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플라톤주의 新 - 主義 〔라〕Neoplatonismus 〔영〕Neoplato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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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가 신플라톤주의의 사상을 조형적으로 표현한 작품인 <아테네 학당>.

라파엘로가 신플라톤주의의 사상을 조형적으로 표현한 작품인 <아테네 학당>.

고대 그리스 특히 헬레니즘 시대의 대표적인 '플라톤주의' (Platonismus) 가운데 하나로, 플라톤(Platon, 기원전428/427~348/347)의 사상 특히 그의 이데아설을 바탕으로 고대 대부분의 정신적 · 종교적 · 신비적인 사상들을 수용한 철학적 · 종교적 운동. 18세기에 와서 하나의 철학적 경향이나 학파로 정립되었다.
〔기원과 역사〕 플라톤 철학의 기본 입장을 계승하거나 플라톤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는 모든 철학들을 통칭하여 '플라톤주의' 라고 한다. 고대 그리스나 헬레니즘 시대의 대표적인 플라톤주의로는 '초기 아카데미아 학파' 와 '중기 플라톤주의' 그리고 '신플라톤주의' 등이 있었다. 이 중 신플라톤주의자들은 3~6세기에 주로 아테네 · 로마 · 알렉산드리아 · 소아시아 · 시리아 등 고대 말기 헬레니즘 문화권에 속한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이 플라톤 철학의 진정한 후계자 혹은 플라톤 철학의 완성자라고 자처하였지만, 그들이 플라톤 철학을 얼마나 올바르게 이해하고 전승하였는지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랐다. 플라톤 철학의 진정한 모습을 무엇이라고 보았는가에 따라 다른 평가를 하였던 것이다. 이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자신들을 '플라톤주의자' 로 이해했었는데,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Hipponensis, 354~430)와 그 이후, 또 15세기경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플라토니카 (Accademia Platonica)에서 피치노(Marsilio Ficino, 1433~1499)가 고전 문헌을 번역할 때, 그리고 17세기경 영국 케임브리지의 플라톤 학파도 '플라톤주의' 와 '신플라톤주의' 를 구별하지 않았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을 일반적인 의미의 플라톤주의자들과 구별하면서 그들의 철학에 대해 긍정적 또는 부정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 초기부터였다. 18세기 초 슐라이어마허(F.DE. Schleiermacher, 1768~1834)는 플라톤 철학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신플라톤주의자들의 해석을 통해서가 아니라 플라톤의 대화 편들을 직접 읽음으로써 가능함을 입증하였다. 이로써 그는 플라톤 철학과 플라톤주의의 혼동, 플라톤 철학과 신플라톤주의의 혼동에 결정적인 쐐기를 박을 수 있었다. 그리고 18세기 독일어권의 철학사가들인 브루커(J. Brucker) · 에버하르트(J.A. Eberhard) · 레보른(G.G. Fülleborn) · 불르(J.G.Buhle) 등에 의해 신플라톤주의가 특정한 철학적 경향과 학파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었고, 서양 철학사의 시대 구분에 도입되었다. 이는 독일 관념론에까지 그 명맥이 이어졌다.
