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 초기 교회
〔용어의 기원〕 '신학' 이란 용어는 그리스어 '테올로기아' (θεολογία) 라틴어 '테올로지아' (theologia)를 번역한 것으로 '신(神)을 주제로 한 인간의 말' 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교가 발생하기 이전부터 이미 그리스 문화권에서 사용하던 단어임이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427~348/347),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83~322/321), 플루타르코스(Plutarchos, 46?~119?), 스토아 철학자 등에게서 확인된다. 이는 신에 대한 시적(詩的) ·신비적 언설(言說), 물리학을 능가하는 철학의 가장 높은 단계, 혹은 도시 국가 신전의 공식 제의(祭儀)를 의미하였다.
〔그리스 교부〕 초기 교부들 특히 호교론(護敎論) 교부들은 '신학' 이 지닌 그리스 문화적 성격 때문에 이 단어의 사용을 자제한 대신 '그리스도교 철학' 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신약성서에는 '테오스' (θεὁς)를 넣은 합성어들은 사용되었지만 신학이라는 단어는 없다.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Clemens Alexandrinus, 150?~215?)는 저서 《양탄자》(Stromata)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모세의 철학' 을 비교하면서, 그리스도교 철학과 신학은 그리스 사람들의 그것과는 반대된다고 하였다. 즉 "성서를 열심히 읽고 성서가 말하는 신앙과 삶의 방식을 온전히 받아들인 사람만이 참다운 철학과 신학을 하는 사람이다"(Ⅴ, 9, 56, 3)라고 하였다.
'신학' 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교부는 오리제네스(Origenes Alexandriae, ?~254)였는데, 그에 의하면 예언자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하여 '충분한 신학' 을 제공하였으며(《요한 복음 주석서》 II , 34, 205), 세례자 요한은 어머니 뱃속에서 '신학을 하면서'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하였다(Ⅵ, 49, 357)고 한다. 그러나 그는 최고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가 한 신학( 1, 24, 157)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신학을 하면서 자기 참다운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특성을 알려 주었다"(《첼수스를 반대하여》 Ⅱ,71). 교회사가 에우세비오(Eusebius Caesariensis, 260?~340)이후 그리스 교부들 사이에서 '신학' 은 하느님에 대한 참다운 교리라는 의미로 통용되었다. 그리고 아리우스주의 논쟁이 있은 후 '신학' 은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 실체성(實體性)' 을 말하는 가르침이었고,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 이후부터는 삼위 일체 교리가 곧 '신학'이었다.
4세기경 그리스도론과 성령론에 대한 논쟁을 거치면서 주교들은 스스로를 신학자라고 하였고, 신앙을 일관성 있게 이해하도록 설명하고 가르치기 위하여 체계적인 저술들을 남겼다. 아타나시오(Athanasius, 297~373)는 삼위 일체를 긍정하는 것이 가장 완전한 신학이라고 강조하면서, "삼위 일체만이 참다운 신심이다 . ··· 그리스도교 신앙은 변하지 않고, 완전하고, 복되신 삼위 일체를 인정한다. 신앙은 삼위 일체에 보태지도 않고 빼지도 않는다"(《아리우스에 반대하여》 I , 18)라고 하였다. 또 "구세주의 신학자들은 육화와 구속(救贖)의 혜택을 선포한다" (《말씀의 육화》 10, 1~2)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신학자들의 생각을 이해하려면 먼저 자기 삶의 방식부터 순화하여야 한다 . ··· 자기 삶의 방식으로 신학자들과 일치할 때 비로소 그들에게 하느님이 계시하신 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57, 1)라고 하였다.
바실리오(Basilius Magnus, 329~379)는 《성령론》(De Spi-ritu Sacto, 1, 2)에서 "신학적 용어들을 경솔하게 이해하면 안된다. 단어 하나 음절 하나가 숨기고 있는 뜻을 알아듣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저서에서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실체가 동일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성서 본문을 분석하였다. 380년에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Gregorius Nazianzenus, 329/330~389/390)가가 콘스탄티노플에서 한 강론 다섯 편은 그 내용 때문에 '신학적 강론' 이라고 불렸고, 그에게는 '신학자' 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그는 신학에 추리가 필요하지만 하느님에 대한 것인 만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표현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또 신학적 언설이 하느님 신비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모세의 경우(출애 33, 23)를 예로 들었는데, 즉 하느님은 그 '뒷모습' 밖에는 보이지 않으며, 하느님이 남긴 일들 안에서만 인식된다고 하였다.
3세기 말부터 이집트의 은수자들 사이에서 신학은 하느님에 대한 영적 · 신비적 인식이 되었다. 에바그리오(Evagrius Ponticus, 345~399)는, 영적 생활에는 실천과 인식이라는 두 단계의 여정이 있고, 인식에는 자연에 대한 영적 인식과 삼위 일체에 대한 관상을 정점으로 한 신학적 인식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스도교는 우리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이다. 여기에는 실천적인 것, 자연적인 것, 신학적인 것이 있다" (Traité pratique, SourcesChretiennes 171, 499). 여기에서 말하는 하느님에 대한 신학적 인식은 지성이 그 대상을 포착하는 일반 인식과는 달리 지성이 그 대상 안에서 스스로를 성취한다는 의미이다. 그 인식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에게 깨달음의 은총을 넘치게 하심으로써(에페 1,8)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 인식은 지성이 스스로를 온전히 비워서 형상도 개념도 없는 상태에서 가능한 것으로, 순수한 기도와 같은 것이다. "네가 신학자라면 참다운 마음으로 기도하여야 한다. 네가 참다운 마음으로 기도하면 너는 신학자이다" (Prière, 12, col. 2258~2259) .
