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베스테르 Silve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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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베스테르 1세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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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베스테르 1세 교황.

① 실베스테르 1세(?~335) : 성인. 교황(314~335) . 축일은 12월 31일(동방 교회의 축일은 1월 2일).
〔생애와 전설〕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에 따르면, 로마에서 루피노(Rufinus)라는 신부의 아들로 태어나 314년 1월 31일 교황으로 선출된 후 21년 간 교황직을 수행하였다고 한다. 오랜 기간 교황직을 수행한 교황 가운데 한 명이었으나, 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에 재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나 활동에 대한 정확한 사료는 희박하고, 상당 부분이 비역사적인 전설적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콘스탄틴 대제(306~337)가 로마 제국과 교회 내에서 펼친 업적에 가려진 탓이다. 335년 12월 31일에 사망하였는데 그 장소는 알 수가 없고, 유해는 살라리아 가도(ViaSalaria)에 있는 프리실라(Pischil-la) 카타콤바에 안장되었다.
교황의 생애에 대한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를 수록한 문헌들로는 《심마쿠스의 위경》(Apocryphus Symmachi) 중 <복된 실베스테르의 생애>(Vita beati Silvestri) · <실베스테르의 헌장>(Consthutum Silvestri) · <275명의 주교 시노드>등이고, 《연대 교황표》에도 일부 내용이 나온다. <복된 실베스테르의 생애>에서는 교황의 아버지에 대해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어머니 이름은 유스타(Justa)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후대의 전설은 교황이 디오클레시아누스(Diocletianus, 274~305) 황제의 박해 때 고통을 받았다고하는데, 이 내용을 더욱더 각색한 도나투스주의자들은 교황이 신부 시절에 교황 마르첼리노(296-304)와 함께 배교하였다고 비난하였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Hipponensis, 354~430)는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라며 이를 일축하였다.
<복된 실베스테르의 생애>는 라틴어 · 그리스어 · 시리아어로 편집된 책으로, 교황의 삶을 소설적으로 묘사하면서 특별히 교황의 젊은 시절과 양성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교황은 젊은 시절부터 성지 순례자들을 환대하고 맞아들이는 책임을 맡았고, 멜키아데스 교황(310~314)으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교황으로 선출된 후 콘스탄틴 대제의 박해로 소라테(Soratte) 산으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이 박해로 대제는 하느님의 벌을 받아 나병에 걸렸고, 어린이들의 피로 씻으면 낫는다는 권고를 받고 많은 어린이들을 학살하였지만 대제의 병은 낫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성 베드로와 바오로가 나타나 교황을 소라테 산에서 돌아오게 하면 교황이 대제의 병을 낫게 해줄 수 있는 연못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하는 환시를 보았다. 이에 교황은 산에서 내려와 라테란 궁에서 회개한 대제에게 세례를 주고 나병을 치유해 주었다. 한편 예비 신자의 의복인 흰 옷을 입고 지내는 주간 동안 대제는 그리스도교에 우호적인 칙령들을 반포하였는데,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로마 교황의 권위가 모든 주교들보다 위에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흰 옷을 벗는 8일째 되는 날 대제는 쟁기를 잡고 베드로 대성전 건립에 착수할 것을 선언하였고, 다음날에는 라테란 대성전 건립 착수도 선언하였다. 또 이 책에 보면, 교황은 유대교에 심취해 있던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Helena, 255~330)와 몇몇 원로들과 참된 종교가 무엇인지 논쟁을 벌였는데, 여기에서 교황은 여러 기적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드러내었고, 결국 헬레나는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훗날 헬레나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예수 그리스도가 못박혀 죽었던 십자가를 찾아내었고, 대제 역시 자신의 백성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도록 하여 교황이 사망할 당시 로마는 그리스도교화 되었다. 《연대 교황표》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역사적인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왜냐하면 콘스탄틴 대제는 실제로 그리스도교에 박해를 가한 적이 없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직후 세례를 받지도 않았으며, 장소 역시 로마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예비 신자로서 안수를 받지도 않았고, 사망할 무렵에야 아리우스파 주교인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Eusbius Nicomediae, ?~342)로부터 세례를 받았음이 역사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실베스테르의 헌장>과 <275명의 주교시노드>는 콘스탄틴 대제가 세례를 받은 후 트라야누스(Trajanus) 온천에서 대제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시노드의 훈령과 결정 사항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이 시노드는 제1차 니체아 공의회(325)의 결정 사항을 재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실베스테르의 헌장>에서 교황은 삼위 일체 교리를 혼란스럽게 한 발렌시아누스파 부제인 히폴리투스(Hippolytus)와 갈리스투스(Calistus) , 그리고 가장 위험한 이단으로 간주된 빅토리누스(Victorinus) 주교를 파문하였다. 아울러 《연대 교황표》에 서술된 여러 전례 규정들과 규율들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8세기에는 《심마쿠스의 위경》에 <콘스탄틴의 증여>(Donatio Constantin)라는 문헌이 첨가되었다. 이 문헌에는 콘스탄틴이 콘스탄티노플로 옮기면서 실베스테르 1세와 그 후계자들에게 로마, 이탈리아 그리고 서방 교회의 모든 지역과 국가에 대한 권한을 증여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한 교황과 성직자들에게 많은 특권을 부여하고, 모든 것은 로마 교회의 재치권 아래에 둔다는 선언내용이었다. 그러나 교황권을 반대하는 이들로부터도 참된 문헌으로 인정받았던 이 문헌은 16세기에 와서 진본이 아님이 밝혀졌다.
