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인식하는 대상이 인간의 사고(思考)와는 독립해 있으며, 사물들 이전이나 혹은 사고 속에 그 스스로 실재하고 있다는 견해.
〔소박한 실재론과 과학적 실재론〕 이 세계에는 여러 대상들이 있는데 이러한 대상의 실존, 다시 말해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음을 우리가 지각하는 바대로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이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태도이다. 이를 '소박한 실재론' (naive realism)의 입장이라고 한다. '자연적 실재론' (natural realism)이라고도 하는 '소박한 실재론' 은 인식의 감각적 단계를 인식 과정 전체와 동일시하는 태도로서, 객관적 실재가 지각을 통하여 완전히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 보통 일상 생활에서 우리의 인식 대상은 물질적 사물이기 때문에, 소박한 실재론은 우리가 감각하는 이 사물들이 감각되는 그대로 실재한다고 믿고 시간적 · 공간적 규정과 감각적 성질까지도 객관적 사물의 구성 요소로 본다. 이와 같은 다분히 상식적인 태도는 지각의 대상이 그 지각을 갖는 어떤 주관으로부터도 독립하여 실재함을 의심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사물이 우리가 지각하는 바대로 있다는 주장은 우리의 인식 능력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반영한다는 '모사설' (copy theory)을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학문적으로 거론되는 '실재론' 이란 좀더 정교한 이론적 태도로서, 세계에 대한 직접적이며 신뢰할 만한 인식을 획득할 가능성을 인정하는 모든 입장들을 통칭한다.
과학적 반성에 의해 도출되었다고 하여 '반성적 실재론' 이라고도 하는 '과학적 실재론' 은 상식적인 지각의 세계가 곧 실재의 세계라고 보는 '소박한 실재론' 의 견해를 과학적으로 비판하여 실재와 지각을 구분한다. 예를 들어 색은 시각에 나타나는 것처럼 존재하지 않고 '에테르' (ether)의 진동으로 비롯된 것이며, 소리도 색과 마찬가지로 주관적 감각에 불과하다. 그 밖에 맛이나 냄새도 객관적으로 우리의 밖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 소박한 실재론이 비록 상식에는 부합되지만 과학적 반성을 통해 볼 때 많은 수정이 불가피함을 지적하고 있는 과학적 실재론은, 우리의 감각 내지 지각과 상이한 에테르나 양자(量子) 등과 같은 것들이 실재하며 이것들이 우리의 감각을 어떤 형태로든지 자극하여 지각 내용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로크(J. Locke, 1632~1704)는 인식 대상 자체에 속하는 객관적 성질(제1 성질)을 주관적 성질(제2 성질)과 구별하였으며, 뉴턴(I. Newton, 1642~1727)과 푸앵카레(H. Poincaré, 1854~1912)의 사상도 과학적 실재론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보편 논쟁과 실재론〕 '실재론' 이라는 명칭은 서양 스콜라 철학에서 논의되었던 '보편의 문제' 와 관련된 주장으로 철학사에 등장하였다. 실재론이 개별적인 감각적 사물들보다 상위의 실존에 속하는 '보편자' (普遍者)의 실재를 인정할 때,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us)의 입장과 대립된다. 유(類)나 종(種)과 같은 개념들에 해당하는 실재의 존재 여부에 관한 논의를 '보편 논쟁' 이라고 일컫는데, 이 논쟁은 보에시우스(AM.T.T.S. Boethius, 470/475?~524)가 포르피리오스(Porphyrios, 232/233~304/305)의 저서 《이사고게》(Isagoge)를 번역하면서 포르피리오스가 논의를 미루었던 문제들을 다시 문제 삼음으로써 비롯되었다. 유와 종은 그 자체로 실재하는가, 다시 말해 실체로서 존재하는가 아니면 단지 지성 안에만 즉 인간이 갖고 있는 개념 안에만 있는 것에 불과한가? 만일 독자적으로 실재한다면 그것은 감각적 내지 물질적인가 또는 비감각적 내지 비물질적인가? 이로부터 보편 논쟁은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427~348/347)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83~322/321)를 보편자의 실재 여부 문제와 연결시키게 되었다.
