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 시대적 배경
II . 십자군 사상의 기원
III . 혜택과 준비
IV . 시대별 원정 과정
V . 결 과
VI . 십자군 운동의 의의
예루살렘과 예수 그리스도의 성묘(聖墓)를 이슬람교 신자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하여 일으킨 일련의 군사 원정(軍事遠征).
교회사에서 타종교와의 관계에서 일어난 가장 큰 충돌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교 세계와 이슬람교 세계 사이에 일어난 예루살렘 성지 탈환과 정복을 위한 전쟁일 것이다. 거의 2세기 동안 이슬람교 세계에서는 성전(聖戰, Ghihad)으로, 그리스도교 세계에서는 십자군으로 서로 대항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교 세력이 그리스도의 무덤을 파괴하고 예루살렘 성지를 강탈하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가 이를 재탈환하기 위하여 11세기 말부터 13세기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일으킨 전쟁이었다. 또한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동유럽과 중근동 아시아 각지에서 실시한 군사원정의 총칭으로, 참가자가 의복에 십자가 표지를 붙인것에서 13세기 후반 이후 십자군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이전 사료에는 '예루살렘 여행' (Iter Hierosolymitanum)혹은 '성묘 참배' 라고 기록되어 있다.
I . 시대적 배경
셀주크 투르크인들의 침입이 있기 전까지 팔레스티나와 그 인근 지역은 무슬림들에게 점령당한 상태였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성지 순례나 현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생활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서유럽 · 동로마 제국 · 이슬람권 등 3대 정치 세력 사이의 균형이 터키 셀주크 이슬람의 압박으로 깨지게되었고, 이들의 압박에 단독으로 대항할 수 없었던 동로마 제국은 서유럽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프랑스 왕 필리프 1세(1059/1060~108)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1084~1105/1106)는 교회로부터 파문을 받은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의 권위 아래 있던 서유럽의 그리스도교계는 예루살렘 성지 회복과 동로마 제국의 그리스도인들을 돕는다는 대의 명분으로 군사적인 원정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이 원정은 훗날 정치적 · 경제적 · 군사적인 요소까지 작용하면서 그 순수성이 상실되기도 하였다.
11세기 전반까지의 몇 세기 동안 중세 서유럽 사회의 농민 등 하층민의 경제적 상황은 늘 어려웠다. 그러나 경제가 안정되면서 생산 · 유통이 향상되고 인구가 증가하였고, 도시와 농촌 지역이 두루 발전하였으며, 사회적으로는 봉건 지배가 해체되고 자치 도시의 독립이 진행되었다. 11세기 말경에는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로마-게르만 문명이 절정에 다다랐다. 또 생활 수준이나 사회 신분의 향상을 바라는 욕구, 동방 세계에 대한 동경심, 서유럽 이외의 세계 진출을 추구하는 욕구가 서유럽 모든 지역에서 동시에 점증하였다.
종교적인 면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으로 수도원 문화가 확산되었고, 그리스도와 관련된 유물이나 순교자 및 성인들의 유물을 거룩하게 여겼으며, 성지 참배 순례는 속죄 행위로서 신자들 사이에서 전통으로 굳어졌다. 특히 예루살렘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 생활을 한 성도(聖都)로서 순례의 최고 목표지였고, 그리스도의 거룩한 무덤을 참배하는 것은 신자들의 평생 소원이기도 하였다.
II . 십자군 사상의 기원
교회 초기부터 성지를 수호하고 순례자들을 보호하며 그리스도교 신앙을 순수하게 보호하는 것을 하나의 의무로 여긴 사상이 십자군 운동의 기본이 되었다. 그런데 9세기부터는 이러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한 무력 사용이 일종의 신앙 행위로까지 간주되었다. 711~719년에 스페인이 무슬림 세력에 의해 점령당하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는 위기를 느끼고 불안해 하였다. 이때 스페인에서 이교도들을 몰아내는 데 뒷받침되었던 성전(聖戰)개념에서 무력을 정당화한 십자군 운동의 기원을 찾기도 한다. 878년 교황 요한 8세(872~882)는 이탈리아를 침입한 무슬림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방어하다 죽은 군인들에게 대사(大赦)를 약속하였고, 1010년에는 이슬람 신자인 하킴(Hakim) 군주가 당시의 무슬림들도 성지로 존중하던 성지들을 강탈하고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의 무덤을 파괴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 요한 8세가 약속했던 대사가 교황 알렉산데르 2세(1061~1073)에 의해 1063년에 다시 선포되었는데, 이때 교황은 스페인에서 무슬림에 대항해서 싸운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대사를 허용하였다.
