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새로운 학풍 또는 사상 체계.
〔개 념〕 실학은 조선 후기, 특히 17~18세기에 본격적으로 확산되어 19세기까지 이어진 새로운 학풍이라는 것이 오늘날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렇지만 19세기 말 개화기 이후 현재까지 여러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어 오면서 그 개념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거나 논의되고 있으나, 엄밀하게 말하면 아직까지도 개념 정리가 마무리된 것은 아니다. 또 학자에 따라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개념 설정이나 평가에 있어 다양성을 보이고 있다. 본래 '실학' 이라는 표현은 금세기에 등장한 것이 아니고 《중용》(中庸)과 같은 경전에도 나온다. 그리고 여말 선초(麗末鮮初) 정도전(鄭道傳)이나 권근(權近)은 성리학을 실학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불교나 사장학(詞章學)을 겨냥한 것이었다. 조선 시대 유학자들은 통상적으로 경학(經學)을 실학이라고 하였고, 과거 시험에 등한시되던 경학 공부를 실학이라 하여 장려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로 당대에는 경학을 학문의 근본으로 여겼다. 조선에 실학이 존재하였다면 중국이나 일본에도 그들의 실학이 있었다. 이처럼 '실학' 이라는 이름은 시공을 초월하여 불렸지만 그 내용은 달랐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실학을 '조선 후기에 등장한 새로운 학풍이나 사상 체계' 라고 한정하여 규정하려는 주장이, 현재 일반적인 현상이라 하더라도, 모두에게 인정되는 개념은 아니다. 즉 개념 정립에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지금까지의 실학 개념에 대한 견해를 보면 실학을 통시대적인 용어로 규정하여 성리학을 포함한 유학을 벗어나지 못한 학풍이라는 입장의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특정 시기 즉 조선 후기에 한정하여 종래의 성리학과는 다른 새로운 학풍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전자는 여말 선초 성리학 사회가 열리면서 실학으로서의 유학이 조선 사회에 지속되고 있다는 입장으로, 역사적 상황에 따라 내용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유학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후자는 실학이 성리학으로부터 탈피된 근대 지향성 · 민족 지향성 ·진보성 등을 보이면서 특히 영조 · 정조 시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학풍이라는 견해이다. 실학의 통시대적 개념을 인정하는 측에서도 조선 후기 17~18세기의 실학이 봉건 사회의 해체와 근대 사회의 여명이라는 역사적 전환기에 새로운 학풍으로 등장함으로써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실학이었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추이로 본다면 후자의 주장에 많은 학자들이 동조하거나 인정하면서 실학 연구를 이어 온 것이 사실이지만, 실학의 통시대적 개념에 대한 논의는 앞으로 계속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다. 여기에서는 조선 후기인 17세기에 나타나 19세기까지 이어진 실학에 한정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발생 배경〕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兩亂)을 겪으면서 드러난 조선의 성리학적 왕도 정치의 위약(危弱)함은 여러 방면에서 변화와 개혁의 도전을 받았다. 이러한 전환기적 상황에서 지식인들 사이에 현실 개혁 의식이 점차 확대되었고 실학 사상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실학의 발생은 크게 내재적 요인과 외래적 요인으로 나눌 수 있는데, 내재적 요인으로는 우선 성리학에 대한 한계가 드러났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주자의 성리학은 동양에서 절대적 권위주의를 지속해 왔지만, 성리학적 경세론은 양란을 겪으면서 약점이 드러났고 변화의 대세에 합리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등 그 허약성을 노출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자각과 함께 현실성 있는 학문과 실제에 맞는 사고 체계가 요구되었다. 즉 당시까지의 경직된 성리학적 경세 방법으로는 정치 · 경제 · 사회 등에서 변화를 요구하는 위기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없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둘째, 국내 사회 경제의 피폐와 더불어 산업 구조의 변화가 있었다. 우선 농촌의 경우, 양란을 겪으면서 국토는 황폐하고 많은 농민들이 소작농이나 유민(流民)으로 전락하였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상업적 부농이 형성되는 등 농촌의 분해 현상이 일어나 빈부의 격차가 점차 커지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도시로의 인구 집중이 이루어지면서 도시 빈민층이 등장하는가 하면, 화폐 경제의 발전과 함께 상업적 유통이 활발해졌다.