보편 논쟁에서 보편자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을 '보편 실재론'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입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보편자는 실재한다. 둘째, 보편자는 개별적인 사물들보다는 상위의 존재이다. 즉 보편자는 개개의 사물들보다 그 실재성에 있어서 더 높은 등급을 갖는다. 셋째, 보편 개념은 개별적 '사물들에 앞서' (ante rem) 존재한다. 이렇듯이 보편자가 개별적인 사물에 선행하여 객관적으로 실재한다는 입장은 플라톤이나 안셀모(An-selmus Cantuariensis, 1033/1034~1109)에게서 발견된다. 그러나 보편자 개념 속의 실재성을 극단화하여 보편이 개별적인 '사물 뒤에' (post rem) 있는 하나의 이름뿐이라고 주장하는 유명론은 스코투스(J. Duns Scotus, 1266~1308)와 오컴(W. Ockham, 1285~1349)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인간 안에 보편적 개념이 있고 그에 상응하여 우리 밖 자연에 보편자가 있다는 생각은 이른바 '극단 실재론'(realismus exageratus)으로서, 사유 내의 존재와 그 밖의 존재 사이에 엄격한 일치 또는 병행을 주장한다. 외부 사물이 그 개념이 갖는 것과 동일한 성격의 보편성을 지닌다는 생각은 비록 단순하지만 상식과 배치되는 것이다. 플라톤의 실재론적 입장이 잘 나타나 있는 그의 '이데아론' 은 극단 실재론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극단 실재론이 사유 세계의 속성들과 정확히 대응하는 실재의 세계를 고안해 낸 반면에, 유명론은 개별적인 외부 대상을 모델로 하여 개념들을 만들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추상적이며 보편적인 개념들의 실존을 인정하지 않는다. 소위말하는 일반 개념들은 단지 이름일 뿐이며 사물들이나 개별적인 사건들의 집합에 속하여 단순히 분류 기호의 역할을 하는 언어적 지칭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중세 스콜라 철학의 발전 과정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의지하였던 극단 실재론은 형상이 실체를 산출해 낸다는 아리스토텔레스 형상 개념과 유명론을 지지하는 측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아 그 입장이 다소 약화되었는데, 이를 '온건 실재론' (realismus moderatus)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본질적인 측면에서 볼 때 종전의 실재론적 입장과 비교하여 큰 변화는 없다. 온건 실재론은 보편자가 개별자에 '앞서' (ante) 존재한다는 이전의 주장을 일부 수정하여 '앞서' 대신에 '속에' (in)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온건 실재론의 주장에 따르면 "보편은 사물 속에 실재한다." 여기서 '사물 속에' 라는 말은 보편자가 개개 사물의 형태로 특수하게 개별적으로 실현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온건 실재론이 보편자는 개별자 속에 실현되어 있다거나 스스로를 실현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보편자가 현실적 내지 실제적이라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므로 여전히 보편 실재론의 입장으로 남는다.
한편 '개념론' (conceptalismus)은 추상적이며 보편적인 개념들이 인간 안에 실재한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이 정신적 대상들이 인간의 정신 밖에서 어떤 기능을 갖고 있는지의 여부, 다시 말해 이 세계에서 발견되는 개별적 대상들 각각이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실재성들을 정신적 대상들이 과연 실제로 나누어 갖고 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개념들은 관념적 가치를 갖는 것이지 실제적 가치는 갖지 못하거나 최소한 그 소유 여부에 대해 알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을 지닌 대표적인 사람이 아벨라르도(Petus Abelardus, 1079~1142)였다.
이러한 보편 논쟁의 근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재론과 플라톤의 실재론의 차이에 있다. 이 두 종류의 실재론의 차이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이데아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은 플라톤의 '이데아' 와는 다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에게 있어서 보편자 즉 변화와 생성의 과정에서 항존하는 어떤 가지적(可知的) 요소인 '에이도스 (ειδος)에 관해서만 학문이 성립한다는 생각은 공통적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데아는 감각적 대상들 밖에 범형으로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이도스' 즉 '형상' 은 그와 같은 존재들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그 안에 내재한다는 차이가 있다. 앞서 개관한 실재론적인 입장은 서유럽 사상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명맥을 이어 오고 있기 때문에 실재론을 둘러싼 논의는 사상사(思想史)에서 지속적인 문제로 남아 있다.
〔실재론과 관념론〕 인식론적 관점에서의 구분 : 철학에서 일반적으로 '실재론' 은 인간의 인식과 독립된 존재를 상정하여, 인간이 그것에 대하여 갖는 지각이나 인식의 여부에 상관없이 이 존재는 실제로 있다는 입장을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버클리(G. Berkeley, 1685~1753)가 말한 것처럼 "존재는 지각이다"(esse est percipi), 다시 말해 "있다고 함은 지각되어 있다"라고 주장하는 관념론(觀念論, idealismus)의 입장에 실재론은 정면으로 반대된다.
