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사〕 트리엔트 공의회 이전 시대 :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 이전까지는 영성적인 면과 신학적인 면에서 사제들을 양성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구성된 오늘날과 같은 신학교 형태의 사제 양성 제도가 없었고, 몇몇 장소에서 간혹 사제 양성을 위한 시도가 있었을 뿐이었다. 3세기 초까지는 사제직 지망자들에게 일정 교육을 시켰다는 사실을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세속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이들 가운데 사제직을 희망하는 사람은 주교와 함께 생활하면서 성직에 필요한 교의 등을 교육받았다. 그 후 밀라노 관용령(313)에 의하여 신앙 생활이 자유로워지면서 교회는 더 많은 성직자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이에 몇몇 사람들이 성서와 철학 등에 있어서 일정한 교육 과정을 제시하였지만 6세기까지 별다른 교육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6세기 초에 주교좌 성당 학교(scholacathedralis)가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되면서 이 학교를 기점으로 후대에 대학들이 생겼는데, 성 아우구스티노 (354 ~430) 시대의 히포(Hippo)에서 이러한 흔적을 발견할 수있다. 또 이는 아를(Arles)의 주교 성 체사리오(470?~542) 시대에 있었던 프로방스(Provence) 주교좌 성당 학교에서도 발견된다.
스페인에서는 톨레도(Toledo) 교회 회의 이후 성직자 양성 계획이 점차 구체적으로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자기 자녀들을 사제로 만들려는 부모들은 자녀들의 사제 지망과 동시에 삭발례(1onsura)를 받게 하였는데, 이들은 18세가 되면 대품(大品, ordines maiores)과 혼인 중 하나를 선택하여야 했다. 이러한 학교는 당시 제국의 각 지방 여건에 따라 제각기 발전하였으나, 교육 여건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충분한 교육을 받을 수는 없었다. 세계 공의회도 성직자 양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특히 제3차 라테란 공의회(1179)와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에서 몇몇 규정들이 제정되었지만, 큰 기대를 가질 만한 것은 못 되었다. 신학교가 대학교(uni-versitas) 체제의 일부가 된 것은 13세기부터였으나, 당시의 대학교들은 수도원 학교(schola claustralis)나 주교좌 성당 학교들과는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생겨난 것들이었다.
그렇지만 신학대학은 의과대학이나 법과대학과 함께 이들 대학교에서 중요 학과가 되었고, 심지어 파리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 같은 규모가 큰 몇몇 대학교들은 신학 교육으로 유명해지기까지 했다. 이외에 16세기 이전에 창설되었던 유명한 신학교로는 로마(1303), 프라하(1347), 파도바(1363), 에르푸르트(1379) 하이델베르크(1385) 라이프치히(1409), 루뱅(1431), 프라이부르크(1457), 튀빙겐(1477) 신학교 등이 있다.
1457년에 카프라니카(Domenico Capranica) 추기경이 로마의 자기 관저에 신학원을 설립하였는데, 이 신학원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 후 1551년에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 de Loyola, 1491~1556)가 독일 신학원(Collegium Germanicum)을 설립하였는데, 그 당시 성직자 양성에 관한 문제는 교회의 가장 큰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 직전 영국의 폴(Reginald Pole) 추기경이 로마에 설립한 새로운 형태의 신학교는 주교가 주관하는 성직자 양성소로, 학생들이 모두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사제 지망자들은 기숙사 안에서 생활하면서 주교의 지도하에 공동으로 장래 사제직에 필요한 영성적인 면과 사목적인 면을 준비하고 교육받았다. 주교가 주관하는 이 성직자 양성소는 트리엔트 공의회가 끝날 무렵 점차 보편화되었다. 