도농(都農)의 구조가 변화되면서 다수의 빈곤층을 위한 개혁 정책이 요구되었다. 즉 안민(安民)을 위한 개혁이 절실히 필요한 때였다. 셋째, 사회 신분 질서의 혼란을 들 수 있다. 전반적인 사회 경제의 혼란과 함께 일부 양반의 잔반화(殘班化) 현상과 평민의 경제적 향상에 의한 신분 상승 현상은 개혁론자들의 관심을 끌면서 각각의 신분 계층에 대한 대책과 개선안을 제시하게 하였다. 넷째, 영조 · 정조의 학문 장려책 또한 실학의 발전에 힘이 되었다. 두 임금의 호학(好學)으로 문예 진흥에 힘쓴 결과 많은 서적이 편찬되고 학자들 또한 많이 배출되었으며, 특히 규장각(奎章閣) 설치로 학풍이 진작되고 학문에 발전을 가져왔다.
외래적 요인으로는 첫째, 명청(明淸) 교체 이후 화이론(華夷論)의 재인식과 대청(對淸) 의식의 변화를 들 수 있다. 병자호란 이후 화이 사상에 바탕을 둔 숭명 존주(崇明尊周) 의식의 만연은 점차 실리적이고 현실적인 국제 인식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대중화(對中華) 자주의식이 강해지면서 본국 중심의 학문과 사상에 관심이높아졌고,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재정립하려는 기운이 강하게 나타났다. 청나라의 수도 북경을 왕래하며 견문을 넓힌 학자들이 점차 많아지면서 세계관이 넓어졌고, 그 결과 종래 이적시되었던 청나라도 중화가 될 수 있다는 인식으로 바뀌어 갔다. 더불어 지식인들 중에는 배청(排淸) 태도를 바꾸어 청나라의 우수한 문물을 수용하자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둘째, 서양 사조의 유입과 청조의 고증학 영향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성리학자들이 이단시하였던 양명학의 확산도 자극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에 전해지는 서양 문물은 대부분 연행사절(燕行使節)에 의한 견문이나 한역 서학서 (漢譯西學書)를 통 하여 이루어졌는데, 한역 서학서는 많은 국내 학자들의 호기심을 일으키며 독서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서양의 지리 · 수학 · 천문학 등 과학 기술 분야는 국내 유학자들로부터도 그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천주교 내용을 다룬 서학서도 국내에 소개 · 유포되어 비밀리에 많은 독자층을 이루면서 점차 서양 사상이 성리학 사회에 파고들게 되었으며, 일부 계층에서는 성리학과 결별하고 이에 심취하는 이도 있었다. 서양의 문물에 관한 새로운 지식은, 이를 접한 사람들의 수용 여부를 떠나서라도 이들에게 작용한 학문적 · 사상적 영향은 컸다. 즉 서양의 지도나 천문학은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회의를 품게 하였고, 과학 기술은 중국 문물의 우월성을 의심하게 하였다. 또 직접 이들 학문에 참여하여 연구하고 제작 기술을 익히려는 이들도 생겨났다. 명말 청초(明末淸初)에 고염무(顧炎武) · 황종희(黃宗羲) · 왕부지(王夫之) 등에 의해 형성되기 시작한 고증학은 윤리 도덕과 사변 철학적 경향이 강한 성리학에 대하여, 경험적이고 실증적이며 합리적인 학술 방법을 고취하게 함으로써 비판적이고 발전적인 학풍을 일으키는 데 일조하였다. 고증학이 역사 · 지리 · 제도 등에 관한 연구의 실증적 태도 확립에 미친 영향은 컸다. 양명학 또한 정권에서 소외된 소론계(少論系)와 대표적 실학파인 성호학파(星湖學派)의 젊은 학자들로부터 연구 대상이 되었는데, 특히 성호학파의 실학사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특 성〕 실학의 특성은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조선 후기 실학은 탈성리학(脫性理學)적성격이 짙다. 학자들은 조선 후기에 사회 변동과 개혁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성리학 본래의 형이상학적인 이기론이나 심성론, 내적 수양과 인륜 도덕에 치중하던 사변적이고 관념적인 학풍을 반성하게 되었다. 