포티체(Potice)의 주교 디아도코(Diadochus, 400~474)의 저서 《100명의 그노시스주의자》 (Κεφάλααι Τνωστικά)에도 이 같은 주제가 나타나는데, 이는 은사에 대한 바오로의 설명(1고린 12, 8)을 참조하여 보완한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신학은 하느님 신비에 대한 관상적 인식이다. 그 뿐만 아니라 신학은 은사들 가운데 하나이면서 영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지식이 지혜와 결합하여 발생한다. 따라서 스스로 겸손할 줄 아는 신학자가 영적 지식의 체험을 맛볼 수 있고, 영적 지식을 가진 자가 자기 영혼의 분별력을 하자 없이 보존하면 이론적 학문을 어느 정도 맛볼 수 있다. 신학과 관상은 같은 성령으로 지혜와 지식의 은사를 받아 서로를 도와 주면서 함께 나아간다. 신학적 영혼은 그것이 동시에 관상적일 때 자기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고, 이렇게 함으로써만 신학은 명실상부한 하느님에 대한 언설이 될 수 있다.
500년경 신비 신학 저서들을 남긴, 위(僞) 디오니시오(Pseudo Dionysius)라고도 불리는 아레오파지타의 디오니시오(Dionysius Areopagita)에게 신학은 먼저 성서를 의미하였다. 특히 성서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들이 신학이고, 성서의 말씀이 신학인 것은 하느님에 대한 인식을 주기 때문이다. 디오니시오는 '방법과 기능의 서열' 에 따라 하느님을 인식하고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 네 가지라고 하였다. 즉 상징 신학, 긍정 신학, 부정 신학, 신비 신학 등이다. 여기서 말하는 부정 신학은 '부정들의 부정' 으로 하느님에 대한 신비적 체험과 다르지 않다. 신비 신학은 관상과 지식이 함께 있는 것으로서, 선행한 변증법적 과정들을 완성시키며 동시에 가장 고상한 지식과 가장 완전한 사랑이 성취되는 사랑의 황홀감을 인간 지성에게 준다. 디오니시오는 이렇게 신학을 신비적 인식이라는 노선에서 이해하였다.
그리스 문화권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신학의 주목적은 하느님 신비에 대한 친밀성 있는 인식이었다. 그리스도론과 성령의 신성(神性)에 대한 논쟁도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신학은 다른 학문과 같은 수준에 있는 하나의 학문이 아니라 철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보다 우월한 것이었다. 신학은 은총의 결과이고 신학의 발전은 인류의 영적 여정에서 볼 수 있는 극치였다. 신학이 관상이 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라틴 교부〕 신학이라는 단어는 그리스 문화권에서 발생하여 라틴 교부들에게 전달되었다. 라틴 교부들은 신앙에 대하여 그리스 교부들과 같은 방식의 사고를 하지 않았고, 문화와 상황의 차이는 신앙 언어의 차이를 낳았다. 그들은 그 시대의 철학에 깊이 물들었으며 수도 생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리스 교부들은 대부분 수도 생활의 경험을 가진 이들인 반면에, 라틴 교부들은 대부분 수사학적 소양을 지녔었다. 치프리아노(Cypianus Cartha-ginesis, ?~258) , 힐라리오(Hilarius Pictaviensis, 315?~368) 암브로시오(Ambrosius, 340?~397) 아우구스티노(Augusinus Hipponensis, 354~430) , 교황 레오 1세(440~461),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 등이 모두 수사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주교가 되자 자연스럽게 신자들의 신앙 교육과 여러 가지 이단(異端)에 반박하는 논쟁에 전념하였고, 이들 주변에 있던 민속 신앙뿐만 아니라 마니교 사상을 비롯하여 아리우스주의 등에도 반박하였다. 아우구스티노는 도나투스주의나 펠라지우스주의와 대결하여야 했다.
그런데 이들 라틴 교부들에게서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Confessiones)과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설교집'(homiliae)이나 《사목 지침서》(Liber Regulae Pastoralis)를 제외하면, 신앙에 대한 신비적 혹은 관상적 차원은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안티오키아와 알렉산드리아 교회에 있었던 신앙 교육 기관도 라틴 교회에서는 거의 없었으며, 밀라노 · 로마 · 카르타고 등에는 성서나 신학을 공부하는 학교가 없었다. 예로니모(Hieronymus, 343~420)가 활동한 베들레헴에도 그러한 연구 기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당시 신자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는 일은 일반적으로 주교들에게 일임되었다. 그 후 중세 봉건 사회 때에 비로소 신학 교육을 직업으로 하는 신학 교수들이 등장하였는데, 이때에도 신앙 교육은 성서를 기반으로 교리를 체계적으로 전수한 것이 아니라 주로 전례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당시에는 아리우스주의를 반대하는 삼위 일체론 저서들을 비롯하여 이단을 반박하는 저서들이 많이 등장하였다.
