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관의 붕괴, 목적 의식과 이상을 상실함으로써 개인과 사회에 나타나는 불안정한 상태.
〔어원및 개념〕 아노미는 그리스어 명사 '아노미아' (ἀνομία)에서 파생되었으며, 아노미아는 '법이 없는' (without law)이라는 의미의 형용사 '아노모스' (ἄνομος)에서 파생된 것이다. 고대에 아노미아라는 개념은 과도한 폭력 · 과시 · 무자비함을 의미하였는데, 이러한 특성들은 정상적이고 정도에 맞는 인간 행동과는 구별되는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아노미적 조건은 신화적인 괴물과 비인간적(non-human) 또는 반인간적(semi-human)동물에 적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노미는 시대와 학자들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고 사용되어 왔다. 에우리피데스(Euripides, 기원전 484?~406)는 아노미를 신에 대한 불경(不敬)으로 이해하였고,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427~348/347)은 무절제와 무질서로 해석하였다. 또 구약성서에서 아노미는 죄와 악행을 의미하였으며, 신약성서에서 아노미의 개념은 바오로의 서한에 잘 드러나 있는데 여기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율법을 뜻하였다. 근대 영국에서는 아노미가 공식적인 법의 위반이나 불법 행동을 뜻하였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켐(E. Durkheim, 1858~1917)은 아노미를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인간의 조건으로 분석한 반면에, 같은 시대의 프랑스 학자 귀요(Guyau)는 근대인의 긍정적인 특성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현대의 사회학자와 종교학자들은 "인간의 열망에 대한 문화적 규제의 부재", "신앙체계의 혼란과 갈등" , "문화적 목표와 제도화된 수단 간의 괴리" "초월적 존재에 대한 신앙의 약화" "집합주의적 도덕성이 개인주의적 도덕성으로 이행해 가는 과정에서 윤리 의식의 혼란 및 세속화 현상" 등의 다양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아노미 개념의 다의적인 해석과 사용은 각 시기의 사회적 조건과 그에 대응하는 지적 · 종교적 · 문화적 반응과 쟁점들을 반영하는 것이다.
〔근 · 현대사적 의미〕 아노미 개념은 근 현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학문적 차원에서 심도 있게 탐구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아노미 이론의 발전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학자는 뒤르켐과 머턴(R.K. Merton, 1910~ )이었다.
뒤르켐의 주장 : 근대적 의미에서 아노미에 관해 본격적으로 연구에 착수한 사람은 뒤르켐이었다. 그의 사상 체계는 상당 부분 그리스도교 전통의 영향 속에서 구축되었고, 그의 아노미 개념도 바로 그 세계관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뒤르켐의 아노미에 대한 묘사는 상당 부분 종교적인 색채를 내포하고 있다. 아노미는 도덕성의 양극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모든 도덕성의 모순" 이다. 인간의 본성은 아노미적이고 비이성적이며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반면에, 사회는 규범 · 합리성 · 만족 · 이타주의를 제공하는 원천이다. 뒤르켐은 《분업론》(De la Division du Travial Social, 1893)의 두 번째 서문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갈등과 여러 가지 무질서의 원인이 아노미 상태라는 점을 밝힐 것이다" 라고 기술하였다. 기원전 1세기에 쓰여진 쿰란(Qumran) 문서에는 "탐욕과 불의와 불경과 거짓, 그리고 오만과 허영 등은··아노미아의 영혼에 속하는 것이다. (세상은) 아노미아의 권세에 의해 악행으로 이끌려 간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두 진술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점이 존재한다. 쿰란 저술가들에게는 아노미아가 어둠의 왕국에서 나온 산물이었던 것처럼, 뒤르켐에게 있어서 아노미는 개인의 탐욕과 이기심으로부터 나온 세속과 현세의 산물이었다. 사회로부터 선과 미덕과 지혜와 정의가 나오는 한편, 개인으로부터는 악행과 불의 즉 아노미가 나온다. 뒤르켐은 《분업론》의 서문에서 "아노미가 악(evi)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응집성(cohesion)과 규칙성(regularity)이 없이는 존립할 수 없는 사회가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 도덕적 · 법률적 규제는 따라서 기본적으로 사회만이 느낄 수 있는 사회적 필요를 반영하는 것이다" 라고 피력함으로써 아노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급진적 윤리관에 정초시키고 있다.