점차 주자학 자체에 대한 비판이 더해지면서 다른 학문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따라서 유학 공부도 수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자의 주석(註釋)에 매달리기보다는 공맹(孔孟)의 수사학(洙泗學)에 충실하려는 경향을 보이면서 일상 생활에서의 실천을 중시하는 실천 궁행(實踐躬行)의 유학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둘째, 이러한 학문적 경향과 함께 실학자들은 현실 모순을 자각하고 당면 과제의 해결에 초점을 맞추어 제반 분야를 대상으로 개혁적 성향을 띠게 되었다. 현실 의식이 강하게 나타난 실학적 사고는 더 실질적이고 실용적인 변혁을 요구하면서, 특히 생산에 종사하는 다수 기층 사회의 안민에 주목하였다. 셋째, 학문 연구에 있어 개방적이며 자유로운 분위기를 지향하는 한편, 매우 독창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종래 주자학의 교조적이고 규범에 얽매인 학풍에서 점차 탈피되었음을 의미한다. 다방면의 학술과 사상에 관심을 보이면서 이적시하던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용할 것을 강조하는가 하면, 이단시되던 양명학이나 서학에 심취하는 학자들도 나타났다. 이들 실학자들의 학문 태도에는 비판적 학문성이 강하게 드러났으며, 다양한 관심은 다분히 백과 전서적인 학문 성향을 지니게 하였다. 넷째, 학문 연구 방법에 있어서 실증적인 면을 중시하였다. 이는 청나라의 고증학풍으로부터 적지 않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경서 고증(經書考證)을 비롯하여 언어 · 역사 · 지리 고증 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다섯째, 자주 의식 내지 민족 주체 의식이 강하게 나타났다. 특히 서유럽 문물의 영향으로 대중국 인식이 바뀌었고, 중국도 다른 주변국처럼 적국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역사에 있어서도 우리 나라 역사의 독자적인 정통 체계를 확립하여 한국사를 서술하려는 주체적 역사 의식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에 실학자들은 사료 수집과 고증의 철저, 사론의 중요성을 주장하였다. 역사 지리학과 서양 지도의 활용으로 역사학에 입체적인 이해를 더하였고, 나아가 역사학의 독자성에 대한 인식을 높였으며, 과거 시험에 국사 과목을 추가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이는 민족 지향적 자주 의식의 성장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실학자들의 관심 대상〕 이러한 특성을 지닌 실학자들의 학문적 관심 대상은 매우 다양하였다. 대체로 공맹의 수사학에 기본적으로 철저하면서 박학적인 학문 방법과 백과 전서적인 학문 경향을 보였다. 경세(經世) · 실용·실증의 학풍을 특징으로 하는 실학에서 실학자들의 우선적 관심 대상이 되었던 것은 당면 과제인 사회 경제 문제 해결에 관한 것이었다. 예컨대 농촌 안정을 위하여 유형원이 균전론(均田論)을, 이익이 한전론(限田論)을, 정약용이 여전론(閭田論) · 정전의(井田議)와 같은 토지 제도 개선책을 내놓았고, 정약용은 상업적 농업을 장려하였다. 또한 많은 실학자들이 화폐의 유통과 상공업 발전을 장려하였고, 광산의 국영화를 통한 재정 확보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으며, 노비 천적(奴婢賤籍)의 모순을 지적하는 등 신분 제도의 개선도 역설하였다. 실학자들은 더 나아가 정치 · 국방 · 외교 등 국가 운영 전반에 걸쳐 자신들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왕권 강화를 통하여 국가 기강을 확립하고 붕당의 폐해를 제거하여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고, 과거의 폐단을 인식하여 천거제의 적극 활용을 권장하였다. 해방(海防)과 변방의 강화, 상비군의 확보와 병농 일치제의 확립, 군 지휘권의 일원화, 신분의 구별 없는 호포제(戶布制)의 실시 등을 통하여 국방력의 강화와 안민의 효과를 기대하는 군사 개혁안도 제시하였다. 