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네, 이냐치오 Silone, Ignazio(1900 ~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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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치오 실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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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치오 실로네.

이탈리아의 소설가. 정치 지도자. 본래 이름은 세콘도 트란퀼리(Secondo Tranquilli).
〔생애와 사상〕 초기생애와 공산당 활동 :1900년 5월 1일 이탈리아 아브루초(Abruz-zo) 지방의 페쉬나 데이 마르(Peschina dei Mar) 시에서 태어났으나, 땅을 조금 소유하고 있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15세 되던 해 길쌈으로 연명하던 어머니마저 사망하고 말아 고아가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17년 공산당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 시작한 실로네는 자기 고향의 저항 운동 지도자로 활동하였던 기원전 1세기의 인물 실로(Silo)를 자주 독립의 표상으로 보았고, 자신이 벌인 저항과 투쟁 정신의 전형을 그에게서 찾고자 하였다. 또한 그는 지하당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바르셀로나의 감옥에 투옥되면서도 v라바탈라》라는 노동 조합 주간지에 글을 발표하였고, 1923년에 장편 《폰타마라》(Fontamara)를 발표하면서부터는 자신을 숨기기 위해 '실로네' 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실로네는 초기 이탈리아 공산당 활동에 지대한 열성을 보였다. 1925년 공산당의 이념적 지주였던 그람시(A.Gramsci, 1891~1937)와 협력하던 그는, 이듬해 파시스트 정부가 모든 정당을 해산하고 언론을 통제하자 지하로 잠적할 수밖에 없었다. 톨리아티(P. Togliatti, 1893~1964)가 공산당의 대외 업무를 맡고 있는 동안에는 대내 사업 을 주관하였고, 1927년에는 그와 함께 이탈리아 공산당 대표로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실로네의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이 점증되었는데, 이를 환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당내에서 일어난 권력 투쟁을 비롯하여 소련에서 가해 오는 압력의 영향으로 마침내 그가 깊은 회의에 빠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29년에 건강을 이유로 당의 요직에서 사임하였고, 1931년에는 당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였다. 이로써 1920년부터 "사회주의 청춘"이라는 단체의 기관지 《아반과르디아》(Avanguardia)의 책임을 맡으면서 시작되었던 그의 공산주의 행로는 막을 내렸다.
사회주의 활동 : 실로네가 이념적으로 공산주의에 기울었던 이유가 안전한 탈출구의 추구에 그 바탕을 둔 것이라면, 그러한 추구 행위는 당과의 결별로 사실상 실패로 끝난 셈이다. 하지만 그의 좌익 사상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나타난 또 하나의 탈출구는 사회당과의 연계였는데, 그가 사회당에 입당한 것은 견딜 수 없는 정신적인 고독감 때문이었다고 회고하였다. 1939년에 실로네는 그때까지 지니고 있던 독립적 사회주의 노선에서 이탈하여 사회당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탈리아 사회당의 해외 지부를 취리히에 결성하였다. 하지만 파시스트 정부의 스위스에 대한 압력 때문에 투옥되자, 파시스트 독재에 대한 실로네의 분노는 절정에 달해 <시민 불복종을 위한 선언문>을 발표하고 나아가서는 3국 동맹의 붕괴를 선언하였다. 또 그는 1929년부터 1944년까지 15년 동안 망명 생활을 하며 온갖 고생을 하다가 귀국하여 사회당에 입당하였을 때, 그때를 회고하는 글에서 "나라는 존재가 모든 면에 있어서 그리스도에게 아주 많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 때가 곧 공산당과의 단절의 순간이었다" 고 말하였다.
