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雅歌

〔히〕שְׁיר השָּׁירים · 〔그〕Ἆσμα · 〔라〕Canticum Canticorum · 〔영〕The Song of So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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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의 지혜서에 속하며, 모두 8장으로 구성된 작은 노래 책.
〔명 칭〕 아가의 히브리어 성서 명칭인 '쉬르 하쉬림' (שְׁיר השָּׁירים)은 히브리어 성서의 관례대로 본문의 첫 낱말을 따서 지어졌다. 이를 직역하면 '노래들의 노래' 이지만 히브리어 문법에서 소유격을 이용한 반복-예를 들어 신명기 10장 17절의 '신들의 신이시며 주님들의 주님' 이나 에제키엘서 26장 7절의 '임금들의 임금' - 은 최상급을 뜻하기 때문에, '최상의 노래' 또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 로 번역될 수 있다. 이런 뜻을 담아 중국에서 '아가' (雅歌)로 옮겨졌고, 한국에서도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다. 히브리어 성서의 명칭은 대중 라틴어역 성서인 불가타(Vulgata)의 아가서 명칭 '칸티룸 칸티코룸' (Canticum Canticorum)에도 반영되었지만, 칠십인역 성서에서 이 책의 명칭은 '노래' 라는 의미의 '아스마' (ἆσμα)이다. 일부 영어 번역본은 1장 1절의 "솔로몬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 라는 구절에서 따온 '솔로몬의 노래' (Song of Solomon)라는 명칭을 붙였다.
〔저자와 저작 연대〕 1장 1절이 시사하는 바로는 솔로몬이 아가서의 저자처럼 보인다. 또 솔로몬의 이름이 여섯 번(1, 5 ; 3, 7. 9. 11 ; 8, 11-12)이나 언급되었고, '임금' 이라는 낱말도 세 번(1, 4. 12 ; 7, 6)이나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솔로몬이 이 책의 저자는 아니다. "솔로몬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 (1, 1)라는 구절에서 '솔로몬의' 는 노래의 저자를 표시할 수도 있겠지만, 노래의 대상 곧 '솔로몬에 관한 노래' 를 뜻할 수도 있다. 그리고 솔로몬의 이름이 나오는 어느 대목에서도 그가 직접 말을 하거나 노래를 하지 않으며, 이 대목들에서 솔로몬은 언제나 3인칭으로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아가서의 본문에 솔로몬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고 해서 솔로몬을 저자로 추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아가서에서 솔로몬은 저자의 필요에 따라 내세운 작품상의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나아가 솔로몬뿐만 아니라 그 밖의 어떤 구체적인 인물도 아가서의 저자로 확인할 길이 없다.
아가서의 저작 연대도 마찬가지이다. 솔로몬 시대에 쓰여지지 않은 것만큼은 확실하지만, 바빌론 유배 전후, 페르시아 시대, 심지어 그리스 시대까지 여러 가지 추정들을 한다. 오늘날 성서학계에서는 적어도 이 작품이 유배 이후에 나왔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한데, 이 견해는 언어학적인 관찰에 바탕을 둔 것이다. 아가서에 사용된 낱말이나 표현이 페르시아 시대나 그 이후 시대에 속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곳에서 히브리어의 옛 어휘나 표현도 감지할 수 있어서 언어학적 관찰을 시대 측정의 표준으로 삼기가 어렵다. 아마도 서로 다른 시대에 여러 저자들이 써 놓은 시들을 후대의 편집자가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책으로 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하나의 추정일 따름이다.