〔교황의 활동과 교회사적 배경〕 실베스테르 1세는 교황 즉위 초기부터 도나투스주의 (Donatismus)와 아리우스주의(Arianismus)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하였다.
아를 교회 회의와 도나투스주의 문제 : 전임 교황 멜키아데스는 313년에 로마 교회 회의를 소집한 다음 도나투스주의 문제를 다루면서 카르타고의 주교 체칠리아노(Cecilianus)의 합법성을 천명하였으나, 도나투스파는 승복하지 않고 콘스탄틴 대제에게 직접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대제는 이듬해 8월 1일 아를(Arles) 교회 회의를 소집하고 교황에게 회의 참석을 요청하였으나 교황은 참석하지 않았다. 이에 대제는 클라우디아노(Claudianus)와 비토(Vitus) 등 2명의 신부와 에우제니오(Eugenius)와 치리아코(Cyinacus) 등 2명의 부제를 로마 주교좌의 대리자보다는 참관자로 참석하도록 요청하였다. 이 회의의 주재자는 아를의 주교 마리노(Marinus)였지만, 시라쿠사(Siracusa)의 주교 크레스토(Chrestus)가 콘스탄틴 대제로부터 위임받아 전반적으로 회의를 이끈 것으로 보인다. 이 교회 회의에서 다시 한번 도나투스파가 단죄되고 카르타고의 주교 체칠리아노의 합법성이 재천명되었으며, 회의에 참석한 주교들은 교황에게 경의에 찬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 주교들은 교황이 서방 교회에 대해 갖고 있는 수위권을 인정하면서 교황이 참석하지 않은 것에 애석함을 표하였고, 회의 결정 사항을 모든 교회에 선포할 것을 요구하였다. 교황 역시 회의 결정 사항에 동의하였다. 아울러 이 교회 회의에서는 부활절 날짜 문제, 영성체, 세례성사 등과 같은 사안들도 다루었는데, 교황은 공의회에 참석한 모든 주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부활절 날짜를 고정시킬 것을 요구하였었다. 교황의 이러한 모습은 로마 교회 주교가 전체 서방 교회에서 갖는 수위권의 단면을 표출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제1차 니체아 공의회와 아리우스주의 문제 :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도나투스주의가 당시 서방 교회에서 강력한 이단으로 등장하였던 것처럼, 동방 교회에서는 319년경 아리우스주의가 강하게 대두되었다. 이 이단은 삼위 일체 교리를 잘못 이해하여 발생한 것으로, '하느님' 이란 명칭은 오직 성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고, 그리스도는 성부의 첫 창조물에 불과한 하나의 '하급신' (δευτερος θεος)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323년에 열린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에서는 아리우스주의를 단죄하였고,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알렉산데르(Alexander, 312~328)는 교황에게 아리우스(Anus, 260~336)를 파문에 처했음을 통보하였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와 아리우스파가 '무익한 세부적인 것' 을 놓고 토론하고 있다고 판단한 대제는 이들 모두에게 편지를 보내고, 코르도바의 호시오(Hosius, 256-357/358) 주교를 알렉산드리아에 파견하는 등 화해시키고자 노력하였지만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325년에 대제는 이탈리아와 유럽의 주교들이 오기에 편한 도시 니체아에서 세계 공의회를 개최한다고 선포하였다.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은 대개 동방 지역의 주교들이었고, 교황 역시 공의회에 참석 초대를 받았다. 소조메노(S.H. Sozomenus, 380?~?)에 의하면, 교황은 연로하였기 때문에 공의회에 참석하지 못하고 비토 신부와 훗날 카푸아의 주교가 된 빈첸시오(Vincentius) 신부 등을 특사로 파견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공의회 회기 동안 행해진교의 논쟁에서 어떠한 영 향력도 행사하지 않았지만, 공의회를 주도한 호시오 주교 바로 다음으로 공의회의 결의 사항에 서명하였다. 호시오 주교가 실제로 공의회를 주도하였기 때문에 모두들 그가 교황의 특사로 파견된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교황은 자신이 파견한 2명의 신부로부터 보고받은 것을 통해 공의회가 결정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하였다. 《연대 교황표》에 따르면 교황은 로마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다시 한번 아리우스, 스미르나의 주교 포시누스(Photinus), , 갈리스투스, 사벨리우스(Sabellinus) 등을 파문에 처하는 등 니체아 공의회의 결의 사항을 재천명하였다고 한다.