공산당이 강요하는 '정신적인 제약들' 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실로네는 프랑스를 거쳐 스위스의 여러 도시들을 방랑하다가 취리히에 정착한 뒤에는 정치와의 인연을 끊고 대부분의 시간을 문화 활동에 바쳤다. 톨스토이(Tolstoi, 1828~1910), 도스토예프스키(F.M. Dostoevski, 1821~1881), 고골리(N.V. Gogol, 1809~1852)를 비롯하여 베르나노스(G. Bernanos, 1888~1948) , 페기(C. Péguy, 1873~1914) 등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하면서 작가적 소양을 키워 나갔다.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문학과 사회와의 연계였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그는 문화의 기능을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의 함양으로 보았고, 여러 예술 분야의 친구들과 더불어 창간한 종합 문예지 《지식》(Information) 역시 그러한 성향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1931년에 창간한 이 잡지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실로네는 평소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투쟁을 계속하기 위하여 직접 창작을 통해 문화 활동을 해야겠다고 판단하였다.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다 준 장편 소설 《폰타마라》와 《빵과 포도주》(Pane e Vino, 1937), 《눈 속에 묻힌 씨앗》(Ⅱ Seme Sotto la Neve, 1940) 등을 비롯하여 전체주의에 대항하는 대화 형식의 비평적 산문 《독재자들의 학교》(La Scuola dei Dittatori, 1938)와 단편집 《파리 여행》은 모두 스위스 망명 생활 중에 나온 결실이다. 그러나 그가 정치적인 활동에서 떠나 있는 동안 그의 옛 친구들은 공산당과 사회당에 잔류해 있으면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실로네는 커다란 정치적 이상을 갖고 귀국하여 이탈리아 사회당에 입당하였고, 훗날 대통령이 된 사라가트(G. Saragat, 1898~ )와 페르티니(A. Pertini, 1896~ )와 더불어 당시 넨니(P. Nenni, 1891~1980)가 이끌던 공산당과는 다른 노선을 취하면서 정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고향 아브루초에서 출마하여 제헌 국회에 진출한 뒤, 이상과 현실 사이에 커다란 장벽이 있음을 절실히 깨닫고 철저히 독자 노선을 걷기로 결심하였다. 1945년 라디오 방송 연설에서 실로네는 "오직 진실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 고 전제한 다음 이탈리아는 불행에 처한 진실성 안에서 재건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또 "혁명이 아니면 혼란이 온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민중을 선동하던 넨니에게 이제는 반파시스트 운동보다는 파시즘 이후의 조국을 생각할 때라고 강조하면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건설할 수 있도록 힘을 결속시켜야 한다는 요지의 주장을 내세우며 공격하였다. 사회당 기관지 《아반티》의 편집진에서 물러난 실로네는 《사회주의 유럽》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면서 독자적인 길을 걷다가 1949년 피렌체에서 통일 사회당을 결성하였다. 이 정당의 강령은 모든 극단적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유럽 문명의 참다운 가치를 회복시키며 인간의 존엄성을 욕되게 하는 모든 세력에 대항해 투쟁한다는 것으로 집약되었다. 그러나 사라가트의 정당과 제휴하여 창건한 통일 사회당에서의 활동도 실로네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자, 마침내 사회주의 이념에도 깊은 회의를 품고 현실 정치는 물론 이데올로기 투쟁에서도 물러나기로 결심하였다.
문화계 활동 : 그에게 가장 중요하게 대두된 이 시기의 문제는 인간성에 바탕을 둔 동 · 서의 화해와 진정한 평화 등이었다. 1950년 동서의 대화가 시작될 무렵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로 이어진 자신의 사상 편력에서 완전히 전향한 그는, 친미적인 국제 운동 기구 '문화의 자유를 위하여' 이탈리아 지부를 결성하였으며, 1956년부터는 잇달아 열린 동서 작가들의 모임에서 사르트르(J.-P. Sartre, 1905~1980), 네루다(P. Neruda, 1904~1973) 등과 논쟁을 벌였다. 그리고 1959년부터는 기관지 《현재의 시간》을 발행(1968년에 폐간)하여 소련에 대한 공격의 목소리를 높였다. 실로네는 이탈리아 사상가 마치니(G. Maz-zini, 1805~1872)처럼 투사적 사상가는 될 수 있었지만 현실 정치에 부합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한동안 펜 클럽 이탈리아 본부의 회장을 역임하였고, 또 망명 생활 중에 발표하였던 자신의 소설들을 다시 정리하면서 오로지 문화 활동에만 전념하다가 1978년 8월 2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사망하였다.