〔정경화〕 유대교나 그리스도교 모두 아가서를 구약의 정경으로 받아들인다. 히브리어 성서에서 아가서는 룻기 · 전도서 · 애가서 · 에스델서와 더불어 다섯 '두루마리' (מְכִלּרת) 또는 '축제 오경' 중 하나이다. 축제 오경이라는 명칭은 이 책들을 축제 기간에 읽었기 때문이다. 아가서는 과월절 축제 때에 읽었는데, 아가서가 구약성서 정경에 포함된 이유나 시기를 정확하게 규명하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1장 1절에 솔로몬의 이름이 나오고 아가 전편에 일관된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가 쉽게 주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로 이해될 수 있었기 때문에 정경에 포함된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하나 이 추측 역시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어떻든 유대교에서나 그리스도교에서 아가서를 정경에 포함시키는 것을 문제 삼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배 경〕 사랑을 주제로 삼는 시는 모든 문화권 안에서 모든 세대에 걸쳐 늘 있어 왔다. 그 가운데 아가서와 비교할 수 있는 사랑 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문학에서 가장 뚜렷하게 발견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운문 문학은 대부분 남신들과 여신들 사이의 사랑을 다루었다. 아카드어로 쓰여진 고대의 수메르 신화에서 겨울은 탐무즈(Tammuz)라는 신의 죽음을 뜻하고, 봄은 이 신이 애인인 이슈타르(Ishtar) 여신의 도움으로 다시 살아남을 뜻한다. 이슈타르는 죽어 사라진 탐무즈를 찾아 저승까지 내려가 마침내 그를 찾아낸 다음 서로 혼인한다. 신들 사이의 이 특별한 혼인을 성혼(聖婚)이라고 하고, 자연이 소생하는 봄을 이 성혼의 결과라고 한다. 이와 비슷한 신화들은 이집트를 비롯하여 고대 근동 전역에서 발견되며, 가나안에서는 이슈타르와 탐무즈가 아세라(Asherah)와 바알(Baal)로 대체된다. 성혼의 제의(祭儀)는 적어도 유다가 아시리아 제국에 예속되던 8세기의 므나쎄 임금 시대에 예루살렘의 경신례에 끼어 들었다고 추측된다(2열왕 21장 참조). 그리고 성혼의 주제와 관련된 몇 가지 요소들은 아가서의 표현과 내용에서도 비슷하게 발견되고 있다.
아가서처럼 수메르 문헌에서도 남성은 목자와 임금으로, 여성은 신부와 누이로 묘사되었다. 두무지(Dumuz)신의 역할을 하는 임금 슈-신(Sch-Sin)에게 바친 시에서 여인은 그를 생명과 풍산을 가져다 준 '오라버니' 로 칭송한다. 또 슐기 임금은 자기 누이 이난나(Inanna) 여신을 다음과 같은 말로 초대하는데, 아가서의 내용과 비슷하다. "나는 너와 함께 내 들로 가리라.···나는 너와 함께 내 정원으로 가리라." 여기서 신들의 사랑 이야기와 인간들의 사랑 이야기는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 전자가 후자에게 영향을 미쳤는가, 아니면 후자가 전자에게서 영향을 받았는가? 아마도 서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신들의 사랑을 묘사할 때에 인간적 사랑의 체험이 바탕이 된 반면에, 신들의 사랑 이야기는 인간적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동기로 작용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가서와 닮은 고대 이집트 문헌의 사랑 시들은 모두 기원전 14~12세기에 쓰여진 것들이다. 이 시들을 보면 아가서처럼 예찬 · 동경 · 육체적 매력 · 뽐냄 등의 주제가 등장하고, 만지고 보고 듣고 향기를 맡는 감각적 사랑이 강조된다. 둘 다 상대방에 대한 찬사가 때로는 너무 지나칠 정도로 넘쳐난다. 사랑하는 애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요 둘도 없는 존재이다. "여인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이여, 그대가 만일 모르고 있다면 양떼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양지기들의 천막 곁에서 그대의 새끼 염소들이 풀을 뜯게 하오"(1, 8). "나의 비둘기, 나의 티없는 여인은 오직 하나, 그 어머니의 오직 하나뿐인 딸, 그 생모가 아끼는 딸, 그를 보고 아가씨들은 복되다 하고 왕비들과 후궁들은 칭송한다네"(6 9).
그러나 고대 근동의 사랑 시들과 아가서가 서로 비슷한 주제나 표현들을 공유하게 된 것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둘 다 인간의 공통된 사랑 체험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다.
〔문학 유형과 구조〕 아가서가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이 노래의 문학 유형을 하나로 정확하게 규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가서는 남녀간의 사랑에 얽힌 감정들과 요소들을 표현한 다양한 시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현대 성서학계에서는 이 책에 드러난 소주제들을 일반적으로 갈망(1, 2-4), 예찬(1, 12-14), 회상(2, 8-17), 육체적 매력의 묘사(4, 1-7), 자랑(8, 11-12), 놀림(2, 14-15), 자아 묘사(1, 5-6) 등으로 분류하고있다.
