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고바르도, 리용의 (769~840)

〔라〕Agobardus Lugdunen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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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용의 대주교. 그리스도 양자설(adoptianismus)을 반대한 대표적인 신학자. 반유대교적인 저술을 남긴 정치 평론가.
〔생애와 활동〕 769년 스페인에서 태어나 무슬림들의 침략을 피해 782년에 갈리아 남부의 나르보네즈(Narbonnaise)로 이주하였으며, 792년 프랑크 왕국 카알 대제(Carolus Magnums, 768~814)의 특사로 나르본(Narbonne)과 우르겔의 서(Seo de Urgel) 지역을 순방하던 레이드라도(Leidradus, 798~814)를 따라 리용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804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813년 레이드라도의 보좌주교로 임명된 뒤 리용 시의 일에 적극 개입하였고, 신학과 전례에 관한 권위 있는 저술을 남겼다. 814년에 은퇴한 레이드라도의 뒤를 이어 2년 후인 816년에 리용의 대주교가 된 아고바르도는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고위성직자였으나, 콩피에뉴(Compiègne) 교회 회의(833)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루트비히 1세(814~840)를 파문하여 미움을 받았다. 그는 루트비히 1세에 대한 파문이 정당함을 밝히기 위해 다섯 편의 논문을 저술하였으나, 권력을 되찾은 루트비히 1세에 의해 자신의 주교좌에서 추방당하여 루트비히 1세의 아들이자 이탈리아의 왕인 로타르 1세(Lothar I , 822~855)와 함께 망명 길에 올랐다.
아고바르도가 추방된 후 834년에 루트비히 1세의 후원으로 리용의 대주교가 된 아말라리오(Amalarius, 775?~850/853?)는, 자신의 저서인 《직무서》(Liber officialis)의 방향에 따라 리용 교구에서 전례를 개혁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의 개혁 의지는 플로로(Florus, +860) 부제를 중심으로 아고바르도를 따르던 리용 성직자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아말라리오의 전례 개혁 의지와 사상은 835년 황제 대관식이 끝난 후에 개최된 티옹빌(Thionville) 교회 회의와 이듬해 열린 아헨(Aachen) 교회 회의에서 인정을 받았다. 이에 플로로 부제와 그의 지지자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반대 운동을 굽히지 않았고, 마침내 838년 퀴에르지(Quiery) 교회 회의에서 아말라리오의 개혁 사상이 단죄를 받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 인해 아말라리오는 대주교직을 박탈당하였고, 다시리용 교구로 복직한 아고바르도 대주교는 이곳에서 840년에 사망하였다.
〔사상 및 저서〕 그리스도 양자설의 배경과 비판 : 5세기 말 부르군트 왕조의 수도였던 리용은 534년 이후 프랑크 왕국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725년 사라센의 침공으로 파괴되었는데 카알 대제에 의해 복구되었다. 카알 대제는 일르 바르베(Ile Barbe) 수도원에 도서관을 설립하는 등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하는 데 열정을 쏟았다. 카알 대제와 그의 계승자들이 통치하는 동안, 리용의 주교들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여러 번 교회 회의에 초대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그리스도 양자설에 대해서 아고바르도가 뉘른베르크(Nürnberg) 출신이자 카알 대제의 사서인 레이드라도와 함께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우르겔의 펠릭스(Felix de Urgel, ?~816)가 나르본(788), 라티스본(Ratisbon, 792), 프랑크푸르트(Frankfurt, 794), 로마(799) 등의 교회 회의에서 그리스도 양자설을 단죄한 것에 대해 반발하자, 카알 대제는 나르본의 주교 네브리디오(Nebridius)와 아니안(Aniane)의 베네딕도 아빠스(750~821)와 레이드라도를 우르겔로 보냈다.
그들은 스페인에서 그리스도 양자설을 논박했고, 799년에는 펠릭스를 아헨 교회 회의에 출두시켰다. 이 교회 회의에서 펠릭스는 그리스도 양자설을 단죄하는 근거가 된 알쿠이노(Alcuinus, 732/735~804)의 이론에 승복하는 듯한 자세를 보여 자신의 교구로 돌아갈 수 있었으나, 완전히 승복한 것이 아니었다. 아고바르도는 비밀 회의에서 펠릭스의 그리스도 양자설을 단죄하였는데, 816년펠릭스가 사망하였을 때 그리스도 양자설에 대한 그의 신앙 고백을 담은 논문이 유작들 가운데서 발견되어 아고바르도의 판단이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아고바르도는 리용의 대주교가 된 후 그리스도 단성설의 몰락을 완결짓는 긴 논문을 저술하였다.
저서 : 아고바르도는 《우르겔의 펠릭스 교리 반박》(Liber adversum dogma Felicis Urgellensis), 유대인들을 비판하는 《유대인들의 오만에 대하여》(De insolentia Judaeorum)등과 같은 신학 저서들과 많은 정치 · 법률 · 전례 서적들을 저술했다. 또한 미신에 반대하는 글도 썼는데, 그 동안 그의 저서로 간주되어 왔던 《성화상에 관하여》(Liber de imaginibus)는 토리노의 클라우디오(Claudius, ?~827)가 저술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그가 주교좌에서 반포한 공식 문서들은 부제인 플로로와 공동 저술한 것들이다. 《영적 시편 낭독에 대하여》(De divina psalmodia), 《아말라리오를 반박하는 4권의 책》(Contra libros IV Amalarii)등이 플로로의 대표적인 저작이다. 825년 파리 교회 회의에 아고바르도가 참석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교황 에우제니오 2세(824~827)에게 청원한 성화상에 반대하는 교회 회의 문서를 작성하는 데는 분명히 참석하지않았다.
아고바르도는 저서들을 통하여 그리스도 양자설을 주장하는 이단에 맞서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지키는 데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당시 성행하던 지나친 성화상 숭배와 시죄법(試罪法, 끓는 물에 손을 담그는 재판법) 등의 풍속에 반대하여 많은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 그리스도 양자설 ; 아말라리오)
※ 참고문헌  P. Bellet, 《NCE》 1, p. 210/ H. Chirat, 《Cath》 1, pp. 225~226/1 Scheffczyk, 《LThK》 1,p. 204. 〔徐獻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