교회 규율의 반포 : 《연대 교황표》는 교황이 다음과 같은 교회 규율을 반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첫째, 다시 가톨릭 교회로 돌아오는 아리우스파 사제들은 가톨릭 주교가 축성한 크리스마(chrisma) 성유와 안수로써 주교에 의해 받아들여질 수 있다. 아울러 주교만이 크리스마 성유를 축성할 수 있으며 견진성사를 집전할 수 있으나, 죽을 위험이 있는 경우에는 신부가 물로 씻겨진 세례자들에게 크리스마 성유로 도유할 수 있다. 둘째, 평신도는 성직자를 고소할 수 없다. 이 규정은 <실베스테르의 헌장>에서도 발견되는데, 이 헌장에서는 사제가 주교를 고소할 수도 없게 하였다. 셋째, 전례복에 관한 규율로, 부제들은 달마티카(dalmatica)와 수대(手帶, manipulus)를 착용하여야 한다. 넷째, 성직자는 어떠한 소송이든지 세속 법원에 출두하지 않으며, 교회 안에서가 아니라면 세속 법정의 판사 앞에서 진술하지 않는다. 다섯째, 예수 그리스도가 아마포로 감싸여 무덤에 묻힌 것처럼 제대포는 아마포로만 만들어져야 한다. 여섯째, 성직의 절차에 관한 규정으로서, 강경자 · 구마자 · 시종자 · 차부제 · 부제 · 사제 등의 순서를 정하고, 주교 · 신부 · 부제는 오직 한 명의 부인만을 두어야 하며, 좋은 평판을 받고 있어야 서품될 수 있다.
성당 건축 : 실베스테르 1세 교황의 재임 시기에 로마에는 많은 성당들이 건축되었다. 콘스탄틴 대제의 도움과 증여로 이루어진 이 건축물은 로마가 그리스도교 도시로 바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연대 교황표》에 따르면, 대제는 교황에게 라테란 궁을 선사하여 라테란 대성전과 세례소(baptisterium)를 건축하도록 하였고, 헬레나 성녀의 궁 옆에 예루살렘의 성 십자가(Santa Croce in Geru-salemne) 대성전을 지어 예수 그리스도가 못박혀 매달렸던 십자가를 모셔 놓았다. 또 바오로 대성전을 건축하여 사도 바오로의 무덤을 안치하였고, 티부르티나 가도(Via Tiburtina)에는 라우렌시오 대성전을 건축하여 성 라우렌시오 순교자의 유해를 안장하였으며, 성녀 아네스 대성전을 건축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대제의 딸인 콘스탄시아(Constantia)가 교황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곳에 세례소를 세우게 하였으며, 베드로 사도의 무덤이 있던 곳에 베드로 대성전을 건축하도록 하였다. 대제는 또 두 명의 순교자, 즉 마르첼리노(Marcellinus) 신부와 구마품자(exor-cista)인 베드로에게 바치는 대성전을 건축하였다. 이외에도 《연대 교황표》에는 대제가 오스티아 · 카푸아 · 나폴리 등 로마 지역 외에 건축한 성당들에 대해서 소개되어 있다. 대제의 명으로 건축된 성당 외에 《연대 교황표》는 교황 실베스테르 1세가 도미티아노 목욕탕 옆에 성당 하나를 건축하였다고 하는데, 이 성당은 에퀴시오(Equitius)라는 신부가 기증한 땅에 세워진 것이었다. 이 성당은 설립자의 이름을 따서 성 실베스테르 성당으로 불려졌으나, 에퀴시오 신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이 성당은 이미 폐허가 된 목욕탕 위에 건축된 것이어서 지면보다 매우 낮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 후 이 위에 교황 심마코(498~514)가 투르의 마르티노(Marinus Toure-nus, 316?~397) 주교와 실베스테르 1세 교황에게 봉헌하는 성당을 건축하였는데, 성당 장식이 철거된 후 폐허가 되어 묻혀졌다가 17세기에 발굴되었다. 현재 이 성당은 '성 실베스테르와 성 마르티노 대성전' 이라고 불리고 있다. 한편 교황 실베스테르 1세는 공동 묘지, 특히 교황 에우세비오(308~309/310)가 묻힌 아피아 가도(Via Appia)의 교회 묘지 건설에도 힘썼고 프리실라 카타콤바에는 경당을 세웠다.