〔작품에 대한 평가〕 그의 문학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형성되었다. 하나는 망명 생활 중에 이루어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에서 완전히 떠난 인생의 후반부에 이르러 즉 사상적 전향을 하고 난 다음에 형성되었다. 이것은 창작 시기는 물론 작가 의식의 방향을 염두에 두고 한 구분일 뿐, 그의 작품 배경이나 소재는 한결같이 남부 이탈리아의 비극적인 현실이었다. 19세기 후반부 이래로 이탈리아에서는 남부의 문제가 정치 · 경제에서뿐만 아니라 문화계에서도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남부는 산업화에서 소외된 시골을 의미하는 도회지의 대칭 개념이었다. 그러나 어떤 작가들은 물질적인 의미를 초월하여 정신적인 문제에까지 남부 정신을 확대하기도 하였는데, 실로네가 그런 부류의 대표적인 작가일 것이다. 남부에 대한 사랑, 그곳을 지키고 있는 농민들에 대한 동정심, 그리고 비극적 현실에서 추구하는 진실 등을 통해서 작가는 자신의 문학 정신을 인문주의(humanism)에 결부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비평가 팜발로니는 그의 문학을 실존적 사실주의의 산물이라고 규정하면서 실로네가 개인과 권력 사이에 뿌리 깊은, 치유가 불가능한 갈등을 현대인의 비극 속에서 인지했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의 문학은 실제 정치 활동과는 달리 파시스트 독재에 시달리는 군중들을 주된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그들의 레지스탕스 정신을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는 않고 있다. 민담에 얽힌 수많은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데 그쳤지만, 풍자성을 살린 그 수법은 일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산간 마을에서 농토도 별로 없으면서 주어진 현실과 비극적으로 싸워나가는 농부들의 삶은 그들만의 것이라기보다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전체 국민의 것이라고 실로네는 전제하였다. 작품의 주인공들은 체념적인 입장을 취할 뿐 어떠한 행동을 통해 저항하는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소위 당국이 가하는 압제에 철저하게 순응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언젠가는 저항에 앞장설 수 있는 농부들이었다. 아무튼 그는 소작 농부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추억 속에 깃들어 있는 어린 시절의 주변적 상황에 맞추어 전개하면서 무엇보다도 갈등 개념에 중점을 두었다.
아름다운 전원의 상징으로 모든 여행객들의 머리에 그려진 남부의 이탈리아라고는 하지만, 《폰타마라》에 나오는 남부 이탈리아는 그러한 모습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황폐의 표상이었다. 산간 마을 폰타마라의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농민들은 파시스트 체제에 영합한 소도시 읍의 새로운 부르주아 주인들이나 종교계를 등에 업고 가장된 인문주의를 내세우지만 갈등의 요인을 제공하기는 마찬가지인 새로운 지도층들과 끊임없는 싸움을 단행한다. 실로네는 그들을 그리면서 이따금씩 성서적인 비유를 적용하여 폰타마라 사람들이 약속된 땅을 가지고 있다는 암시를 통해 그들의 성공을 내다보았다. 그 약속된 땅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개인주의를 파괴하고 계급의 연대 의식을 창출하여 민중의 투쟁을 진행시켜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에 바탕을 둔 그의 두 번째 소설 《빵과 포도주》 역시 처음에는 《폰타마라》처럼 스위스에서 독일어로 출판되었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독자들에게 자유롭게 읽혀질 수 없었으나, 훗날 이탈리아어 판이 비밀스럽게 전달되면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 피에트로 스피나는 성서적 사랑의 전파자로, 또 하나의 인물 돈 베네데토는 정의롭고 연대 의식이 강한 사회의 사도로 부각되었다. 스피나를 통해서 작가가 나타내려는 주된 주제는 "그리스도교 정신은 행정이 아니다" 라는 데에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정치적 · 종교적 순응주의는 무지와 불의와 특권들을 항구화시키면서 사회의 구원과 도덕적 발전에 거역하는 것이다. 사회란 그 구성 요소들 안에서 개선되어 나갈 때 비로소 제 궤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는 작가의 정신이 이 인물을 통해서 구체화되고 있다. 어빙 하우(E. Howe)는 정치와 소설의 관계를 설명하는 글에서 실로네의 《빵과 포도주》를 소개하였다. 특히 그는 주인공 스피나('가시' 라는 뜻)라는 인물이 지니고 있는 실로네의 자전적 요소에 관심을 두면서, "스피나는 민중과의 관계를 다시금 확고히 하고 자기의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실제의 현실적인 경험 세계 안에서 무너지지 않고 지탱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망명 생활에서 고향 땅의 농촌으로 돌아오는 혁명가로서" 결국에 가서는 마르크스주의를 버리지만 사회에 대한 저항 정신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고 분석하였다. 스피나는 스파다( '창' 이라는 뜻)로 이름을 바꾸고 신부로 가장한 뒤 성직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개인적 감정마저 감추는 혁명적 그리스도교 성자(聖者)가 되려고 하지만, 하느님을 믿지 않는 성자이기 때문에 그는 어느 면에서 보면 성자의 본질보다는 사랑의 본질에만 집착하고 있을 뿐이다. 스파다는 고향에 돌아와 고통 속에서 허덕이는 농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념과 정치적 선전과 독재 체제에 대하여 통찰한 다음, 자신이 품어 왔던 정치적 신념에 대한 불안과 회의를 갖는다. 그리고 정치적 회의는 그로 하여금 윤리적 이상을 추구하게 만든다. 그 이상은 원시 그리스도교의 사랑의 개념이다.
