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시인. 극작가. 역사가.
〔생애와 작품〕 1759년 11월 10일 뷔르텐베르크 공국(公國)의 소도시 마르바흐(Marbach)에서 군의관 출신인 아버지 요한 카스퍼(Johann Kasper Schiller)와 여관 집 딸이었던 엘리자베트 도로테아(Elisabeth Dorothea)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경제적으로 상당히 궁핍하였던 어린 시절의 꿈은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뷔르텐베르크의 영주인 카를 오이겐(Karl Eugen)의 지시로 카를 학교(Karlsschule)에 들어가 그곳에서 법학과 의학을 배웠다. 폭군 카를 오이겐에 의해 운용되던 이 학교는 규율이 매우 엄격하였는데, 그런 가운데에서도 실러는 남몰래 클롭슈토크(F.G. Klopstock, 1724~1803), 루소(J.J. Rousseau, 1712~1778), 셰익스피어(W. Shakespeare, 1564~1616) 작품들을 탐독했다. 그리고 철학 교수인 아벨(J.F. Abel, 1751~1829)의 문예 작품에 대한 심리 분석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인간의 동물적 성향과 정신적 성질에 관해서>라는 논문으로 졸업한 실러는, 1780년 슈투트가르트에서 박봉의 군의관으로 근무하였으나, 그의 마음은 일을 떠나 있었다. 이에 실러는 18세 되던 1777년부터 구상해 온《군도》(群盜, Die Räuber)를 부지런히 완성시켜 1781년 4월에 자비(自費)로 출판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출판해 주려고 하지 않았던 이 작품은 불과 수 주일 만에 그의 이름을 전 독일에 떨치도록 하였고, 이듬해 만하임에서 상연되었을 때에는 독일 희곡 사상 유례없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뒤이어 함부르크 · 라이프치히 · 베를린 등 주요 도시에서 차례로 상연된 《군도》의 주제는 사회악에 대한 도전, 압제와 인습에 대한 반항, 자유와 이상에 불타는 젊은 정의감 등이었다. 이 작품에서 그는 당시 공국 안에서 행하여지던 탄압 정치를 정면으로 공박하였고, 탄압에 대하여 무력하게 아부 · 굴복하는 동 시대인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집필이 금지되자 실러는 1782년 초에 친구인 음악가 슈트라이허(A. Streicher)와 함께 공국을 탈출하여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그의 두 번째 희곡 《피에스코의 반란》(Die Verschwörung des Fiesco zu Genua)을 1783년에 출판하였다. 이탈리아를 무대로 한 5막의 역사 비극으로서 정치적인 모략을 주제로 삼은 이 작품은 역사극으로서 후세 역사극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이듬해 출판한 독일 시민 비극의 대표적 작품인 《모략과 사랑》(Kabale und Liebe)에서는, 죄악에 가득 찬 궁중생활과 교양은 없으면서도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는 평민 계급을 대립시키면서, 선(善)한 것이 악(惡)한 것에 눌려 파멸되는 퇴폐적인 사회상을 묘사했다. 그리고 1785년에 후원자인 드레스덴의 관리 코르너(G. Körner)를 따라 드레스덴으로 간 뒤 1787년에 정치극 《돈 카를로스》(Don Carlos)를 출판하였다. 실러가 청년기에서 원숙기로 넘어가는 과도기, 정확히 말하면 '질풍 노도' (Sturm und Drang)의 시대에서 고전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속하는 이 작품에서 그는 자신의 정치적 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적 박애주의 사상과 자유 국가 체제에 대한 이상을 암시하였다.
같은 해 7월 실러는 괴테(J.W. von Goethe, 1749~1832), 빌란트(C.M. Wieland, 1733~1813) 등이 있는 바이마르로 가서 쾨르너의 권고로 학문 연구에 몰두하여 이듬해 《스페인 통치로 인한 네덜란드 쇠퇴의 역사》(Geschichte des Abfalls der vereinigten Niederlanden von der spanischen Regierung)라는 저서를 집필하였는데, 이 업적으로 그는 1789년 괴테의 추천으로 예나 대학의 역사학 교수로 초빙을 받았다. 1790년에는 애인 샤를로테(Charlotte)와 결혼하여 한동안 행복한 나날을 보냈으나, 과로로 병을 얻어 교수직을 그만두고 칸트 철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런 역경 속에서 철학적 · 미학적 논문 <소박과 감상의 문학>(Über naive und sentimentalische Dichtung, 1796)을 집필하였고, 3년 뒤인 1799년에는 3부로 된 역사극 《발렌슈타인》(Wallenstein)을 출판하였다. 이 작품은 실러 예술의 최고봉일 뿐만 아니라 독일 사극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역사학자로서의 학문적 밑받침, 칸트 철학 연구로 얻은 이념과 사상, 그리스 고전과 세익스피어 희곡 등의 깊은 이해 등이 융합되어 있는 그의 필생의 대작이다.
