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타 (?~249/251?)

〔라〕Agat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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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타 성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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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타 성녀.

성녀. 동정 순교자. 축일은 2월 5일. 데치우스(249~251) 황제의 박해 때 순교한 것으로 여겨진다.
〔관련 문헌〕 교황 다마소 1세(366~384)가 성녀의 생애가 담긴 성녀 아가타 찬미가를 지었다고 하나 후대에 익명의 저자가 성인 축일 전례용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Damasi Epigrammata 75 ; PL 13, 403). 성녀와 관련된 오래된 기록으로 6세기에 베난시오(Venantius Fornatus)가 쓴 시가 있는데(Cam., ⅦI, 4, De Virginitate), 여기에서 그는 교회의 동정녀와 순교자들을 언급하면서 그중 하나로 아가타를 꼽았다. 또 7세기에 성 알델모(Aldhelmus, 639~709)와 9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성 메토디오(Methodius, +847) 등도 아가타 성녀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역사적 확실성은 없지만 아가타의 행적을 기록한 문헌으로 그리스어 판과 라틴어 판이 있는데, 라틴어 판이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이나 6세기 이전의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 판본에 역사적 진실이 담겨 있다 해도 후대에 윤색된 내용을 구분해 내기란 쉽지 않다.
〔생애 및 전설〕 전설에 따르면 아가타는 시칠리아의 부유하고 권세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 출생지가 팔레르모(Palemo)라고도 하고 카타나(Catana)라고도 한다. 팔레르모라는 주장은 6세기부터 나왔고, 카타나라는 주장은 그보다 더 오래된 기록에 의한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결심하였던 아가타는 철저히 동정을 지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남자들의 청혼을 모두 거절하였는데, 권력으로 아가타와 결혼하려는 귄시아누스(Quintianus)라는 집정관도 그중 하나였다. 데치우스 황제 박해 때 귄시아누스는 아가타가 그리스도인임을 알고, 그녀를 체포하여 끌어 오도록 하였다. 이때 아가타는 그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여, 모든 이의 주님이신 분, 당신은 제 마음을 아십니다. 당신은 저의 열망을 아십니다. 저의 모든 것을 가지소서. 저는 당신의 양입니다. 제가 악을 이기도록 하여 주소서" 라는 기도를 바쳤다. 이에 분노한 귄시아누스는 아가타의 굳은 신심과 의지를 꺾으려고 아프로디사(Aphrodisa)라는 여자 포주가 운영하는 사창가로 보냈다. 그러나 아가타를 유혹하여 타락시키려던 이러한 시도도 그녀의 굳건한 신앙을 이기지는 못하였다.
그 후 아가타는 권시아누스에게 다시 불려가 심문을 당하였으나 여전히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아 감옥에 보내졌다. 그럼에도 아가타가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굽히지 않자 귄시아누스는 온갖 고문을 가하였고, 이 모든 고통을 기쁨으로 견디어 내는 그녀를 보고 크게 격분하여 유방을 잘라 내는 잔인한 명령을 내렸다. 이에 아가타는 "잔인한 군주여, 내 몸을 이렇게 고문하고도 당신은 부끄럽지 않습니까? 당신은 여인인 어미의 젖을 빨지 않았던가요?" 하고 질책하였다. 귄시아누스는 그녀를 다시 감옥으로 돌려보내면서 어떠한 치료약이나 음식물도 주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환시를 통해 그녀는 하느님이 보낸 사도 베드로로부터 상처를 기적적으로 치유받았다고 한다. 나흘 뒤 아가타가 다 나은 것을 보고도 귄시아누스는 또다시 그녀에게 고문을 가하고 감옥에 처넣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가타는 "주님, 저의 창조주시여, 당신은 제가 어릴 때부터 저를 언제나 보호해 주셨나이다. 당신은 세상의 사랑으로부터 저를 택하시고 고통을 견딜 인내를 주셨습니다. 제 영혼을 받으소서" 라는 마지막 기도를 바친 뒤 숨을 거두었다.
〔공 경〕 아가타가 순교한 뒤에 팔레르모와 카타나 지역에서 그녀를 성녀로 공경하는 관습이 확산되었다. 그리고 530년경 카르타고 교회의 미사 경본에 아가타의 이름이 삽입되었으며, 5세기와 6세기의 《예로니모 순교록》(Martylogium Hieronymianum)과 고대 《카르타고 순교록》(Martylogium Carthaginiense)에는 2월 5일에 아가타가 순교한 것으로 수록되었다. 또한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에 의해 로마 미사 경본에도 수록되어 공경을 받게 되었다.
500년경 교황 심마코(498-514)가 로마의 아우렐리아가도(Via Aurelia)에 성녀 아가타 성당을 세웠는데, 붕괴되어 지금은 없다. 또 훗날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자신의 서한에서 언급한 로마 수부라(Subura)에 있는 성녀 아가타 성당은 5세기 초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서로마 제국의 장군 리치메르(F. Ricimer, ?~472)가 460년경에 모자이크 장식을 곁들여 증축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팔레르모에 성 막시모와 성녀 아가타 수도원을 세웠으며, 지금의 카프리 섬에 있는 성스테파노 수도원 성당에 아가타의 유해 일부를 안치하도록 명하였다. 한편 아가타 성녀의 유해 대부분은 카타나에 있었는데, 1040년경 시칠리아에서 사라센인들을 몰아낸 그리스의 장군에 의해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가 1127년에 다시 돌아왔다. 아가타를 매장한 지 1년 후 에트나(Ema) 산의 화산 폭발로 유황과 돌들이 분출하였을 때 그녀의 무덤에서 나온 베일이 마을 사람들을 위험에서 보호해 주었다는, 아가타의 유해와 관련된 기적 이야기가 이 지역에서 전해져 오고 있다. 이외에 1551년 투르크족이 말타 섬에 침략하였을 때 아가타 성녀의 전구로 위기를 모면한 뒤부터 이 섬의 수호 성인으로 공경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성녀 아가타는 처녀, 양치는 여자, 종 만드는 사람, 유리 제조공, 광부, 알프스 등반 안내자, 간호사들의 수호성인이자 불과 날씨의 수호 성인으로 알려져 있다. 14세기부터 쟁반에 담긴 잘려진 가슴과 양초, 화염에 휩싸인 집들을 배경으로 한 상본이 등장하였는데, 일반적으로 성녀 아가타의 성화에는 종려 가지 · 집게 · 잘려진 유방이 담긴 쟁반 등이 그려졌다. 남부 독일에서는 화재의 피해로부터 보호받기 위하여 성녀 아가타의 이름으로 빵 · 양초 · 편지 등을 축성하기도 한다. 시칠리아에서 성녀의 공경 예식 때 이루어지던 대중 축제가 이시스 여신 축제의 연장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 참고문헌  P.K. Meager · T.C. O'Brien eds., Encyclopedic Dictionary ofReligion, The Sisters of Joseph of Philadelphia, 1979/ (RGG) 31 P. Roche, 《NCE》 1, pp. 196~197/ J.P. Kirsch,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 1, trans. by M.T. Barrett, Robert Appleton Company Online Edition Copyright, 1999/ Angelo di Berardino ed., Encyclopedia of the Early Church, vol. 1, trans. by Adrian Walford, James Clarke & Co. Cambridge, 1992, p. 16/ Peter and Linda Murray, The Oxford Companion Art and Architecture, Oxford Univ. Press, 1996, p. 5. 〔崔爛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