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달베르토, 브레멘의 (1000?~1072)

〔라〕Adalbertus Bremen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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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멘-함부르크(Bremen-Harmburg)의 대주교. 독일 황실의 고문. 북부 슬라브인과 스칸디나비아인들의 선교 활동에 헌신한 아달베르토의 생애에 대해 가장 자세히 나와 있는 책은 아담(Adam von Bremen, +1085)이 쓴 《함부르크 교회 주교의 업적》(Gesta Hammaburgensis ecclesiae pontificum)이다.
〔생애와 활동〕 1000년경 투린지아(Thuringia)에서 프리드리히(Fiedrich von Goseck) 백작과 바이마르(Weimar) 백작 가문의 아네스(Agnes) 사이에서 태어나 할버슈타트(Halberstad)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그곳 주교좌 성당의 참사회 회원이 되었다가 1032년에 주임 신부가 되었다. 그리고 독일 왕 하인리히 3세(1039~1056)에 의해 이탈리아 대사로 활동하던 중, 황제의 서임으로 1045년에 브레멘-함부르크 대교구의 대주교가 되었다.
아달베르토는 황실의 후원 아래 북부 슬라브인과 스칸디나비아인들을 개종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의 노력으로 덴마크는 브레멘-함부르크 대교구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많은 선교사들이 아이슬란드 · 그린란드 · 오크니 제도 핀란드 등지로 선교를 떠났다. 또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1060년에 발트 해 연안의 메클렌부르크(Mecklenburg)와 라체부르크(Ratzeburg)에 슬라브인들을 위한 교구들이 설립되어 브레멘-함부르크 대교구에 속하였다.
1046년에 하인리히 3세를 수행하여 수트리(Sutri) 교회 회의에 참석한 아달베르토는 교황좌에 오르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자신의 친구인 밤베르크(Banberg)의 주교 수이드거(Suidger)를 후보로 추천하였다. 그가 곧 교황 글레멘스 2세(1046~1047)였다. 아달베르토가 이를 거절한 것은 함부르크의 주교좌와 유럽 북부 지방을 포괄하는 거대한 대교구좌를 관할하고 싶어서였는데, 이러한 그의 꿈은 좌절되었고 대신 북유럽의 복음화를 위한 교황 특사로 임명받았다. 그리고 1053년에 교황 레오 9세(1049~1054)에 의해 북유럽 지역의 교황 대리로 임명되었다.
한편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왕들은 자신들의 국가 내에있는 주교들을 대주교로 서임받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또 덴마크의 왕 스벤 2세(Svend II Estridsen, 1047~1076)는 하인리히 3세와 교황 레오 9세에게 자신을 대주교에 임명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요청은 독일의 입장에서 볼 때 200년 간의 복음화 활동으로 얻은 결실을 내어 주는 것으로 함부르크 영토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이 문제를 결정하는 데에는 아달베르토의 동의가 필요하였다. 이때 아달베르토는 북부 지역의 대주교좌를 관할하는 자신의 꿈이 실현되도록 한다는 조건하에서 동의하였으나, 교황(1054)과 황제(1056)의 잇따른 사망으로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황후인 아네스(Agnes von Poitiers)가 섭정하는 동안 아달베르토는 황실 내의 영향력을 상실하였고, 어린 나이의 독일 왕 하인리히 4세(1056~1106)는 쾰른의 대주교 안노 2세(Anno Ⅱ, 1056~1075)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아달베르토는 하인리히 4세의 교육을 계속해서 맡음으로써 결국 하인리히 4세의 신뢰를 받게 되었고, 황실에서 안노 대주교의 영향력은 점차 소멸되었다. 아달베르토는 대교구좌를 위한 대단한 열의와 황제를 섬기는데 있어 온갖 희생을 감내하는 열성과 개방적이고 정직한 활동으로 황실의 인정을 받았으며, 독일 정치에 있어서도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하인리히 3세의 충실한 고문 역할을 한 데 이어 하인리히 4세의 믿음직한 보호자 역할을 한 그는, 1064~1066년에는 실질적으로 독일 통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를 시기하고 적대시하던 귀족들의 음모로 1066년에 황실에서 추방되고 그를 대신하여 다시 쾰른의 안노 대주교가 브레멘-함부르크 대교구를 관할하며 황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는 아달베르토의 관할 교구가 경제적 · 종교적 · 정치적으로 발전되는 것을 저지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복음화의 정체가 이어지고 이교가 극심해지자 아달베르토의 복귀가 강력하게 거론되었고, 마침내 1069년 아달베르토는 황실로 복귀하였다. 1072년 3월 12일 아달베르토는 독일 중북부에 있는 도시 고슬라르(Goslar)에서 사망하였다. (→ 독일)

※ 참고문헌  R. Kay, 《NCE》 1, p. 112/ F.M. Rudge,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 1, Robert AppletonCo., 1907/ P. Johanek, 《LThK》 1,pp.128~129/ H. Chirat, 《Cath》 1, p. 123. 〔徐獻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