아우구스티노는 《고백록》에서 중기 플라톤주의자들에 반대하여 믿음과 이해의 관계를 정의하였다. 이사야서 7장 9절에서 영감을 받은 그는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결코 굳건히 서지 못하리라" 고 하였고, "이해하려면 믿어야 하고, 믿으려면 이해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반복하여 사용하였다. 또 그의 저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De doctrina christiana)을 통해서는, 성서 본문을 해석하기 위해서 한편으로는 마술 · 점성술 · 미신을 제외한 세속의 모든 문화적 교양을 갖추어야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설교할 사람은 해석에 필요한 법칙 곧 수사학의 큰 원칙들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신학을 하는 데에 있어서 아우구스티노의 폭 넓은 자세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세상과 인간 운명에 대한 새로운 신앙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인문 과학, 곧 그 시대의 세속적 지식을 동원하여 과거의 문서인 성서를 해석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또 이집트인들의 재산을 털어 히브리인들이 사용한 사실(출애 12, 35-36)을 예로 들면서 세속적 지식을 이용한 신앙 이해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에 의하면, 히브리 사람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부(富)를 받았지만 그것을 잘못 사용하였고, 유대인들이 한 것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이해하고 설교하는 데에 인문 분야의 세속적 지식을 활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신학 연구 자세는 중세 유럽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비록 그리스도교 사상이 절대적 우월성을 차지했지만, 학자들이 자폐적 자세로 그리스도교 유산만을 고집하지 않고 플라톤주의를 재발견하고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함으로써 신학의 새로운 언어를 만들수 있는 길을 닦을 수 있게 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그 후 성직자들의 신학 교육 지침서와 같은 역할을 하였고, 일반 인문 과학은 올바른 성서의 이해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예비 과정으로 인식되었다. 또 문화에 대한 아우구스티노의 수용적 자세의 영향으로 서방 교회의 신학 이해가 동방의 것과 차이를 드러내게 되었는데, 이는 11세기에 일어난 동방 이교와도 무관하지 않다.
II . 유럽 중세 교회
〔중세 초기〕 아우구스티노의 죽음과 더불어 신학사의 한 세기가 마감되었다. 교부라고 불리는 신학자들이 사라지고, 신학을 연구하고 신앙을 수호해야 할 필요성도 사라졌다. 이단들은 정복되었고 이제 교회는 교회가 확립한 진리 안에서 그 진리대로 생활하는 교회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게르만인들의 침입과 이주는 유럽을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로마가 게르만인들에 의해 약탈당했고, 476년 로마 제국이 붕괴되면서 유럽 중세 사회가 출현했다. 유럽은 사회적 · 문화적으로 퇴보했고, 신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복음화를 위한 새로운 장(場)이 열려 가고 있었다. 일부 성직자 ·주교 · 수도자들이 그 시대의 혼란을 반(反)그리스도의 도래로 생각하고 비분 강개했지만, 다른 일부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교육받은 평신도들과 함께 주어진 여건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일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이때 세비야의 대주교인 이시도로(Isidorus Hispalensis, 560?~636)는 역사 · 학문 · 성서 등 그 시대 모든 분야를 총망라하여 주제별로 나눈 방대한 백과 사전을 집필하였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로마와 타지역의 복음화를 위하여 전념하였다. 평신도인 카시오도로(F.M.A. Cassio-dorus, 485/490~580)와 보에시우스(A.M.T.S. Boetius, 470/475?~524)도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들은 아리우스주의에 의해 세례를 받은 고트족이 점령할 당시 마지막 로마 시민들이었다. 카시오도로는 로마에 상급 교육 기관이 없는 것을 보고 자기 고향인 칼라브리아에 기숙사와 수도원을 겸한 시설 비바리움(Vivarium)을 창설하고 많은 도서들을 모아 도서관을 병설하였다. 이 도서관과 그가 집필한 성서 주석서들은 중세 수도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동고트족의 왕 테오데리히(474-526)의 집정관이었지만 정적(政敵)의 중상 모략으로 처형되는 비운을 겪은 보에시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포르피리오스(Porphyrios, 234~305)의 저서들을 번역하고 해설하여 중세 유럽에 소개하였다. 삼위 일체에 대한 다섯 편의 글이 실린 《신학 논고집》(Opuscula sacra)은 신학을 위한 형이상학적인 개념들, 즉 관계 · 참여 · 본성 · 위격 등의 개념들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이성적 본성의 개체적 "(substantia individua rationalis naturae)라는 위격에 대한 그의 정의는 아직도 통용되고 있다. 그가 생애 말년에 감옥에서 집필한 《철학의 위안》(De Consola-tione philosophiae)에는 영혼이 철학을 통하여 하느님을 관상하기에 이르는 과정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 책에 대한 해설서가 중세에 다수 출판되었다.
〔봉건 사회의 정착〕 이 시기는 카알 대제(Carolus Mag-nus, 800~814)가 등장한 800년부터 1000년까지의 시기이다. 카알 대제가 유럽을 통일한 후부터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은 서로 밀착하여 사회 문화 전반을 관리하는 특수 체제를 형성하였다. 동시에 그가 백성과 성직자들의 교육을 중요시하자, 신학이 점차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되었다. 카알 대제는 유럽 정복을 나서면서 복음화도 추진하였는데, 그에게 있어 이상적인 제국이란 신앙을 포함한 문화 전반이 통일된 국가였다. 그는 이를 위해 왕립학교와 수도원 학교들을 설립하여 교육 기관으로 발전시켰다. 교육 내용은 라틴어 읽기와 쓰기, 성서, 전례였다.
이 교육 기관들의 노력으로 유럽에 통일된 성서 본문과 통일된 전례문들이 나타났는데, 제국 안에 모든 것이 통일되어 있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이 신앙 고백문과 전례마저도 획일화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교부들의 성서 주석서와 설교집과 비그리스도교 문헌들이 발굴 · 수집되는 등 신학 유산들도 서서히 재발견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수도자들은 과거 위대한 저자들의 저서들을 필사(筆寫)하고 그 시대 사람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만든 선문집(選文集)들을 발간하였으며, 서방 세계는 이들 덕분으로 고대 인문학 작품들을 접하고 보존할 수 있었다.
