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 성인. 교황(536~537). 축일은 6월 20일.
캄파니아의 프로시노네(Frosinone)에서 호르미스다 교황(514~523)의 아들로 태어나, 536년 4월 22일 콘스탄티노플에서 사망한 교황 아가피토(535~536)의 후임으로 같은 해 6월 교황이 되었다. 그는 당시 로마를 점령하고 있던 동고트족의 왕 테오다하(Theodahah, 535~536)에 의해 교황으로 임명될 당시 차부제(suddiaconus)는데, 이러한 선출은 당시까지의 관습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교황은 부제들 중에서 선출되었고, 실질적으로 대부제는 교황직 직전의 직분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에는 돈으로 더럽혀진(corruptus pecuniae) 테오다하가 자신이 세운 새 교황 선출에 동의하지 않는 성직자들을 칼로 책벌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로마 교회의 성직자들은 이러한 교황 임명이 관습에 따른 것이 아니라고 하여 크게 반발하였고, 교황 임명 훈령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다. 하지만 실베리오는 물리적 힘으로 교황 직분에 올랐고, 결국 성직자들은 교회의 일치와 보존을 위하여 새 교황 즉위 후인 6월 8일에 비로소 동의를 표하였다. 이탈리아 소유권을 둘러싸고 동로마 제국과 동고트족 사이에 벌어진 전쟁 중에 교황이 된 실베리오는, 짧은 교황직을 수행하는 동안 자신의 원의와는 상관없이 이탈리아와 교회에 휘몰아친 정치적 · 종교적 문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다가 537/538년에 사망하였다.
〔교황 활동과 역사적인 배경〕 교황에 즉위한 지 얼마되지 않아, 《연대 교황표》에 따르면 두 달 후 후원자 인테오다하 왕이 사망하자,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527~565)는 벨리사리우스(Belsarius, 500~565)장군을 이탈리아로 파견하여 고트족으로부터 이탈리아를 해방시키도록 하였다. 536년 12월 10일 나폴리를 점령한 후 황제의 이름으로 로마에 입성한 벨리사리우스는 교황과 로마 시민들로부터 환대를 받았고, 직접 로마를 통치하였다. 한편 고트족은 테오다하 왕의 후계자인 비티제스(Vitiges, 536~540)를 중심으로 라벤나에 집결하여 로마 공격을 위한 행진을 시작하였다.
이때 동로마 제국에 파견된 교황 사절 비질리오(Vigi-lius, ?~555) 부제가 이탈리아로 오면서 황제의 부인이자 공동 통치자였던 테오도라 1세(Theodora I , 527~547) 황후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이 편지에서 황후는 벨리사리우스 장군에게 비질리오가 교황으로 선출될 수 있도록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비질리오는 본래 교황 보니파시오 2세(530~532)에 의해서 후임자로 임명되었지만, 성직자들과 원로원의 반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었다. 아울러 황후는 그리스도 단성설을 믿는다는 이유로 아가피토 교황이 면직시켰던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안티모(Anthimus, 518~?)의 복권을 받아들일 만한 새 교황을 찾고 있었다. 카르타고의 부제 리베라토(Liberatus)가 560~565년에 저술한 《네스토리우스파와 에우티케스파 사건의 개요》(Breviarium causae Nestorianorum et Eutychianorum)에 따르면, 비질리오는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테오도시오 · 안티오키아의 주교 세베로 ·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안티모 등의 복권과 칼체돈 공의회(451)의 결의 사항 무효화 등에 동의하는 대가로 황후로부터 교황좌를 약속받았다고 한다.
벨리사리우스 장군은 황후의 뜻을 따르려고 하였으나 합백적인 교황을 면직시킬 권한이 없자, 자신이 머물고 있던 핀치아노(Pincianus) 궁으로 교황을 소환하여 교황직을 사퇴하고 안티모를 복권시키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하지만 교황은 이 요구를 거절하였다. 537년 2월에는 비티제스 왕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약 1년 동안 로마를 포위하며 공격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 많은 이들이 굶주림과 무력으로 사망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성당과 묘지들이 황폐화되었다. 특히 이들이 진영을 세운 살라리아(Salaria) 지역에 있던 순교자들의 유해가 가장 심하게 훼손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후에 복구된 묘지, 특별히 살라리아 지역 묘지의 묘비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한편 그 해 3월 초에는 교황이 비티제스 왕에게 보낸 것으로 되어 있는 서한이 유포되었다. 이 편지에는 교황이 라테란 궁 옆에 있는 아시나리아 문(porta Asinaria)을 열어 로마를 비티제스에게 넘긴다는 약속을 한 것으로 쓰여 있었다. 그러자 벨리사리우스는 3월 11일에 다시 교황을 소환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혐의를 벗기 위해, 또 반대자들에게 어떠한 구실도 주지 않기 위하여 라테란 궁을 떠나 성 사비나(St. Sabina) 성당으로 이주하였다. 3월 18일(혹은 19일)에 고트족의 공격이 있은 후, 3월 21일 교황은 세 번째로 벨리사리우스의 궁으로 소환되었다. 교황을 수행한 성직자들을 대합실에 기다리게 하고, 비질리오만이 교황을 동행하도록 허락되었다. 