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교황(468~483) 축일은 3월 10일. 이탈리아 티볼리(Tivoli)에서 카스티노(Castinus)의 아들로 태어나 오랫동안 교황직을 수행하였지만, 그의 출생 연도나 교황 즉위 전의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468년 3월 3일 교황으로 선출되었는데, 그가 교황직을 수행하던 시기는 리치메르(Ricimer, +472)의 반란과 아리우스 추종자인 오도아체르(Odoacer, 433~493)에 의해 서로마제국이 멸망됨으로써 이탈리아가 혼란에 빠진 때였다. 이러한 일련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사건들은 교황직 수행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지만, 그리스도 단성설 (monophysitismus)의 재현과 35년 간 지속된(484~518)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와의 분열은 그의 교황직 수행기간 내내 점철되었다. 오랜 병으로 483년 3월 10일 로마에서 사망하여 베드로 대성전의 교황 레오 1세(440~461) 옆에 묻혔다.
〔교황 활동〕 교회 규율과 교황권의 확립 : 심플리치오 교황의 주목할 만한 활동은 교회 규율에 관한 것이었다. 그중 주교들이 교회 수입 가운데 4분의 1만을 취하도록한 479년의 규정은 훗날 교황 젤라시오 1세(492~496)와 그레고리오 1세(590~604)에게서도 나타났다. 482년 라벤나(Ravenna)의 주교 요한에게 보낸 서한에서, 교황은 라벤나의 그레고리오 신부를 자신의 동의 없이 모데나(Modena)의 주교로 서임한 것에 대해 날카롭게 책망하면서 이 일로 파문에 처할 수도 있다고 요한을 위협하였다. 그리고 라벤나 교구에 대해 자신의 권위를 직접적으로 행사했고, 교황의 권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 한번 강조하였다. 또한 교황은 세비야(Sevilla)의 주교 제노(Zeno)에게 스페인에서의 교황청 총대리(vicarius sedis nostrae)라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정치적인 관계와 전통 교리 수호 : 476년 9월에 오도아체르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 475~476)가 머물러 있던 파비아(Pavia)를 침략하여 원로원 앞에서 황제의 직분을 포기하도록 한 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였음을 선포하게 하였다. 이로써 오도아체르는 명실공히 이탈리아의 왕이 되었는데, 교황은 그의 통치를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도아체르와 협상을 맺어 로마 제국 황제가 했던 것처럼 왕이 교황 선출을 인준할 수 있도록 하였음이 교황이 사망한 후 개최된 교회 회의에서 밝혀졌다.
오도아체르가 아리우스주의자였지만, 교황이 염려한 것은 이 왕보다도 동방 교회였다. 교황은 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아카치오(Acacius, 471~489)에게 서한을 보내 칼체돈 공의회의 28번째 조항, 즉 콘스탄티노플 주교좌가 로마 주교좌와 같은 권위를 지닌다는 조항에 반대하였다. 475년에는 바실리스쿠스(Basilicous, 475~476)가 황제 제논(Zenon, 474~491)의 왕위를 찬탈하였는데, 이것 또한 교황에게는 큰 관심사가 못 되었다. 이듬해 1월 교황은 새 황제와 아카치오 총대주교, 그리고 전체 콘스탄티노플의 성직자들 앞으로 보낸 서한에서 그리스도 단성설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였고, 칼체돈 공의회(451)에 매우 적대적이며 새 황제로부터 임명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디모테오 엘루루스(Timotheueus Aelurus)에게 반대입장을 취하도록 지시한 뒤, 황제에게는 선임 황제들의 정치적 입장을 계속 이어 주기를 촉구하였다.
하지만 황제의 입장은 교황의 염원과 정반대였다. 그리스도 단성설자들의 도움이 필요하였던 황제는 475년에 알렉산드리아 · 안티오키아 · 예루살렘의 주교 500여명이 서명한 회칙을 반포하였다. 이 회칙에서 황제는 에페소 강도 공의회(449)의 결정을 정통으로 승인하고, 교황 레오 1세의 에우티케스주의에 관한 서한 <토무스 앗플라비아눔>(Tomus ad Flavianum)과 칼체돈 공의회의 그리스도론을 단죄하면서 주요 주교좌에 그리스도 단성설자들을 임명하였다. 황제의 이러한 입장으로 그리스도 단성설이 동방 교회의 많은 주교좌를 차지하는 듯하였으나 오래가지 못하였고, 교황에게도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이듬해 8월 제논이 다시 황제로 복귀하였고, 교회에 대한 정치권의 영향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아카치오가 통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리스도 단성설자 베드로(Petus ilFullone)가 차지하였던 안티오키아 주교좌가 다시 정통파 주교로 교체되었고, 디모테오 엘루루스가 차지하였던 알렉산드리아 주교좌는 디모테오 살로파치올로(Timotheus Salofaciolo)에게로 돌아갔다.