〔스콜라 신학의 발생〕 하느님과 하느님 구원 계획 대한 지식으로 자리잡은 신학은 11세기부터 제도화라는 새로운 현상과 마주치게 되었다. 봉건 제도의 정착과 더불어 토지 활용의 효율성이 제고되면서 10세기의 유럽사회는 경제적으로 발전하였다. 십자군 운동과 동방 국가와의 교역은 여러 형태의 동업 조합(guild)들을 탄생시켰고, 상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늘어나면서 자유민을 중심으로 한 도시들이 발전하였으며, 이에 더하여 새로운 교육 기관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카알 대제가 장려한 수도회 학교들이 11세기부터는 신학자들을 배출하였는데, 교육 기관이 늘어나면서 신학 교육에 종사하는 신학자들(scholastici)의 수요도 커졌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1085)는 도시 발전에 따른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모든 주교는 그들 주교좌 성당에서 신학을 가르치라"는 결정을 내렸으며, 수도회 학교와 도시의 주교좌 성당 학교는 한동안 병존하였다. 12세기 말 볼로냐 대학을 필두로 1215년에 파리 대학이 설립되었고, 다른 도시들 즉 파도바 · 나폴리 · 몽펠리에 · 옥스퍼드 · 케임브리지 · 살라망카, 14세기 후반에는 빈 · 하이델베르크 · 쾰른에도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대학들의 목적은 이단의 가르침을 배척하고 백성의 종교적 · 문화적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신학을 비롯한 인문 과학뿐만 아니라 법학과 의학이 교과목으로 추가되었고, 졸업생들에게는 어디서라도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면허(licentia ubique docendi)가 주어졌다. 대학에 대한 세속 군주들의 간섭을 피하기 위하여 성직 지망자가 아니더라도 모든 학생에게 성직자의 특권을 주어서 대학을 육성하였는데, 당시 교황들은 이 정책을 적극 권장하였다. 신학 교과목 편성을 보면, 성서와 교부들의 성서 주석서들에 이어 베드로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 1095~1160)가 집필한 《명제집》(LibriSententiarm)이 있을 뿐이었다. 교수의 자질과 열성의 정도에 따라 그들의 인기와 학생수가 달랐고, 새롭게 발굴된 고전을 참고하여 신앙에 대한 창조적 해석을 하는 교수들이 높이 평가되었다. 이 시기에 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과 그에 대한 아랍어 주석서들이 이에 크게 공헌하였다.
〔신학의 조직화〕 신학 교육의 제도화는 신학 자체의 조직화를 낳았다. 사도 시대부터 신학적 반성이 참조하는 유일한 문서는 성서였는데, 수도자들은 시간 전례 기도를 하면서 성서와 친근하게 되었고 신학도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해석하여야만 했다. 교사와 학생들은 예로니모 · 암브로시오 · 아우구스티노와 같은 교부들의 성서 주석서들과 간결한 양식으로 작성된 명제집들과 같은 문서들을 중심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토론하였다. 이로써 '토의' (disputationes)라는 신학 저술 양식이 생겨났다.
교부들의 신학 전통을 계승한 이 시기의 조직 신학자 안셀모(Anselmus Cantuariensis, 1033/1034~1109)는 《육화론》(Cur Deus homo)과 《삼위 일체론》(De processione spiritussancti) 등 여러 저서들을 남겼다. 그의 보상 신학은 중세봉건 사회의 문화적 여건을 비판 없이 신학에 옮겨 놓은 것으로, 각자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진다는 봉건 사회의 염원을 구원 신학의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파리에서 독자적으로 신학 교육 기관을 설립 · 운영한 아벨라르도(Petrus Abelardus, 1079~1142)는 《신학 입문》(Introductio adtheologiam)과 《그리스도교 신학》(Theologia christiana)을 저술하여 조직 신학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그는 신학의 명제들이 성서보다 더 중요한 듯한 인상을 심어 주었으며, 그의 방법론은 과거의 상반된 해석들을 모아 논리적으로 검토하고 가신성(可信性, credibilias)을 찾으면서 교의의 통일성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어조는 강경하고 도전적이어서 다른 신학자들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베드로 롬바르두스는 영적으로나 지적으로 특출하지는 않지만 신학의 조직화를 위해 일조하였는데, 그의《명제집》은 신학을 공부하는 모든 학생들의 교과서가 되었다. 상당 부분 한계를 지닌 책이었지만 그 시대의 신학 교육을 위해서는 편리한 도구였고, 많은 신학자들이 새로운 해석을 도입하기 위하여 언급할 수밖에 없던 책이기도 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교부들과 과거의 철학에 대하여 조예가 깊었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기본적으로 수용하면서 보에시우스의 이론도 수용하였다. 그는 본질과 본질을 현실화(actuatio)하는 존재를 구별하고, 본질과 존재가 일치하는 것이 하느님이라고 정의하였다. 그에 의하면, 존재는 창조된 본질을 현실화하여 실제로 사물이 존재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모세에게 "나는 있는 그로다" (Ego sum qui sum)라는 말로 하느님이 스스로를 계시하였다는 사실에서, 그는 하느님을 순수 존재 곧 어떤 본질적 제한도 받지 않는 존재이며 모든 피조물의 원천적 존재 원리라고 설명하였다.