국방 문제와 관련하여 이들은 요동 지방 등 옛 북방지역에 대한 애착심을 크게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유의할 점은 실학자들이 탈주자학적 경향으로 나아갔지만,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모두 성리학과 결별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실학자들 대부분은 경전에 박식하였고, 성리학을 멀리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그들 자신이 성리학에도 밝았다. 이러한 학문의 양립적 혼재 현상을 성리학의 약점이나 모순에 대한 반성, 재검토를 거치는 자기 극복의 현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실학자들은 그들의 학문적 바탕인 유학에 뿌리를 두고 비판적인 학문 자세를 취하는 동시에, 학자에 따라서는 양명학이나 고증학 또는서학 등에 깊은 관심을 두고 공부하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유 형〕 실학을 연구함에 있어 학자들은 관점에 따라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였으므로, 기준에 따라 유형화의 내용과 방법이 달라지게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실학 연구에서 나타난 경향을 보면, 대체로 주동 인물의 실학적 성격을 중심으로 그 학맥이나 계통을 형성한 사람들을 묶어 학파로 분류하는 방법, 실학 전개 과정을 시기별로 나누는 방법, 사회적 · 경제적 배경이나 산업 구조 개혁의 변화 양상을 유형화하는 방법 등이 가장 선호되고 있다. 먼저 시기별 분류에 있어서는 실학의 전개를 준비기(16세기 중엽~17세기 중엽) · 맹아기(17세기 중엽 18세기 중엽) · 전성기(18세기 중엽~19세기 중엽)로 보거나, 초창기(선조~광해군) · 발전기(인조~경종) · 융성기(영조~정조) · 쇠퇴기(순조~철종)로 구분하여 고찰하였다. 시대의 변천과 사회적 · 경제적 배경에 따라 구분하면 봉건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실학(17세기 초) · 과도기의 실학(17세기 중엽 ~18세기 중엽) · 시민 계급을 대변하는 실학(18세기 말~ 19세기 중엽) · 전환기의 실학(19세기 말~20세기 최으로 유형화된다. 시기별 구분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은 실학이 발생한 시기이다. 실학의 존재 시기를 대체로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설정하고 학자들의 관점에 따라 배분하는 시기가 다른데, 특히 그 상한선은 일정하지 않다. 그러나 하한선은 대부분 19세기로 일치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실학의 주동 인물이 지닌 사상적 성격과 시기에 따라 세 개의 유파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실학의 제1기는 이익(李翼)을 대종으로 하는 경세치용파(經世致用派, 18세기 전반)로서 토지 제도 및 행정 기구 등 기타 제도상의 개혁에 치중하는 학파이고, 제2기는 박지원(朴趾源)을 중심으로 하는 이용후생파(利用厚生派, 18세기 후반)로서 상공업 유통 및 생산 기구등 일반 기술 면의 혁신을 지표로 하는 학파이다. 제3기는 김정희(金正喜)에 이르러 일가를 이룬 실사구시파(實事求是派, 19세기 전반)로서 경서(經書) 및 금석(金石) ·전고(典故)의 고증을 위주로 하는 학파이다. 이 유형은 실학파를 농촌을 배경으로 한 근기(近畿) 지방의 성호학파와 도시 환경을 배경으로 한 연암학파 즉 북학파(北學派)로 크게 나누려는 의도도 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유형을 추종하고 있지만, 이러한 유형은 북학파만을 진정한 실학파라고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수용하기 곤란하다.
이처럼 실학을 조선 후기에 한정하여 보는 견해에서 서로 다른 유형을 보이는가 하면, 최근에는 실학을 통시대적으로 보는 견해에서도 일정한 유형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테면 여말 선초의 실학을 고대 실학, 17~18세기의 실학을 중세 실학이라고 하면서 근세 실학이나 현대 실학을 점쳐 보기도 하였다. 따라서 실학의 유형은 실학 개념의 다양성이나 통시대성 여부에 따라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일정한 유형으로 고정하기는어렵다.