교황과 비질리오가 벨리사리우스의 방에 들어갔을 때, 그의 부인 안토니나(Antonina)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벨리사리우스는 그녀의 발치에 앉아 있었는데, 안토니나는 교황을 보자 "실베리오 교황, 당신이 우리를 고트족의 손에 넘기려고 할 만큼 우리가 당신과 로마인들에게 잘못한 일이 무엇인지 말해 보시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때 대부제인 요한이 들어와 교황의 팔리움(pallium)을 빼앗은 뒤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가서 수도자 복장으로 갈아입혔고, 식스토 차부제는 기다리고 있던 성직자들에게 실베리오가 더 이상 교황이 아니고 수도자가 되었다고 선포하였다. 이 말을 들은 성직자들은 그대로 도망가 버렸다. 다음날 모든 사제들과 부제들과 수품자들을 소집한 벨리사리우스는 이 사실을 공포하고, 새 교황을 선출하도록 하였다. 결국 벨리사리우스의 압력을 받아, 실베리오가 자의로 교황직을 사임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비질리오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실베리오는 휘하 성직자들을 만나지도 못한 채 리치아(Lycia)의 파타라(Patara)로 유배되었고, 교황에게 행해진 일련의 사태에 대해 분개한 파타라의 주교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게 가서 "세상에는 많은 왕들이 있지만, 그 어떤 왕도 온 세상의 교회를 짊어지고 있는 교황 같지는 않습니다. 바로 그 교황이 자신의 좌에서 추방되었습니다"(《네스토리우스파와 에우티케스파 사건의 개요》)라고 고발하였다. 그러자 황제는, 테오도라파에 속했고 당시 동로마 제국의 교황 사절로 와 있던 펠라지오(Pelagius) 부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황을 이탈리아로 다시 보내어 그곳에서 재심을 받도록 하였다. 그리고 실베리오의 유죄가 인정된다면 주교직은 그대로 유효하지만 로마 밖에 머물러야 하며, 아무런 잘못이 없다면 교황직에 복권될 것이라고 결정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이탈리아에 도착하자마자 비질리오의 간계에 걸려들었다. 황제의 결정에 위협을 느낀 비질리오는 벨리사리우스에게 실베리오 교황을 자신에게 인도하지 않는 한, 더 이상 황후로부터 자신에게 요구된 그리스도 단성론 지지를 하지 않겠다고 통지하였던 것이다. 이 통지를 받은 벨리사리우스는 교황을 사로잡아 비질리오 교황의 종들에게 인도하였는데, 리베라토의 증언에 따르면 교황은 이들에게 이끌려 팔마리아(Palmaria) 섬으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연대 교황표》와 《로마 순교록》(Martirologium Romanorum) 및 안티오키아의 대주교 아나스타시오 1세(Anastasius I, 559~598/599)의 증언에 따르면, 교황의 재유배지는 폰차(Ponza)였다고 한다. 이 유배지에서 537년 11월 11일에 교황직 사퇴가 강요된 것으로 추정된다.
〔순교와 공경〕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교황은 537년 12월 2일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고 하나, 538년 6월20일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하여 사망일은 확실하지 않다. 또 리베라토와 아나스타시오는 교황이 아사했다고 하였고, 교황과 같은 시대 인물이었던 프로코피오(Procopius)가 쓴 《아르카나 역사》(Historia Arcana)에는 벨리사리우스의 부인인 안토니나가 자신의 종 에우제니우스(Eugenius)를 보내 교황을 살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유배지에서 사망한 교황들의 유해가 로마로 이송된 것과는 달리 실베리오 교황의 유해는 유배지에 그대로 남아 있다. 교황의 무덤은 이후 순례 장소가 되어 많은 기적들과 치유가 이루어졌으며, 11세기부터는 칼체돈 공의회의 정통 신앙을 옹호한 순교자로 공경을 받았다.
※ 참고문헌 L. Duchsene, Le Liber Pontificalis, Texte, Introduction et commentaire, ed. E. De Boccard, Paris, 1955/ P.H. Grisar, Roma allafine del mondo antico, nuova edizione aggoirnate e curata da Alfonso Bartoli, trad. di A. Mercati, Decalée & Editori Pontifici, Roma, 1930/ J.N.D. Kelly, The Oxford Dictionary of Popes, Oxford Univ. Press, Oxford, New York 1986/ Liberates, Breviariuim causae Nestorianoum et Eutychianorum, 《PL》 68/ A. Lopes, I Papi, La vita dei pontefici attraverso 2000 anni deistoria, Futura Edizioni, Roma, 1997/ L. Tripepi, Ritratti e Biografie dei Romani Pontefici, Tipografia della Pace, Roma, 1879/ É. Amann, 《DTC》 28, pp. 2065~2067/ A. Amore, 《EC》/ J. Barmby, 《DCB》/ A. di Berardino, (DPAC》C.F. Coué, Dizionario Storico del Papato, diretto da P. Levillain, trad. di F.S. Sardi, Bompiani, Milano, 1996/ V. Monachino, Bibliotheca Sanctorum, Instituto Giovanni XXIII della Pontificia Università Lateranense, Roma, 1968. 〔邊宗燦〕
실베리오 Silverius(?~537/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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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실베리오 교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