인간에 대하여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 형상론(質料形相論)을 수용하여, 아우구스티노 이후 전통적인 가르침이었던 영혼과 육신, 두 실체의 집합체로서의 인간 개념을 거부하였다. 그는 질료를 가능태(可能態)안에 있는 사물의 원리로 보았고, 실체적 형상만을 현실태(現實態) 안에 있는 존재의 원인이고 사물의 원리로 보았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지성을 지닌 영혼이 가능태 안에 있던 육신을 현실화하여 인간 존재가 있는 것이고, 영혼은 유일한 실체적 형상으로서 인식 가능한 다른 형상들과의 접촉에서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토마스는 이성과 신앙, 자연과 초자연, 철학과 신학을 각각 구별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성은 자기 영역 안에있는 사물에 대해 인식하고 그 인식에 대한 설명이 철학이라고 하였다. 신앙이 이해를 추구하기에(fides quaerensintellectum), 신학은 이성의 영역 안에 있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설명인 철학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철학은 스스로의 한계를 넘는 하느님 은총의 신비에 이르면 침묵을 지켜야 한다. 이 분야에 대해서는 복음 메시지와 교회 안에 그 메시지를 전달한 교부들만이 말할 수 있다. 이 영역에서도 존재의 법칙이 초자연적인 것을 배제하지 않고 모든 존재에 적용되므로, 이성과 형이상학은 사람들의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여기에 신학이 합리적으로 체계화 되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토마스가 성취한 것이 바로 이 추리적 신학인데, 그에 의하면 신학은 자연적이거나 초자연적인 사물들의 실재를 인식하기 위한 추리적 연구이지 사람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실천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의 주지 주의적(主知主義的) 성격이 드러난다.
그 시대 다른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신학은 초자연적인 실재를 파악하는 인간의 모든 노력을 총괄하는 학문이었다. 이성과 추리적 신학에 대한 그의 신뢰는 역사적 발전을 외면하였는데, 그의 접근 방식은 역사적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를 수용한 형이상학적인 것이었다. 이후 스콜라 신학은 인간 구원에 대하여 형이상학적인 고찰을 하게 되었고 역사적 차원에 대해서는 외면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는 후기 스콜라 신학이 큰 대가를 치르는 하나의 장애가 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은 초기에 파리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1323년 그가 시성된 후 그에 대한 반대가 점차 사라졌고, 이후 도미니코회를 중심으로 교회의 공식 신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보나벤투라와 스코투스) 프란치스코 신학파의 대가들이었던 보나벤투라(Bonaventura, 1217?~1274)나 스코투스(Joannes Duns Scotus, 1265~1308)는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사랑으로 하느님을 찾는다는 아우구스티노의 사상에 충실하였다. 이 신학은 존재에 대한 인식보다는 선(善)의 관념을 앞세웠으며, 신앙 이해에 있어서 지성과 지식보다는 의지와 사랑의 역할을 더 강조하였다. 이들은 믿음 안에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있으면 그 사랑이 이성을 비추어 신앙에 대한 신비적 이해를 가능하게 해준다고 하였다. 보나벤투라에게 있어서 철학은 신학 밖의 학문이었다. 피조물에 대한 인식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모상이고 하느님을 반영한다는 의미에서만 가치를 지니며, 피조물들의 상징적인 의미는 성서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보나벤투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빌려 신학을 구상하였지만, 이성 자체에 대한 그의 불신은 신앙을 조직화하는 데 있어서는 큰 약점으로 작용하였다. 보나벤투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한 스코투스는 주의주의적(主意主義的) 관점에서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자연
적 혹은 초자연적 인식을 비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형이상학은 하느님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피조물에 대해서만 말한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이 하느님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유(有)의 관념을 통한 궁색한 방법이며, 신학이 하느님에 대해 아는 방식은 계시하는 하느님의 뜻을 기원으로 하는 것이다. 신학 안에 제기된 '필연적 이유들' 은 명백한 필연성을 제시해 주지 못하고 하느님만이 명백하게 인식할 수 있다. 하느님의 뜻이 인간 신앙행위의 최종적 이유이다. 성서와 계시는 신앙의 내용들을 연결시켜 유기적 이해를 하게 한다. 인간의 통찰력이 계시된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의지만이 이 연결들을 보장한다. 이렇게 스코투스는 보나벤투라 안에 함축된 주의주의를 더욱 명시화하였지만, 그는 유명론(唯名論)이 발생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유명론〕 오컴(W. Ockham, 1285~1349)은 하느님에 대한 진지한 믿음은 하느님의 자유스러운 뜻으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유명론적 철학에서는 인간 인식의 실재성을 부인한다. 오컴은 성서 안에 주어진 계시만이 하느님과 하느님의 섭리를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하였다. 하느님이 계시한 이유에 대해 인간 이성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하느님이 그것을 원한다는 것이고, 인간이 하는 종교적 체험은 인간이 하느님에게 도달할 수 없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이 신학은 유럽 신학 사회 안에 급속히 확산되었다.
〔14~15세기의 신학〕 교황의 아비농(Avignon) 시기(1309~1378)와 그 후 발생한 교회의 혼란은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와 바젤 공의회(1431~1437)를 거쳐 수습되었지만, 이 시기에 신학은 쇠퇴하였고 신학의 유일한 주제는 교회였다. 대학의 신학 교수들을 중심으로 교회 사상 처음으로 본격적인 교회론들이 등장한 것도 이때였다. 이 시기의 교회론은 '공의회 우위설' (conciliarismus)로 공의회가 교황보다 우위에 있다는 이론이었으며, 다이이(Piere d' Ailly, 1350/1351~1420)와 제르송(Jean Le Char-lier de Gerson, 1363~1429)이 대표적인 신학자였다. 이론적 신학의 쇠퇴와 더불어 하느님에 대한 종교적인 욕구는 신비주의로 분출되었다. 13세기의 유명한 신학자들이 추리적이면서 신비적인 신학자였다면, 14세기의 영성 신학자들은 신학을 외면하였고 일부는 반추리적 성향을 지닌 신비 신학자들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에크하르트(Meister Joannes Eckhart, 1260~1328)와 타울러(Johannes Tauler, 1300~1361) 등 독일계 도미니코회 신비가들이었고, 빈데스하임(Windesheim)의 영성 신학파가 《준주 성범》(Imitatio Christi)을 출판한것도 이때였다.