〔공 경〕 실베스테르 1세 교황에 대한 최초의 공경은 《주교 증언록》(Depositio Episcoporum)에 나타나는데, 이는 교황이 사망한 후 곧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12월 31일을 축일로 지내는 것은 모든 성무 집전서들과 《예로니모 순교록》(Martirologium Hieronymi)과 《로마 순교록》(Mar-tirologium Romanum) 등에 나타나고 있다. 7세기의 여러 여행기들(intineraria)에도 소개된 것처럼, 교황이 매장된 프리실라 카타콤바에는 교황을 기념하여 대성전이 세워졌다. (→ 니체아 공의회 ; 아리우스주의)

※ 참고문헌  M. Armellini, Le Chiese di Roma, Edizioni del Pasquino, Roma, 1982/ L. Duchesene, Le Liber Pontifcalis, Texte, Introduction et Commentaire, ed. E. De Boccard, Paris, 1955/ A. Lopes, I Papi, La vita dei pontefici attrcverso 2000 anni di storia, Futura Edizioni, Roma, 1997/ C. Pietri, Roma Christians, vols. 1~2, Bibliothèque des Écoles Frangaised' Athénèse et de Rome 224, Roma, 1976/ Sozomene, trad. par A.J. Festugière, Histoire Ecclésiastique, 《SC》 306/ L. Tripepi, Ritratti e Biografie dei Romani Pontefici, Tipografia della Pace, Roma, 1879/ É. Amann, 《DTC》 28, pp. 2068~2075/ A. Amore, 《EC》/ 一, Bibliotheca Sancto- rum, Istituto Giovanni XXIII della Pontificia Università Lateranense, Roma, 1968/ J. Barmby, 《DCB》/ 《ODCC》, p. 1566/ J.N.D. Kelly, Oxford Dictio-nary of Popes, Oxford Univ. Press, Oxford, New York, 1986/ E. Paoli, Dizionario Storico del Papato, diretto da P. Levillain, trad. di F.S. Sardi, Bompiani, Milano, 1996/ B. Studer, 《DPAC》. 〔邊宗燦〕
② 실베스테르 2세(945?~1003) : 최초의 프랑스인 교황(999~1003). 본래 이름은 오리야크의 제르베르(Ger-bertd'Aunilac). 베네딕도회 수도자였으며, 전통적인 교황권 옹호자이자 교회 개혁가였다.
945년경 아퀴타니아(Aqitania)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오리야크의 생 제로(Saint-Géraud) 베네딕도 수도원에 입회하여 교육을 받았는데, 그의 총명함을 보고 수도원장이 바르셀로나의 보렐(Borrel) 공작에게 보냈고, 공작은 967년경 카탈루냐(Cataluña)로 데리고 가 3년 동안 비크(Vich)와 리폴(Ripol)의 학교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이 때 그는 비크의 주교로 수학 전문가였던 하톤(Hatton)의도움으로 수학 · 기하학 · 점성술 · 음악과 카탈루냐인들이 아랍 세계와의 접촉으로 알게 된 학문 등을 공부하였다. 970년 보렐 공작과 하톤 주교 등과 함께 로마를 방문한 제르베르의 학식에 감동한 당시 교황 요한 13세(965~972)는 그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1세(OttoI , 962~973)에게 소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당시 유럽의 신흥 학문이었던 변증법을 공부하고자 이 분야의 학교로 유명하던 랭스(Reims)로 972년에 떠났다. 당시 랭스에는 이 분야의 전문가 제란느(Géranne) 대부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999년 4월 9일 교황으로 선출되기까지 그는 학자로서 활동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일과 갈리아 교회의 반교황권 주장 문제에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 전통적인 교황권 옹호주의적인 입장에 선 그는 교황으로 즉위한 후 교회 확장 · 외교 개선 · 교회 내 개혁 정책을 단행하였고, 학문과 과학의 향상에도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재임기 동안 주로 오토 3세(996~1002) 황제와의 긴밀한 친분 관계 덕분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베스테르 2세 교황과 황제 등 국외자들에게 불만을 품은 로마인들의 반란으로 1001년 2월 로마를 떠나 라벤나(Ravenna)로 피신해야만 하였다. 이때 황제는 자신의 수도를 탈환하기로 결심하였지만, 이듬해 1월 23일 로마 북쪽의 파테르노(Paterno) 성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 후 로마 수호자로서 강력하게 통치하던 크레센시오(Crescen-tius)는 교황이 다시 로마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영적 지도자로서만 활동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귀환한지 1년 후인 1003년 5월 12일 로마에서 사망하여 라테란 대성전에 안장되었다.