칸트(I. Kant, 1724~1804)는 《순수 이성 비판》(Kritik derreinen Vernunft, 1781)에서 인식 주관과 인식 객관의 두 축을 설정하고, 인식 주관이 '선험적' (a prior)으로 구비하고 있는 인식 형식과 '후천적' (a posteriori)으로 주어지는 인식 내용으로 현상계에 대한 실질적인 인식이 성립된다고 보았다. 상식은 소박한 실재론의 입장에서 모사설을 취하지만, 칸트는 감성이 인식 내용으로 받아들이는 잡다한 질료의 다양함 속에 시간 · 공간과 범주라는 주관적인 인식 형식을 적용하여 인식 대상을 구성하였다. 그로 인해 종전에 인간의 인식이 대상 중심이던 것을 주관 중심으로 바꾸어 놓는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이루었다. 소박한 실재론을 완전히 역전시켜 놓은 칸트의 견해는 버클리와 같은 관념론 내지 현상론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 (A. Schopenhauer, 1788~1860)가 높이 평가한 칸트의 '선험적 감성론' 에 따르면, 시간 · 공간이라는 감성 형식은 선험적으로는 주관적 관념이지만 경험적으로는 실재한다. 또 시간 · 공간은 현상으로 실재하고 물자체(物自體)로서 실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시간·공간의 조건은 현상으로서의 모든 사물에 타당하기 때문에 경험적 실재성을 가진다. 따라서 경험적 관념론은 부정된다. 시간 · 공간은 현상을 직관할 때 논리적으로 먼저 있어야 하는 형식이지만, 현상을 넘어서 있는 물자체에 적용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선험적 관념성을 지닌다. 칸트는 경험적 실재성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대상이 한 갓 주관적인 관념으로만 있다고 보는 경험적 관념론을 배척하며, 또 사유로서의 자아가 곧 실재한다고 보는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의 관념론도 배척한다. 인식 형식과 무관한 사물의 실재를 주장하는 소박한 실재론을 부정하는 동시에 물자체의 실재성을 독단적으로 주장하는 이성주의자들의 선험적 실재론도 역시 부정한다.
한편 관념론적인 이상주의(理想主義)에 반대하여 논리적인 태도로 인식 비판 작업을 함으로써 형성된 현대의 소위 '신(新)실재론' 은 과학을 중시하는 성격을 띠게되어 수학 · 물리학 · 심리학 등의 연구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무어(G.E. Moore, 1873~1958)나 러셀(B.A.W. Rus-sell, 1872~1970)과 같은 현대 영국의 신실재론자들도 역시 고대의 철학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설정하였다.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인 무어는 1903년에 발표한《관념론 반박》(Refutation of Idealism)에서 동 시대의 수학자 프레게(G. Frege, 1848~1925)와 함께 플라톤주의로 회귀하여, 사유된 대상들의 독립적인 실재성을 인정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것은 버클리에 의해 대표되는 주관적 관념론을 신실재론적 입장에서 논박하려는 것이었다.
러셀도 무어와 마찬가지로 선(善)이나 악(惡)과 같은 윤리학적인 개념들의 객관적 실존을 주장하였다. 또 《수학의 원리》(Principles of Mathematics)에서는 극단 실재론을 피력하여 수뿐만 아니라 공간상의 점이나 물리학적 대상의 일반 성질들도 역시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봄으로써 일체의 관념론적인 발상을 배제하였다. 그에 의하면, 보는 작용은 의식에 있으나 대상은 의식 작용을 초월하여 존재한다는 것이다. 각 대상들은 일정한 관계를 구성하여 존재하므로 그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인식이며, 그 초월적 대상 사이의 관계가 사고에 있어서 내재적으로 생각되는 대상 사이의 관계와 일치할 때 진리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실재론자인 무어와 함께 유럽 대륙의 후설(E.Husserl, 1859~1938)도 본질들을 일종의 심적 구성들로 환원하려는 심리학주의를 거부함으로써 실재론적으로 사유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념》(Ideen) 제1권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사상 역시 일종의 플라톤주의의 형태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때 플라톤적 실재론을 세상에 보이는 경험적 사물이 실재하는 양태를 미루어 본질들이 실재함을 짐작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후설은 이러한 의미의 본질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후설이 말한 '본질 직관' 은 '객관화된 대상' 을 대상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이라는 양상' 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따라서 후설의 현상학은 본질학으로서 오로지 본질을 대상으로 한다.