Ⅲ . 르네상스 이후의 근대 사회
〔르네상스〕 15세기에 시작된 르네상스는 근대 사회 출현의 준비였다. 르네상스가 가져다 준 문화적 큰 변화는 고대 언어와 고대 작가들의 재발견이었다. 스콜라 신학자들이 라틴어만으로 철학과 논리학에 몰두하여 고대의 언어와 저작들을 외면하던 시기에, 르네상스는 그리스도교가 발생하기 이전의 인류와 발생 후 선교의 대상으로 삼았던 인류의 종교적 · 문화적 배경에 새롭게 접근하도록 해주었다. 또 스토아 철학이 지닌 인간 개체의 존엄성에다 중세의 유명론적 성향을 결합하여 사회적 실재에서 독립한 인간 개체를 지향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구조에서 분리된 개별적 실존에 대한 새로운 의식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사회적 제약에 얽매이지 않고 각자 자유롭게 자기의 진로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의 두드러진 결과가 주교직을 중심으로 한 교계 제도와 수도 생활 및 결혼 제도에 대한 조직적인 비판이었고, 인간 권리와 그 존엄성을 침해한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에 대한 거부였다. 그들은 제도만 거부한 것이 아니라 성서의 새로운 해석으로 과거의 신학 체계와 언어를 비판하였다. 가톨릭 신학이 부흥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격동의 시기를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에 일어난 두 가지 큰 사건이 인쇄술의 보급과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이었는데, 인쇄술은 문화적 교류와 비판을 활성화하였고, 대륙의 발견은 선교를 위한 열정을 유발시켰다.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의 신학〕 르네상스로 발생한 근대적 정신으로 말미암아 신학도 새로워져야 했다. 전통적 가르침은 쇄신되어야 하였고, 성서와 교부들에 대한 연구에서도 역사적 관점이 가미되어야 했다. 스콜라 신학은 고정된 개념과 체계로 복잡한 논리적 구분에 빠져 실재와 접촉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으며, 르네상스와인문주의는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와 같은 인물과 더불어 반(反)스콜라 신학적이고 반(反)추리적인 경향을 낳았다. 에라스무스는 신앙인으로 남아있으면서 중세의 신학 · 정신 · 방법론과 그 결론, 결국 중세적인 모든 것에 반기를 들었다. 루터(Marin Luther,1483~1546)를 비롯한 소위 종교 개혁가들은 교회의 교리와 생활을 혁신하여 시대가 요구하던 바를 충족시키려고하였다. 루터는 스콜라 신학에서 벗어나 성서에서 구원의 메시지를 발견하고자 하였으며, 타락한 인간 안에 있는 이성을 불신하고 성서를 기반으로 한 신학으로 스콜라 신학을 대치하려고 하였다. 그는 또 은총과 의화(義化)에 대한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에 따라 그리스도교가르침과 삶을 개혁하는 운동을 시작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서방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분열시키고 말았다.
개혁가들에 의한 교회 분열 앞에 가톨릭 교회의 반응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와 공의회 이후의 신학개혁으로 나타났다. 공의회 이전 반세기 동안의 신학 교육은 유명론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는데,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스콜라 신학에서 플라톤적 신학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도미니코회 회원들은 신학 교육의 교재로 베드로 롬바르두스의 《명제집》 대신에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을 사용하면서 신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 시기의 '신학 대전 해설서' 로 가장 유명한 것이 가예타노(Cajetanus da Thiene, 1480~1547)와 비토리아(Francisco deVitoria, 1483~1546)의 저서들이다.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에 신학은 스콜라 신학으로 제한되면서 성서와 교부들에게도 시선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신학의 특성은 세분화였다. 스콜라 신학은 14세기부터 독자적인 발전을 시작한 신비 신학과 결별하였고, 15세기에는 윤리 신학이 스콜라 신학에서 분리되었다. 이후 실증 신학(實證神學)이 계시와 전통이 남긴 자료에 대한 연구로, 스콜라 신학은 이 자료에 대한 이론적 반성으로 간주되었다. 교회의 가르침이 계시를 충실히 반영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호교론은 17세기 중엽부터 스콜라 신학과 실증 신학에서 분리되어 독자적인 하나의 분야가 되었다. 18세기 계몽주의 이후 이 호교론은 합리주의와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호교론(Demonstratio chris-tiana et catholica)으로 정착하면서 교의 신학의 입문 과정이 되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실용적인 동기로 설교와 교리 교수법을 한데 묶어 사목 신학이 독립적인 분야로 등장하였다.