〔교황 즉위 이전의 활동〕 학문적인 소양과 입장 : 변증법의 전문가로 큰 명성을 얻은 제르베르는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하였고, 주교좌 성당 학교의 책임자로 있을 당시에는 이 도시의 대주교인 아달베통(Adalbéron)과도 절친한 관계를 맺었다. 많은 이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는데, 이 가운데에는 훗날 교황의 전기를 쓴 랭스의 생 레미(Saint-Rémi) 수도원의 수도자 리셰(Richer)와 11세기에 교황의 가르침을 전파한 샬트르의 풀베르(Fulbert)와 플뢰리쉬르루아르(Fleury-sur-Loire)의 압보네(Abbone) 등이있다. 리세는 제르베르가 랭스에서 행한 교육 방식에 대해 자세히 전하면서 세 학문 즉 문법 · 수사학 · 변증법에 중점을 두었다고 하였다. 경험주의(experimentalismus)를 기본 입장으로 한 제르베르는 고대 논리학' 을 가르친것으로 보이지만, 더 나아가 네 학문인 수학 · 기하학·천문학 · 음악을 선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는 기하학과 천문학에 정통하여 둥근 모양으로 천체의 모습을 구성함으로써 별들의 움직임을 이해하게끔 하였고 다른 기구로는 행성들의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별들의 움직임을 관측함으로써 시간을 정할 수 있게 되었는데, 낮시간뿐만 아니라 밤 시간까지도 표시할 수 있어 해시계만을 사용하던 당시로서는 상당한 충격이었다고 한다. 또 계산법을 단순화하여 이를 <기하학에 관하여>(DeGeometia)a)라는 논문을 통해 설명하였다.
제르베르의 철학적 입장은 그의 저서 《이성적인 것과 이성에 대하여》(De rationali et ratione)와 《주님의 몸과 피에 관하여》(De Corpore et Sanguine Domini)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저서들 중 일부 본문에서 보여지듯, 그가 지나친 실재주의(realismus)에 빠졌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980년 아달베롱과 함께 라벤나를 방문하였을 때, 그는 오토 2세(967~983) 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마크데부르크(Magdeburg)의 주교좌 성당 책임자인 오트리크(Othic)와 철학 토론을 하였다. 제르베르의 명석함에 감동을 받은 황제는 그를 책이 많은 도서관으로 유명한 보비오(Bobbio) 수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983년에 후원자인 황제가 사망하자 일부 수도자들과 이방인을 싫어하는 이탈리아 신자들 때문에 수도원장을 그만두고 랭스로 돌아와 학업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
정치 연루와 갈리아 교회의 반교황권 주장에 맞선 활동 : 제르베르는 정치에 연루되면서 많은 심적 고통을 겪었다. 그는 카롤링거 왕조의 로테르(Lothaire, 954~986)와 루이 5세(Louis V , 986~987)에 반대하던 아달베롱 대주교를 도와 위그 카페(Hugues Capet, 987~996)가 987년 7월 3일 랭스의 주교좌 성당에서 프랑스 왕좌에 오르는데 협력하였다. 그리고 18개월 후인 989년 1월 23일 아달베롱 주교가 사망하자, 그는 자신이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하지만 위그 왕은 반대자들의 불만을 진정시키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카롤링거 왕조 출신이 랭스 교구장이 되기를 원했고, 결국 랭스 교회 회의는 로테르의 아들로서 랑(Laon)의 신부였던 아르눌프(Arnulf)을 랭스의 새 대주교로 선출하였다.
하지만 그 해 8월 새 대주교의 숙부인 로레나(Lorena)의 가를로(Carlus) 공작 군대가 랭스를 점령함으로써 문제가 발생하였다. 적에게 문을 열어 준 아달가리오(Adal-garius) 신부가 대주교의 절친한 친구였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석방시키는 것을 방관하였으며, 그러면서도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규명하도록 하는 요구를 거부하였다는 점 등이 왕의 의심을 산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왕과 제르베르 등은 교황 요한 15세(985~996)에게 잘못을 행한 대주교를 면직시키고 새로운 주교를 선출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위그 왕은 로마로부터 답신을 받기도 전에 가를로 공작과 아르눌 대주교를 감옥에 가두었다.