일찍이 오리제네스(185~254)는 아가서를 하나의 드라마로 규정하였는데, 오리제네스의 이 드라마 가설은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19세기에 와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 하였다. 이 가설에 따르면 아가서는 여러 사람들이 등장하는 한 편의 드라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주인공이 몇 사람이고 누구인지는 해석에 따라 다르다. 어떤 학자는 이 드라마가 솔로몬과 어떤 처녀 사이의 사랑을 다루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솔로몬이 어떻게 이 여자를 예루살렘으로 데려갔는지, 여자에 대한 솔로몬의 사랑이 얼마나 애틋한 것인지가 이 드라마의 주요 내용이라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이 드라마의 주인공을 세 명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솔로몬 임금과 시골의 목자가 처녀의 사랑을 얻으려고 다투는데, 여자는 결국 처음 마음을 준 시골 목자의 사랑에 충실하기 위하여 솔로몬의 화려한 유혹을 뿌리친다는 것이다. 이처럼 드라마 가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서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아가서에 드라마의 특징인 갈등과 내용 전개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가서에 드라마적인 요소가 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이 책 자체를 드라마로 보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아가서의 구조에 관해서는 더욱 학자들의 동의를 끌어내기가 어렵다. 학자들은 이 책에 수집된 노래들 숫자를 적게는 6개에서 많게는 25개 이상까지 다양하게 추정하고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아가서의 구조는 내용을 되도록 쉽게 파악하기 위하여 임의로 만든 것이다. 이 구조의 기준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오간 대화이다. 대화의 내용이 끊어지고 다음 노래와 연결 지을 수 없을 때에는 새로운 노래가 나오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 구조는 본질적으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노래를 주도하고, 그 밖에 예루살렘의 아가씨들, 여자의 오빠들, 남자의 친구들이 이들을 거드는 형태로 되어 있다.
1, 2-6 : 도입부. 여자가 자기 애인을 몹시 그리워하면서 예루살렘의 멋쟁이 아가씨들을 대화에 끌어들인다.
1, 7-2, 7 : 남자와 여자의 대화. 여자가 남자에게 만나 주기를 청하고 남자가 이에 응답한다. 대화 중에 그들은 서로를 예찬한다.
2, 8-17 : 여자의 회상. 여자는 자기 애인이 찾아왔던 때를 회상하며 다시 자기를 방문해 주기를 바란다.
3, 1-5 : 부재와 재회. 여자는 예루살렘 아가씨들에게 자기가 어떻게 애인을 찾아 헤매다 발견하게 되었는지 설명한다. 애인의 부재와 재회는 연애 때에 흔히 등장하는 주제이다.
4, 1-5, 1 : 육체적 매력의 묘사. 남자는 여자의 머리에서 젖가슴에 이르기까지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여러가지 표상과 은유로 묘사한다.
5, 2-6, 3 : 여자와 예루살렘 아가씨들의 대화. 여자는 애인의 방문을 3장 1-5절의 연장처럼 회상한다. 여자의 애인은 또다시 사라지는데, 이번에는 여자가 그를 찾을 수 없다. 예루살렘 아가씨들이 그에 대해 묻고 여자는 애인의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묘사한다. 그러자 아가씨들도 같이 찾아 나서겠다고 한다. 여자는 애인을 완전히 잃은 것이 아님을 역설한다. 그는 자기 정원에 갔을 뿐이고 여자와 남자는 여전히 서로에게 속해 있는 연인들이다.
6, 4-12 : 여자에 대한 남자의 예찬. 여자의 아름다움은 어느 누구와도, 심지어 수많은 왕비와 후궁과 궁녀들과도 비교할 수 없다.
7, 1-8, 4 : 여자의 육체적 매력에 대한 찬사. 아가서에서 이 대목이 여체의 아름다움을 가장 적나라하게 묘사한 부분이다. 애인 몸의 아름다움을 한껏 표현한 뒤에 남자는 여자에 대한 그리움을 열정적으로 표현한다(7, 7-10). 그러자 여자는 남자를 들로 초대한다.
8, 5-14 : 부록과 같은 단편 시들. 이 대목의 백미이자 아가서 전체에서 가장 강렬한 표현은 6절의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정열은 저승처럼 억센 것"이다. 죽음 또는 저증(שְׁאוֹל)이 모든 생명체를 끈질지게 좇듯이 남녀간의 사랑도 그만큼 강렬하고 분명하게 서로를 추구한다.