개혁가들의 새로운 가르침을 반박하는 가톨릭 신학자들의 논쟁은 가톨릭 신학 쇄신의 첫 단계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논쟁을 주도한 신학자로는 독일의 에크(J.M.Eck, 1486~1543)와 가니시오(P. Canisius, 1521~1597), 영국의 피셔(J. Fisher, 1469~1535)와 폴(R. Pole, 1500~1558), , 네덜란드의 피게(A. Pigge, 1490~1542)와 타퍼 (R. Tapper, +1559), 프랑스의 뒤 페롱(J.D. Du Perron, 1556~1618)과 프란치스코 살레시오(Franciscus Salesius,1567~162), 이탈리아의 벨라르미노(R.F.R. Bellarminus, 1542~1621) 등을 들 수 있다. 벨라르미노의 신학 방법론은 후기 스콜라 신학의 고전적 방법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사이에 쟁점이 된 모든 문제들을 대조해서 설명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제시한 뒤 그것을 성서 · 교도권이 내린 결정 · 교부들의 증언 · 교회의 실천 · 신학자들의 합의를 들어서 입증하였다. 그의 이런 방법론은 추리적이기보다는 실증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논쟁 신학은 선입견과 일방성으로 점철된 신학이었다. 이 반(反)프로테스탄트적인 성향은 스콜라 신학과 교회 가르침의 다른 분야들에도 깊이 영향을 미쳤으며, 이로 인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까지 가톨릭 교회의 공식 신학은 다분히 반프로테스탄트적인 사고의 범주 안에 머물렀다.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근대 신학의 방법론 정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살라망카 도미니코회의 카노(Melchior Cano, 1509?~1560)인데, 그가 죽은 뒤에 발간된 저서 《신학의 원천론》(De locis theologicis)에 그는 신학을 성서 · 전통 · 신학적 합리성을 통한 증명이라는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신학 방법은 훗날 모든 신학 교재에서 채택되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까지 교의 신학의 유일한 방법으로 통용되었다.
이 시기의 영성 신학 저자들은 대학 강단에 서는 전문신학자들은 아니었지만, 그리스도교 신앙 체험에 준 영향은 지대하였다. 스페인의 성녀 아빌라의 데레사(There-sia ab Avila, 1515~1582)와 십자가의 요한(Joannes a Cruce, 1542~1591)은 근세 유럽 영성 학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고, 《신애론》(神愛論, Traité del'Amour de Dieu)을 집필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와 추기경이자 프랑스 오라토리오회의 설립자 베륄(P. de Bérulle, 1575~1629)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신비들에 대한 관상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영성 신학을 개척하였다.
Ⅳ. 19세기 가톨릭 신학
〔신학의 위기와 교회의 대응〕 이 시기의 신학은 시대의 지성적 요구를 외면하였는데, 라므네(H.F.R. de Lamen-nais, 1782~1854)는 1829년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그 자체로는 매력과 흥미를 지닌 광범한 신학이지만, 대부분의 신학에서 가르치는 신학은 궁색하고 진부하여 학생들을 지루하게 만드는 스콜라 신학이다. 이 신학은 신앙의 총체적인 의미를 말하지 못하고, 인간이 흥미를 가지고 사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것들과의 관계를 전혀 취급하지 못한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생각하던 신학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이 시기의 스콜라 신학은 성서와 교부들을 외면하고 그리스도교 신비를 명제들로 단편화하는 데에만 열중하였다. 또 신학은 추상화되고 계시와 신앙 체험의 실재를 반영하지 못하였으며, 신앙 체험은 인간 정신과 감수성을 높이 평가하는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 베푼 구원에 대한 인식의 객관성을 소홀히 하였고 종교적 감흥이라는 주관성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날드(L.G. Bonald, 1754~1840)를 대표로 하는 전통주의, 라므네를 대표로하는 신앙주의, 보탱(L.E.M. Bautain, 1796~1867)과 헤르메스(G. Hermes, 1775~1831)를 대표로 하는 합리주의 등이 태동하였다. 이 시기의 큰 약점은 18세기 계몽주의와 더불어 발생하여 유럽에 확산된 합리주의와 독일의 관념주의, 특히 각 대학에 급속도로 보급된 칸트(I. Kant, 1724~1804)의 사상에 대응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 철학이 없었다는 점이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의 교의헌장 <데이 필리우스>(Dei Filius)에는 이러한 문제점들이 나열되어 있을 뿐 아무런 치유책도 제시하지 못하였다. 교황 레오 13세(1878~1903)는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Aeterni Patris, 1879. 8. 4)에서 신학을 위한 철학의 필요성과 신학 원천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성서 연구를 장려하고 역사적 연구를 위하여 바티칸 문서고를 개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교회 안의 진보파와 보수파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교황 레오 13세의 호소에 부응하여 나타난 인물로는 루뱅 대학의 메르시에(D.J. Mercier, 1851~1926)와 프랑스 도미니코회의 가르데이(A. Gardeil, 1859~1931) 등 신스콜라 신학자들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의 신학을 위한 또 하나의 과제는 헤겔(G.W.F. Hegel, 1770~1831)의 철학, 즉 문화와 다양한 지식의 역사적 발전과 더불어 형성되고 발전하는 절대 정신이라는 헤겔의 사상으로 말미암은 역사의 의미에 대한 해석이었다. 종(種)들이 진화하고 그 진화 과정에서 출현한 것이 인간이라는 진화론적 역사관은 창세기가 말하는 인간 기원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따라서 과학과 신앙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갈등들이 발생하였다. 이 시기는 과거 전통적으로 긍정해 오던 바가 과학의 이름으로 속속 부정당하는 때였고, 교의와 역사 과학이 제공하는 결과는 온전히 상반되는 것이었다. 모든 분야에 갈등은 있었다.
