤 사상가는 서유럽의 큰 불행은 정치적인 칼〔敎權)과 세속적인 칼〔俗權)의 분리라고 설명하면서, 마음과 양심 그리고 신적 존재 자체도 풀어졌고, 근대 사회의 울밑에서 영원한 혁명이 멈추어 있다고 하였다. 즉 영혼 곧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는 국가는 국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현대 전체주의 운동에 있어서 정치는 하나의 세계관, 즉 하나의 종교, 하나의 신과 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에 매여 있다.
블룬칠리(J.C. Bluntschli, 1803~1881)는 신이 지배하는 '신정 정치' 와 성직자나 승려가 지배하는 '교권 통치주의' (hierokratie)로 구별했다. 그는 신정 정치가 샤머니즘(shamanism)의 유산이며, 주술사가 신의 의탁이라고 하여 자기의 판단을 절대화함으로써 그것을 피지배층에게 강요하는 고대 종교의 관습에서 시작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고대 이스라엘의 민족 지도자 모세부터 다윗과 솔로몬에 이르는 왕정과 왕정이 분열되고 남부 유다 왕국이 멸망한 후의 사제 정치와 신전(神殿) 정치가 바로 신정 정치의 형태라고 하였다. 고대 이집트와 인도의 정치형태도 신정 정치라고 할 수 있고, 중세 시대 교황에 의한 정치적 지배와 신성 로마 제국에서도 신정 정치를 볼수 있으며, 근세에는 칼뱅(Jean Calvin, 1509~1564)이 지배한 제네바가 신정 정치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왕권 신수설(王權神授說, divine right theory)을 근거로 한 절대 군주 정치는 프랑스의 루이 14세(1643~1715)와 영국의 제임스 1세(1603~1625)의 정치에서 볼 수 있는데, 신권론자로는 프랑스의 보쉬에(J.B. Bossuet, 1627~1704)와 영국의 필머(R. Filmer, 1588?~1653)가 꼽힌다.
〔일본에서의 신정 정치〕 그리스도교적인 신정 정치의 예를 통해서만 보더라도 '신의 나라' 라고 하는 등 어떠한 형태로든 간에 신국 사상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신국 정치를 논함에 있어서 일본 신화 또는 신도(神道)에 사상적 근원을 둔 일본의 신국 사상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일본의 신국 사상은 명치 유신 이후 근대 국가 형성을 매개로 하여 강화되었고, 그 후 초국가주의적 형태로 전환되었다. 남북조 대립 시대의 《신황정통기》(神皇正統紀)에도 이미 나타나고 있지만, 일본의 신국 사상은 몽고 침략 때의 신풍(神風) 사상 등 대외적인 위기에 봉착하였을 때 등장하였다. 이와 같은 신국 사상은 명치 시대에 이르러 유럽으로부터의 충격에 의한 대외적 위기에서 국민적 과제를 수반하였다. 신국사상은 부락 개척의 전통에서 그 정통성의 근거를 구하였으며, 천황 신화(天皇神話)를 통하여 국민을 신의 후예 즉 신수(神受)의 것으로 간주하였다. 또한 일반 서민을 흡수하기 위하여 부자(父子)의 정(情)을 내세우고, 무사 계급을 규합하기 위하여 군신(君臣)의 의(義)를 내 세워 신의 이름 아래 이들을 결합하였다. 그리고 국민 전체의 결집을 구현함으로써 봉건적인 지방 분권을 초월 ·극복하고 이를 계기로 통일된 국권을 형성하였다. 특히 외부의 충격 아래 이루어진 근대화와 이에 대한 반발은 토지 소유를 둘러싼 왕토론과 국토론의 대립을 낳았으며, 봉건적 충성주의는 제도의 근대화에 있어서 여러 가지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신국론은 신예론(神裔論)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민족 동조론(民族同祖論)을 근거로 한 가족 국가론으로 전환되었으며, 신민제(臣民制) · 천황제가 형성됨에 따라 신국 사상은 그 정서적 배경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또 이러한 신국 사상은 일본이 군국주의화함에 따라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념으로 사용되었으며, 나치 독일의 사상적 영향을 받아 이른바 대동아 공영권의 맹주라는 선민 사상(選民思想)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실효성에 있어서 신국 사상은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 (→ 정치 ; 칼뱅, 장)
※ 참고문헌  Jean-Baptiste Duroselle, Que-sais-je?, Histoire du Catho-licism, no. 365, Paris, Presses Universitaire de France, 1967/ J.N. Figgis, The Divine Right ofKings, London, 2nd ed., 1922/ H. Nakamura, History of the Development of Japanese Thought from A.D. 592 to 1868, vol. 1~2, NewYork, 1970/ E. Troeltsch, Soziallchren der Christlichen und Grupen, 1925/ A. Langner, Katholizmus und Freiheitlicher Sozialismus in Europe, Mün-chen, 1965. 〔洪淳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