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I. Kant, 1724~1804)의 학설을 1870~1920년 사이 독일에서 옹호 · 비판하였던 학자들과 그 학설을 일컫는 말. '신칸트 학파' 라고도 불린다.
〔기 원〕 신칸트주의는 독일의 특수한 사회적 · 문화적 상황에서 발생한 것으로, 오랜 지적 특성들과 함께 하나의 새로운 학문적 풍토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특히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 1788~1860) 등의 비합리주의, 자연 과학의 발달에 힘입은 사변적 자연주의, 헤켈(E.H.Haeckel, 1834~1919) 등의 통속적 유물론, 그리고 회의론 등에 맞서 칸트의 비판 철학을 기초로 '칸트로 돌아갈 것' 을 제창하였다. '신칸트주의' 라는 명칭은 리프만(O.Liebmann, 1840~1912)이 1865년에 슈투트가르트(Stut-tgar)에서 "칸트로 돌아가자" 라는 입장의 《칸트와 그 후예들》(Kant und die Epigonen)을 출판한 데서 비롯되었다.
〔초기 신칸트 학파〕 신칸트 학파의 초기 인물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철러 (E. Zeller, 1814~1908)는 《인식론의 의미와 과제에 대하여》 (Über Bedeutung und Aufgabe der Erkenntnistheorie, 1862)에서 인식론으로의 복귀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칸트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저명한 철학사가로 리프만과 빈델반트(W. Win-delband, 1848~1915)의 스승이었던 피셔(K. Fischer, 1824~1907)는 1860년에 칸트에 대한 저서 《칸트의 생애와 학문의 기초》(Kants Leben und die Grundlagen seiner Lehre)를 출판하였다. 이 저서는 특히 칸트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그 연구를 활성화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랑게(F.A. Lange, 1828~1875)는 《유물론의 역사》(Geschi-chte des Materialismus, 1866)라는 그의 저서를 통하여 유물론의 형이상학적 문제를 검토하면서 유물론이 전통적으로 과학의 결론들을 신학과 미신의 영역으로까지 확대하는 만용을 저질러 왔다고 비판하였다. 그에 따르면 감각세계는 인간의 감관(感官)과 실재(實在)의 상호 작용에 의한 산물이며, 이 상호 작용에 의해 경험 세계가 결정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심리학과 생리학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 인과율과 같은 사고 원리도 사실은 심리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칸트의 예지계(叡智界, intelligible Welt)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랑게는 물자체(物自體, Dinge an sich)와 예지계의 존재를 불가피하게 가정하였던 칸트의 학설을 완전히 거부하면서 단지 이것은 시적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과학적 지식의 타당성을 경험 세계에 한정시키고자 한 점에서 랑게는 칸트 인식론의 정신을 이어받았다고 할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물자체의 인식 불가능성과 존재론적 형이상학의 성립 불가능성을 주장함으로써, 칸트 철학의 형이상학적 구도를 무시하고 경험론적이고 심리학적인 경향으로 흐르고 말았다. 비판적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주장하였던 리프만과 폴켈트(J. Volkelt)역시 그러하였다. 이 두 사람은 칸트의 감성론(感性論)을 비판하면서 불가지론적(不可知論的) 실재론으로 기울어 칸트의 논리적 선험성을 심리적 · 생득적인 것으로 해석하려고 하였다.
〔후기 신칸트 학파〕 후기에 와서 신칸트주의는 새로운 면모를 보여 주었다. 후기에 속하는 철학자들은 칸트의 비판 정신에 의해 칸트의 인식론을 철저히 파악함으로써 전기의 심리주의적 · 주관주의적 요소를 배격하고, 칸트 철학의 참모습을 비판적 · 초월적(transzendental) 측면에서 찾아내고자 하였다. 이러한 후기의 신칸트주의 운동은 코엔(H. Cohen, 1842~1918) · 나토르프(P. Natorp, 1854~1924) · 카시러(E. Cassirer, 1874~1945) 등의 마르부르크 학파(Marburger Schule)와, 빈델반트 · 리케르트(H. Rickert,1863~1936) 등으로 대표되는 하이델베르크 학파(Heidel-berger Schule)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후자는 특히 서남 독일 학파 또는 바덴 학파(Badische Schule)라고 불리기도 한다.
마르부르크 학파 : 이 학파에서는 칸트의 수학적 · 자연 과학적 인식의 이상으로부터 출발하여, 물자체를 거부하고 논리적으로 형식이 갖추어지지 않은 질료(감성적 직관을 통하여 수용된 감각 자료)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은 대상이 로고스(logos, 사유 혹은 정신)에 의하여 산출된다고 보고, 이 로고스의 형식 · 개념 · 기능 · 방법 등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들은 형이상학을 거부하였으며, 인식론에 주로 관심을 집중하였다. 미학과 윤리학을 다루기는 하지만 그 경우에도 형식주의와 비판주의를 강조하였으며, 따라서 형식과 타당성을 중시하였다.