〔실학과 천주교〕 한국 실학의 발전은 서학(西學)의 국내 유포와 무관하지 않다. 마테오 리치(M. Ricci, 利瑪竇, 1552~1610)의 《천주실의》(天主實義)가 이수광(李晬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소개된 이후, 조선 후기에는 한역 서학서와 함께 서유럽 과학 기술 문물이 중국을 통하여 유입되면서 국내 유학자들은 서학에 대해 많은 호기심을 나타냈다. 그 가운데에서도 성호학파의 비조(鼻祖) 이익이 조선 천주교 전파의 배경과 관련이 깊은데, 이는 18세기 말의 한국 천주교 탄생이 이익의 문하에 있던 학자들의 참여하에 이루어졌다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이익은 20여 종의 한역 서학서를 읽고 과학 기술분야에 대해서는 많은 찬사를 나타냈지만, 종교적인 면즉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다만 천주교에는 교화적인 측면과 실용적인 측면이 있음을 긍정적으로 보면서 보유론적(補儒論的)인 입장을 보였다. 즉 천주교에서 천주의 존신(尊信)과 성서의 가르침 등은 유교에서 상제(上帝)를 존숭하거나 《시경》(詩經) · 《서경》(書經)의 가르침과 같은 것으로 평가하였다. 하지만 천주를 경외하여 섬기고 믿는 것은 불교에서 석가를 섬기는 것과 같다 하여 유교와 유사하다고 보았다. 이처럼 그는 서학서를 접하면서도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태도를 보이는 등 이른바 이단이라 하여 극단적으로 배척하지 않았다. 이는 서양 문물을 통하여 형성된 의식 구조의 변화라 할 것이다. 당시 서학을 대하는 유학자들의 태도가 거의 부정적이었던 상황에서 이와 같은 이익의 열린 학문적 태도는 문인들이 서학을 접하는 데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많은 서학 서적을 읽은 그의 문인들 사이에 신후담(愼後聃)이나 안정복(安鼎福)과 같은 벽위론(闢衛論)의 대가가 등장하였는가 하면, 권철신(權哲身)을 대표로 하는 젊은 학자들 중심의 천주교 수용자도 등장하였다. 다시 말하면 성호학파의 학자들은 성호를 정점으로 다수의 한역 천주교 서적을 읽고 갈등과 알력을 치르면서 한쪽은 천주교를 배척하는 길로, 다른 한쪽은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길로 나아갔다.
권철신의 문인이요 조선 후기 실학의 집대성자로 평가받는 정약용(丁若鏞)은 이익의 실학을 계승한 사람으로, 서양의 과학 기술은 물론이고 천주교에도 관심이 컸다. 그는 유교의 상제와 천(天)을 동격의 윤리적 · 종교적 존재로 인식함으로써 천명(天命)과 천주 사상을 결부하여 이해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서학서의 천주 교리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791년의 진산(珍山) 사건이후 천주교로부터 등을 돌렸다고 <자벽문>(自辟文)을 통하여 스스로 말하였지만, 그 후에도 천주교를 완전히 배척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익 이후 정약용에 이르기까지 천주교 문제로 학파 내의 문인들 사이에 많은 갈등이 있었지만, 조선 후기 실학파의 대표적 유파인 성호학파에서 일단의 젊은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초기 한국 천주교 전파의 선구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천주교 전파가 실학 발달과 무관하지 않음을 말해 준다. 더불어 대부분 실학자들이 찬사를 보낸 서유럽의 과학기술도 동양으로의 전달 과정에서 선교사들이 앞장섰는데, 그 근본 목적은 천주교 전파에 있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실학의 발달과 천주교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천주교의 평등 사상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과 신분 질서의 붕괴에 일조하는 근대지향적 실학 사상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주었다고 하겠다.