한편 637년부터 아랍 무슬림 세력의 지배하에 있던 팔레스티나의 성지 순례자들과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은 약간의 불편은 있었지만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11세기 중엽 동(東)이슬람권의 실권을 장악한 셀주크 투르크인들은 이어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시리아와 소아시아의 요충지를 잇달아 점령하였다. 그리고 1071년에 지금의 터키 동부인 만지케르트(Manzikert)에서 동로마 제국의 군대가 패배하고 예루살렘과 다마스커스마저 점령당하자, 서방 세계는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 유럽까지 위험할 것이라는 우려를 하게 되었다. 바로 이 만지케르트 점령이 서방 세계가 십자군 원정을 일으키게 된 직접적인 계기로 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방 교회의 요청을 받은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1085)는 그들을 돕기 위하여 교황청의 봉신(封臣)들로 원정대를 조직하는 한편, 교황 자신도 참가를 희망하였다. 하지만 성직 서임권 문제로 황제와 투쟁 관계에 있었으므로 참가하지는 못하였다. 클뤼니(Cluny) 수도원 출신인 교황 우르바노 2세(1088~1099)는 1095년에 동방 교회로부터 군사 원정 요청을 다시 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1081~1118)는 피아첸차 교회 회의에 사절을 보내, 동로마 제국에서의 '이슬람 침략' 을 과대 선전하고 교회와 그리스도인 및 순례자들이 입은 피해를 막아 줄 것을 호소하였다. 또 교황 우르바노 2세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신으로 동로마 제국을 도움으로써 동방 교회와 서방교회가 재결합하고, 이슬람교 신자들에게 짓밟힌 그리스도의 거룩한 땅을 되찾아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서유럽의 여러 민족들을 일치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겼다. 이에 교황은 같은 해 11월 클레르몽 교회 회의에서 예루살렘을 목표로 하는 제1차 십자군 원정을 선언하였다. 전쟁에서 점령지가 정복자의 영토가 되듯이 정복된 지역의 교회는 교황의 권한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교황은, 십자군 원정의 결과에 교황 통치권의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던 것 같다.
클레르몽 교회 회의를 마치면서 교황은 '신의 휴전'(Treuga Dei)을 선포하고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는 모두에게 대사를 약속하였다. 또 '십자군' 을 선포하고 동방 교회를 돕자고 호소하자 군중들은 이를 '하느님의 뜻' 으로 받아들이며 환호하였다. 십자군은 성지 회복을 위한 원정대에 참가한다는 '십자가의 맹세' (votum crucis)를 하고, 좋은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에만 대사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본래 성지 순례자에게는 무기 휴대가 허용되지 않았지만, 클레르몽 교회 회의 이후 부터는 무장한 채로 예루살렘 성지 순례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르바노 2세 교황은 현세의 영광이나 욕심을 얻기 위해서 십자군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교황 에우제니오 3세(1145~1153)는 십자군 참가자들에게 사치나 과시를 금지하는 의무를 부과하였다. 영성 저술가들도 인생의 전환점으로 십자군 참가를 고려하였는데, 베르나르도(Bernardus de Clairvaux, 1090~1153)는 십자군 원정이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풍부한 은총의 은혜로운 기회라고 강조하였다. 십자군 참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치겠다는 개인적인 신앙과, 십자군 원정 동안 교회가 자기 가족과 재산을 보호해 주는 물질적인 이익과 대사를 얻는 두 가지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대사를 얻고 영원한 구원을 받는 것이 지상의 삶보다 더 중요하다고 확신한 사고 방식이 신자들로 하여금 십자군 전쟁에 쉽게 동참하게 하였던 것이다.
Ⅲ . 혜택과 준비
〔참가자에 대한 혜택〕 대사는 죄를 고백한 십자군들이 현세나 내세에서 해야 하는 속죄를 하지 않아도 되고, 교회법적인 형벌도 완전히 용서받는 특별한 은사였다. 12~13세기 신학자들은 교회 공로의 보고(寶庫)에서 대사의 신학적인 기초를 찾았지만,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십자군이 받는 대사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대단한 가치였다. 교회가 십자군에 참가하는 사람의 재산과 그 가족들을 보호하고 더 나아가 십자군이 진 빚과 이자의 지불 정지로까지 확대됨으로써, 이것은 '십자가의 특권'(priviliegium crucis)으로 불렸다. 또 십자군은 교회 법정에서만 재판을 받도록 하였다.
〔준비와 조직〕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는 르 퓌(Le Puy)의 주교이자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한 지 얼마 안되어 동방 지역의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아데마르(Adhemar Monteil, ?~1098)를 교황 사절로 임명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제1차 십자군 원정에서 군사 지휘자로 활약한 것이 아니라 설교를 계획하고 참가자들을 참회시키며 순례자들의 신앙 생활을 돌보는 등 영적인 임무에 헌신하였는데, 각 원정대에 동행한 다른 교황 사절들도 주로 이러한 임무에 종사하였다.
실전에서는 각 국왕이나 귀족들이 지휘자로 임명되어 휘하의 병사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훈련도 시켰다. 소속이 확실하지 않은 십자군들은 대개 유명한 지휘관 중 한 사람에게 스스로 예속되었다. 그러나 교황의 의도와는 다르게 비무장 순례자들이 십자군에 동참하여 구호품에 생계를 의지함으로써 군대에 부담을 주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신앙 열정만은 대단하였다. 무엇보다 병참이 문제였는데, 육로를 이용한 원정단은 가는 도중 내내 보급품을 운반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므로 후에는 각 나라가 보급품을 조달하였다. 모든 이가 스스로 식량을 구입해야 했으므로 때때로 원정 도중 십자군에 의해 저질러진 약탈 행위는 식량 부족 때문이었다. 해로를 이용한 원정대는 보급품 운반을 더 쉽게 하였지만 여러 달 걸려 운반된 양식은 서유럽에서 온 상인들에 의해 보급되었다.
〔재 정〕 이 모든 전쟁에는 재정적인 뒷받침이 필수적이었다. 떠나기 전에 십자군들은 자신들의 땅을 팔거나 저당 잡혀 돈을 마련하였는데, 교황 에우제니오 3세는 십자군에 참가하기 위해서라면 땅을 쉽게 저당 잡힐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또 프랑스 왕 루이 7세(1137~1180)와 영국 왕 헨리 2세(1154~1189) 등은 일반 세금의 상환 청구권을 활용하여 배 · 용병 · 비축용 보급품을 구입하였고, 교황청은 십자군 설교에서 신자들의 자비심에 호소하면서 선물과 구호품을 걷어 십자군을 재정적으로 지원하였다. 직접 십자군에 참여할 수 없는 신자들은 그들을 대신하여 참가하는 군인에게 돈을 지불하는 방법으로 십자군 대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에 대한 잦은 남용이 문제가 되었다.