코엔은 랑게의 젊은 동료였으나, 랑게와 리프만 등의 칸트주의에서 엿보이는 자연주의를 거부하였다. 다시 말해 철학은 인간 의식의 분석에서 시작된다는 랑게와 리프만의 생각, 즉 철학의 과제는 실재와 구분되는 현상 세계를 산출하기 위해서 인간 의식이 어떻게 감각 자료에 개념을 적용하는가를 밝혀 내는 것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이 이해하여야 할 '사실' 은 지극히 모호한 심리적 과정이 아니라 과학 그 자체인 사실이라고 하였다. 또 윤리학에 있어서도 '사실' 은 인간의동기 · 욕구 · 의무감 등이 아니라, 과학적 법학에 의해 수립된 법의 지배를 받는 시민 사회의 사실이라고 하였다. 칸트도 '과학과 문화의 사실' 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그는 이러한 사실을 모호한 심리학적 사실 및 현상학적 사실로부터 분리하는 데 실패하였다. 코엔에 따르면, 순수 사유에는 본래 주어지는 것(Gegebene)이 아무것도 없다. 다시 말해서 칸트가 믿었던 것과 같은 직관적 자료, 사고와 독립해서 주어지는 어떤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유는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 내용을 스스로 지니고 있는 사유야말로 객관으로서의 실재 그 자체이자 지식의 목표이다. '사실' 또한 완전히 사유에 의해 결정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물자체 역시 결코 물(物)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사물의 완전한 규정을 위한 인간의 접근에서 요구되는 하나의 한계 개념(Grenzbegriff)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칸트의 수용성의 능력인 감성과 자발성의 능력인 오성과 감성을 촉발하는 대상인 물자체라는 가정, 즉 인식론에 있어서 형식과 질료를 구분하는 이원론(二元論)을 극복하였다. 그에 의하면, 시간 · 공간의 직관도 사실은 사유 작용일 뿐 사유 이전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결국 그는 사유를 모든 실재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과학적 지식도 이러한 사유의 내적 요구에서 발전된 체계에 불과한 것이다.
마르부르크 학파의 제2 세대 선두 주자는 코엔의 제자인 나토르프였다. 그는 코엔의 방법론이 고전 수학과 물리학의 한계에 머물러 있었던 데 반해, 자신의 방법론은 과학의 새로운 발전(특히 상대성 이론)에 힘입어 보다 깊은 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그는 심리학의 전 영역을 코엔 식의 지식론으로 끌어들이려고 시도하였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의식 일반(과학의 '사실' )과 제한된 개개인의 의식 사이에 코엔이 남겨 둔 빈틈을 메우고자 하였다. 나토르프는 자신의 저서 《심리학 개론》 (1888)과 《비판적 방법에 의한 일반 심리학》(Allgemeine Psychologie nach kritischer Methode, 1912)을 통하여 심리학에 자연주의적인 방법 대신 코엔의 초월적인 방법을 적용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객관적 현상 세계와 현상 세계에 대한 지식을 지니는 비현상적 · 비자연적 자아 사이의 간격을 메우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경험적 자
아와 경험적 대상을 각기 독립된 현상으로서가 아니라 상호 필연적인 상관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는 칸트주의의 전형적인 방식을 따랐다. 또한 그는 순수 자아는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마치 물자체처럼 한계 개념이라고 주장하였다. 나토르프에게 있어서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은 둘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은 지식의 두 방향 즉 주관화와 객관화였다. 이 두 가지는 동일한 현상에서 시작하고 각기 범주 구성이라는 초월적인 방법을 통하여 근원(Ursprung)과 산출(Erzeugung)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상관주의적 일원론에서는 직관과 개념, 감각과 사유의 이원론도 부정된다. 학적 인식은 순수 사유가 객관적 세계를 근원으로부터 산출하는 무한한 동적 진행 과정이며, 범주는 절대적 합리성의 궁극에 있는 이 운동의 틀 또는 방향이 된다. 그리고 이 원리는 문화 창조의 모든 분야에 적용된다. 따라서 윤리와 예술도 순수 의지와 순수 감정을 포함하는 순수 의식의 합법칙적이고 객관적인 산출이라고 할 수 있다.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은 이 객관적 산출의 가능 근거인 '법칙' 을 보편적 이성에 의해서 자각하는 활동으로 규정된다. 여기서 나토르프의 시도가 후설(E. Husserl, 1859~1938)의 '이념' (Ideen)에 다가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르부르크 학파의 마지막 대표자는 카시러였다. 나토르프의 노선을 계승한 그가 과학 철학에 남긴 업적은 거의 실증주의와 유사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카시러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이 학파의 '산출' 개념을 문화의 전 영역(언어 · 신화 · 예술 · 종교 · 정치)으로 확대한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범논리주의를 넘어 범상징주의를 표방하게 되었다. 이 학파에 속하는 그 밖의 철학자들로는 법철학의 슈타믈러(R. Stammler)와 철학사가이자 칸트주의적 사회주의자인 포어랜더(K.Vorländer) 등을 들 수 있다.