그에 따르면 사회는 도덕적 규칙의 주된 원천이며, 아노미는 사회의 부정이므로 동시에 모든 도덕성의 부정인것이다. 도덕적인 것이건 법률적인 것이건 모든 사회적 규칙의 이완은 아노미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분업론》의 결론에서 뒤르켐은 이 점을 분명히 하였는데, 즉 "도덕성은 집단에의 유대에 기초한 것이며, 그 유대가 달라짐에 따라 도덕성도 달라진다. 그러므로 인간은 오직 그가 사회 속에 생존하기 때문에 도덕적인 존재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궁극적으로 뒤르켐의 사상에는 개인의 도덕적 규칙의 원천으로서의 사회가 하느님을 대신하고 있다. 그는 또 저서 《도덕 교육론》(Moral Education)에서 설명하기를, "(신과 사회의) 평행이 그토록 완벽하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이미 신은 집합체의 상징이라는 점을 증언해 주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도미니크 라 카프라(Dominick La Capra)는 뒤르켐에 관한 저서에서, 뒤르켐은 "모든 도덕성과 사회적 연대를 설명하기 위하여 의사(擬似) 종교적 기초가 필요함"을 강조하였다고 기술하였다. 이처럼 뒤르켐의 아노미 개념은 그리스도교적 전통에 입각한 종교적 함의를 지닌 것이었다.
머턴의 주장 : 뒤르켐의 아노미 관념이 명백히 종교적 주제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면, 머턴은 뒤르켐의 아노미 개념을 소피스트 철학과 같은 비종교적인 전통과 연결시켰다. 그의 아노미 이론은 무엇보다도 근 · 현대의 인본주의적 전통에서 태동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에 따르면 아노미는 문화적으로 승인된 목적과 이 목적을 쟁취하기 위한 합법적인 수단 사이에서 발생하는 괴리 내지 분열을 의미하였다. 조직에 순응하지 않는 개인에 대해서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 통상적인 사회의 생리이다. 이러한 사회 구조에 위치한 개인들이 문화적으로 승인된 목적을 거부하거나 경시하게 되면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아노미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머턴의 주저 《사회구조와 아노미》(Social Structure and Anomie)는 뒤르켐의 《자살론》(Le Suicide, 1897)에서 영향을 받았다. 머턴은 불안정한 사회 질서, 즉 뒤르켐이 '아노미' 라고 한 사회적 상황이 일탈 행동을 야기시킬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급작스러운 경기 침체나 경기 호황 혹은 급속한 산업화 등이 자살률을 증가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나타나는데, 전통적 사회 질서가 붕괴되는 이러한 아노미 상태에서 자살과 같은 일탈 행위가 나온다는 것이다. 아노미 상황은 사회에 따라, 또 같은 사회라도 집단에 따라 다르게 표출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일탈 행동의 비율도 다르다.
머턴은 아노미를 사회적으로 규정된 목표와 구조적으로 목표 달성이 가능한 기회의 괴리(disjunction)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성공을 문화적인 목표로 삼고 있는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수단이 일부 사람에게만 제한된다면 일탈 행동이 만연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머턴은 이와 같은 불균형의 조건에서는 "합법적이건 비합법적이건 기술적으로 가장 실현 가능한 수단이 제도적으로 지시된 행동보다 더 선호된다. 이러한 과정이 계속되면 사회의 통합은 약화되고 아노미가 발생하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즉 목표가 강조되는 형태의 문화적 목표와 제도화된 수단 간의 불균형에서 아노미가 야기된다는 것이다. 머턴은 문화적으로 규정된 성공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는 사회 구조 내에서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따라 순응(conformity) · 개혁(innovation) · 의례주의(ritualism) · 도피주의(retreatism) · 반항(rebellion) 등 5가지의 적응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뒤르켐과 머턴의 주장 비교 : 머턴의 이론은 아노미의 경험적 근거와 도구적 관념에 기울어져 있는 인본주의적 전통에 기초해 있다. 그것은 뒤르켐의 초월주의적 도덕 철학을 벗어나 과학적이고 가치 자유적 탐구라는 주류 속에 합류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의 아노미 개념은 기존 기회 구조의 부적절성과 더불어 금전적 성공 목표에 대한 과도한 강조의 모순된 결과의 해명에 활용되고 있다. 따라서 아노미의 문제는 문화적 목표가 적절한 것이냐 아니냐의 가치적 ·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목표와 제도화된 수단 간의 불균형으로서 사회 과학적인 방식으로 접근되고 있는 것이다.