교황 인노천시오 3세(1198~1216)는 제4차 십자군 원정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하여 성직자들에게 수입의 일부를 희생하도록 설득하였고, 교회록의 1%를 세금으로 징수하고 각 원정 때마다 이를 갱신하였다. 이는 교회록의 10분의 1은 아니었지만 "십일조" 라고 불렸으며, 이 십일조는 대부분 13세기에 십자군을 재정적으로 돕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십자군에 참가한 세속 권력가들은 수년 동안 자신들 나라의 성직자들로부터 십일조를 거두었지만, 실제로 이 돈들이 모두 십자군에게 전달된 것은 아니었다.
IV 시대별 원정 과정
성지를 수호하고 순례자를 보호하며 신앙을 옹호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무력도 불사한다는 십자군 사상은 16~17세기까지 남아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십자군 운동은 중세 시대의 군사 원정으로 한정되며, 그 횟수도 역사가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제1차 십자군 전쟁(1096~109)〕 1095년 말과 1096년 초겨울에 프로방스를 순례한 교황 우르바노 2세의 권유로 많은 사람들이 십자군 원정에 호응하자 교황은 르퓌의 주교 아데마르를 대리인으로 선임하고, 출발일을 1096년 8월 15일로 확정하였다. 그리고 이때 아미앵의 은수사(隱修士)인 베드로가 '사도적이고 복음적인 생활' 의 이상을 사람들에게 설교하며 회개를 촉구하였다.
당시는 종말론적인 사상과 결부된 신자들의 신앙적인 열정과 특히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농부들과 하층민들이 보다 향상된 삶을 살기를 바라는 열망으로 쉽게 십자군 원정에 참가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신앙적 열정과 세속적 욕구가 혼합된 분위기 속에서 이들은 베드로의 권고에 따라 예루살렘 해방을 위한 군사 원정을 떠났다. 베드로의 뒤를 따르는 이들은 중도에 합류한 이들과 여자들까지 합쳐 5만~7만여 명에 이르렀지만, 이들은 비무장이거나 무장이 허술한 가난한 순례자들이었고,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고 지휘 계통도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은 하층민들이었다. 한편 이들은 라인 지방을 지날 때 유대인들에게 유혈 참극을 저지르다가 헝가리인들과 터키인들에게 쫓겨 대부분 학살당하고 말았고, 베드로 은수사의 지휘 아래 소아시아에 도달한 것은 극히 일부였다. 이것으로 보아 초기에는 비무장의 민간인 집단이 참가자의 대부분을 차지했었음을 알 수 있다.
알렉시우스 1세 황제는 처음 도착한 그들을 손님으로 맞이하였으나 통제할 수 없는 만행을 보고 그들을 소아시아 쪽으로 이동하게 하였다. 본 부대는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출발하여 다뉴브 강 골짜기, 발칸 반도, 이탈리아, 그리스를 거쳐 콘스탄티노플에서 합류하였는데, 당시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2세(Alexius Comnenus, 1180~1183)는 엄청난 숫자의 십자군을 보고 불안해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도움으로 투르크인을 몰아내는데 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일 것과, 외교적인 수완을 발휘하여 점령군 지휘자들의 충성 맹세와 터키로부터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이 협약은 소아시아를 지나오는 동안 존중되어, 십자군에 의해 재탈환된 니체아가 1097년 7월에 동로마 제국으로 반환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 과정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끔찍한 유혈 참극은 그 동기와 목적의 정신에서 완전히 벗어난 비그리스도교적인 행위라는 비판을 받아도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이는 바로 전쟁은 인간의 모든 승고한 가치와 신앙의 정신도 철저히 파괴하는 반인륜적인 죄악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그 후 시리아의 에데사가 점령되었고(1097), 오랜 포위 공격 끝에 제노바 동맹군들이 바다를 통해 합류한 지원으로 안티오키아(1098)와 예루살렘(1099)도 점령하였다. 이로 인해 서유럽 세계가 흥분하였고 십자군 원정에 대한 열기도 커졌다. 그러나 이 지역들이 동로마 제국에 넘겨지지 않고 시리아 · 팔레스티나 일대에서 획득한 에데사 백작령(1098~1144) 안티오키아 후작령(1098~1268), 트리폴리 백작령(1109~1289) 등 세 봉건 소령을 포함하는 예루살렘 왕국(1099~1187)이 세워졌다. 그리고 그 기초를 굳힘과 동시에 주변의 이슬람 세력에 대한 공세적 방위작전을 폈다.
예루살렘 왕위는 초기에 '성묘의 수호자' 라는 칭호가 부여된 바스로렌(Basse-Lorraine) 후작 고드프루아(Godefroi de Bouillon, 1089~1100) 이래 여계(女系) 상속을 포함하는 세습제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서유럽의 군주와 동등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보두앵 3세(Baudouin Ⅲ 1143~1162) 시대에는 그 영토가 북쪽은 유프라테스 강 연안에서부터, 그리고 남쪽은 홍해의 아카바 만에 이르렀다. 이 왕국들은 서방 세계와 같은 조직으로 재편되어 총대주교 · 대주교 · 주교, 그리고 많은 라틴 교회 수도회들이 자리를 잡았으며, 점차 왕과 총대주교나 군주로부터 독립하여 교황에게 직속된 요한 기사 수도회와 성전 기사 수도회가 권력을 장악해 갔다. 광대한 면적에 비해 서유럽인 지배자의 수는 매우 적었으며, 대부분의 피지배자층은 정복될 때 대학살을 모면하고 피신하였다가 귀순한 원주민들이었다. 또 유럽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인구가 유입되지 않고 원주민들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왕국으로서의 조건을 충족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리고 안티오키아를 점령하여 장악하고 있던 노르만인들에 대해 반감을 가진 동로마 제국과의 대립과 갈등으로 서로간에 전쟁이 일어남으로써 결국 십자군 약화의 한 원인이 되었다. 한편 십자군 진출 시기에 정치적 대립으로 분열되어 있던 여러 이슬람 세력들이 통합을 하였는데, 12세기 중엽 이들의 반격으로 에데사 백작령 전역과 안티오키아 후작령 동부를 빼앗기고 말았다.
