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보 申太甫(?~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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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로 압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는 신태보(탁희성 작).

전주로 압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는 신태보(탁희성 작).

순교자. 세례명은 베드로. 양반 출신으로 1790년대 초에 입교하였는데, 당시 그는 서울에서 140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가 끝나고 그는 용인(龍仁)에서 40리쯤 떨어진 곳에서 살았는데, 이곳이 그가 원래 살던 곳인지 아니면 피신한 곳인지는 알 수 없다. 그 후 용인에 거주하던 40여 명의 신자들과 강원도로 이주하였다가, 1804년 이전에 다시 서울 근교로 옮긴 듯하다. 이때부터 교회 재건을 위해 노력한 신태보는, 특히 그의 사촌 이여진(요한)이 1811년과 1813년 밀사로 북경에 갈 때 경비를 마련하기도 하였으나, 신부를 영입하려던 계획이 실패하자 교회 일에서 손을 떼고 경상도 상주(尙州)의 잣골(현 尙州郡 牟東面新興里)로 은거하였다.
당시 신태보는 교회의 주요 인물로서 활동했고 교회 서적을 많이 등사(謄寫)하여 유포시켰기 때문에, 박해가 발생하면 자연히 주목될 수밖에 없었다. 정해박해(丁亥迫害) 때인 1827년 4월 22일 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된 신태보는, 그곳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은 뒤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중앙의 재가가 나지 않아 13년 동안 옥중에서 생활하였다. 그리고 결국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가 발생하면서 그 해 5월 29일 70여세의 나이로 참수되었다.
한편 신태보는 1838년 샤스탕(J. Chastan, 鄭) 신부의 요청에 따라 옥중에서 일기를 썼는데, 이 <수기>(手記)는 박해 시대의 상황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수기 원문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샤를르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 그 일부가 수록되어 있다. 경기도 포천에 있는 금호동 천주교회 묘역 내에 1988년에 신태보의 5대 손인 신인균(申麟均, 요셉) 신부가 조성한 가묘(假墓)가 있다. (→ 기해박해 ; 정해박해)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하성래, 《빛의 사람들》, 가톨릭출판사, 1996. 〔方相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