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피토 1세 (?~536)

〔라〕Agapitus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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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피토 1세 교황.

아가피토 1세 교황.

성인. 교황(535~536). 축일은 9월 20일. 사도좌의 권위를 수호하고, 정통 교리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생애와 활동〕 로마의 유명한 가문 출신으로, 출생 연도는 알 수 없다. 성 요한과 바오로 성당의 신부였던 그의 아버지 고르디아노(Gordians)는 487~499년에 로마 교회 회의에 참석하였으며, 교황 심마코(498~514)를 반대하여 일어났던 폭동으로 502년 9월에 사망하였다. 유년 시절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성직자 양성 교육을 받은 아가피토는 로마 교회의 대부제가 되었으며, 교황 요한 2세(533~535)를 계승하여 535년 5월 13일 교황으로 즉위하였다. 그리스도 단성설을 옹호하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527~565)는 아가피토 1세 교황이 즉위하자 헤라클리오(Heraclius) 신부를 축하 사절로 보냈다.
교회 내 정책 : 즉위 후 아가피토 1세 교황이 처음으로 한 일은, 보니파시오 2세(530~532) 교황이 자신의 교황 즉위를 반대하고 대립 교황으로 디오스코로(Dioscorus, 530)를 내세웠던 로마의 성직자들에게 내린 파문을 무효화하고, 디오스코로의 명예를 복원시켜 준 일이었다. 그러나 이 유화 정책으로 전임 교황의 공적을 인정하지 않고 대립 교황 디오스코로를 지지한 그의 행동은, 훗날 동방 교회 및 서방 교회의 성직자들로부터 교황의 신앙적 정통성을 의심받고 논란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교황은 리에즈(Riez)의 주교였던 콘투멜리오소(Contumeliosus)의 사건에도 관여하였는데, 이 사건은 교황 요한 2세가 아를(Arles)의 주교 체사리오(Caesarius)로 하여금 콘투멜리오소를 수도원에 감금시키는 것으로 이미 종결되었었다. 그러나 535년 7월 18일에 아가피토 교황이 갈리아 교회에 서한을 보내 콘투멜리오소가 새 재판관으로부터 재심을 받을 수 있도록 아를의 주교 체사리오가 주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재심 결과 콘투멜리오소는 주교로서의 권한을 박탈당하고 본래의 교구로 복귀하였다. 또 교황은 반달족으로부터 해방된 아프리카의 주교들이 파견한 사절을 만나 그가 가져온 주교들의 서한을 받았다. 선임 교황도 받은 적이 있었던 그 서한은 아리우스주의자들의 성직 복귀 문제 등을 질의한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교황은 535년 9월 9일 답장을 보내면서 먼저 사도좌에 충실한 아프리카 교회에 대해 축복한 다음, 가톨릭 교계로 돌아온 아리우스주의자들의 성직 복귀를 금지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비롯하여 교황은 당시 성직자들을 분열시키고 반목시킬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는 여러 가지 사건들에 개입하였으며, 교회의 입장이나 공의회의 결정을 토대로 대처하면서 이에 반발하는 성직자들을 단죄하였다.
교육과 학문 연구에의 기여 : 교황은 아무리 훌륭한 정책이라도 학문으로부터 자양분을 공급받지 못한다면 그 정책은 악덕으로 변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교육 문제와 학문 연구 지원에 지대한 관심을 두었으며, 특히 젊은이들 교육과 당시 사회의 최상층에까지 만연되었던 무지(無知)를 근절시키기 위하여 공립 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카시오도로(Cassiodorus, 480~575)의 협조를 얻어 성서 연구를 위한 기관을 설립하고자 계획하였으나, 당시 이탈리아가 전쟁 중이었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의 사저를 도서관으로 변형시켰는데, 훗날 이 도서관은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에 의해 다른 장소에 설립되었다.
정치 문제와 교회 정통 교리 옹호 : 교황이 이러한 정책들을 시행하는 가운데 아말라순타(Amalasuntha, 498~535)의 궁정에서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다. 이탈리아 내동고트인들의 왕이었던 테오도리히(Theodorich, 455~526)의 딸 아말라순타는 왕이 사망한 후 그녀의 아들 아탈라리크(Athalaric, 516~534)가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였는데, 그녀는 이탈리아인들과 동고트인들의 연합을 촉진하기 위하여 아탈라리크에게 로마식 교육을 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에 반감을 가진 측근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혀 포기하였고, 534년 10월에 아탈라리크가 사망하자 사촌 테오다하트(Theodahad, ?~536)에게 왕의 칭호를 주는 동시에 자신이 실권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테오다하트에게 도리어 체포 · 추방되었고, 유배지에서 암살당하고 말았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565)는 아말라순타의 복수를 구실로 그리스 출신의 장군이며 전략가인 벨리사리우스(Belisarius, 500~565)에게 자신의 군대를 지휘하게 하여 시칠리아와 달마시아를 점령하였다. 벨리사리우스의 군대가 계속해서 이탈리아를 공격하려고 시도하자, 이에 불안을 느낀 테오다하트 왕은 교황에게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평화 협상을 해주도록 요청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교황은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비용을 직접 부담하였는데, 그 비용 마련을 위하여 베드로 대성전의 성작을 저당잡혔다고 한다.