〔제2차 십자군 전쟁(1147~1149)〕 1144년 12월 25일 투르크인들이 예루살렘 왕국의 동북방 지역인 에데사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교황 에우제니오 3세에의해 1146년 5월 프랑스 중부 베즐레(Vézelay)에서 소집된 회의에서 당시 서유럽 제일의 영적 지도자였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의 권고로 제2차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제1차 십자군 원정 때보다는 숫자가 적었지만, 성전 기사 수도회(Templarii) · 성 요한 기사 수도회 · 예루살렘 왕국 제후군이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독일 왕 콘라트 3세(1138~1152)가 지휘하는 원정대에 참가하였다. 루이 7세와 콘라트 3세는 다뉴브 강을 따라 육로로 출발해서 콘스탄티노플을 통과하였으나, 식량 부족 등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으로 니체아로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대패하여 루이 7세 왕의 군대에 의존하여야 했던 콘라트 3세는 큰 희생을 치르고 아달리아(Adalia)에 도착하였으나 이 원정은 바다에 막혀 끝나 버리고 말았다. 시리아에 도착한 십자군들은 다마스커스 공격에 참여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1148) , 안티오키아 방어에 유효한 상황을 가져오지도 못한 채 오히려 장기 왕조(Zangid dynasty, 1127~1222)의 세력 확대를 허용하는 결과를 낳았다.
〔제3차 십자군 전쟁(1182~1192)〕 오랫동안 내분으로 약화되었던 터키에 이집트와 시리아의 지배자인 살라딘(Saladin, Salabad-din, 1138~1193)이 새로운 권력자로 출현하면서 상황은 역전되었다. 그는 이슬람 세력으로 단일 국가를 이룬 자신이 지배하는 지역 내의 무력을 모아, 여러 라틴 국가로 편성된 다국적 십자군이 방어하고 있는 지역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티베리아 호수 근처 하틴(Hattin)에서 3일 동안 맹렬한 전투를 벌인 끝에 1187년 10월 예루살렘을 함락하였다. 이로 인해 티로와 북쪽 해안 도시들만 겨우 저항하는 상황에서 십자군 국가의 운명이 위기를 맞게 되자, 대대적인 제3차 십자군 원정을 추진하게 되었다. 서유럽 그리스도교계의 반응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8세(1187)는 스칸디나비아 지역부터 여러 나라로 사신을 파견하여 7년 동안의 '신의 휴전' 을 선포하고 십자군 원정을 독려하였다. 이때 영국 왕 헨리 2세(1154~1189)와 프랑스 왕 필리프 2세(1179~1223)가 화해하여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였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1152~1190) 역시 참가하였다. 십자군은 1189년 5월에 출발하여 발칸 반도를 통과하였는데, 잘 준비된 계획이었음에도 살라딘과 협정을 맺은 동로마 제국의 황제 이사치우스 2세(1185~1195)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프리드리히 1세 황제는 동로마 제국 황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뉴브 강을 따라가다가 동로마 제국을 가로질러 터키를 통과하였다. 그러나 그가 1190년 6월 9일 실리시아 강에서 익사하고 말아 휘하의 군사들은 되돌아가고 말았다.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 헨리 2세의 후계자로 기사도 정신의 귀감이라 하여 인기가 높았고 사자심왕(獅子心王)이라고도 불렸던 영국의 리처드 1세(1189~1199)는 해로를 통해 예루살렘 왕국의 핵심지인 아크르의 포위 작전에 참여하였다. 한편 이 전투에 참여하기 전에 리처드 1세는 이사치우스 황제의 지배하에 있던 키프로스 섬을 정복했었는데, 두 왕들의 사이가 벌어져 프랑스 왕은 아크르를 점령한 뒤 귀환하였다. 영국의 리처드왕은 고군 분투 끝에 여러 해안 도시들(Jaffa, Ascalon)을 점령하였지만 예루살렘은 공격하지 못하고, 1192년 살라딘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제3차 십자군 원정은 서방의 순례자들이 성지 순례를 할 수 있을 지역만큼만 점령하는 성과를 올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원정은 십자군 본래의 정신과 목표에 가장 근접한 마지막 십자군 원정이요, 다른 모든 십자군 운동의 정점으로 평가받고있다.
〔제4차 십자군 전쟁(1202~1204)〕 사실 이 원정은 교회 역사에서 대단히 수치스럽고 지워 버릴 수 없는 오욕의 군사 원정으로 평가되고 있다.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지 순례의 허가를 받았으나 예루살렘은 여전히 무슬림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는 성지 회복을 위한 새로운 원정대를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므로 이 원정은 동로마 제국이나 예루살렘 성지에서 일어난 재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무슬림에게 점령된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하여 교황이 결정한 군사 원정이었다. 그러나 독일 내부의 불화와 프랑스-영국 두 왕의 대립으로 시작조차 불가능하였던 이 십자군 원정은, 뇌이(Neuily)의 펄크의 호소로 상파뉴(Champagne) 지역의 귀족들이 1199년 11월 28일 십자군에 참여하기로 성대한 서원을 한 에크리(Ecry) 대회 이후 가능해졌다.