교황의 답신이 오지 않자, 왕은 991년 6월 17일 랭스 근처 베르지의 성 바실리오 수도원에서 국가 공의회를 개최하여 이 문제를 다루도록 하였다. 랭스의 고위 성직자들, 상스(Sens)와 부르주(Bourges)의 대주교, 오를레랑 · 오툉(Autun) · 랑그르(Langres) · 마콩(Mâcon)의 주교 등 4개의 관구에서 13명의 주교들과 많은 수도원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당시 갈리아 교회의 수위권자인 상스의 대주교 세갱(Seguin)이 회의를 주재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공의회 분위기를 주도한 것은 제르베르의 친구이며 오를레앙의 주교인 아르눌(Arnoul)이었다. 공의회에서 아달가리오 신부는 가를로 공작이 랭스로 들어오게한 것은 대주교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인정하였고, 이어 오세르(Auxerre)의 요한 · 상스의 라눌포(Ranulfus) 대수도원장 · 플뢰리쉬르루아르의 압보네 등이 피고인을 변호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들은 가(假) 이시도로 문헌(documenti pseudoisidoriani)에 근거하여 국가 공의회는 주교를 심판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교황에게 이 문제 해결을 요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오를레앙의 아르눌 주교는 교황이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기에 교황청에 이 사건의 심판을 맡기는 것은 불가하다고 밝혔다. 이때 오를레앙의 주교 아르눌은 제르베르가 제공한 자료를 토대로 교회 규율을 정하는 데 있어서 자치권에 대한 개념을 주장하였다. 즉 명백한 사건인 경우 또 법으로 정해진 것이라면 지역 공의회가 주교들을 심판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주교를 면직시키는 데 교황의 승인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최초로 갈리아주의(Gallica-nismus)를 표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랭스의 대주교 아르눌은 자신의 무죄와 아달가리오 신부의 증언이 중상 모략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대주교와 절친한 관계에 있던 레니에(Renier) 역시 대주교를 반대하는 편을 들어 대주교를 낙담시켰고, 결국 대주교는 교회 회의에 참여한 몇몇 사람들에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조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나서 대주교는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는 고백문을 주교들 앞에서 읽었다. 6월 18일에는 위그 왕과 그의 아들인 로베르가 참석한 가운데, 아르눌 대주교는 용서를 청하면서 주교의 명의를 반납하고 포기 각서에 서명하였다. 왕은 대주교를 오를레앙의 감옥으로 보냈으며, 평신도로 신분이 바뀐 아달가리오 신부는 고통스러운 참회형에 처해졌다. 대주교와 함께 왕을 배반하였던 많은 이들 역시 파문에 처해졌다. 왕의 원의에 따라 제르베르가 랭스의 대주교로 선출되었고, 이로 인해 교황권과 신임 대주교인 제르베르 사이에 긴 싸움이 시작되었다. 교황 요한 15세는 위그 왕에게 강력한 어조로 항의하였지만, 위그 왕은 교황청의 법에 아무런 손상도 입히지 않았다고 확언하면서 이를 교황에게 납득시키기 위하여 프랑스나 중립 지역인 그르노블(Grenoble)로 오도록 초청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이에 응하지 않고, 992년에 성 보니파시오 수도원장인 레옹(Léon) 아빠스를 독일과 프랑스의 교황 특사로 파견하면서 두 나라의 주교들과 함께 이 문제를 새로이 조사하여 확실한 결정을 내리도록 하였다.
995년 6월 2일 레옹 아빠스는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지역인 무종(Mouzon-sur-Mense)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하 .였다. 그러나 교회 회의 동안 랑의 주교 아달베롱이 왕을 사로잡아 프랑스를 오토 3세에게 넘기기로 독일 주교들과 야합하였다는 것이 왕에게 알려졌다. 아달베롱은 체포되었고 자신들의 계획을 자백하였다. 이 때문에 왕은 프랑스 주교들에게 독일 주교들과 함께하는 교회 회의 참석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으나, 제르베르 대주교만이 왕의 명을 따르지 않고 교회 회의에 참석하여 주교직을 찬탈하였다는 비난을 받았다. 성 마리아 성당에서 행해진 이 교회 회의에서 트레비리(Treviri)의 대주교, 베르됭(Verdun)의 주교 애몬(Aimone), 리에주(Liège)의 노트케르(Notker) 주교, 뮌스터의 수제르(Suger) 주교, 그리고 다수의 대수도원장들과 평신도 귀족들이 제르베르 대주교를 심문하였다. 제르베르 대주교는 자신을 변호하는 연설에서 자신이 선출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고, 교황에게 보내는 이 연설의 사본을 교황 특사에게 제출하였다. 이 장문의 연설문에는 국가 공의회의 개념이 서술되어 있었다. 한편 교회 회의가 진행되는 도중 교황권에 대한 공격이 포함된 《성 바실리오 시노드 행전》이 출판되었는데, 교황 특사는 위그 왕에게도 썼듯이 "로마 교회에 가한 모욕과 신성 모독으로 가득 찬 이 중상 모략문"에 충격을 받았다고 하였다. 교황 특사는 교황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들의 주장을 하나씩 반박하였다.