아카치오는 이 모든 이들을 교황에게 알리면서 칼체돈의 정통 신앙이 승리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교황은 매우 기뻐하면서 아카치오와 제논 황제에게 서한을 보내 디모테오 엘루루스와 베드로, 그리고 에페소 교회를 찬탈하였던 바오로에게 엄한 조치를 내리도록 요청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어 베드로 몬고(Petrus Mongo)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소요를 주동하였고, 아카치오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의 특권을 확장시키려는 열망에서 그리스도 단성설자들과 타협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심플리치오 교황은 478년 3월과 가을에 아카치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모든 일들에 우려를 표명하였다.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 스테파노가 479년 6월 이전에 살해되자 아카치오가 주교로 임명했던 칼란디오네(Calandione)가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임명은 칼체돈 공의회의 28번째 조항에 부합되는 것이었지만, 교회의 전통 및 안티오키아 교회 규범에는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에 교황은 479년 6월 아카치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놀라움을 표명하였다. 그 후 칼란디오네는 482년에 교회 회의를 통하여 자신의 선출이 유효한 것이라는 입장을 정립한 뒤 교황에게 사절단을 파견하여 이를 통지하였고, 아카치오는 칼란디오네의 서한에 짧은 안부 인사를 삽입하였다.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디모테오 살로파치올로 총대주교는 자신에게 충실한 요한 탈라이아(Joannes Talaia) 신부를 황제에게 파견하여 자신의 주교좌 계승을 준비하도록 하였는데, 황제는 요한 신부를 냉대하면서 주교직의 권리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게 하였다. 그러나 총대주교가 사망하자 요한은 알렉산드리아의 정통파가 개최한 교회 회의에서 합법적인 후계자로 선출되었다. 교황은 이 선출에 대한 통지를 받고 동의를 하려던 차에 제논 황제로부터 요한이 적당한 인물이 아니므로 베드로 몬고를 후계자로 임명한다는 서한을 받았다. 요한을 맞아들인 교황은 아카치오에게 긴급 서한을 보내 이 일련의 사태에 대해 침묵을 지킨 것을 책망하면서 요한에게 행해진 각종 비난에 놀라움을 표명하였다. 그리고 황제에게도 서한을 보내 칼체돈 공의회 결정의 반대자들로 진영을 형성하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리베라토(Liberatus)에 의하면, 요한은 교황에게 호소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이에 제논 황제와 아카치오 총대주교 그리고 베드로 몬고 사이의 화해를 표명한 일치 포고령 <헤노티콘>(Henotikon)이 483년 3월에 공표되었다. 이에 아카치오는 <헤노티콘>에 의거하여 이미 베드로 몬고와 통교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요한을 인정할 수 없다는 답신을 교황에게 보냈고, 교황은 다시 아카치오에게 서한을 보내 사도좌의 허락 없이 그와 통교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베드로 몬고는 훈령에 의해 단죄된 자이기 때문에 공의회에 의해 그의 복권이 결정되어야 하고, 칼체돈 공의회와 레오 1세 교황의 사목 서한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이 두 번째 서한에 대한 답신을 받지 못한 채 사망하고 말아 결국 사도좌와 콘스탄티노플 교회 사이의 갈등은 매우 첨예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교황은 20여 편의 서한을 남겼는데, 이 서한들은 로마 교회의 수위권과 전통 교의를 옹호하기 위하여, 그리고 합당하지 않은 자나 이단자들에게 중요한 주교좌를 맡기지 않도록 권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신앙의 문제에 있어 교황들이 결정한 사항들의 유효성을 확언한 서한도 있다.
건축 활동 : 교황은 또 로마에서 중요한 건축 사업들을 추진하였다. 472년 리치메르를 중심으로 한 야만족들의 세 번째 침입으로 로마에 있는 대성전들과 도시가 많이 훼손되고 약탈당한 상황에서 교황은 우선 성 스테파노 성당을 건축하게 했고, 주니오 바소(Giunio Basso)가문의 소유였던 궁전을 성 안드레아 성당으로 바꾸었다. 이 성당을 세운 이는 테오도시오(Teodosius)라고도 불리는 플라비오 발릴라(Flavio Valila)라는 고트족 출신의 장군이었는데, 성모 마리아 대성전 근처에 세워졌던 이 성당은 1684년에 붕괴되어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로마 성벽 밖에 있는 성 라우렌시오 성당 근처에는 성 스테파노에게 봉헌한 또 하나의 대성전이 세워졌고, 리치니아노(Liciniano) 궁 근처 에스퀼리노(Esquilino)에 있는 님프 신전은 성녀 비비안나 대성전으로 바꾸어 유해를 안치하였다. 또 로마 성밖에 있는 세 개의 대성전을 인접 본당의 신부들에게 1주일씩 순번을 정해 주어 세례성사 · 고해성사 · 장례 미사 등의 성사 집전이 정규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이외에도 다른 많은 성당들의 복원 공사가 심플리치오 교황에 의해 단행되었다. (→ 그리스도 단성설 ; 칼체돈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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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리치오 (?~483)
〔라〕Simplic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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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심플리치오 교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