이 원정은 해로를 택하였기 때문에 많은 배들이 베네치아에 집결하였다. 그런데 배 주인들에게 약속한 돈을 지불할 수 없자 동방과 무역 경쟁 관계에 있던 베네치아 상인들이 그 대가로 달마치야(Dalmacija) 해안에 있는 그리스도교 도시인 차라(Zara)를 탈환하는 것으로 그 돈을 대신하라고 강요하였다. 1202년 6월 20일 교황은 십자군에게 동로마 제국 문제에 개입하는 것과 베네치아인들과의 관계를 금지하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베네치아 상인들은 동로마 제국의 상인들의 세력을 말살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십자군에게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동로마 제국을 분할하기로 제의하였고, 질서도 규율도 없는 십자군은 그 도시를 급습하여 3일 동안 약탈하고 파괴하였다. 이에 교황은 "그대들은 약속의 땅을 정복한 대신 그대들 형제의 피에 갈증을 느꼈다. 세상의 유혹자인 사탄이 너희를 유혹하였다"고 질책한 뒤 그들을 파문하였다. 얼마 후 더 이상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약속하에 파문을 철회하였지만, 끝내 그들은 베네치아 상인의 이기적이고 상업적인 이해 관계 속에서 십자군 본래의 정신과 목표를 저버리고 말았다. 이 원정은 참가한 제후와 기사들의 미약한 재정과 전략 개념의 불일치가 원인이 되었으며, 베네치아인들의 상업주의에 이끌려 그리스도교 국가인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라틴 제국을 건설하는 이상한 결과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이 도시는 심하게 약탈되고 황폐화되었는데 , 이러한 난폭하고 비이성적인 행동은 동 · 서방 교회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고 이슬람 세력에 대한 동방 세계의 방위력이 결정적으로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1204년 5월 16일에는 플랑드르의 백작이 보두앵 1세(1172~1205)라는 이름으로 라틴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이로써 동방의 라틴 제국은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지배되었고, 성지의 재점령에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였다. 이 새 제국은 트라키아 · 마케도니아 · 그리스 각지를 정복하여 동방 교회를 한때 로마 교회에 통합하고 라틴 문화를 동유럽에 보급시켰지만, 소아시아로 망명하여 부흥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동로마 제국 황제의 반격을 받아 1261년 멸망하였다.
〔제5차 십자군 전쟁(1217~1221)〕 1213년 교황 인노천시오 3세는 무슬림들이 타볼 산에 아크르를 위협하는 요새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제5차 십자군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교황은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새로운 십자군 원정의 필요성을 역설한 뒤, '신의 휴전' 을 선포하고 무슬림과의 모든 상거래 금지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대사 · 사면 · 교회의 보호 등 십자군들에 대한 여러 가지 혜택을 열거하면서 모든 전통적인 방법들을 동원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도록 하였다. 1217년 6월 1일이 원정 출발일로 확정되었으나 교황은 그 이전에 사망하였고, 참가자는 동유럽의 신흥 그리스도교 국가인 헝가리의 왕과 오스트리아 제후 외에 네덜란드의 프리슬란트(Friesland)인 기사 등으로 대체로 약소한 군사력이었다. 헝가리 왕이 1217년에 성지에 도착하였지만, 확실한 계획도 없이 출전하였기에 그의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들이 출발한 후 예루살렘 왕인 브리엔(Brienne)의 요한은 이집트에서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1218년 5월 다미에타(Damietta)에 상륙하여 1년 이상 그곳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그 동안에 도착한 많은 십자군들의 지원을 받아 이듬해 11월 마침내 그곳을 탈환하였다. 이 무렵 성지 재탈환을 복음 정신에 따라 평화로운 선교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1181~1226)는, 무방비 상태로 성지에 가서 술탄을 설득시키려 하였으나 오히려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술탄이 그를 너그럽게 대우하여 풀어 준 뒤, 이를 계기로 성지에서의 평화로운 선교 활동이 프란치스코회에 의해 시작될 수 있었다.
그 후 카이로로 진군한 십자군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1215~1250)가 약속한 군대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겨울에 다미에타를 통과하였고, 독일 십자군들의 도움을 받아 전투를 개시하였다. 1221년 7월 알만수라(al-Mansurah)에 도착한 십자군이 이곳을 함락하려 할 때, 이집트 술탄으로부터 예루살렘 반환을 약속하며 다미에타와 교환하자는 평화 협정 제안을 받았다. 브리엔의 요한은 이 제의를 받아들이고자 하였으나, 교황 특사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 후 교황 특사의 지시에 따라 십자군은 카이로 공격을 계속하였으나 무슬림들의 반격과 나일강 홍수 때문에 아무 전과도 거두지 못하였다. 그리고 결국 카이로에서 패배하여 무슬림들에게 다미에타를 넘겨주고 포로 신세를 면하였다.