그 후 1563년에 교황 비오 4세(1559~1565)가 설립한 로마 대신학교(Seminarium Romanum)에서는 예수회 회원들이 교육을 담당하였는데, 훗날 폴 추기경이 세운 신학교와 합병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시대 : 사제 양성을 위한 신학교 설립에 대한 교회의 결정적인 계기는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마련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신학교에 관한 법률의 직접적인 원천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1556년에 폴추기경이 개최한 영국 교구 대의원 회의의 법령 제11항 이다. 트리엔트 공의회 문헌(De formatione) 18항에서는 신학교를 "하느님의 직무자들의 영원한 못자리" (Dei mi-nistroum prepetuum seninarium)라고 언급하면서, 모든 주교들이 사제들을 양성 · 교육하기 위하여 신학교를 설립할 것을 요구하였다. 신학교에서는 12세 이상의 소년들이 앞으로 수행할 직무를 위하여 공동으로 교육을 받았으며, 장래 사제직에 필요한 언어와 전례 및 기타 실천적인 지식을 연마하였다. 그런데 주교는 주교좌 성당 근처에 신학교를 의무적으로 설립하여야 했지만, 서품 지원자들이 이 신학교에 의무적으로 입학하도록 강제하지는 않았다. 공의회의 결정은 새로운 성직자 양성 교육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교육 형태를 쇄신하고 재확인한 것뿐이기 때문이었다. 원칙적으로 각 교구에 한 개의 신학교를 설립 · 운영하도록 하였지만, 여건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에는 관구별로 혹은 여러 교구가 연합하여 하나의 신학교를 운영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공의회의 의지는 신학교 교육에 대한 경험과 관리 지식의 부족으로 초기에는 효율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은 이탈리아에서 즉시 이행되었는데, 1564년 리에티(Riet)의 대주교 아물리오(Amu-lio) 추기경에 의하여 신학교가 처음으로 시작되었고, 이듬해에는 교황 비오 4세가 로마 신학교를 설립하였으며,밀라노 대교구장 보로메오(C. Boromaeus, 1538~1584) 추기경은 이탈리아 북부에 몇 개의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독일에서는 1564년에 신학교가 처음으로 설립되었으나 영국 · 아일랜드 · 스코틀랜드 등에서는 신학교 설립이 즉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의회가 끝난 지 5년 후에 두에(Douai) 신학원이 설립되었는데, 이 학교는 여러 세기 동안 가톨릭 교회의 교회적이며 지성적인 생활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프랑스에서는 16세기에 신학교들이 처음 설립되었으나 오래 지속되지 못하다가 17세기에 와서 선교 수도회(Congregatio Missionis), 오라토리오회, 쉴 피스회(Congregatio Sulpitiensis)의 노력으로 신학교들이 설립 · 지속되었다. 빈천시오 아 바오로(1581~1660), 올리에(J.J. Olier, 1608~1657), 에우데스(J. Eudes, 1601~1680) 등이 프랑스의 신학교 설립 및 사제 양성에 큰 공헌을 하였다. 18세기의 혼란으로 서부 유럽의 많은 신학교들이 문을 닫았으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옛 신학교들이 다시 재건되고 새로운 신학교들도 많이 설립되었다.
〔한국의 신학교 역사〕 한국 천주교회의 신학교 역사는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주교회에 대한 조선 왕조의 탄압 정책이 계속되던 시기에는 성직자 양성을 위한 전문 교육 기관을 국내에 설립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였으므로, 모방(P.P. Maubant, 1803~1839) 신부는 1836년에 김대건(金大建) · 최양업(崔良業) · 최방제(崔方濟)등을 선발하여 마카오(Macao)에서 신학교 교육을 받게하였다. 국내에서는 1830년대에 앵베르(L.M.J. Imbert,1796~1839) 주교가 정하상(丁夏祥) · 이신규(李身逵) 등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빠른 시일 안에 사제 서품을 주고자 하였으나, 1839년의 기해박해로 앵베르 주교와 정하상이 순교함으로써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므로 한국 천주교의 신학교 교육이 체계적으로 시작된 것은 1855년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철종이 즉위한 이후 천주교 박해가 어느 정도 수그러들자 1855년 충청북도 제천 배론(舟論, 현 堤川郡 鳳陽面 九鶴里)에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당' 이 세워졌다. 