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체토 (?~166?)

〔라〕Anice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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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체토 교황.

아니체토 교황.

성인. 교황(154/155~166?). 축일은 4월 17일.
〔생애와 활동〕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에 따르면, 아니체토는 출생 연도는 알 수 없지만 시리아의 에메사(Emessa)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 후 교황 비오 1세(142~154/155?)의 후계자로 선출되어 약 11년 동안 교황직을 수행했는데, 예로니모(Hieronymus Eusebius, 341?~420)는 그가 교황에 즉위한 연도를 로마 제국의 황제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 138~161)의 재위 18년째인 155/156년으로 기록했다. 리용의 이레네오(Irenaeus, 130~200)와 에우세비오(Eusbius Caesariensis, 260?~339)는 이집트 출신의 그노시스주의자 발렌티누스(Valentinus)가 140년경 로마로 가서 아니체토가 교황직에 있을 때까지 활동하였다고 하였고, 그노시스주의를 논박하는 작품을 쓴 시리아의 학자이자 역사학자 헤제시포(Hegesippus, ?~?)도 로마에 와서 아니체토의 사저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고 한다. 엘레우테리오 교황(174~189?)은 아니체토의 부제였다. 이 밖에도 순교자 유스티노(Justinus, 100?~165?)와 이단자 마르치온(Marcion, ?~160?)이 그 당시 로마에서 활동하였다.
스미르나(Smyma)의 주교 폴리카르포(Polycarpus, 69~155)는 155년경 로마로 와서 교황과 교회의 여러 문제, 특히 부활 축일의 날짜에 관해 논의하였다. 소테르 교황(166~174?) 이전까지 로마 교회에서는 예수 부활 대축일의 날짜를 따로 정해 기념하지 않고 유대인들의 과월절 당일 일요일 또는 과월절 다음 일요일에 거행하였다. 반면에 소아시아 지역의 여러 교회에서는 유대인들의 과월절 전날인 니산(Nisan) 달 14일에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였다. 폴리카르포는 서방 교회의 관습과는 달리 니산 달 14일을 예수 부활 대축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14 일파' (quartodecimani)의 입장이었는데, 교황과 논의하여 이 같은 동방 · 서방 교회의 부활 축일을 통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서로 상대방의 관행을 존중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에우세비오는 그들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그들(폴리카르포와 아니체토)은 여러 문제에 있어 사소한 의견 충돌이 있었지만, 이러한 매우 중요한 문제에서 서로 논쟁하지 않고 곧 화해하였습니다. ··· 그들은 공동체성을 유지하였습니다. 아니체토는 폴리카르포를 존경하였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교회에서 성찬 전례를 거행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으며, 온교회는 평화를 유지하였습니다. 그 관습을 지키는 교회도, 그 관습을 지키지 않는 사람도 평화를 유지하였습니다"(《교회사》 5. 24, 16-17).
교황 아니체토는 166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연대 교황표>에는 교황이 순교하여 바티칸 아니면 갈리스도 카타콤바에 묻혔다고 전하나 그가 순교하였는지는 불확실하다. 반면에 에우세비오는 아니체토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Marcus Aurelius, 161~180)의 재위 8년째인 168년에 사망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교황 아나글레토(79~90/92?)가 바티칸 언덕에 사도 베드로를 위해 세웠다고 알려진 묘지 기념비는 아니체토 교황이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에 행해진 베드로 대성전의 지하 발굴에서 2세기 후반에 이 기념비가 세워졌음이 밝혀졌다.
〔의의와 영향〕 폴리카르포가 교황 아니체토와 교회의 여러 현안들을 논의하기 위하여 로마에 간 것은 교회사적, 특히 교회 일치의 문제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후에도 계속 이른바 '부활 축일 논쟁' 에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서로 의견이 일치되지 않자, 교황 빅토르 1세(189~198/199?)는 전세계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부활 축일을 춘분 이후 첫 만월 다음에 오는 일요일로 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소아시아의 신자들은, 그전에 폴리카르포와 교황 아니체토가 이에 관해 합의를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교회의 일치와 평화를 유지하려 노력하였다는 점을 거론하였다. 또 리용의 이레네오도 교회의 일치와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우선임을 강조하며 교황 빅토르 1세로 하여금 그 평화를 유지하도록 권고하였다. 이로써 이 논쟁은 궁극적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제1차 니체아 공의회(325)에서 니산 달 14일에 행하는 부활절 관습을 금지시킴으로써 이 관습의 실행은 실질적으로 점점 더 약화되었다.
(→ 부활 축일 논쟁 ; 폴리카르포)

※ 참고문헌  H.R. Drobner, Lehrbuch der Patrologie, Freiburg · Basel · Wien, 1994/ M.P. McHugh, Encyclopedia of Early Christianity, vol. 1, Everett Ferguson ed., Garland Pub. Inc., New York, London, 1997, p.56/ E.G. Weltin, 《NCE》 1, p. 544/ 에우세비오, 《교회사》 4~5, 성요셉출판사, 1985/ 전달수, 《교황사》, 가톨릭출판사, 1996, pp. 23~24.〔河聖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