제르베르가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의 주교 빌데로데(Wilderode)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그는 보편 교회는 전체 지역 교회로 구성되며 모든 주교는 교황청의 권한에 참여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울러 아르눌 대주교가 단죄된 것은 복음의 규율과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계명에 따라서, 그리고 교회 회의와 로마 주교들의 훈령에 따라 행해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상스의 대주교인 세갱에게 보낸 서한에서 가톨릭 교회의 공통 법이복음 · 사도들 · 예언자들 · 하느님 영의 영감을 받아 온 세상의 존중을 받음으로써 성화한 규율들, 그리고 그 규율 자체와 멀지 않은 한에서 교황의 훈령들이라고 내세웠다.
교회 회의에 참석한 주교들은 로마와의 불편한 관계를 위그 왕에게 명확히 설명하기 위하여 요한 수도자를 데리고 갈 것을 제르베르 대주교에게 요청하였다. 그리고같은 해 7월 1일에 랭스에서 다시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최종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였다. 이와 함께 교회 회의에서는 대주교에게 새 교회 회의가 개최되기 전까지 성무 집행을 삼갈 것을 결정하였다. 대주교는 이에 반대하였으나, 트레비리의 대주교의 조언에 따라 교황권에 대한 분명한 불순명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하여 새교회 회의가 개막되기 전까지 미사를 집전하지 않기로약속하였다.
995년 7월 1일에 개최된 랭스 교회 회의 기록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제르베르 대주교 혹은 그의 지지자에 의해 행해진 '주교들의 연설' 은 남아 있다. 여하튼 이 교회 회의에서 아르눌 대주교의 면직과 제르베르 대주교의 선출이 합법적이라고 선포되었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던 위그 왕이 996년 10월에 사망하였다. 이듬해 2월 교황 그레고리오 5세(996~999)는 파비아(Pavia)에서 개최한 교회 회의에서, 아르눌의 면직에 참여한 주교들은 교황청의 권고를 듣지 않았기 때문에 성무 집행 정지 처분에 처한다고 선포하였다. 이로 인해 제르베르는 998년 독일로 떠나 오토 3세 황제의 손님으로 황제 궁에 머무르면서 황제의 절친한 친구요 조언자로 지냈다. 랭스에서의 문제는 결국 황제가 같은 해 4월 교황의 동의를 얻어 그를 라벤나의 대주교로 임명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제르베르는 라벤나의 주교로 임명되자 교회 개혁에 앞장섰다. 그리고 그 해 12월에는 '성 베드로 교회 회의' 에 교황과 함께 참석하였는데, 이 교회 회의에서는 로베르(Robert 왕과 그의 사촌 누이인 베르트(Berthe)와의 혼인에 동의한 주교들에게 파문의 위협이 가해졌다.
〔교황 즉위 후의 활동〕 교황 즉위 : 999년 2월 18일 교황 그레고리오 5세가 사망하자, 오토 3세 황제는 클뤼니 수도원의 오딜로(Odilo, 962~1049) 아빠스의 조언에 따라 제르베르 대주교에게 교황좌를 권하였다. 이는 교황의 비문에도 잘 드러나 있는데, 이에 따르면 오토 3세 황제의 원의에 따라 제르베르 대주교가 교황이 되었다고 적혀 있다. 4월 9일 부활 대축일에 실베스테르 2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위에 올랐는데, 그가 이 이름을 택한 것은 황제의 공동 협력자로 간주되는 실베스테르 1세의 모범을 따라 '새 콘스탄틴 대제' 인 오토 3세와의 공동 협력자임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교황위에 오른 그는 자신이 이전에 공격하던 교황권의 비타협적인 태도를 고수하였다.
