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 17세기 프랑스 얀센주의 신학자. '대(大) 아르노' (Le Grand Arnauld)라고도 불린다.
1612년 2월 6일(혹은 8일) 프랑스 파리에서 12명의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당대의 명망있는 변호사였다. 법률 계통에서 유명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던 그의 가문은 얀센주의와 얀센주의의 본거지인 포르루아얄(Port-Royal) 수녀원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17세기 프랑스와 유럽 교회사에 미친 영향도 크다.
이러한 가문의 배경 못지않게 아르노의 가정 환경은 유복하였으나, 7세 때 아버지를 여읜 뒤 그는 어머니와 누나 앙젤리크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다. 아르노는 이 두 사람을 통하여 얀센주의자인 생 시랑(Jean Dubergier de Hauranne Saint-Cyran, 1581~1643) 아빠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앙젤리크는 포르루아얄 수녀원에서 수녀들을 지도하면서 엄격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법학을 공부하려던 아르노는 어머니와 누나를 비롯하여 생 시랑 아빠스의 강력한 요청으로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얀센(C.O. Jansen, 1585~1638)의 저서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1640)가 출간되기 전인 1635년에 칼뱅 대학에서 은총에 관한 논문을 쓴 그는, 이 논문에서 '순수' 와 '타락한 본성' 을 구분하고 은총의 유효성에 대해서도 거론하였다. 이러한 그의 논문이 얀센의 《아우구스티노》와 유사하다고 해서 얀센 저서의 서곡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1638년부터 생 시랑의 영적 지도를 받기 시작한 아르노는, 1641년에 사제 서품과 소르본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그의 학위 논문은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와 생 시랑으로부터 사상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1643년에 생 시랑이 사망하자 아르노는 프랑스 얀센주의의 지도자가 되었고, 소르본 대학에서 교수와 신학 논쟁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1656년 소르본 대학에서 강제 퇴임되었다.
아르노는 자기의 전 재산을 포르루아얄 수녀원에 기증한 뒤 극히 필요한 만큼만으로 생활하였는데, 얀센주의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심했기 때문에 1644~1648년과 1656~1668년에는 숨어 지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그는 부유하고 저명한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1679년 프랑스 왕이 포르루아얄과 얀센주의를 탄압하자 벨기에로 망명하였으며, 브뤼셀에서 1694년 8월 6일 사망하였다.
〔사상과 저서〕 아르노는 다음과 같은 신학적인 입장때문에 당대 얀센주의의 거두로 주목을 받았다. 첫째, 그는 영성체를 자주 하는 것을 반대한 생 시랑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그는 엄격주의에 가까울 정도로 초대 교회의 이상과 교부들의 가르침과 엄격한 수련을 주창하였는데,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덕행이 뛰어난 사람들만이 성체성사를 받을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빈천시오 아 바오로(Vincentius a Paulo, 1581~1660)는 당시 신자들의 영성체 빈도가 현저하게 감소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둘째, 얀센의 저서 《아우구스티노》가 1642년에 교황 우르바노 8세(1623~1644)로부터 단죄를 받으면서 일어난 논쟁에서 그가 보인 반응 때문이다. 파리 대학 신학부의 아베르(I. Habert)가 파리 노트르담 주교좌 성당에서 한 강론에서 얀센의 저서를 비난하자, 아르노는 <얀센에 대한 변론>을 통하여 얀센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이에 코르네(N.Corne)가 얀센의 《아우구스티노》에서 일곱 가지 명제를 뽑아 이 주장이 오류라고 비난하자, 아르노는 논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얀센이 공격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아우구스티노 자신이 비판을 받는 격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베르는 코르네가 제시한 일곱 명제 중에서 제 1~5 명제에 대한 교황의 판단을 요청하였는데, 교황 인노천시오 10세(1644~1655)는 제4 명제까지는 이단이고, 제5 명제는 오류라는 내용의 칙서 <쿰 오카시오네>(Cum Occasione, 1653. 5. 31)를 반포하였다. 이 칙서가 반포되자 아르노는, 갈리아주의(Gallicanismus)적인 입장에서 프랑스의 공작과 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 교황의 칙서에 반대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편지는 신학부 교수들로부터 격렬한 반격을 받는 원인이 되었다. 교수들은 단죄받은 다섯 가지 명제는 아우구스티노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 의로운 사람에게는 은총이 부족한 적이 없고 오로지 그가 죄를 지을 때만 은총이 부족하다고 주장한 아르노의 편지 내용을 문제 삼았다. 결국 아르노는 신학부에서 영구히 제명되었다.
셋째, 아르노는 프로테스탄트와 예수회를 공격하였는데, 특히 예수회는 그의 주적이라고 할 정도로 심한 비판의 표적이었다. 이러한 비판과 공격이 거센 반대에 부딪히자, 그는 자신의 얀센주의적인 입장을 포기하지 않은 채 조용히 자신의 생각을 확산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자 그의 입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그가 거주하는 포르루아얄 수도원으로 모여들었고, 이 때문에 그는 더욱 더 교회와 궁정의 의혹을 받아 결국에는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외에도 아르노는 수학과 자연 과학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그의 《엘르망》(Elemens, 1667)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식들을 당대의 문학과 파스칼(B. Pascal, 1623~1662)의 영향을 받아 재정립한 것이다. 또 철학에도 조예가 깊어 데카르트의 《성찰》(Meditationes, 1641)을 비판하는 글을 썼으며, 말브랑슈(N. Malebranche, 1638~1715)에 대해서도 격렬한 비판을 하였다. 그리고 '포르루아얄 논리학' (Logique de Port-Ryal)이라고 불리는 《논리학의 기술》(Logique ou I'art de penser, 1662)은 최근까지 교과서로 사용 될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
〔평 가〕 아르노의 저서들은 문학과 철학, 은총론,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반박, 예수회에 대한 반박, 성서론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는 학식이 뛰어나고 정교한 논리학자였으나, 가톨릭 교리에 어긋나는 주장을 하였던 까닭에 그의 저서들은 대개 파묻혀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사망한 후 뒤곽(G. Dupac)과 오트파주(J. Hautefage)에 의해 그가 저술한 저서들 대부분이 전집(Oeuvres de Messire Antoine Arnauld, 1775~1783)으로 엮어졌다. 다방면에 걸친 그의 저서들은 양적으로는 매우 방대하지만 오늘날 많이 읽히지는 않고 있으며, 그의 문체는 현학적이거나 가식적이지않다는 평을 받고 있다. (→ 얀센주의)
※ 참고문헌 J.Q.C. Mackrell, 《NCE》 1, pp. 841~8421 Dictiomaire de biographie française 3, pp. 859~867/ H.L. Brekle, Semiotik und linguisti-sche Semantik in Port-Royal, Indogermanische Forschungen 69, 1964, pp. 103~121/ Nouvelle biographie generalle 3, pp. 282~290/ A. Gazier, His-toire generalle du mouvement janséniste, Paris, 1922. 〔朴文洙〕
아르노, 앙투안 (1612~1694)
〔프〕Arnauld, Anto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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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앙투안 아르노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