뒤르켐은 사회가 개인에 대해 신과 같이 군림하는 종교적 실체이며, 신적 실체로서의 사회와 사악한 적으로서 신과 같은 사회에 반기를 든 행위를 아노미라고 하였다. 반면에 머턴의 경우 사회는 개인과 문화의 관계로서 존재할 뿐이고, 이는 절대자의 자리에 인간이 있는 인본주의적 전통과 종교의 세속화 과정이 맞물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근 · 현대사적 배경을 지닌 이 두 가지 전통은 모두 종교적 관점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종교 문화와 아노미〕 아노미는 현대 한국 종교의 실상과 위기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필수적인 사회학적 · 종교학적 개념이다. 현대의 한국 사회는 특히 196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 · 도시화 등의 사회 변화를 경험하면서, 전통적인 윤리 체계가 해체되는 가운데 새로운 시민 사회의 윤리가 확립되지 못하여 일종의 윤리적 공백 상태를 맞고 있다. 이른바 무규범성(nomlessness)의 현상을 빚고 있으며, 급속한 공업화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물질적 성공의 목표를 추구하게 만들었다. 또 그와 같은 목표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편법주의적 행동도 만연되고 있고, 이러한 사회의 변동과 함께 교회도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특히 1980년대 중반 이후 교회가 급성장하면서 초창기 지역민을 기반으로 출발했던 교회는 외부로부터 모여드는 사람들로 인해 지역성이 퇴색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조직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교회는 행정적인 관료 체계를 정교히 하고 새로운 직무와 기능들을 양산해 내었다. 반면에 초창기에 고락을 함께했던 '신앙인' 들 가운데 중산층 수준의 경제력과 교양을 갖추지 못한 이들은 중산층들과 성직자들로부터 소외되기 시작되었다. 교회의 대형화와 중산층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직의 관료화 속에서 신자들은 원초적인 종교 체험 열망을 충분히 수용하지 못한 채 감정적으로 의지할 유대를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방향 감각까지도 잃어버렸다. 이는 종교적 아노미 상태에 빠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때 신자들은 정신적인 도피처를 찾게 되고, 그곳에서 천년 왕국의 꿈을 기다리며 구원의 순간을 기다린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신종교의 발생은 예정된 것이며, 이러한 종교는 좌초된 종교 체험 욕구를 채워 줄 수 있는 새로운 신념 체계로서 필연적으로 요청될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의 신종교가 500여 개를 넘는 사실은 단적으로 한국 종교 문화의 아노미 지수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에 들어와서 '국제 통화 기금' (IMF) 구제 금융 여파와 사회적 불안정 등이 대두되면서 보편적 가치와 공공 선(公共善)보다는 개인의 건강과 안녕 및 심리적 안정 등에 집착하는 대체 종교(alternative religion) 현상이 크게 늘고 있다. 기(氣)나 명상 · 요가 · 선(禪) · 도(道) · 초월적인 수행 방식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어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 소외 계층이 주류를 이루었던 예전과는 달리 사무직 근로자나 중산층 등이 신종교 운동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전세계가 정보 통신의 기술로 이질적인 배경을 가진 다양한 사회가 '지구촌' 으로 압축되면서 외국 신종교의 유입도 늘어나고 있으며, 성직자나 종교 의식, 의례 공간이 없는 '사이버 교회' (cyber church)까지 등장하고 있다.
이 같은 신종교 발생의 새로운 현상은 불교(중산층률 50.7%), 프로테스탄트(중산층를 66.6%), 천주교(중산층률 76.1%) 등 기성 종교들의 중산층화에 따른 성장률 둔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나왔다. 기성 종교가 장년층 이상의 기성 세대와 중산층의 욕구에만 부응하다 보니 여러 계층의 욕구를 고루 충족시켜 주지 못해 성장률이 둔화된 반면, 종교 아노미 현상이 심화되면서 다양한 신종교 운동들이 양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 뒤르켐, 에밀 ; 신종교 ; 자살)
※ 참고문헌 W. Heitmeyer · O. Backes · R. Dollase eds., Was treibt die Gesellschaft auseinander?, Frankfurt, Suhrkamp Verlag K.G., 1997/ C.Herbert, Culture and Anomie : Ethographic Imagination in the Nineteenth Century, Chicago, Univ. Of Chicago Press, 1991/ C. Sand, Anomie und Identität? Zur Wirklichkeitsproblematik in der Prosa von C.F. Meyer, Stuttgart, Akademischer Vlg Stgt, 1980/ Dominick La Capra, Emile Durkheim Sociologist and Philosopher, Ithaca, Cornell Univ. Press, 19721 E. Durkheim, The Division of Labor in Society, trans. by G. Simpson, New York, The Free Press, 1893/ 一, Suicide, trans. by J.A. Spaulding · G.Simpson, New York, The Free Press, 1897/ 一, Moral Education, trans. by E.K. Wilson · H. Schnurer, New York, The Free Press, 1925/ R.K.Merton, Social Structure and Anomie,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3 (June, 1959), pp. 672~682/ 노길명, 《한국 신흥 종교 연구》, 경세원, 1996/ 윤승용,《현대 한국 종교 문화의 이해》, 한울, 1997. 〔成始政〕
아노미
〔영〕anomie, ano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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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종교 아노미 현상이 심화되면서 다양한 신종교들이 양산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