〔제6차 십자군 전쟁(1228~1229)〕 이 원정이 결정된 것은 1223년 교황 호노리오 3세(1216~1227)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시칠리아 왕을 겸하면서 이슬람 세력과 우호 관계를 맺고 있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늑장을 부렸고, 그가 승선할 즈음 교황 그레고리오9세(1227~1241)가 그를 파문하였기 때문에 공식적인 십자군 운동으로 간주하지 않는 역사가도 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카이로의 술탄과 개인적인 친교가 있었으므로 결혼 정책으로 예루살렘 왕을 겸하고 있었고, 외교적인 수단으로 1229년 2월에 야파(Jaffa) 협정을 맺어 베들레헴과 나자렛을 양도받고 예루살렘에 무혈입성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그 주변 지역은 양도받지 못한 상태였다. 종교적 관용 정신에 따라 십자군 본래의 목적은 달성되었으나, 정치적 · 경제적 이해(利害) 관계의 상충으로 서유럽인 사이의 불일치, 파문당한 황제와 현지 제후의 대립, 출신지를 달리하는 여러 국민 간의 불화가 표면화됨으로써 왕국은 무정부 상태의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제7차 십자군 전쟁(1248~1254)〕 1245년 리용 공의회에서 교황 인노첸시오 4세(1243~1254)의 제안으로 추진되었고,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프랑스의 왕 루이 9세(1226~1270)만이 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루이 9세가 일으킨 이 십자군은 "예루살렘의 열쇠는 카이로에 있다"는 전략 개념 아래 우선 이집트를 정복하고 성지를 점령하고자 하였다. 이에 영국과 노르웨이의 귀족들과 함께 이집트와 튀니지로 정예 대군을 보냈으나, 모두 이슬람의 포위망 속에 고립되어 성지 회복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도 못한 채 패퇴하고 말았다. 키프로스를 거쳐 이집트에 도착한 루이 왕 역시 1249년에 다미에타를 점령하고 카이로로 향했지만 만수라(Mansara)에서 또다시 저지당하여 후퇴하다가 전염병과 무슬림의 공격으로 전멸당하고 말았다. 루이 왕은 포로가 된 자신의 부하를 위해 몸값을 지불하고 자신도 다미에타를 넘겨주고 풀려 났다. 실패를 했지만 루이 왕은 4년 동안 성지에 머무르면서 수많은 요새를 새로 만드는 등 성지의 방어를 튼튼히 하였다. 그렇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카이로의 새로운 정권인 맘루크 왕조(Mamluk dynasty, 1250~1517)가 그리스도인 소탕을 도발하게 한 결과를 가져왔다.
〔제8차 십자군 전쟁(1265~1272)〕 1263년 바이바르스 1세(Baybars I , 1260~1277) 술탄이 라틴 국가들을 재정복하기 시작하자 교황 우르바노 4세(1261~1264)는 제8차 십자군 원정을 선언하였고, 이에 원정단들은 산발적으로 아크르에 도착하여 술탄과의 싸움에 합류하였다. 그리고 1270년에 루이 9세 왕의 대군은 바이바르스에게 대항하는 튀니지 왕으로부터 원조를 받기 위하여 튀니지로 갔으나, 루이 왕은 카르타고에 상륙한 지 얼마 안되어 페스트로 사망하였고, 그의 빈약한 군대는 붕괴되었다. 단지 영국의 에드워드 왕자가 다소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는 1272년에 시리아로 가서 술탄과 새로운 협정을 맺었다.
서방에서는 차츰 십자군 원정에 반대하는 여론이 조성되고 비폭력적인 설교를 통해 이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유럽 내에서는 이교도 문제, 즉 스페인의 무어인 · 이교 슬라브인 · 프랑스 남부의 알비파 이단 등 더 현실적인 문제들이 대두되어 십자군원정은 더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
〔12~13세기의 십자군들〕 이 시기에는 하느님의 은총은 교만한 어른들의 군대보다는 깨끗하고 작은 자들을 통해 드러난다는 내용으로 십자군 참가를 독려하는 감상적인 설교가 등장하였다. 그래서 1212년에는 수천 명의 소년 소녀들이 프랑스의 조그마한 마을 클루아쉬르르루아 출신의 목동 스테파노와 쾰른의 열 살짜리 소년 니콜라오의 인솔로 '목동 십자군' 과 소위 '어린이 십자군' 이 결성되어 성지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소년 십자군들이 마르세유에서 승선한 배 일부가 난파되었고, 일부는 알제리의 해적에 의해 노예로 팔렸다. 또 알프스 산을 넘어 이탈리아의 제노바로 향했지만 대부분 굶주림과 과로로 흩어지고 브린디시에 도착한 일부도 역시 흩어지고 말았다.
십자군은 또 정통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이교에도 대항했다. 1208년 교황 특사 카스텔라나우(Castelanau)의 베드로가 살해된 후 교황 인노첸시오3세는 알비파 이단자들과 그들의 동맹군에 대항하는 랑그도크(Languedoc)의 신자들을 방어할 십자군을 요청하여 그 지역을 정복하게 하였다. 십자군은 또 교황령 국가의 적들에게도 대항하였다.
13세기 후에도 그리스도교 신앙을 옹호하고 교회의 적을 물리치기 위한 수단으로 교황들은 십자군을 계속 활용하였다. 첫째, 근동 이외의 지역에서 이교도들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1396년 무슬림인 티무르(Timur, 1336~1405)가 러시아 남서부 지역 카프카스(Kavkaz)를 침략하였을 때, 카스피 해에 군함을 보내 가톨릭을 방어한 이들에게 십자군 대사를 허용하였다. 둘째, 이단에 대항하여 신앙을 수호하기 위한 경우였는데, 보헤미아에 후스파 이단이 생겨나자 교황들과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 시에나 교회 회의는 후스파 이단에 대항하여 십자군을 소집하였다. 셋째, 서방 교회 분열 중에 로마와 아비뇽의 교황들은 서로에게 대항하는 십자군을 이용하였다. 1383년에는 헨리(Henry Despensor)가 아비농에 복종한 플랑드르인들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영국에서 병사들을 모아 십자군을 이끌었다.
