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후담 愼後聃(1702~1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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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기 남인(近畿南人) 실학자인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의 뛰어난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천주교 서적들을 체계적으로 비판한 인물.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이노(耳老). 호는 하빈(河濱) 또는 돈와(遯窩) 또는 금화자(金華子) . 1702년(숙종 28) 2월 8일 한성부 동부 낙선방(현 종로구 연건동 부근)의 외가에서 현령 (縣令) 신구중(愼龜重)과 참봉 이정관(李正觀)의 딸 우계 이 씨(羽溪李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근기 남인 가운데에서도 청남(淸南)에 속하였던 그의 집안은 권대운(權大運) 가문과 가깝게 교류하였고, 윤동규(尹東奎) · 이익의 집안과도 인척 관계였다. 그에게 9대조가 되는 신수근(愼守勤) 이후 그의 집안에서는 크게 현달한 이가 없었는데, 5대조 신수(愼售)는 무직인 부사과(副司果)에 그쳤고, 고조 신득의(愼得義)는 사직 서령(社稷署令)을 역임하였으며, 증조 신회(愼憙)는 현령을 지냈다. 또 조부 신미오(愼微五)는 선비로 과거에도 급제하지 못하고 벼슬도 하지 못하였으며, 그의 아버지 신구중은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은 현령에 그쳤다.
그의 집안의 학문적 전통은 퇴계의 성리학(性理學)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나 신후담의 초기 학문적 관심은 노장 사상(老莊思想)이었으며, 여기에서 큰 영향을 받아 이를 바탕으로 한 한문 소설 등을 많이 저술하였다. 그러나 경서(經書)에 전념할 것을 요구한 부친의 뜻에 따라 17세부터 성리학의 입장으로 기울어지게 되었고, 송대(宋代)의 성리학설을 두루 모아 엮은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은 뒤부터는 자기 마음을 수양하는 공부를 위주로 하는 도학(道學)에 힘썼다.
18세 때인 1791년(숙종 45)에는 <자경설>(自警說)을 지어 바른 학문인 도학에 더욱 분발할 것을 다짐하였는데, 이때 그는 노장 사상에 입각하여 저술했던 지난날의 글들을 많이 삭제하였다. 또 《금강 반야경》(金剛般若經)을 읽고 이것을 낱낱이 비판한 뒤에는 다른 불경도 마찬가지로 비판하고자 하였다. 22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뒤에는 오로지 성리학에 마음을 기울이기로 결심하고, 18세 때에 삭제하고 남은 글들 가운데 마음에 들지 않지만 원문만은 남길 만한 것들을 골라 후기(後記)를 붙여 반성하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그 외의 글들은 모두 삭제하였다.
신후담은 23세 때인 1724년(경종 4) 1월에 처음으로 이익을 찾아간 뒤부터 변함없이 그를 스승으로 모셨는데, 이익은 자신을 찾아온 그에게 가장 먼저 공부해야 할 책으로 《근사록》(近思錄)을 권하면서 이 책을 통해 먼저 학문의 근본 방향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굳게 다져야 한다고 하였다. 또 그는 《소학》(小學)에 대해 듣고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여 더욱 일상의 실천에 힘썼으며, <자성문〉(自省文)을 지어 벽에 걸어 놓고 아침저녁으로 이것을 보면서 자기 허물을 반성하였다. 또한 정주(程朱)의 학설에 구애받지 않고 경전을 자주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이익의 영향으로 정주의 성리학과 다른 학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45세 때인 1746년(영조 22)에 영남을 유람하면서 퇴계의 학문을 계승하는 학자들을 차례로 방문하여 자신의 학문 성취를 과시하다가 정주의 학설과 판이하게 달라 그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한편 그가 42세 때인 1743년에 쓴 <대학후설>(大學後說)에 보면 '격물' (格物)의 '격' 을 주자학에서와 같이'지' (至)의 의미로 해석하지 않고 양명학(陽明學)에서와 같이 '정' (正)의 의미로 해석하여 양명학의 입장을 따르고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그의 경학(經學)에 대한 학설은 양명학으로 기운 것이 아닌가 한다.
23세 때 처음으로 이익을 찾아고 사제 관계를 맺었던 신후담은 두 달 뒤인 3월 21일에 다시 찾아가 서학(西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서학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7월 17일에도 이익을 방문하여 서학에 대하여 궁금한 것들을 물었는데, 이에 대해 이익은 서학의 삼혼설(三魂說)과 뇌에 관한 설〔腦襄說〕이 타당하다고 설명하면서 《천주실의》天主主實義) 등을 지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를 성인이라고 언급하였다. 그리고 서학에는 《천문략》(天問略) · 《기하원본》 (幾何原本) 등과 같은 실용적인 면이 있다는 점에서 적멸(寂滅)을 추구하는 불교와 다르다고 설명하였다. 특히 천문학과 수학에 관한 서양의 학설은 이전 사람들이 발명하지 못한 바를 발명한 것으로서, 세상에 이익 됨이 크다고 주장하여 서학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이익의 계몽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를 불교와 다름없는 사학(邪學)으로 인식한 그는 <영언여작>(靈言蠡勻) · 《천주실의》 · 《직방외기》 (職方外紀) 등의 서학서(西學書)를 성리학의 입장에서 체계적으로 비판한 《서학변》(西辨)을 같은 해에 저술하였다. 그리고 1725년(영조 1) 7월 27일과 이듬해 11월 25일에도 이익을 방문하여 서학에 대해 토론하였으나 여전히 천주교를 불교와 같은 사학으로 배척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을 그가 말년까지 계속 유지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도학에 대한 그의 학설과 같이 서학에 대한 그의 견해도 후기에 가서 바뀌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아직 이에 대한 연구가 없다. 1761년(영조 37) 11월 24일 6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 《서학변》 ; 척사론 ; 이익)

※ 참고문헌  慎後聃, 《河濱全集》, 驪江出版社 保有/ 崔東熙, 《西學에 대한 韓國實學의 反應》, 高麗大學校 民族文化研究所, 1988/ 金世潤 譯, 《朝鮮後期 儒敎와 天主教의 대립》, 一潮閣, 1997/ 李元淳, 《朝鮮西學史研究》, 一志社, 1986/ 車基眞, 〈星湖學派의 西學認識과斥邪論에 대한 연구>, 韓國精神文化研究院 博士學位論文, 1996.〔徐鍾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