교황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여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며, 한 앉은뱅이를 치유하는 기적을 행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교황은 전쟁 종식에 관한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였고, 단지 몇 가지 교회의 일을 처리하였을 뿐인데 교황이 이때 개입한 교회 문제는 그리스도 단성설에 관련된 것이었다. 교황이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였을 당시 그곳의 총대주교는 532년에 총대주교로 서임된 안티무스(Anthimus)였다. 그는 그리스도 단성설을 보다 발전시킨 에우티케스주의를 옹호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으므로, 교황은 그를 만나기를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총대주교의 자격이 없다고 비난하였다. 그러자 당시 황후였던 테오도라(Theodora, ?~548)의 보호를 받고 있던 안티무스와 그를 지지하던 고위 성직자들은 교황의 이러한 행동을 종교적 · 정치적 평화를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교황에게 결정적인 해를 입히려고 모의하였다. 황후의 사주를 받은 고위 성직자들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를 찾아가 교황이 네스토리우스주의자로서 이단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고발하였다. 황제는 처음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러한 고발이 반복되자, 과거의 여러 가지 사건들 때문에 교황이 오만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황제는 교황의 이단 증거를 확보하기 위하여 교황에게 여러 가지 교리에 관한 심문을 하였고, 교황과 대담하던 중에는 추방하겠다는 위협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위협이 교황을 꺾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교황은 황제를 질책하면서 안티무스를 심문하는 교회 회의를 개최할 것을 요구하였고, 테오도라의 후원을 받고 있던 안티무스를 비롯하여 그리스도 단성설자들을 추방할 것을 간청하였다. 이로 인해 536년 6월 2~6일 개최된 교회 회의에서 교황은 육화의 신비와 관련된 교리를 설명하면서 자신이 설명하는 교리의 정통성을 역설하였고, 이에 대해 안티무스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두 개의 본질이 존재할 수 없다는 그리스도 단성설적인 입장을 고수하면서 교황을 공격하였다. 회의 결과 교황은 안티무스의 파면장을 획득했으며, 정통파였던 메나스(Menas, +552)를 총대주교로 취임시켰다.
로마 성직자들이 가톨릭 황제의 지배를 받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 교황은 정통 신앙을 수호하도록 도와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편을 들었으나, 황제라 할지라도 평신도로서 교회 내에서 교리를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 후 교황은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콘스탄티노플에서 536년 4월 22일 사망하였는데, 테오도라 황후의 사주로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성대하게 장례식이 거행되었으며 그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536년 9월 17일 로마의 베드로 대성전에 안장되었다.
〔의 의〕 교황 아가피토 1세는 황제의 권한과 지역 교회들의 권위에 맞서 사도좌의 권위를 재건하고 칼체돈 공의회(451)에서 결정된 정통 교리를 재생시키고 확립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래서 교황은 탁월한 수완과 현명함으로 교회 문제들을 해결한 거룩한 사람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그리스도 단성설 ; 칼체돈 공의회)
※ 참고문헌  Histoire des Papes, Administration de Librairie, 1842, pp. 413~421/ G. Castella, Histoire des Papes, Zurich, Fraumunster, 1944, pp. 80~81/ Ch. Fraisse-Coué, Dictionnaire Historique de la Papauté, direc. de P. Levillain, Fayard, 1994, pp. 58~59/ J.N.D. Kelly, Oxford Dictionary of Popes, Oxford Univ. Press, 1996, pp. 58~59. 〔邊琪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