〔플로티노스의 사상〕 형이상학 : 신플라톤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철학자로는 플로티노스(Plotinos, 204/205~270)를 꼽는다. 그의 제자 포르피리오스(Porphyrios, 232/233~304/305)가 쓴 《플로티노스의 전기》에 의하면, 플로티노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11년 동안 암모니오스 사카스(Ammo-nios Saccas, 175~242)로부터 철학을 배웠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일부 철학사가들은 신플라톤주의의 기원을 암모니오스 사카스로 보기도 하나, 신플라톤주의의 존재론적 기초와 이론적 체계를 확립한 것은 플로티노스의 업적임이 틀림없다. 그의 저작들은 그가 사망한 뒤 포르피리오스에 의해 각 9권씩 여섯 묶음으로 편집 · 출간되었으며, '여섯 엔네아데스( ἑννεάδες)' 라고 불렸다. 그의 철학은 정신적 · 물질적 · 영적 · 유기체적 · 무기체적 존재 여부를 불문하고 모든 존재를 통틀어서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고대의 대표적인 형이상학 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의 철학은 우선 물질적 존재 영역(κόσμος αίσθητός, 감각적 지각의 세계)과 정신적 존재 영역(κόσμος νοητός,가지적 세계)을 구별하였으며, 정신적 존재에서 모든 존재와 가치의 근원을 찾으려 했다는 점에서 정신주의적 경향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그가 뜻하는 '가지적(可知) 세계' 는 세 가지 근본 실체(ὑπόστασις)로 일자(一者,ἔν), 정신(νοûς, 영혼(ψυχή)을 말한다. 감각적 지각 세계는 하늘의 천체들과 인간, 동물계와 식물계, 그리고 무생물체 등으로 세분된다. 전체 존재계의 이러한 구분은 상하 구조이며 인과론적 존재 구조이자 동시에 목적론적 구조이다. 왜냐하면 이 상하 구조는 한편으로는 그 최상단 정점인 '일자' 로부터의 유출 과정으로서 생성의 단계를 뜻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밑으로부터 위로 향하는 존재 근원으로의 회귀 과정이며, 또한 최고 가치〔善〕와 아름다움〔美〕을 지향하는 모든 노력의 상승 단계를 뜻하기 때문이다.
플로티노스의 이러한 역동적이고 목적론적이며 위계론적인 존재 구조는 실천 철학적 내지는 종교 철학적인 의미도 가지며, 위계론적 존재 구조의 정점인 '일자' 에 대한 그의 생각과 그의 실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가 말하는 세 가지 근본 실체들 가운데 하나이면서도 그중 최상위의 것인 '일자' 는 모든 존재와 인식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모든 존재를 초월하는 절대자이다. 또 이것은 존재와 사고를 포함하면서 동시에 모든 존재와 사고를 초월하며, 모든 구별과 차이 및 대립을 변증법적으로 자기 안에 포함하면서 동시에 모든 차이와 대립을 초월하는 절대 단순(絶對單純)이다. 이러한 절대 개념으로서의 '일자' 를 플로티노스는 존재 자체로서, 최고 가치인 선과 미로서, 그리고 신(神)으로 이해하였다. 또 모든 정신적 노력과 인식, 그리고 깨달음의 궁극적 대상으로서, 모든 실천적 노력과 심미적 지향성의 최후 종착점으로 제시하였다. 세 근본 실체들 상호간의 관계, 그리고 하나와 다른 모든 존재들과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 플로티노스는 분리와 통일의 치밀하고 정교한 변증법적 논증을 전개하였다. 반면에 그는 절대 초월자인 일자, 존재자체, 또는 신을 향한 모든 노력이 궁극적으로는 직접 그것과 하나가 되며 합일(合一)하는 체험(ἔνοσις, ekstasis)의 경지에까지 도달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 자신도 실제로 네 차례 이상 이러한 체험을 하였다고 《플로티노스의 전기》에는 기록되어 있다. 이 점에서 플로티노스의 철학은 지적 노력의 차원을 넘어서 윤리적 실천과 종교적 구원의 길도 제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플로티노스의 철학적 노력의 기본 의도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형이상학적 전통과 논리적 · 변증법적 방법론 위에서 가능한 종교철학을 찾음으로써 그리스 철학의 종교화를 꾀하는 것이었다고 평가될 수 있다.