〔13세기 이후의 십자군〕 아크르 함락으로 십자군이 종말을 고하지도 않았고 "성지 회복" 이라는 목적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후에도 많은 계획들이 여러 왕들에 의해 제안되었는데, 이 계획 가운데 어떤 것은 순수하게 군사적인 성격을 띠었고, 어떤 계획들은 말타 기사 수도회나 성전 기사 수도회보다 더 완전한 기사 수도회의 종교적인 임무를 지향하였다.
후기 십자군은 "이교도들"을 대적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보호라는 의미를 다시 강조하면서도 예루살렘 성지순례 정신에 대한 언급 없이 주로 터키인들을 대적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1344년 이후 교황 글레멘스 6세(1342~1352)에 의해 조직된 신성 연맹(神聖聯盟)은 에게해에서 터키 해적들과 교전하여 스미르나를 재탈환하였고, 이듬해 사보이의 움베르(Dauphin Humbert)는 흑해로 이교도들을 축출하기 위해 십자군에 합류하였으나 원정에 실패하였다. 또 1390년에 부르봉(Bouton)의 루이 2세는 튀니지 알 마티야(al-Mahdiya)의 무슬림 해적에 대적하기 위하여 십자군을 일으켰으나 도시를 점령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후기에 중요한 십자군을 일으킨 주요 원인은 오스만 제국 때문이었다. 1336년 사보이의 아마데우스(Amadeus) 4세는 오스만 제국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콘스탄티노플을 돕고자 군대를 이끌고 갔는데, 이것은 14세기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참가한 마지막 대 십자군 원정이었지만 헝가리 왕 보니파시오 11세와 네버(Nevers)의 존 백작은 1396년에 니코폴리스(Nicopolis)에서 대참패를 당하였다.
1443년에는 폴란드의 라디슬라오(Ladislao) 왕과 헝가리 장군 후냐디(J. Hunyadi, 1407?~1456)의 연합으로 십자군이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들의 출전은 1444년 바르나(Varna)의 재해에서 끝났다. 이때 부르고뉴의 공작필리프 3세(Philipe le Bon, 1396~1467)는 터키 함대와 격전하기 위해 배를 보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필리프는 1455년 패산(Faisan) 서원으로 십자군을 결성하였으나, 교황 비오 2세(1458~1464)가 십자군 지휘를 고집하자 군대를 출발시키지 않았다.
십자군에 약속한 대사는 다른 원정에도 허용되었는데, 프랑스는 1495년에 샤를 8세(1483~1498)의 터키 원정 계획 때, 스페인은 1489년 스페인의 그라나다 원정 때, 포르투갈은 1505년 아프리카에서 소요를 일으킨 무어인들에 대한 원정 때 그와 같은 특전을 받았다.
16~17세기에 헝가리와 지중해에 있는 터키인들과 싸우기 위하여 교황들은 중세기 십자군을 지속시키는 신성 동맹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군대를 재정적으로 돕고 십자군을 모으기 위하여 여러 제후들의 후원을 얻고자 하였고, 대사를 허용하였다. 1407년 그리스의 섬인 에보이아(Évvoia)의 네그로폰트(Negropont)를 잃은 후 이탈리아에서 1470년에 동맹이 조직되었고, 1481년에는 터키로부터 오트란토(Otranto)를 재탈환하였다. 1500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1492~1503)는 프랑스 · 폴란드 · 보헤미아 · 헝가리 동맹을 형성하여 프랑스-베네치아 함대를 에게 해로 보냈고, 1511년 교황 율리오 2세(1503~1513)는 프랑스를 대적하여 신성 동맹을 조직하였다. 1537~1538년에 다른 동맹이 구성되었지만 프레베차(Preveza)패전으로 끝났고, 1570년 또 다른 동맹이 조직되었지만 키프로스를 구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레판토(Lepanto)해전에서는 승리하였다.
V . 결 과
십자군 원정이 계속되는 동안 자주 신앙의 순수한 열성이 물질적이며 정치적인 이해 관계로 퇴색되고 변질되었지만, 성과보다는 이 전쟁에서 파생된 영향이 더 중요하다. 즉 십자군 원정은 서유럽 사회가 근대로 넘어가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십자군 원정이 진행되는 동안이나 끝난 후에도 서유럽에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 · 종교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정치적으로는 조국을 떠나 먼 타국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과 군사 원정에 참가하면서 공동체 의식이 강화되었고, 이로 인해 민족 의식 내지는 국민 의식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군소 봉건주들이나 영주들의 십자군 원정 참가로 영지 관리가 소홀해지고 경제력이 약화되면서 상대적으로 왕권 절대화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 무어인들로부터 피레네 산맥 남쪽의 반도가 해방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이미 지중해와 레판토 지방과 해상 무역을 해왔지만, 십자군 원정이 진행되는 동안과 끝난 후에는 동방과의 교역이 더욱 활성화되면서 상업 · 기술 · 공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또 동방과의 교역량이 증가되어 예전에는 주로 상류층에서 애용하던 동방의 직물 · 조미료 · 설탕 등이 평민들에게도 일반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십자군 원정의 와중에서 활성화된 화폐 경제의 발달은 기본적으로 자급 자족으로 유지되던 장원 경제를 쇠락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서유럽이 종교적 · 문화적으로 그리스도교 중심의 단일 종교와 단일 문화 분위기에서 통일성을 유지해 왔는데, 십자군 원정 과정에서 이질 문화와 이질적인 종교 요소가 유입되면서 종교와 문화의 다양성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이단을 중심으로 왕권과 교권에 저항하는 세력이 형성되어 사회 혼란이 가중되었다.