교회의 확장과 개혁 정책 : 나이 60세에 이른 새 교황과 19세에 불과한 황제 오토 3세 사이의 관계는 매우 좋았다. 황제는 보편적인 로마 제국을 복원하기를 원하였고, 반면에 교황은 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하기를 원하였다. 교황과 황제의 친밀한 협력 관계는 황제로 하여금 그리스도교 로마 제국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교황을 무척 존경하였던 황제는 1001년 1월 선임 교황인 그레고리오 5세가 요구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던 펜타폴리스(Pentapolis)의 8개 국을 교황에게 선사하였다. 이때 황제는 이 증정이 자신의 자유 의사에 의한 것이지, 결코<콘스탄틴의 증여>(Donatio Constantini)를 성취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교황과 황제 사이의 좋은 협력 관계로 황제는 독일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화된 여러나라에서 교황권이 인정받도록 하였고, 교황 역시 황제를 통하여 독일 교회에서 폴란드를 독립시켜 새 교계 제도를 세웠다. 또한 헝가리에 두 개의 관구를 세우고, 헝가리의 통치자 스테파노(Stephenus Hungarorum, 969/970~1038)를 헝가리 국왕으로 인정하였다. 이러한 교황의 정책으로 로마 교회의 영역은 비스톨라(Vistola)와 다뉴브강 중부까지 확장되었다.
교황은 스스로를 교황권의 옹호자이자 교회 개혁가로 선포하면서, 미결된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 유럽 내에서 교회의 입지를 확고히 하고자 노력하였다. 또 그가 아르눌 대주교에게 사면을 베풀어 랭스의 대주교로 복직시킨 것은 아르눌 대주교의 면직이 교황의 승인을 받지 않은 것이라는 근거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전 교황 특사였던 레옹이 라벤나의 대주교로 임명되는 데 동의한 것이나 베드로알도(Petroaldus) 수도자가 보비오의 대수도원장이 된 것 역시 그러하였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여러 대수도원에 각종 특전을 베풀었으며, 로르쉬(Lorsch)의 대수도원과 보름스(Woms)의 주교 사이의 분쟁과 마곤차(Magonza)의 대주교와 간더스하임(Gandersheim)의 여자수도원 원장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였고, 카탈루냐인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또한 교회 내에 만연해 있던 성직 매매(simonia)와 족벌주의(nepotismus)를 근절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성직자들의 독신 생활을 강조하였고, 대수도원장은 수도자들의 자유 선거에 의하여 선출되도록 하였다.
〔평가와 영향〕 교황 실베스테르 2세는 오토 3세 황제와의 협상을 통하여 모든 그리스도교 국가들을 교황의 수위권과 황제의 세속 정치권하에 둔 로마 제국을 재건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교황은 교회의 확장과 교황권의 옹호를 도모하고 교회를 개혁하고자 한 교황이었으며, 한편으로는 특히 과학 · 수학 · 문학 등의 분야에서 두드러진 학자로서 10세기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아울러 일부 과학 기재의 발명으로 인해 11세기 초부터 교황의 활동과 저술에 기초하여 '마술사 교황' 이라는 전설이 일기 시작해서 19세기 말까지 전해졌다. 《연대 교황표》 역시 교황을 점성술사요 마술사로서 악마와의 계약에 의해 랭스와 라벤나의 대주교 그리고 교황이 되었다는 전설적인 내용들을 소개하고 있다. (→ 갈리아주의 ; 스테파노, 헝가리의)
※ 참고문헌  J.P. Migne, 《PL》 139/ L. Duchesene, Le Liber Pontifi-calis, Texte, Introduction et Commentaire, ed. E. De Boccard, Paris, 1955/A. Lopes, I Papi, La vita dei pontefici attracverso 2000 amuni di storia, Futura Edizioni, Roma, 1997/ J.N.D. Kelly, The Oxford Dictionary of Popes, Oxford Univ. Press, Oxford, New York, 1986/ L. Tripepi, Ritratti e Biogra-fie dei Romani Pontefici, Tipografia della Pace, Roma, 1879/ É. Amann, 《DTC》 28, pp. 2075~2083/ M. Belardinelli, Saint Basle di Verzy, Conciliodi(17~18 giug. 991), Dizionario dei Concili, Istituto XXIII, Città Nouva Editrice, Roma, 1966/ M. Belardinelli, Mouzon-sur-Mense, Concilio di(2giug. 995), Dizionario dei Concili, Istituto Giovanni XXIII, Città Nuova Edit-rice, Roma, 1966/ 《ODCC》, p. 1566/ G. Mollat, 《EC》/E. Paoli, Dizionario Storico del Papato, diretto da P. Levillain, trad. di F.S. Sardi, Bompiani, Milano, 1996. 〔邊宗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