《발랜슈타인》으로 성공을 거둔 실러는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었던 마리아 스튜어트(Maria Stewart, 1542~1587)의 기구한 운명을 다룬 정치극 《마리아 슈투아르트》(Maria Stuart)를 바이마르 극장에서 상연하였다. 이어 상연한 《오를레앙의 처녀》(Die Jungfrau von Orleans)라는 희곡은 가톨릭적인 작품으로 1426년에 있었던 프랑스의 오를레앙 해방 전쟁을 소재로 한 것이다. 역사적 사실에 의하면 잔 다르크(Jeanned'Arc, 1412~1431)는 영국군에 의해 화형을 당하였으나, 실러는 이를 완전히 바꾸어 그녀가 성모 마리아의 도움을 받아 기적적으로 조국 프랑스를 구하고 프랑스 국기에 감싸여 승천하는 것으로 개작하였다. 주인공인 잔 다르크의 영혼과 소박한 신앙 속에 영웅적 기질을 부여한 이 작품은 애국적인 분위기와 중세적인 낭만적 용어 그리고 동적인 줄거리 등으로 화려한 무대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 극이 라이프치히에서 초연되었을 때 제1막이 끝나자 관객은 '실러 만세' 를 부르면서 환성을 올렸고, 상연이 끝난 다음에는 극장 문 앞에 도열하여 그에게 경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1803년에는 소포클레스(Sophocles, 기원전 496?~406)의 비극 가운데에서 특히 《오이디푸스 대왕》(Oedipustyrannus)을 모범으로 한 비극적 운명극 《메시나의 신부》 (Die Braut von Messina)를 출판하였고, 이듬해에는 독일 민족의 애국심에 호소하는 《빌헬름 텔》(Wilhelm Tell)을 바이마르 무대에서 상연하였다. 《빌헬름 텔》에서 실러는 그리스적인 경향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그의 희곡 전체에 일관되어 있는 자유 사상을 다시금 구현하였고,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되찾으며 국가의 독립을 되찾으려는 애국적인 감정과 극적인 사건을 힘차고 밀도 있게 전개함으로써 다소 이완된 듯한 느낌을 주는 이 희곡의 결점을 보완하였다.
오랫동안 가난에 시달려 왔던 실러는 이 무렵부터 차츰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되었다. 한편 그는 1802년에 바이마르의 아우구스트 공의 추천으로 독일 황제로부터 귀족 칭호를 받았고, 황태자의 결혼식에 즈음해서는 《예술의 봉사》(Die Huldigung der Kunst)라는 축제극을 봉정하였다. 동시에 그는 여러 가지 대작에 대한 복안에 부심하였는데, 가장 규모가 큰 비극 《데메트리우스》(Demetrius)그중 하나였다. 《빌헬름 텔》 공연이 있은 후 그만 몸져눕고 말았으나,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데메트리우스》의 집필에 전력을 기울였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기에 더욱 이 작품의 완성을 서둘렀으나, 제2막 3장을끝으로 1805년 5월 9일 사망하고 말았다.
〔평가와 의의〕 괴테와 함께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황금기를 장식하였던 실러는 괴테와 마찬가지로 원숙기를 앞두고 자유 분방한 '질풍 노도' 의 경향이 짙은 작품들을 남기기도 하였다. 청소년 시절에는 가난과 싸우면서 포악한 영주의 탄압에 항거하여야 했고, 원숙기에 접어들면서 작가로서, 또 교수가 된 다음부터는 병마에 시달리면서 질병과 싸웠다. 더욱이 정열에 불타는 천성을 억제하며 정신적인 조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일생 동안 자기 자신과 싸워야 했던 그는 일생을 찬란한 생활을 엮어 나간 괴테와는 달리 실로 비극적인 삶을 살다 간 작가였다.
희곡을 비롯하여 그가 남긴 많은 작품들은 그러한 고난의 결정체였고, 그의 작품 속에 흐르는 일관된 주제는 자유 이념(Freiheitsidee)이었다. 청년 시기인 '질풍 노도' 시대에 갈구한 자유는 프로테스탄트적인 육체적 자유로서 그의 초기 희곡에서는 특권에 항거하는 인간의 자유가 구가되었다. 반면에 고전주의 시대에 해당하는 원숙기의 희곡에서는 가톨릭적인 정신적 자유를 추구하면서 세계적 박애주의 사상과 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자신의 이상을 제시하였다. 즉 자유는 이미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국민 전체의 정치적인 자유라는 것이었다. 실러는 여기서 정열적인 감정이 아니라 원대한 이상을 추구하며 그것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 가톨릭 문학, 독일의)
※ 참고문헌 金光堯, 《獨逸戲曲史》, 明知社, 1993/ 朴鍾緒, 《獨逸文學概論》, 고려대학교 출판부, 1979/ Brockhaus Enzyklopädie in zwanzig Bänden, Siebzehnte völlig neubearbeitete Auflage des groβen Brockhaus, Wiesbaden, 1981/ Benno von Wiese, Schiller. Wallenstein, Das deutsche Drama, Hrsg. v. Benno von Wiese, Diisseldorf, 1968/ Emil Stei-ger, Friedrich Schiller, Zürich, 1967/ Gero von Wilpert, Lexikon der Weltliteratur, Bd. I , Autoren, Stuttgart, 1975/ Otto Mann, Geschichte des deutschen Dramas, Schillers Überlegumg zur Klassik, Stuttgart, 1969.〔金光堯〕
실러,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폰 Schiller, Johann Cristoph Friedrich von(1759~1805)
글자 크기
8권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폰 실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