종교 철학의 기본 성격 : 플로티노스 철학의 기본 동기는 인간의 영적 내지는 정신적 구원에 대한 당대의 종교적 열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철학을 제시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이러한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궁극적인 지혜를 고대 그리스 철학의 전통 안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그는 플라톤 철학의 전통을 중시하였으며, 기원전 70년 경에 시작된 플라톤 철학의 부흥과 중기 플라톤주의로부터 직접 자극을 받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아리스토텔레 스(Aristoteles, 기원전 384/383~322/321), 신피타고라스 학파, 스토아 학파,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기원전544~483), 엘레아 학파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기원전 540~470) 등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개념과 이론들까지도 자신의 철학 체계 안에 수용하고 원용하고 또 재해석하였다. 이들 플로티노스 이전 철학자들에게서 나타난 개념과 이론들, 예를 들어 영혼 · 이성 · 정신 · 실재 · 시간 · 실체 · 이데아 · 선 · 물질 · 로고스 · 세계 영혼(세계 이성) · 수학적 실체 · 물리적 존재의 창조 등과 관련된 여러 가지 중요한 이론들이 플로티노스의 종교 철학적 체계화 안에 도입되어 하나의 새로운 연관성 안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혼합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적지않은 철학사가들은 플로티노스를 비롯한 신플라톤주의자들을 창조적 사고력과 비판 정신이 결여된 절충주의자 또는 혼합주의자로 평가 절하하기도 하였다. 브루커는 저서 《철학 비평사》(Historia Critica Philosophiae, 1742~1744)에서 신플라톤주의자들을 '절충파' (secta eclectica)로 분류하고, "알렉산드리아라고 불리는 배설구에 모인 가장 못된 자들"이라고 평하였다. 불르 역시 《철학사와 그의 비판적인 문헌 편람》(Lehrbuch der Gesch. der Philos. u. einerkritischen Literatur derselben, 1796~1801)에서 신플라톤주의에 의해 플라톤은 "전혀 다시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왜곡되고 변형되어 버렸다" 고 평하였다.
〔플로티노스 이후 여러 학파의 경향〕 철학사가들은 일반적으로 플로티노스 이후의 신플라톤주의자들에 대한 평가와 분류에 있어서 프레크터(K. Praechter)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 그는 신플라톤주의를 성격상 크게 다음과 같이 세 부류로 나누었다. 첫째는 형이상학적 · 사변 철학적 부류로서 플로티노스 학파 · 시리아 학파 · 아테네 학파이고, 둘째는 신비 종교적 · 주술적 경향의 페르가몬 학파이며, 셋째는 학구적 경향이 강한 부류로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이탈리아 특히 로마 중심의 라틴어권 신플라톤주의자들이다.
플로티노스 학파 : 이 학파는 포르피리오스를 지칭한다. 그는 여러 해 동안 플로티노스의 제자였으며, 그의 전기를 저술하고 그의 저작들을 편집 · 출간 · 해석하였으며, 플로티노스 철학을 대중에게 보급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철학은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데 종사해야 한다"며 플로티노스보다 더 종교적인 실천에 비중을 두었다. 더 나아가 신탁 · 주술 · 신기(神技) 등 당대의 통속적인 종교 관행(예를 들어 '갈대아의 신탁' 등)에 대해서도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의미를 부여하였다. 100여 편이 넘는 그의 저작들 중 절반 이상이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 · 플로티노스에 대한 주석서였던 것으로 전해지며,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 입문서》(Σισαγωγἡ)는 중세 시대의 가장 중요한 기초 철학서 중 하나였다. 포르피리오스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그리스적인 다신 숭배를 부정함으로써 우주의 로고스와 인간의 관계를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그리스도교에 적대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시리아 학파 : 이 학파에 속하는 신플라톤주의자는 포르피리오스의 제자인 얌블리코스(lamblichos, 250~330)이다. 