이후 신학교육에 착수하였으나 1866년의 병인박해로 신학교 교장 및 교수 신부들이 체포되어 순교함으로써 폐교되었고,그 후 1885년에 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의 전신인 '예수성심신학교' 를 강원도 원주 부엉골(현 驪州郡 康川面釜坪里)에 설립하였다. 1885년은 신앙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어 있지 못했던 때였으므로, 교회 당국은 교회 활동의 중심지였던 서울을 피하여 이곳에 신학교를 설립함 으로써 신학교 설립으로 인한 관청과의 마찰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한불조약 이후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자, 이 신학교를 서울 용산(현 용산구 원효로 4가 1번지)으로 이전하고 중등과 3년 · 철학과 2년 · 신학과 3년의 일관된 교과 과정을 두게 되었다. 이 신학교에 중등과가 부설된 것은 당시 국내의 중등 교육 기관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편 한국 천주교회의 발전과 함께 1914년에는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 출신 신학생들을 위하여 대구에 '성 유스티노 신학교' 가 설립되었고, 1927년에는 함경남도 덕원에 새로운 신학교가 설립되어 북한 지역 출신의 신학생들을 교육하였다. 한편 서울의 용산 신학교는 1919년에 소신학교를 혜화동으로 옮겨 교육하였고, 일제의 탄압으로 1942년에 예수성심신학교가 폐쇄되자 신학생들은 덕원 신학교에 수용되어 공부하거나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신학교의 재개교를 위한 노력은 끊이지 않아 광복되기 직전인 1945년 2월 23일에 '경성천주공교신학교' (京城天主公敎神學校)로 개칭하여 설립 인가를 받았다. 이 신학교의 교육 과정은 예과 4년 ·고등과 2년의 중등 교육 과정과 본과 4년 · 연구과 2년의 고등 교육 과정이었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서 재개교한 경성천주공교신학 1947년 4월 30일 '문고 제31호' 에 의해 경성유지 재단이 설립 주체가 된 '성신대학' 승격 · 인가되었으며, 신학과 4년과 연구과 두었다. 그러나 38선 이북의 덕원 신학교는수립과 함께 큰 위기에 직면했고, 결국 1949년 교장 로머(A. Romer) 신부를 비롯하여 클링사이즈(R.Klingseis) · 쿠겔만(W. Kugelmann) · 브란들(A. Brandl) ·밀레만(H. Millemann) · 람로트(O. Ramroth) · 조르거(G.Sorger) 신부 등이 공산당에 체포됨으로써 신학교는 최대의 수난을 겪으며 폐교되었다. 성신대학도 한국 전쟁으로 휴교를 하였고, 1951년 1월 제주도 서귀포로 옮겼다가 그 해 4월 5일 다시 부산 영도로 옮겨 가교사를 짓고 수업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31일 교육법 시행령(문고 제1194호)에 따라 연구과를 폐지 · 개편하였지만 6년의 교육 과정은 고수하였다. 그 후 1953년 9월 15일 서울로 복귀하여 다시 정상 교육을 시작하였고, 이듬해에는 의학부(현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를 증설하였다.
그리고 1955년에 신학부 편제를 6년으로 정식 개편하여(문고 제146호) 예과 2년과 신학과 4년으로 하였으며, 1959년에는 학교 이름을 '가톨릭대학' 으로 변경하고 신학부와 의학부의 편제를 두었다. 1962년 3월에는 광주에 대건신학대학(현 광주 가톨릭대학교)을 설립하여 충청북도 · 경상남북도 · 전라남북도 · 제주도 지역의 신학생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대구에서는 1966년에 선목중 · 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소신학교의 기능을 부활시켰으나 1970년에 폐교하였고, 그 후 1982년 3월 1일에 대신학교인 '선목신학대학' 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1983년 12월 7일에 수원, 1991년 3월에는 부산에 각각 대신학교가 설립되었고, 사제 성소의 증가로 1993년 3월 1일 대전 가톨릭대학이 설립된 데 이어 1995년 12월 29일에는 인천 가톨릭대학이 설립되어 현재 국내에는 7개의 대신학교에서 사제 양성 및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고등학교 교육 과정의 소신학교인 성신고등학교는 1983년 2월 28일 폐교하였다.
