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지역 내에 있는 도시. 베델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길 동쪽에 있으며, 베델에서 북쪽으로 약 5km, 레보나(Lebonah)에서 동쪽으로 5km 지점에 있던 전형적인 가나안의 도시(판관 21, 19)였다. 실로의 성소에는 계약의 궤가 있었는데, 후에 불레셋인들에게 빼앗겼다가 이스라엘로 돌아왔다.
실로의 지리적인 위치는 에우세비오(260-340)와 예로니모(343~20)에 의해서 이미 확인되었으며, 1838년 이 지역을 체계적으로 탐사한 미국의 성서 지리학자 로빈슨(E. Robinson)은 현지의 팔레스티나 아랍인들이 '키르베트 세일룬' (Khirbet Seilun)이라고 부르는 한 유적지 언덕이 구약 시대의 실로임을 밝혀 냈다. 해발 700m 언덕에 위치한 실로는 중앙 산악 지대의 도로를 통제하는 지정학적인 요지였으며, 근처의 실로 골짜기에는 기름진 평야가 펼쳐져 있어서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성서적 배경〕 실로는 길갈, 세겜과 함께 초기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적인 3대 성지 중 하나였다. 따라서 실로에는 여호수아 시대부터 이미 만남의 장막이 있었고(여호 19, 51), 판관 시대에는 "엘로힘의 집"(성전)이 있었다(판관 18, 31). 해마다 초여름에 실로의 포도밭에서 야훼의 축제가 열렸던 것으로 보아 이곳에 어떤 형태로든 야훼 제의가 거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판관 21, 19). 여호수아는 실로의 만남의 장막에서 아직 땅을 분배받지 못한 일곱 지파에게 추첨으로 땅을 나누어 주었다(여호 18, 1-10). 사무엘 시대에는 이곳에 "야훼의 성전"이 있었는데(1사무 1, 7),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건설한 야훼의 성전이 역사상 최초의 것이라는 일반적인 상식으로 볼 때 이는 매우 파격적이다. 본문에 나타나는 "성소 입구"나 "야훼성전의 문" 등 건물의 특정 부분을 가리키는 용어들을 종합해 볼 때, 실로에는 "만남의 장막"(1사무 2, 22)과는 별도로, 적어도 돌이나 흙 벽돌로 지어진 성전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 민족이 에벤에젤에서 불 레셋과 전투를 벌일 때, 당시 계약의 궤는 엘리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관리하고 있었는데, 승리를 보장받기 위하여 실로의 야훼 성전에 안치되어 있던 이 계약의 궤를 전쟁 터로 가져 갔다. 불레셋군은 처음에는 두려워하였지만 결국 이스라엘 군대를 격파하여 3만 명이나 죽이고 계약의 궤를 빼앗아 갔고(1사무 4, 1-11), 비록 성서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불레셋군은 이때 실로까지 진격하여 도시와 야훼의 성전을 파괴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솔로몬 시대에 실로 출신의 예언자 집단이 건재하였다는 구절(1열왕 11, 29)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또 예레미야 시대에 실로는 폐허로 있었고(예레 7,12), 파괴된 실로가 이스라엘 역사 대대로 교훈으로 여겨진 것(예레 26, 9 : 시편 78, 10)은 실로 자체가 파괴되었다기보다는 이곳의 야훼 성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하여야 한다. 불레셋 아스돗으로 옮겨진 계약의 궤는 다곤 신상을 쓰러뜨렸고, 아스돗 주민들에게 피부병이 번지고 쥐가 들끓게 되자 7개월 후 벳세메스를 거쳐 키럇여아림으로 옮겨져 20년 동안 머무르게 되었다. 이렇듯 계약의 궤가 이스라엘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왜 실로로 보내지지 않았는지에 대해 성서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단지 사무엘의 활동을 통해서 야훼 제의의 중심지가 실로에서 미스바로 이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미스바에 야훼의 성소가 있었다는 것은 물을 길어다 붓는 의식과 번제를 드리는 의식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가 있다(1사무 7, 6-9). 사무엘은 또한 자신의 새로운 거처인 라마에 야훼의 제단을 만들었다(1사무 7, 17). 사울 왕 시대에 엘리의 증손인 아히야가 사제들의 제복인 에봇을 관리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엘리의 후손이 사제직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1사무 14, 3). 실로 출신의 사제들은 솔로몬이 다윗에 이어 왕으로 등극하면서 반대파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에비아달이 아나돗으로 추방되고 사독이 그 자리를 대신하면서 더 이상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다. 솔로몬 치하에서 실로 출신의 예언자 아히야는 여로보암의 반란을 부추기는 예언을 하였다(1열왕 11, 29-39).