〔해 석〕 아가서는 분명히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능적 사랑을 다룬다. 현대의 성서학계에서는 공통적으로 아가서의 문자적 의미가 모두 성적 사랑과 관련되어 있다고본다. 그렇다고 이 책에 표현된 남녀간의 사랑을 현대적 의미에서의 '성적 방종' 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아가서의 저자는 하느님이 처음 창조한 그대로의 남녀 관계를 긍정하고 인간의 성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 현자들의 지혜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그들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단일하면서도 순수한 성적 사랑을 높이 평가하였는데(잠언 5, 15-23), 이는 혼인을 사회적인 관점에서 이해한 그 밖의 성서 본문들과 대조를 이룬다. 이스라엘의 가부장적인 사회상을 반영한 이 본문들은 혼인의 목적을 종족 보존과 씨족이나 부족의 번영을 위한 가족과 재산의 결합, 자녀 출산으로 이해하였다. 여기에는 성적 사랑이 차지할 자리가 거의 없다. 그러나 아가서에는 성적 사랑 그 자체에 독자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아가서에 나타난 남녀 관계를 순수한 인간적 사랑으로 본 것은 18세기 이후부터였다. 그 이전까지 유대교에서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관계로,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리스도(또는 하느님)와 교회(또는 그리스도인 각자) 사이의 관계로 이해하였다. 이때 동원된 방법이 우유(寓喩, allegory)적 해석이다. 히브리어 성서의 아람어 역본인 타르굼(תּרְכוּם)은 아가서를 이스라엘 역사의 우유로 이해하였다. 곧 아가서에 묘사된 여자가 자기 애인(하느님의 표상)을 잃었다가 찾는 과정은 출애급에서 출발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왕정 제도를 수립한 뒤에 바빌론에 유배 갔다가 다시 회복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같은 견해가 히브리어 성서의 주석인 미드라시에서도 발견된다. 사실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관계를 곧잘 성적 사랑으로 표현하였다. 예언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충과 배반이 곧잘 창녀 짓으로 묘사되었고, 구약성서에서 성적인 사랑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보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 더 자주 사용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아가서는 예언서들처럼 남편과 아내 또는 남자와 여자를 하느님과 이스라엘로 분명하게 드러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성적인 사랑과 연계시킨 예언서의 전통에 길들여진 유대인들이 아가서에 묘사된 남녀 사이의 관능적 사랑을 하느님과 자기들 사이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우유적 해석에서 벗어나 문자적 의미로 아가서를 해석하게 된 계기는 멘델스존(M. Mendelssohn, 1729~1786)이 시도한 아가서의 번역과 주석이었고, 멘델스존 이래 문자적 해석은 많은 유대인 학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아 왔다.
그리스도교의 우유적 해석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은 오리제네스의 아가서 주석이었다. 그는 문자적 의미를 의식하면서도 이른바 사목적 관심에 이끌려 아가서의 남녀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그리스도인 각자)의 관계에 연결시켰다. 오리제네스의 우유적 해석을 교회 안에 확고히 정착시킨 그레고리오 1세 교황(590~604)도 오리 제네스처럼 아가서의 문자적 의미를 알고 있었으나, 영혼을 하느님께 들어 높이기 위하여 우유적 방법을 하나의 도구로 이용하였다. 구약성서 가운데 아가서가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중세에 들어와서였다. 12세기에만 아가서의 주석서가 서른 권이나 발간되었는데, 그중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1090-1153)가 남긴 아가서 강론집이 유명하다. 베르나르도에게 있어서 인간의 가장 위대한 체험은 사랑이었으므로, 그는 아가서를 '체험의 책' 이라고 불렀다. "사랑만이 그 자체로서 충분하다. 사랑은 그 자체로서 그리고 그 자체를 두고 만족한다. 사랑은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으며 그 자체가 보상이다. 사랑은 그 자체를 넘는 어떤 이유도 결과도 찾지 않는다. 사랑은 그 자체가 결실이요 목적이며 유용함이다.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랑할 따름이다" (《강론》 83, 4). 한편 가톨릭의 전통 안에서는 아가서를 동정 성모 마리아에게 적용시키려는 움직임이 늘 있어 왔다. (→ 구약성서 ; 성문서)
※ 참고문헌  임승필 역, 《룻기 · 아가 · 코헬렛 · 애가 · 에스델》, 구약성서 새 번역 4,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3/ A.S. Van Der Woude ed., The World of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82/ D. Senior ed., The Catholic Study Bible, New York · Oxford, Oxford Univ. Press, 1990/ R.E. Murphy, 《ABD》6, pp. 150~155. 〔丁太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