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로마의 동정 순교자. 축일은 1월 21일.
〔순교 행적〕 아녜스의 순교에 관한 기록 가운데 정확하거나 신뢰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다만 암브로시오(339?~397)의 《동정에 관하여》(De Virginibus 1, 2)와 《교회 직무에 관하여》(De Officilis 1, 41), 교황 다마소 1세(366~384)의 묘비, 프루덴시오(Prudentius, 348~395)의 《페리스테파논》(Peistuphan) 가운데 제14 찬미가, 찬양시<복된 동정녀 아녜스>(Agnes beate Virginis) 등에서 아녜스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특히 <복된 동정녀 아녜스>는 《아녜스의 순교 전기》가 나오기 이전의 것으로, 이 시를 쓴 시인의 서술 방식이 교황 다마소 1세와 흡사하지만 암브로시오의 글을 인용한 흔적이 보인다.
아녜스의 생애와 순교 과정 등을 기술하고 있는 이 기록들 가운데, 암브로시오와 교황 다마소 1세는 아녜스가 참수형으로, 프루덴시오는 화형으로, 그리고 <복된 동정녀 아녜스>에는 교살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순교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순교할 당시 아녜스의 나이는 12~13세 정도의 어린 소녀였다는 사실은 공통된 진술이다. 박해를 당한 시기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은데, 통상적으로 304년경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 황제의 박해 때라고 여기나, 교황 다마소 1세의 묘비를 근거로 데치우스(249~251) 황제의 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않은 때로 보기도 한다.
《아녜스의 순교 전기》는 다소 후대의 것으로, 두 개의 그리스어 판본과 한 개의 라틴어 판본으로 전해진다. 이 판본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보다 짧은 그리스어 판본이고, 이를 기초로 내용이 덧붙여져 라틴어 판본이 쓰여졌으며, 이를 번역한 것이 좀더 긴 그리스어 판본이다. 이탈리아 토리노의 주교 막시모(Maximus, 450~470)가 강론에서 라틴어 판본의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보아 5세기 초에 라틴어 판본이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설 및 생애〕 전해 오는 모든 순교 기록들을 기초로하여 6세기경에 보다 완전한 형태의 아녜스 순교 전기가 쓰여졌는데, 이 이야기에 따르면 아름다운 아녜스에게는 청혼하는 로마 귀족 청년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청혼을 해도 아녜스는 천상배필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순결을 서원하였다며 거절하였다. 그러자 구혼자들은 위협과 고문을 가하면 굴복하리라 믿고 아녜스가 그리스도인임을 고발하였다. 재판관은 처음에는 아녜스를 설득하려 하였으나,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배필은 없다며 의지를 굽히지 않자 점차 그녀를 위협하였다. 그렇지만 아녜스는 굳은 신앙으로 온갖 고문을 참아 받았다.
암브로시오의 기록에 따르면, 그 후 아녜스는 우상에게 향을 바치라는 강요를 받았으나 "성호를 긋는 것 외에 절대로 그녀의 손을 움직이게 할 수 없었다" 고 한다. 또 프루덴시오의 기록에 따르면, 재판관이 자신의 방법이 전혀 효과가 없자 그녀를 방탕한 난봉꾼들로부터 모욕을 당하게 하려고 사창가에 보낼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때 재판관은 "당신은 칼로써 나의 피를 더럽힐 수는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께 봉헌된 나의 육체를 절대로 더럽힐 수는 없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격분하여 아녜스를 공창으로 보내 사람들이 마음대로 그녀를 범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많은 젊은이들이 아녜스를 향해서 달려갔으나 한 명만 빼고 모두들 아녜스를 보고 어떤 두려움을 느껴 감히 그녀에게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그 한 명도 끝까지 아녜스를 범하려 하다가 하늘에서 어떤 섬광 같은 것이 내려쳐 눈이 멀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아녜스에게 데리고 가자 그녀는 그 남자의 시력과 건강을 치유해 주었다.
자신의 뜻이 좌절된 데 몹시 화가 난 재판관은 그녀를 참수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암브로시오는 아녜스가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이들 보다도 더 기쁘게 사형 집행장으로 갔다"고 전하고 있다. 그녀는 짧은 기도를 마치고 순교하였다.
〔공 경〕 유해 : 아녜스의 시신은 훗날 살라리아 가도(Via Salaria)가 된 노멘타나 가도(Via Nomentana) 근처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9세기 이전에 아녜스의 머리를 무덤에서 꺼내어 라테란 궁전의 중앙 제대에 안치하였는데, 1903년 4월 19일에 행한 조사에서 12세 정도 된 여자 아이의 머리로 판명되었다. 교황 비오 10세(1903~1914)는 로마의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의 아고네(Agone)에 있는 성녀 아녜스 성당으로 성녀의 유물을 이전하였다.
축일 기념과 신심 : 아녜스의 축일은 354년부터 고대 로마 달력인 《순교자 증언록》(Depositio Martyrum)에 삽입되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아녜스의 축일은 1월 21일이고 그녀의 무덤은 노멘타나 가도 근처에 있다고 하였다. 아녜스는 로마의 동정 순교자들 가운데 4세기경부터 가장 많은 공경을 받은 성녀였으며, 당시 교부들과 그리스도교 시인들은 아녜스 찬미가를 불렀고, 고문을 받으며 보여 준 영웅적인 용기와 끝까지 지켜 낸 동정성을 칭송하였다. 암브로시오와 아우구스티노(354-430) 외에도 투르의 마르티노(316?~397)는 아녜스를 각별히 공경하였으며,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79~1471)는 자신의 저술에서 아녜스 성녀의 전구를 통해 받은 많은 기적들과 은총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아녜스의 동정성은 성모 마리아와 성녀 테클라(Thecla, 1세기)와 함께 높이 공경받고 있다.
성당과 상본 : 콘스탄틴 대제(306~337)의 딸 콘스탄시아(Constantia)가 358년경에 아녜스의 묘지 위에 산타 코스탄자(Santa Costanza) 성당을 세워 봉헌하였으며, 교황 심마코(498~514)가 이 성당을 복원하였고, 7세기경에는 교황 호노리오 1세(625~638)가 현재의 모습으로 완전히 새롭게 재건하였다. 이 성당에는 화염 속에서 성녀 아네스의 발 밑에 칼이 놓여 있는 모습의 모자이크화가 있고, 제대 대리석 위에는 성녀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6세기경부터 성녀 아녜스의 상본에 새끼 양을 팔에 안고 있거나 발 밑에 두고 있는 모습이 그려졌는데, 새끼 양은 그녀의 순결한 무죄를 상징하였다. 그래서 아녜스 축일 때 성 아녜스 성당에서는 두 마리 새끼 양을 축복하고 그 양에서 깎은 털과 다른 양털을 섞어 교황이 관구장 주교에게 수여하는 팔리움(pallium)을 만든다.
※ 참고문헌 P.K. Meager · T.C. O'Brien eds., Encyclopedic Dictionary of Religion, The Sisters of Joseph of Philadelphia, 1979/ M.J. Costelloe, 《NCE》 1, p. 204/ D.H. Farmer, The Oxford Dictionary of Saints, Oxford, 1987, pp. 6~71 Enzo Lodi, Saints of the Roman Calendar, trans. by Jordan Aumann, 1992, pp. 19~21. 〔崔爛瓊〕
아녜스 (?~304?)
〔라 · 그〕Ag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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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네스 성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