〔고고학적 배경〕 실로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은 1915년 독일인 슈미트(A. Schmidt)에 의해 처음으로 진행되었고, 1926년부터 6년 동안은 덴마크의 고고학자 카예르(H. Kjaer)와 크리스텐센(C. Christensen)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1981년부터는 이스라엘 바르-일란(Bar-Ilan) 대학의 핑켈슈타인(I. Finkelstein), 부니모비츠(S. Bunimo-vitz), 레더만(Z. Lederman) 등이 4년 동안 이곳을 집중적으로 발굴하였다. 특히 후자의 발굴은 1980년대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고고학계의 새로운 연구 방법론인 지역 발굴 계획의 일환이었고, 실로에 대한 발굴은 에브라임 지역 연구의 한 분야로 진행된 것이었다. 실로의 지표면에는 로마-비잔틴 시대를 비롯해서 후기 아랍 시대의 수많은 유적들로 뒤덮여 있었으므로, 고고학자들은 성서시대의 도시를 파악하기 위하여 우선 유적지 외곽의 비탈 부분 즉 성벽 부분을 집중적으로 발굴하였다.
지금까지 밝혀진 실로의 최초 주거 연대는 중기 청동기 Ⅱ b시대(기원전 1750~1650)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이 흔적은 중기 청동기 Ⅱ c시대(기원전 1650~1550)에 성벽을 보강하기 위하여 성 바깥쪽에 쌓았던 경사로를 메운 흙 속에서 출토된 토기 조각들에 의한 것으로, 일단 경사로 자체가 바위 바닥까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시대의 토기들이 실로 최초의 주거 흔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실로의 최초 성벽은 중기 청동기 II c 시대에 보강 경사로와 함께 건설되었고, 텔 가장자리의 대부분의 발굴 지역에서 성벽의 윤곽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이 성벽은 당시 가나안 대부분의 도시들에서 유행했던 소위 '키클로포스' 양식으로서 길이가 1m가 넘는 큰 바위들로 양쪽 외벽이 구성되었고 그 내부는 작은 돌들로 채워져 있었다. 실로 성벽의 폭은 3~3.5m로 보강 경사로와 함께 바위 바닥에 기초가 놓여 있었고 군데군데에는 망대가 건설되었으며, 성벽 바깥쪽은 방어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요철 형태로 마무리하였다. 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면적은 16,000㎡ 정도였다.
