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암 비문 - 碑文 〔영〕Siloam in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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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암 지하 수로 터널의 벽에 기록된 비문.

실로암 지하 수로 터널의 벽에 기록된 비문.

기원전 701년 아시리아의 왕 산헤립의 예루살렘 침공에 대비하여 남부 유다의 왕 히즈키야(기원전 717~698)가 방어 전략 공사 중 하나로 시행한 지하 수로 터널의 벽에 기록된 내용.
〔배 경〕 산헤립이 아시리아 군대를 이끌고 남부 유다를 침공하였을 때(2열왕 18, 13-16 ; 2역대 32, 1-8), 비록 성서에는 기록이 없지만 "성밖의 샘들을 막고 흐르는 물줄기를 차단했다"는 구절(2역대 32, 3-4)을 통하여 어떤 형태로든 당시 예루살렘의 지하 급수 시설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예루살렘의 수원지(水原池)인 기혼 샘으로부터 실로암 못까지 전체 길이가 525m에 달하는 히즈키야 터널은 고대 이스라엘의 토목 공사 기술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보여 준다. 터널의 출발지인 기혼샘은 도착지인 실로암 못보다 불과 32cm 정도 높기 때문에 전체 터널의 평균 기울기는 0.06%에 불과하다. 또 터널과 관계된 가장 신비로운 의문점 두 가지는 기혼 샘에서부터 실로암 못까지의 직선 거리가 315m인데도 구불구불하게 파여져 525m나 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 양쪽에서 파 들어간 인부들이 한가운데에서 만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첫 번째 의문에 관한 구약학자들의 답은 터널의 지상 부분에 있었던 유다 왕들의 무덤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하지만 1978년부터 다윗성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이 시도되었을 때 지질학자 길(D. Gill)이 정밀 조사한 결과, 이 터널 지역이 4만 년 전부터 형성된 바위 틈새로 이어져 있었음이 밝혀졌다. 즉 히즈키야의 공병대원들은 단순히 물이 흐르는 기존의 바위 틈새를 따라 파다 보니까 구불거리는 수로를 따라간 것이고, 당연히 한가운데에서 양쪽이 만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을 포위하던 산헤립은 쿠데타 소문을 듣고 급히 본국으로 철수하였고, 이사야의 예언(이사 37, 7)대로 칼에 맞아 죽었다. 어떤 학자들은 6개월동안 비가 오지 않는 건기에만 주로 성을 포위하는 당시 전술에 비추어 볼 때, 히즈키야 터널 때문에 예루살렘이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비문 내용〕 실로암 비문은 1880년 실로암 못에서 물놀이를 하던 팔레스티나 어린이들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히즈키야 터널의 실로암쪽 출구에서 안쪽으로 10m 들어간 지점의 왼쪽 벽, 즉 동쪽 면에 바닥에서 1.5m 지점에 있던 이 비문에는 모두 6줄에 200자의 고대 히브리어가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던 영국의 고고학자 콘더(C.R. Conder)와 세이스(A.H. Sayce) , 독일의 구테(H. Gutthe) 등이 비문의 해독을 각각 시도하였는데, 비문이 발견된 지 10년 만인 1890년에 도굴꾼이 이 비문을 터널 벽에서 떼어 내는 과정에서 일부가 떨어져 나가 현재는 23개의 글자가 훼손된 상태이다. 이 비문은 그 후 예루살렘의 한 골동품 상인에게 팔렸다가 당시 팔레스티나를 통치하고 있던 오스만 터키 당국에 압수되어 오늘날까지 이스탄불의 고고학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비문의 우리말 번역은 다음과 같다.
"굴착 (공사), 굴착 공사는 다음과 같다. (인부들은)도끼를 1 서로 (마주쳤다). 아직 3암마를 더 파야 함에도 불구하고 동료를 부르는 사람의 1 목소리가 들렸다. 왜냐하면 암벽의 오른쪽과 왼(쪽에) 틈새가 있었기 때문이다. 굴착 1 당일에 인부들은 맞은편 동료쪽으로 파 들어갔다. 도끼와 도(끼가) 서로 겹쳤다. 1 물이 수원지로부 터 연못까지 1,200암마를 흘러갔다. 1 바위의 높이는 인부들의 머리 위로 100암마였다."
비교적 완벽하게 보존된 비문이었기 때문에 번역에서 큰 문제는 없었으나 셋째 줄의 히브리어 단어 "지다"(ורה)의 뜻을 두고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런데 이 단어를 "(바위) 틈새"로 번역한 이유는 바로이어 나오는 "암벽의 오른쪽과 왼쪽"에서 착안한 것이다. 두 방향에서 서로 마주보고 파 들어가는 인부들의 위치에서 각각 오른쪽과 왼쪽, 즉 이미 갈라져 있는 바위 틈새가 있었기 때문에 서로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의 의〕 실로암 비문은 양적으로 많지 않은 유다 왕국의 기념비적인 비문 중 가장 긴 장문이다. 또 성서의 기록과 아시리아의 기록, 고고학, 비문학, 지질학, 수리학, 토목 공학 등의 전문적인 지식들이 총동원되어 연구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 실로암)

※ 참고문헌  S. Ahituv, Handbook of Ancient Hebrew Inscriptions, Jerusalem, Keter, 1992/ R.B. Coote, 《ABD》 6, pp. 23~24/ J.C.L. Gibson, Hebrew and Moabite Inscriptions, Oxford, Clarendon, 1971/ D. Gill, Jerusalem's Underground Water Systems : How They Met?, Biblical Archaeology Review 20-4, 1994, pp. 20~33/ H. Guthe, Die Siloainschrift, Zeitschrift der deutschen morgenlandischen Gesellschaft 36, 1882, pp. 725~750/ S.B. Parker, Siloam Inscription Memorializes Engineering Achieve-ment, Biblical Archaeology Review 20-4, 1994, pp. 36~38/ E. Puech, L'ins-cription du tunnel de Siloe, Revue Biblique 81, 1974, pp. 196~214/ V. Sas-son, The Siloam Tunnel Inscription, Palestine Exploration Quarterly 114, 1982, pp. 111~117. 〔金 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