종교적으로 십자군 원정이 교회에 미친 영향은 명암이 교차한다. 교황의 주도로 시작된 십자군이 성공을 거둘때는 교황권이 크게 신장되었지만, 동시에 십자군의 몰락은 교황권의 위신이 실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사목자의 권위가 교회 본연의 사명에 충실함에서 비롯되어야지 세속적인 힘에 의존하는 것은 교회 위상에 적합하지 않다는 교훈을 남겼다. 그리고 교회 내적으로 대중 신심을 활성화시키고 기사 이념을 발달시켰다. 또한 주로 작은 형제회와 도니미코회 소속 선교사들에 의해 간접적이나마 이슬람 세계와 아시아 및 아프리카에 그리스도 신앙을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고, 은둔 형태의 수도 생활에서 병든 순례자에 대한 봉사와 이교도들로부터 성지를 보호하는 등 외적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한 의료 수도회와 기사 수도회를 출현하게 하였다. 또 비잔틴과 이슬람 문화와의 접촉이 유럽 문화를 더욱 풍요롭게하여 스콜라 사상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동방 교회 입장에서는 콘스탄티노플 약탈이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와의 일치 노력을 파괴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밖에 없었다.
Ⅵ. 십자군 운동의 의의
십자군은 교회와 세속과의 관계가 다른 어느 시대보다 가장 밀접했던 중세의 특성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낸 역사적인 대사건이었다. 교황이 십자군 원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향후 근 2세기 동안 서유럽 세계에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교황의 위상이 높아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은 황제와는 달리 전 유럽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평신도 군주들의 성직 서임권과 군주에 대한 충성 맹세를 억제하는 교령을 계속 갱신할 수 있었다.
중세 유럽 역사의 일대 사건인 십자군 원정 발생 동기는 신앙 내적인 요소와 외적인 요소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내적인 요소로는 중세 그리스도인들이 위험한 처지에 있는 형제들을 지켜 주고 예루살렘 성지 해방을 자신들의 거룩한 의무로 여겨 엄청난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였으며, 그레고리오 교황의 개혁을 통해 일깨워진 서유럽 세계의 새로운 그리스도교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였다는 데 있다. 그리고 외적인 요소로 기사도적인 충동으로 인한 군사적이고 상업적인 이해 관계에 따른 경제적인 측면을 배제할 수 없다. 이로 인해 십자군 원정이 거듭되면서 초기의 종교적인 참회 행위와 하느님께 대한 자발적인 봉사라는 동기와 목표로부터 빗나간 비그리스도교적인 난폭한 유혈 사태가 행해졌다. 반면에 문화적인 교류의 폭이 확대되어 중세 중기 유럽 문화의 다양성과 질적인 향상을 가져왔다. 특히 중세 시대 스콜라 철학과 신학의 발달은 동 · 서방의 교류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진다. 또한 영성적인 면에서 십자군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 때문에 온갖 위험과 고통을 극복하였고, 성지 순례의 체험에서 깊은 감동을 받아 고향에 돌아온 후 청빈과 속죄의 정신을 보급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십자가를 진 가난한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청빈 정신이 이 시대의 분위기를 이루었지만, 일부는 극단적인 태도를 보이며 교회를 비난함으로써 분열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 라틴 제국 ; 소년 십자군)
※ 참고문헌 민석홍, 《서양사 개론》, 삼영사, 1984/ 민석홍 · 나종일, 《서양 문화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5/ 요트 마르크스, 《가톨릭 교회사》 上, 가톨릭출판사, 1975/ 조의설 감수, 《대세계사》 5, 삼성출판사, 1982/ 차하순, 《세계사 총론》, 탐구당, 1986/ K. Bihlmeyer · H. Tuchle, Church History, vol. II , The Newman Press, 1963/ E.O. Blake, The Formation of the Crusade Idea, Joumal of Ecclesiastical History 21(Jan. 1970), London/ Cent point chauds de l'histoire d'Eglise, trad. F. Pierini, Ed. Paoline, 1984/ J. Comby, How to Read Church History I, SCM Press, 1985/ M. Deanesly, A History of the Medieval Church 590~1500(박희석역, 기독교 문서 선교회, 1993)/ A. Flich . V. Martin, Storia della Chiesa Ⅸ -2~X, Torino, 1976 · 1977/ A. Franzen, 최석우 역, 《교회사》, 분도출판사, 1982/ H. Jedin · J. Dolan, 유희수 역, 《서양 중세 문명》, 문학과지성사, 1992/ H. Jedin · J. Dolan eds., Handbook ofChurch History Ⅲ, Herder, 1969/ W. Kirchner, 지동식 감수, 《서양 중세사 개론》, 대학문화사, 1984/ D. Knowles · D. Obolensky, The Christian Centuries II , London, 1968/ K.S. Latrourette, The Thousand Years of Uncertainty II , Zandervan CEP. Ed., 1970/ J. Lortz, Storia della Chiesa I , trad. L.Marinconz, Ed. Paoline, 1984/ P.F. Palumbo, 《EC》 4, pp. 983~998/ J.Richard, 《NCE》 4, pp. 504~512/ A. Runciman, A History ofthe Crusades Ⅲ , New York, 1967/ G. Sabatini, Crociate, Dizionario Storico Religioso, Ed. Studium, 1966, pp. 226~230. 〔金喜中〕
십자군
十字軍
〔라〕cruciatae · 〔영〕crusades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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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주의 무덤 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