1920년대 발굴의 주요 관심사는 판관 시대에 불레셋 민족에 의해 파괴된 흔적을 과연 발굴 현장에서 찾아낼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었다. 철기 Ⅰ시대(기원전 1200~1000) 가나안의 특징적인 '목이음 항아리' 6개가 출토되었는데, 이 항아리는 문자 그대로 항아리의 목 부분을 이어 만든 흔적이 있는 항아리로, 영어로는 목 부분에 옷깃같은 자국이 있다 하여 '칼라-림 항아리' (collar-rim jar)라고 한다. 기원전 13~12세기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정착 유적에서 자주 발견되는 특징적인 토기류이다. 아마도 물이 귀한 산악 지대에 정착했던 새로운 민족이 물을 한꺼번에 많이 저장하기 위하여 대용량의 항아리 제작을 시도하였고, 아가리 부분을 따로 만들어 몸통에 붙일 때 항아리 목 부분에 독특한 이음새가 튀어나오게 된 것 같다. 오늘날 이스라엘 고고학계에서 목이음 항아리는 이스라엘 민족 기원의 물질 문명적인 시금석으로 간주되고 있는데, 이들이 모두 파괴층에 섞여 있었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실로가 파괴되었던 에벤에젤 전투를 기원전 1050년경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1980년대의 발굴에서 철기 I 시대의 유적들이 텔 전체에 걸쳐 발견되었지만, 발굴 지역들이 서로 떨어져 있어서 일관된 주거층으로 연결시키기에는 좀 복잡한 양상을 지니고 있었다.
텔 서쪽에 위치한 발굴 지역 C에서 발견된 철기 I 시대에 건설된 여러 채의 집들은 모두 중기 청동기 시대에 성벽 바깥쪽에 잇대어 건설되었는데, 성벽 바깥쪽에는 원래 보강 경사로가 있었으므로 집들은 이 경사로에 에워싸여 지어졌다. 워낙 경사가 급한 곳이어서 축대를 쌓고 계단식 2층 집으로 건설한 흔적이 드러났다. 목이음 항아리들은 대부분 밑 부분이 집 바닥에 약간 박혀 있는 상태에서 벽에 기댄 채로 발견되었는데, 모두 13개였다.
철기 I 시대 실로의 주거지 면적은 약 1만 ㎡ 정도로 추산되며, 사방에 흩어진 재층으로 미루어 이 주거층은 심한 화재로 기원전 11세기 중엽에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철기 Ⅱ 시대의 실로는 텔의 정상 부분이 후대의 침식 작용으로 많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그 주거 상황을 뚜렷하게 밝히기는 어렵지만, 몇 십 년의 공백 후에 소규모로 주거가 지속된 것으로 여겨진다. 왕정 시대의 주거 현상은 성서의 언급에서 간간이 나타나는 실로 출신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 시대에도 실로에는 미미하지만 주거가 지속되었고, 로마-비잔틴 시대에는 텔과 남쪽 지역에 큰 규모의 주거지가 형성되었다. 특히 비잔틴 시대인 5~6세기경에는 순례자들을 위한 성당과 대성전 등 2개의 성당이 건설되었는데, 아랍인들의 침입으로 파괴되었던 순례자들을 위한 성당을 발굴한 결과 모자이크 바닥이 드러났다. 오늘날 실로에는 성서의 지명을 딴 유대인 정착촌 실로가 동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 참고문헌 F.G. Anderson, Shiloh : The Danish Excavations at TellSailun, Palestine in 1926, 1929, 1932, and 1963, Copenhagen, National Museum of Denmark, 1985/ M.L. Buhl · S. Holm-Nielsen, Shiloh : The Danish Excavations at Tell Sailun, Palestine in 1926, 1929, 1932, and 1963, Copenhagen, National Museum of Denmark, 1969/ I. Finkelstein, Khirbet Seilun(Shiloh), 《ABD》 5, pp. 1069~1072/ 一, Shiloh : Renewed Excava-tions, 《NEAEHL》4, pp. 1366~1370/ I. Finkelstein ed., Shiloh : The Archae-ology ofa Biblical Site, Tel Aviv, Tel Aviv Univ. Press, 1993/ B. Halpern,Shiloh, 《ABD》 5, pp. 1213~1215/ A. Kempinski, Shiloh, 《NEAEHL》4, pp.1364~1366/ D.G. Schley, Shiloh : A Biblical City in Tradition and History,Sheffield, JSOT Press, 1989. 〔金 聲〕
실로 〔히〕שִׁילוֹ 〔라〕Silo 〔영〕Shi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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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초기 이스라엘 민족의 3대 성지 중 하나였던 실로 전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