〔근대주의와 신학〕 근대주의(近代主義, modernismus)의 위기는 이 시기를 대표하는 갈등의 표출이었다. 성서에 대한 역사 비평과 그리스도교 기원에 대한 역사적 연구가 제시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일련의 시도들이 교황 비오 10세(1903~1914)의 교령 <라멘타빌리>(La-mentabili, 1907. 7. 3)와 회칙 <파쉔디>(Pascendi 1907. 9. 8)를 통하여 근대주의라는 이름으로 단죄되었다. 이는 교황 비오 9세(1846~1878)부터 시작된 모든 새로운 것에 대한 방어적 자세였다.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 전역으로, 또 각 분야에 확산되는 탈교회의 자유주의 물결에 놀란 교회는 그 갈등을 헤쳐 나가기 위한 선의의 모든 선구적 신학자들을 단죄하면서 새로운 신학적 반성의 출현을 그 뿌리부터 말살하려고 하였다. 모든 성직 지망자와 신학 교수 지망자는 반근대주의 선서를 하여야만 했고, 신학분야에서 교회의 이러한 과잉 방어적 반응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까지 지속되었다.
교회의 이런 자세에 부채질을 한 것은 교황 무류성(無謬性)에 대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이었다. 이 교의는 그 당시 교회가 필요로 하는 하나의 타협이었지만, 그것이 과도기적인 성격을 잃으면서 교회의 중앙 집권적 권위주의와 지역 교회의 신학적 · 전례적 창의성을 고사(枯死)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다. 이 교의는 문화적 다양성 속에서 복음의 충실한 전승을 보장하기 위함이었지만, 원칙적으로 교회는 다른 그리스도를 증언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교의는 그 본연의 교의적 목적을 벗어나 로마적 중앙 집권화라는 하나의 정치 이념이 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교황들의 개인 숭배를 조장하고 그것을 배경으로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였고, 복음과 시대적 · 문화적 상황의 협상이라는 신학은 위축되고 말았다.
V . 20세기의 신학 동향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로마 교회에서의 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론적 사고를 바탕으로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정의한 이성과 신앙의 연관성을 긍정하는 것이었다. 하느님은 창조주이며 계시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학은 계몽주의 이후 급격히 확산된 '세속화' 와 '인간 자유' 를 외면하고 의미 없는 언어의 반복에만 머무를 수는 없었다. 계시, 교회 발생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 교도권의 권위, 인간 이성의 자율성 등은 끊임없이 새로운 신학적 사고의 대상이 되었다. 로마 교회의 비판적인 시선을 받으면서, 또 계속되는 로마 교회에의 밀고와 로마 교회의 경고를 받으면서도 훗날 소위 '신(新)신학' 이라고 불리는 신학 분야를 개척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즉 1930년대의 대표적 신학자들인 뤼박(H. de Lubac, 1896~1991), 세뉘(M.-D. Chenu, 1895~1990) , 발타사르(H.U. vonBalthasar, 1905~1988) 등이었다. 이들은 교회 초기 문헌들과 교부들에 대해 꾸준히 연구하였다.
1943년에 교황 비오 12세(1939~1958)는 회칙 <디비노 아플란테 스피리투>(Divino Afflante Spiritu, 1943. 9. 30)를 통하여 가톨릭 신학자들에게 성서에 대한 역사적 연구를 요청하였다. 여기에 힘입어 성서를 비롯한 신앙 원천에 대한 활발한 역사적 연구가 형이상학적 신학 · 패권주의적 신학 · 반프로테스탄트적 신학을 넘어서, 하느님에 대해 또 세상과 인간에 대해 현대인을 위한 새로운 언어를 발생시키는 신학의 문을 열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신학의 결실이었다. 중요한 신학자들로는 위의 세 신학자를 비롯하여 콩가르(Y.M.J. Congar, 1904~1995), 라너(K. Rahner, 1904~1984), 스킬러스(E.H. Schil-lebeeckx, 1914~ ) 등을 들 수 있다. (→ 가니시오, 베드로; 가예타노, 티에네의 ; 가르데이, 암브로시오 ; 교부 ;그레고리오 1세 ; 그리스도교 인문주의 ; 근대주의 ; 디오니시오, 아레오파지타의 ; 라너, 칼 ; 라므네, 위고 펠리시테 로베르 드 ; 뤼박, 앙리 드 ; 메르시에, 데지레 조제프 ; 반종교 개혁 ; 베드로 롬바르두스 ; 벨라르미노, 로베르토 프란체스코 로물로 ; 보에시우스, 아니치우스 만리우스 토르과투스 세베리누스 ; 보나벤투라 ; 부정 신학 ; 스코투스, 둔스 ; 스콜라학 ; 스킬러스, 에드바르헨리 ; 신비 신학 ; 신스콜라 철학 ; 신학 ; 실험 신학 ;아벨라르도, 베드로 ; 아우구스티노, 히포의 ; 안셀모,캔터베리의 ; 에크, 요한 마이어 ; 오컴, 월리엄 ; 유명론; 자유주의 ; 전통주의 ; 토마스 아퀴나스 ; 콩가르, 이브마리 조셉 ;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 피셔, 요한 ; 합리주의)
※ 참고문헌 Y.M.J. Congar, Théologie, 《DTC》 15-1, pp. 341~447/K. Rahner, 《LThK》 10, pp. 71~76/ P. de Letter, 《NCE》 14, pp. 49~58/ G. Mathon, Théologie, 《Cath》 14, pp. 1009~1042/ A. Solignac, Théologie,《DSp》15, pp. 463~487. 〔徐公錫〕
신학사 神學史 〔라〕historia theologiae 〔영〕history of theology
I . 초기 교회
II . 유럽 중세 교회 · III . 르네상스 이후의 근대 사회 · IV . 19세기 가톨릭 신학 · V . 20세기의 신학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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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후부터는 삼위 일체 교리가 곧 '신학' 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