그가 신플라톤주의적 종교서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주석서들을 저술했다고 하나, 단편들만이 간접적으로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는 플로티노스의 존재 계층 구조를 더 세분화시켰으며, 플로티노스와는 달리 철학적 이론보다는 오히려 주술 · 신기 · 신탁 등에 의해서 인간의 종교적 목표가 달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얌블리코스에 의해 신플라톤주의는 전환기를 맞게 되었고, 그리스 · 헬레니즘적 다신교와 동방 종교의 융화, 그리고 이론적 플라톤주의와 통속 종교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아테네 학파 : 이 학파의 신플라톤주의자들로는 플루타르코스(Plutarkhos, 350~433?), 그리고 시리아노스(Syia-nos, 4~5세기경)와 그의 제자인 프로클로스(Prolos, 412~485)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아테네의 아카데미아에서 가르쳤고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서로 사제(師弟)간이었다. 아카데미아의 신플라톤주의는 프로클로스 때에 절정기를 누렸는데, 그가 45년 동안 아카데미아 원장을 역임하면서 신플라톤주의의 체계를 완전하고 정교하게 다듬고 세분화시켰음이 그의 저서 《신학 원리론》(∑τοιχεἰοσιςθεολογική)과 《플라톤의 신학》(εἰς την Πλάτωνοςθεολογιαν)에 언급되어 있다. 또 그는 플라톤의 대화 편들인 <티마이오스>, <파르메니데스>, <국가> 등의 주석서를 남겼다. 그의 사변적 신학 체계는 기본적으로는 플로티노스와 포르피리오스를 따르고 있지만, 정신적 존재들의 유출 과정을 설명하면서는 여러 세분된 단계들을 중간 과정으로 도입하였다. 근원적 존재인 '일자' 의 신적 본질과 그로부터 유출된 다른 모든 존재들 사이의 관계를 프로클로스는 내재적 동일성(μονἡ) · 유출적 전개(πρόοδος) · 회귀(έπιστροφή)의 개념으로 규명하였다. 그에게 있어서도 인간의 정신적 · 윤리적 노력의 최종 목표는 근원으로의 회귀였으며, 최고 존재와의 합일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그가 보여 준 합리적 사변의 정교화, 그리고 3단 구조 또는 7단 구조를 따르는 존재 계층의 세분화 등과 함께 아레오파지타의 디오니시오(Dionysius Areo-pagita, 6세기 초), 에리우제나(Johannes Scotus Eriugena, 810~877) 등을 거쳐 스콜라 철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페르가몬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 : 주술 종교적 신플라톤주의를 신봉하였던 페르가몬 학파(암블리코스의 제자였던 아이데시오스, 율리아누스 황제 등)는 그리스도교의 강한 반대자들이었지만, 신플라톤주의와 그리스도교의만남과 융화가 시작된 것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의해서였다. 예를 들면 415년 프톨레마이스(Ptolemais)의 주교로 임명된 키레네 출신의 시네시오스(Synesios, 370~413)는 얌블리코스의 형이상학과 그리스도교의 삼위 일체론을 연계시키려고 하였고, 알렉산드리아의 히에로클레스(Hierocles, 2세기)는 플로티노스 형이상학의 세 가지 근본 실체는 배제하고 오직 우주의 창조주만을 인정했다.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요한(Joannes Philoponos, 490~566)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철학에 반대하면서 그리스도교의 무(無)로부터의 창조설을 옹호하였다. 라틴어권 신플라톤주의자 : 이탈리아의 라틴어권에서4~6세기에 걸쳐 학술 활동에 종사하였던 신플라톤주의 자들로는 칼치디우스(Calcidius, 4세기), 마리우스 빅토리누스(Marius Victorinus, 300~362), 마크로비우스(Ambrosius Macrobius Theodosius, 5세기), 보에시우스(Boethius, 480~524)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플로티노스와 포르피리오스의 저작들을 번역하거나 해석하고 주석서를 씀으로써 신플라톤주의를 중세 라틴어권으로 전 수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이들은 그리스도교에 우호적이거나 그리스도인들이었다. 특히 보에시우스는 그의 신학서에서 '영원' · '인격' · '자연' 등의 개념에 대한 정의를 제시하였는데, 이것은 삼위 일체론과 그리스도교 정립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사상적인 영향과 발전〕 플로티노스나 다른 신플라톤주의자들에게서 진리 탐구와 인식의 가능성에 대한 철학적 반성, 자기 목적적 인식 추구 등의 태도를 찾아보기는어렵다. 