〔평 가〕 그의 저항 정신은 결론적으로 이상향의 실현을 위한 꿈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있다. 실로네는 이상향을 처음에는 마르크스주의의 울타리 안에서 찾으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후에는 비록 변형된 의미지만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의 개념 안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이러한 세계의 건설을 위해서 그는 《독재자들의 학교》나 《눈 속에 묻힌 씨앗》 등을 내놓았고 또 이러한 작품들을 통하여 전체주의적 현상의 원인을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당시 유럽 지성인들로 하여금 저항 의식을 갖게 하는 데 공헌하면서, 결국에 가서는 그의 후기 문학 세계에까지 이어지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복음주의적 성향과 탈이데올로기적 성향을 띤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1968년에 발표한 그의 마지막 작품 《어느 불쌍한 그리스도 신자의모험》(L' Avventura d'un Povero Cristiano)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작품이다. 드라마의 형식을 빌린 소설이라는 이색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작품은 당시까지의 작품들과는 달리 자전적인 요소를 직접적인 소재로 삼지 않고 13세기의 역사로 독자들을 안내하고 있다. 이교도적인 삶에서 철레스티노 5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이되었던 모로네의 베드로(Pietro da Morrone)가 가예타니(Benedetto Cajetani) 추기경(즉 보니파시오 8세)에 의해 사임하는 과정에서 벌어졌던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내부적 갈등을 부각시키면서 현대인이 필요로 하는 이상 세계를 암시하였다. 실로네는 이상 세계를 인류의 제3 시대 즉 교회나 국가라는 조직마저 필요로 하지 않는 성령의 시대에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어떠한 개혁이나 어떠한 물질적 번영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인간은 결코 만족할 수 없는 불안을 지니고 있음을 자신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토피아의 역사란 안노니(C. Annoni)라는 비평가가 지적하였듯이 항상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 그러나 강인하기 그지없는 희망의 역사라는 것을 실로네의 문학은 암시하고 있는지 모른다. 아울러 좌경적 성향을 띠고 생성 · 발전되었던 실로네의 사상이 서유럽인의 정신적 기둥인 그리스도교의 복음 사상으로, 비록 변형된 모습으로나마 귀의한 것도 끊임없는 이상향의 추구 정신에서 파생되었을 것이다. (→ 가톨릭 문학, 이탈리아의)
※ 참고문헌  I. Silone, Fontamara, Oprecht, Zürich, 1930(Mondadori, Milano, 1958)/ ㅡ, Pane e Vino, Oprecht, Ziirich, 1937(Mondadoni, Milano, 1957)/ ㅡ, Il seme sotto la neve, Faro, Roma, 1945(Mondadori, Milano, 1961)/ ㅡ, Ⅱ segreto di Luca, Mondadori, Milano, 1956/ ㅡ, L'avventura d'un povero cristiano, Mondadori, Milano, 1968/ L. D'Eramo, L'opera diIgnazio Silone, Mondadori, Milano, 1971/ C. Annoni, Invito alla lettura di Silone, Mursia, Milano, 1974/ S. Martelli · S. Di Pasqua, Guida alla lettura-tura di Silone, Mursia, Milano, 1988/ E. Ghidetti · G. Luti, Dizionario critico della letteratura italiana del novecento, Riuniti, Milano, 1997. 〔韓炯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