〔소신학교〕 소신학교의 유용성과 교육적 기능: <사제양성에 관한 교령>(Optatam totius) 3항에 의거한 교회법 234조는 소신학교(小神學校, seminarium minus)의 유용성과 교육적인 특별한 기능을 재확인하고 있다. 소신학교는 교회법에서 그 목적을 언급하였듯이 성소 배양을 위하여 보존되고 조장되어야만 하며, 공의회 문헌에서는"성소의 씨앗을 싹트게 할" (사제 양성 3항) 목적으로 소신학교가 설립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소신학교는 사제 성소의 형성과 성소 식별을 위한 교육 공동체로서 가장 합리적이고 적합한 형태이므로, 성소의 씨앗을 소유하고 있는 소년들이 그들의 성소를 깨닫고 이에 합당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역할을 하여야 한다. <사제양성에 관한 교령>에서는 '성소' 대신 단지 '성소의 씨앗 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소년들이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필요한 성소에 대한 확실한 표지를 찾기보다는 그들의 성품 · 재능 · 덕행 등을 보아 그들이 교회적 신분에 적합한 소질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의미이다. 즉 소신학교는 소년들이 성소의 기초가 되는 요소들과 그들의 성품과 사제가 되려는 원의를 키워 주고 깨닫게 해주는 성소에 대한 안내 역할을 하는 교육 기관일 뿐이다.
소신학교의 설립과 보존 : 교회법 234조 1항은 소신학교의 설립과 보존에 대하여 두 가지 규범을 요구하였다. 즉 이미 자기 교구 내에 소신학교가 있는 교구는 신학교를 보존하고 장려하여야 하며, 없는 교구는 교구장의 현명한 판단에 따라 적절하다고 여겨지면 소신학교나 이와 유사한 학원(사도 학교, 성소 지망자 신학원 등)의 설립을 도모하여야 한다. 비록 많은 곳에서 사제 성소의 감소로 소신학교가 폐지되거나 합병되었지만 아직도 교회는 소신학교의 보존과 설립이 필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합당한 양성 : 소신학교 학생들의 양성은 신학교의 본성과 목적에 합당하게 이루어져야 하는데, 특히 신앙적이고 인간적이고 학문적인 측면에서 양성되어야 한다.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성소가 싹트고 있는 때이므로 이를 잘 키워 갈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하며, 인간적이고 학문적인 측면에서는 상급 학교 진학을 준비하는 과정을 국가나 지역의 특성에 따라 같은 수준으로 유지하도록 하여야 한다. 이는 그들이 성소의 길을 포기하였을 때라도 상급 학교 진학에 아무런 불편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대신학교〕 교회법과 <사제 양성에 관한 교령>에서는사제직 지원자들을 위해 대신학교(大神學校, seminariummajus)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으며,제8차 세계 주교 시노드(1990. 10. 1~28)에서도 거듭 천명하였다. 신학교는 무엇보다도 앞으로 전진하는 교육 공동체이다. 다시 말해 신학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열두 사도들에게 특별히 시켰던 양성의 경험을 주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도 사도들처럼 맛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교회가 설립한 공동체이다. 따라서 신학교는 본질상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 주위에 모여든 제자들 공동체의 명맥을 교회 안에서 나름대로 이어나가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신학교는 신학생들이 교회의 삶을 최초로 경험하는 곳이므로 "모든 구성원들이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진정한 가정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깊은 우정과 사랑을 바탕으로 굳게 뭉쳐진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신학교는 교육하는 특별한 공동체, 즉 미래의 사제들의 성소를 후원해 주면서 성소를 판별해 주고, 성소에 응답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곳이다. 아울러 성품성사만이 줄 수 있는 은총과 책임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시켜 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교회와 세상에서 구원의 사명을 나누어 실천하고,그러한 사명에 투신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곳이다. 또 교육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신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생활은 비록 매우 다양하게 표현된다 할지라도 모두 미래의 사제들을 교육하기 위하여, 즉 미래 사제들에게 인간 교육 영성 교육 · 지적 교육 · 사목 교육을 하고 있다. 이러한 교육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교회는 각 교구의 능력과 신학생들의 숫자에 따라 교구가 독자적으로 대신학교를 설립하거나 초교구적(교구 연립, 전국) 신학교를 설립하도록 권고한다. 이러한 사제 양성을 위한 신학교는 인종과 지방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교황청에서는 일반 법규만을 제정해 주고, 국가별 또는 전례 의식별로 사제 양성 계획을 세우고 교황청의 인준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사제 양성에 관한 교령>과 교회법(232~272조) 및 가톨릭 교육성에서 발표한<사제 양성의 기본 지침>(Tria iam lustra, 1985. 3. 19)에 따라 <한국 사제 양성 지침>을 마련하였고, 각 대신학교들은 이 지침서에 따라 학교 실정에 맞게 영성 교육과 지적 · 사목적 교육 과정을 마련하여 시행하고 있다.