이들의 철학적 탐 구 목적은 오히려 종교적 동기를 실현시키기 위한 삶과 실천의 길, 그리고 이상적 행동지침을 얻는 것이었으며, 이를 기초해 줄 형이상학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노력은 철학적 운동이자 동시에 종교적 운동이었으며, 형이상학적 탐구가 확인한 최고 개념이 이들에게는 곧 신이었다. 이러한 의도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불가피하게 이론과 실제, 이상과 실천이 직접 연결된 형태로 발전하게 만들기도 하였으며, 더 나아가 당시의 여러 가지 신비 종교나 민속 신앙과 결합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리스도교에 미친 영향 : 플로티노스의 종교 철학은 의지적 존재인 인격신과 신으로부터의 계시나 은총을 전적으로 배제하는 그리스 철학의 바탕 위에 세워진 것이었으며, 당시의 그리스 철학 이 알고 있던 논리적(변증법적) 합리성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의도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의 스승으로 알려진 암모니오스 사카스는 처음에는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였으나 후에 그리스도교를 떠난 사람이었고, 플로티노스의 직제자(直弟子)이며 가장 가까운 후계자였던 포르피리오스는 행동과 저서를 통해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박과 투쟁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후세에 가장 큰 영향력을 남긴 신플라톤주의자 세 사람 중 하나로 꼽히는 프로클로스 역시 플로티노스의 철학을 이어받아 철저하게 그리스 철학 및 헬레니즘의 입장에서 신학을 전개시키면서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세 사람 모두 중세기에 그리스도교 교리와 그리스도교 철학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음을 간과하여서는 안된다.
플로티노스의 철학은 세계 정신사에 등장한 최초의 이론적 신학 체계로서, 신에 관한 학문(theologia)으로 평가된다. 신플라톤주의는 그리스적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 종교 철학으로서 계시의 불합리성을 믿는 그리스도교 신앙과는 본래적으로 화해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포르피리 오스, 프로클로스, 율리아누스(361~363) 황제 등은 적극적인 반그리스도교주의자들이었다. 이에 반하여 동로마 제국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신플라톤주의에 적극 대항하였고, 이것은 529년에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 누스 1세(527~565)에 의해 단행된 아카데미아의 폐쇄 및 신플라톤주의의 가르침과 전파에 대한 금지령을 유발시키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서유럽의 라틴어권에서는 그리스도교와 신플라톤주의가 공존 내지 융화로 발전하였다.
아우구스티노 역시 385/386년경에 신플라톤주의를 신봉하였으나, 이후 신플라톤주의와 그리스도교의 통합을 실현시켜 나아갔다. 이로써 신플라톤주의는 아레오파지타의 디오니시오와 에리우제나 등을 거치면서 형이상학적 위계론의 합리적 존재 구조 이론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신비주의로 발전하였다. 이는 중세 말 신학자들인 스코투스(J. Duns Scotus, 1265~1308), 알베르토(Albertus Mag-nus, 1200~1280) , 캔터베리의 안셀모(Anselmus Cantuarien-sis, 1033/1034~1109) , 아벨라르도(P. Abelardus, 1079~1142)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225~1274), 에크하르트(Meister Joannes Eckhart, 1260~1328), 쿠사의 니콜라오(Nicolaus Cusanus, 1401~1464) 등을 거쳐 르네상스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15세기에는 플레톤(G.G. Plethon, 1355~1450), 피치노, 피코 델라 미란돌라(G. Pico llaMirandola,1463~1494), 브루노(G. Bruno, 1548~1600) 등에 의해 다시부흥기를 맞기도 하였다. (→ 플라톤주의 )

※ 참고문헌  F. Überweeg · K. Praechter, Die Philosophie des Alter-tums, Berlin, 12th ed., 1926/ J.C. de Vogel, Greek Philosophy, vol. 3, Leiden,1959/ T. Whittaker, The Neoplatonists, Cambridge, 2nd ed., 1918/ E. Zeller,Die Philosophie der Griechen, vol. 2, Part Ⅲ , Leipzig, 5th ed., 1923. 〔金聖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