하이델베르크 학파 : 이 학파는 정신 과학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이들은, 정신 과학이란 개별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어 그 특성을 밝혀 내는 연구로서 보편적인 것을 관찰하는 자연 과학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가치의 문제를 특별히 중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빈델반트는 딜타이(W. Dilthey, 1833~1911)와 함께 당대의 가장 저명한 철학사가였다. 그는 하나의 완전한 철학체계를 세우는 데는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이 학파의 후계자들로 하여금 보다 체계적인 연구를 수행하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의 가장 특징적인 학설은 인식론적 문제가 곧 가치론의 문제임을 밝힌 것이었는데, 즉 어떤 판단은 한 대상(물자체)과의 비교에 의해 그 진위가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이고 경험적인 믿음에 구속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원리적 구별을 단순한 자연의 세계를 넘어 역사의 세계, 더 나아가 도덕 · 법 · 예술 · 종교 등 체험의 영역으로까지 확대하였다. 그리고 사실들 속에 들어 있으면서 그 특성을 결정짓는 가치 · 당위 · 규범을 순수하게 드러내는 일이 철학의 사명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연 과학과 역사 과학을 구분하고, 전자를 법칙 정립적(nomothetish), 후자를 개성 기술적(ideographisch) 학문으로 규정하였다.
하이델베르크 학파의 체계를 세운 사람은 리케르트였다. 리케르트는 자신의 스승과 마찬가지로 판단을 가치의 형식으로, 다시 말해서 진위 문제를 판단 행위가 지향하는 가치의 문제로 보았다. 판단이 이루어지는 대상의 영역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자연 과학의 감각 세계와 비감각적 경험의 예지계가 그것이다. 후자는 지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성(Verstehen)에 의해서 알려진 것으로 바로 문화적 대상(역사 · 예술 · 도덕 · 제도)이 그것이다. 비록 감각으로 환원될 수 없고 따라서 범주가 적용될 수는 없지만, 이것들은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의 범위안에 있는 것으로서, 말하자면 헤겔(G.W.F. Hegel, 1770~1831)의 객관적 정신에 해당하는 것이다. 자연 과학은 시공(時空)을 초월한 보편 타당한 법칙에 의해서 현상을 규명하려는 반면에, 역사 과학 및 문화 과학은 그 현상을 가치에 의해서 본질 · 비본질을 구별하고 일회적인 것 ·개별적인 것을 기술한다. 이리하여 리케르트는 칸트의 인과성 범주의 적용 범위를 자연 과학의 영역에 국한시키고, 역사 · 문화 과학의 영역에는 일회적 · 개별적 현상을 통일적으로 구성하는 구성적 범주(konstruktive Katego-rie)를 확립하였다. 한편 문화적 대상과 자연은, 그것이 대상인 한 모두 그에 상응하는 주관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주관 자신은 대상화될 수 없다. 이것이 리케르트가 '전(前)-자연학적' (pro-physisch)라고 부른 존재의 세번째 영역이다. 즉 그것은 칸트의 초월적 자아이자 헤겔의 주관적 정신이다. 존재의 네 번째 영역은 형이상학적(metaphysisch)인 것으로서 오직 신앙의 대상이고, 우리가 종교에 있어서 혹은 자연 철학으로부터 선견(先見, Welt-anschauung)으로 눈을 돌릴 때 언급하게 되는 그런 것이다. 경험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을 구분하는 이러한 윤리적 태도를 통해서 리케르트는 칸트의 이론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 사이의 간격을 보다 좁힐 수 있었다. 또한 여기서 리케르트의 사상이 피히테(J.G. Fichte, 1762~1814)와 헤겔의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평 가〕 일반적으로 신칸트 학파는 순수 사유나 판단 의식 일반을 경험적 대상과 엄밀히 구별하는 '형식주의'의 입장에 서기 때문에, 삶의 비합리적인 본질이나 인간의 실존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 이들은 스스로를 '비판적' 이라고 여겼으나, 지나치게 추상적인 이 철학을 많은 사람들은 '독단적' 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 제1차 세계대전 후 이 철학은 현상학 · 존재론적 형이상학 · 생 철학 · 실존 철학 등의 반발에 직면하였고, 점차 쇠퇴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 독일 관념론 ;칸트)
※ 참고문헌 The Encyclopedia ofPhilosophy, vol. 5, New York, Mac-Millan, 1975/ Historisches Worterbuch der Philosophie, Bd. 6, Hrsg. v. J.Ritter, Basel · Stuttgart, 1984. 〔朴贊玖〕
신칸트주의 新 - 主義 〔독〕Neukantianismus 〔영〕Neokanti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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