이때 대상으로서의 본질이 그 어떤 예지적 직관력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개체를 종(種) 또는 일반자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본질 직관을 위한 예비 절차로서 '형상적 환원' 을 거치는데, 이는 결국 사실의 세계에서부터 본질 내지 형상의 세계로의 전환을 뜻한다. 이와 같은 본질이 개체에 내재하는 것이라면 후설의 실재론은 플라톤적 실재론이라기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실재론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형이상학적 관점에서의 구분 : 형이상학적 관점에서도 실재론과 관념론은 구별된다. 다시 말해 형이상학적 실재론과 형이상학적 관념론으로 구분한다. 인식론적 실재론자들에 따르면 초월적인 존재들 즉 인간의 의식 또는 정신으로부터 독립하여 있는 존재들을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반면에, 인식론적 관념론자들에 의하면 이와는 정반대로 우리는 우리 정신이 겪거나 구성하는 것만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더 자세히 말해서 정신이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것만을 인식한다고 하면 내재적 관념론' 이고, 스스로 구성한 것만 인식한다고 주장하면 '선험적 관념론 이다. 여기서 문제되는 실재론에 주목한다면 인식론적 실재론은 결국 초월적 존재자들의 실존을 인정하는 형이상학적 실재론으로 귀착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형이상학적 관념론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런 저런 물체가 있다"라는 표현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저런 주체가 이런 저런 감각을 갖고있다" 라고 이해한다면 '주관적 관념론' 이고, "그 문제의 물체가 객관적 정신이 내리는 참된 판단에 의해서 확인된다" 라고 이해한다면 '객관적 관념론' 이다. 주관적 관념론의 경우에는 실재론자들이 인간 정신과 독립하여 외부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 존재들이 주체의 현상들로 환원되는 반면, 객관적 관념론의 경우에 그 존재들은 객관적 정신의 현상들 즉 그 정신의 지향적 대상들이 된다. 위와 같은 구분에 의하면 헤겔(G.W.F. Hegel, 1770~1831)은 '객관적 형이상학적 관념론'의 입장이고, 마르크스(K.H. Marx, 1818~1883)와 앵겔스(F. Engels, 1820~1895)는'형이상학적 실재론자' 로 분류될 수 있다.
〔신토마스주의의 실재론〕 실재론은 중세 스콜라 철학시대부터 지금까지 가톨릭 교회의 공식 입장으로서, 하느님 존재 · 삼위 일체 · 천사의 위계 서열 등의 형이상학적 교의의 기초가 된다. 보편자만이 충만하고 현실적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보편자는 모든 현존하는 것보다 상위의 실재성을 갖는다고 할 때, 가톨릭 교의는 개별자에 근거하지 않고도 실제적인 내용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보편 논쟁에서 실재론은 하나의 입장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봉건 사회에서 가톨릭 교회가 담당한 정치적 · 사회적 역할을 지탱해 주는 세계관이었다.
현대 신스콜라 철학의 주류인 신토마스주의(Neobho-mismus)의 입장 역시 실재론을 표방하므로 가톨릭 교회의 공식 입장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신토마스주의자들이 관념론과 구별하여 자신의 입장을 실재론이라고 규정한다 할 때, 여기서 관념론은 '주관적 관념론' 이라 볼 수 있으며, 신토마스주의도 일종의 '객관적 관념론' 이라는 지적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현대의 과학적인 시각에서 볼 때 신토마스주의는 우리의 의식 바깥에 독립적 존재를 인정하나, 이러한 존재는 결국 인간 의식의 관념적 실체화의 산물이라고 비판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토마스주의자들은 형이상학이 인식론의 근거를 이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의 인식론을 형이상학적 실재론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의 실재론은 인간 밖에 있는 어떤 존재는 자연 과학자가 대상으로 삼는 그런 물체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있음' 이라고 상정하는 인식론적인 입장을 말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있어서 '실재' 는 미리부터 있는 어떤 것, 자명한 것이며,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존재자, 시간 · 공간 안에 있는 것, 다시 말해 제1 실체를 의미하였다. 여기에서 실체 즉 본질적인 것은 단순히 이데아나 형상이 아니라 형상과 질료로 이루어진 실체이다. 그러므로 제1 실체란 많은 개체들 안에서 동일한 것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 즉 공통적인 본성으로서 종이나 유와 일치하며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인식은 감각적 지각으로부터 출발하며 이로부터 생긴 감각상은 능동적 이성에 의해 조명되어 비감각적, 다시 말해 정신적인 본성을 갖게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감각적 인식은 본래 보편적 인식을 할 수 없지만, 이 감각상에 의해서 동일한 유(類)에 속하는 개별적인 표상들의 보편적인 내용, 즉 보편자 내지 보편 개념이 생겨날 수 있게 된다. 이때 보편적인 것 즉 본질은 구체적인 것 속에 구체적으로 실재하는 지성의 추상 작용을 통해서만 비로소 이끌어 낼 수 있어서 오직 이성을 바탕으로 한 지성만이 본래적인 인식을 할 수있다는 것이다. (→ 개념론 ; 관념론 ; 러셀 ; 보편 논쟁 ;스코투스, 둔스 ; 스콜라학 ; 신스콜라 철학 ; 아리스토텔레스 ; 아벨라르도, 베드로 ; 오컴, 윌리엄 ; 유명론 ; 칸트; 토마스 아퀴나스 ; 플라톤 ; 후설)
※ 참고문헌 Sylvain Auroux ed., Encyclopédie philosophique univer-selle, Puf., 1990/ 《EP》/ André Lalande, Vocabulaire technique et critique de laphilosophie, Puf., 1926. 〔車乾熙〕
실재론
實在論
〔라〕realismus · 〔영〕re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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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