목적 : 대신학교는 자신들의 성소에 대하여 책임 있게 행동할 수 있는 젊은이들을 인간적 · 영성적 · 윤리적 ·지성적 교육을 통하여 사제직에 필요한 자질과 능력을 갖추어 사제직에 종신토록 헌신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곳이다(241조 1항). 대신학교에서의 교육은 전적으로 스승이요 사제이며 목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바탕으로 영혼들의 참된 목자를 양성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신학교는 하나의 장소로서뿐만 아니라 미래의 사도적 선교 사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자질과 능력을 배양하는, 즉 좀더 깊이 있게 삶의 경험을 축적하는 곳이기도 하다.
교육 기간 : 대신학교의 교육은 철학과 신학 수업을 6년에 걸쳐 이수하여야 하며(250조) 특별한 경우에는 교구장의 판단에 따라 적어도 5년은 채워야 한다. 종신 부제직 지망자 : 종신 부제직을 지망하는 젊은이들은 그 직무를 합당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적절한 기간동안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들이 청소년일 경우에는 교구장이 달리 정하지 않는 한 3년 동안 특별한 집에 살면서 교육을 받아야 하고, 성숙한 연령의 남자들은 독신자이든 기혼자이든 3년에 걸쳐 주교 회의에 서 규정한 대로 교육을 받아야 한다(236조 ; 바오로 6세의 자의 교서,
학교 법인 : 합법적으로 설립된 신학교들은 법 자체로 교회 내에서 법인격을 가지며(238조 1항), 학장(rector)이 모든 업무 처리에서 신학교를 대표한다(238조 2항) .
신학생 선발 : 대신학교에서 신학생을 선발하는 일은 어렵고도 중요한 문제이므로 이는 직접적으로 교구장의 책임하에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신학교 학장의 도움을 받지만 모든 것을 학장에게 위임하여서는 안된다. 교회법에 언급된 신학생 선발의 기준은 <사제 양성에 관한교령> 6항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교구장은 인간적 ·윤리적 · 영성적 · 지성적 자질들과 신체적 · 정신적 건강과 아울러 올바른 의지를 유의하여 사제직에 종신토록 헌신할 자격이 있는 자를 선발하여야 한다(241조 1항) 그러나 신학생들을 선발하는 데 있어서 사제수가 부족해서 마음이 아플 경우라 할지라도 언제나 용감하여야 한다(사제 양성 7항).
신학교의 장상과 교수들 : 신학교의 최고 책임자는 학장이며, 필요한 경우 부학장을 둘 수 있다. 또한 교무 담당 · 재무 담당 · 교수들 · 영성 지도 · 고해 사제 등이 있어야 한다(239조 1~2항, 240조).
신학생 양성 : 사제 양성을 위해서는 영적 양성(245조)을 실시하여야 하며, 이에 필요한 수단으로 미사 · 시간 전례 기도 · 묵주 기도 · 고해성사 · 영성 수련 · 묵상 기도 등을 행하여야 한다(246조). 또한 독신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여야 하며(247조), 학문적 양성(248~254조)과 사목적 양성(255~258조)도 실시하여야 한다. (⇦ 대신학교 ; 사제 양성 ; 소신학교 ; → 가톨릭대학교 ; 광주 가톨릭대학교 ; 대구 효성 가톨릭대학교 ; 덕원 신학교 ;배론 성 요셉 신학교 ; 부엉골 ; 사제 ; <사제 양성에 관한 교령> ; 성 유스티노 신학교)
※ 참고문헌 L. Chiappetta, Prontario di Diritto Canonico e Concor-datario, ed. Dehoniane, Roma, 1994, pp. 1124~1128/ J.A. Coriden · T.J.Green · D.E. Heintschel, A.A.V.V., The Code of Canon Law : A Text and Commentary, The Canon Law Society of America, Paulist Press, 1985, pp.174~190/ J. Cox, The Administration of Seminaries, Washington, Catholic Univ. of America, 1931/ J. Ellis, Short History of Seminary Education( I .I ), Seminary Education in a Time ofChange, ed. J. Lee · L. Putz, Notre Dame Ind., Fides, 1965/C. Peterson, Spiritual Care in Diocesan Seminaries,Washington, Catholic Univ. of America, 1966. 〔李讚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