〔한계와 의의〕 조선 후기의 실학은 크게 성공적이지 못하였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이다. 사실 실학자들은 수준 높은 학문과 사상의 세계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 토대는 기본적으로 봉건적 유교 질서와 규범에 두면서, 주자학의 학문적 범주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 또한 역사적 전환을 이끌 만한 일정한 이념의 틀과 통일된 철학 의식이 부족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실학자들의 처지가 자신들의 견해를 조정에 관철시킬 만한 능력에 한계가 있었으며, 실학자 스스로도 실천에 옮기거나 정책에 반영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부족하였다. 결국 집권층의 의지 부족과 외면, 그리고 정치적 박해 등으로 역사적인 변환의 역할을 이루어 내지 못하였다. 이념이나 사상, 사회 개혁을 표방하던 실학은 19세기 들어 약화되면서 백과 전서적인 순수 학문 고증에 매달리는 경향으로 전락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조선 후기 실학은 몇 가지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선 17~18세기의 실학은 전통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넘어가는 방향을 제시하여 주었다. 피폐하고 침체된 사회를 재건시키기 위하여 실학자들이 제시한 각종 제도 개혁, 상공업의 증진과 생산 기술의 향상, 합리적인 과학 정신 등은 그 자체의 내재적 한계로 말미암아 근대 학문으로 자리 매김되지는 못하였지만, 19세기 후반으로 이어지는 근대화의 추진에 주춧돌이 되었다는 점은 인정하여야 한다. 특히 이들이 강력히 추진하려던 사회적 · 경제적 개혁 내용은 근대화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이었다. 시기적으로 전통 농업 사회에서 근대 산업 사회로 출발하려는 전환기에 제시되었다는 점에서도 근대 지향성이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다음으로 자국사(自國史)를 재인식하면서 독자적인 정통성을 확립하고, 옛 북방 지역에 대해 강렬한 실지(失地) 회복 의식을 나타낸 점, 그리고 화이 의식과 대청 의식의 적극적인 전환에서 보인 이들의 자주 의식과 민족 의식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국사에 대한 재인식과 독자성 정립은 한말 이후 일제 식민지 통치 아래 민족사관 정립에 적지 않게 영향을 주었다. 끝으로 실학 사상은 '국민' 의 개념 내지 위상을 한층 높였다고 할 수 있다. 전통 사회에서는 오로지 피통치자나 피지배자로서의 민(民)이 존재하였지만, 실학자들의 안민을 향한 제반 개혁안이 비록 혁신적인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국민의 개념이 표출되어 나오고, 민의 지위 향상에 활력소가 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초보적이나마 이들의 근대 지향적 민주 국민관과 사회 경제론은 이들의 새로운 '국민' 관에서 출발한 것이라 하겠다. (→ 남인과 천주교)
※ 참고문헌 한국 철학사 연구회 편, 《한국 실학 사상사》, 다운샘, 2000/ 元裕漢, 〈韓國 實學의 概念 摸索〉, 《實學思想研究》 14집, 毋岳實學會, 2000/ 趙珖, <실학의 발전>, <한국사> 35, 국사편찬위원회, 1998/ 徐鍾泰, 〈星湖學派의 陽明學과 實學>, 《朝鮮時代史學報》 7집, 朝鮮時代史學會, 1998/ 車基眞, <星湖學派의 西學認識과 斥邪論에 대한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 박사 학위 논문,1996/ 趙珖,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 1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一, 〈朝鮮後期 歷史認識〉, 《韓國史學史의 研究》, 을유문화사, 1985/ 琴章泰, 《韓國實學思想研究》, 집문당, 1987/ 池斗煥,<조선 후기 실학 연구의 문제 점과 방향>, 《태동 고전 연구》 3, 1987/李元淳, 《韓國天主敎會史研究》,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 ㅡ, 《朝鮮西學史研究》, 일지사, 1986/ 劉元東, 《韓國實學概論》, 정 음문화사,1983/ 趙璣濬, 《韓國資本主義成立 史論》, 대왕사, 1982/ 韓沾欣, 《星湖李瀷研究》, 서울대 학교 출판부, 1980/ 李佑成 · 姜萬吉 編, 《韓國의歷 史認識》 下, 창작과 비평사, 1976/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편, 《實學思想의 探究》, 현암사, 1974/ 역사학회 편, 《實學研究入門》,일조각, 1973/ 千寬宇, 〈韓國實學思想史〉, 《韓國文化史大系》 12,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출판부, 1970/ ㅡ, <磻溪 柳馨遠 研究>,歷史學報》 2 · 3집, 歷 史學會, 1952 · 1953. 〔姜世求〕
실학
實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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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들에 의해 쓰여진 《성호사설》(이익), 《여유당 전서》(정약용), 《북학의》(박제가), 《반계수록》(유형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