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를 교회 회의

敎會會議

〔라〕Concilium Arelatense · 〔영〕Council of Ar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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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투스주의자들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314년 8월 1일 콘스탄틴 대제(306~337)가 서방 지역의 주교들을 프랑스 남동부의 아를에 소집한 교회 회의. 시라쿠사의 크레스토(Chrestus di Siracusa)가 회의를 주재하였다.
〔배경과 전개〕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카르타고의 주교 멘수리오(Mensurius, +311/312)를 계승하여 주교로 축성된 체칠리아노(Caecilianus, +345)가 주교로 부적합하다고 고발하였다. 사실 체칠리아노는 너무도 급하게 주교로 축성되었고, 또 당시 카르타고의 주교를 축성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누미디아(Numidia)의 수석 대주교(primatus)도 축성식에 참석하지 않은 상태였다. 더욱이 주교 축성식을 거행한 주교들 가운데 압퉁가(Aptunga)의 펠릭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의 박해(303~305) 동안에 배교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또 체칠리아노는 부제였을 때 멘수리오 주교의 지시에 따라 감옥에 갇혀 있던 신자들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지 못하게 하여 고발되었었다. 이에 누미디아의 수석 대주교인 티지시스의 세쿤도 (Secundus of Tigisis)는 312년에 70명이 참석한 교회 회의에서 체칠리아노의 면직을 선포하고, 주교로 마요리누스(Majorinus)를 선출하였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해결하여야만 했던 당시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틴 대제는 처음부터 체칠리아노의 편을 들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코르도바의 주교인 호시오(Hosius ofCordova)의 조언 때문인 듯하다. 더욱이 체칠리아노와 관계가 있는 성직자들에게 세금 면제 혜택을 주고자 하는 의도를 밝혔을 때, 체칠리아노의 반대자들은 313년 4월 15일 황제에게 직접 상소하여 이 문제를 박해 동안 피해를 입지 않은 갈리아의 주교들이 판단해 주도록 조치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틴 대제는 이 문제를 교황 멜기아데스(310~314)에게 맡겼고, 교황은 313년 10월 2~5일에 개최한 교회 회의에서 체칠리아노가 카르타고의 합법적인 주교라고 선언하였다.
한편 황제는 도나투스주의자들의 상소를 받아들여 아를에서 교회 회의를 개최하였다. 9세기경 비엔의 아도(AdoofVienne)는 600명의 교부들이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고 기록하였으나, 실베스테르 1세 교황(314~335)에게 보낸 편지에 33명의 주교와 4명의 부제와 1명의 신부만이 참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정확한 숫자는 아니다. 이 교회 회의에서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체칠리아노의 문제점을 다시 거론하였지만, 확실한 증거를 대지 못하였다. 결국 체칠리아노는 무혐의로 인정되고, 고발자들은 파문에 처해지거나 유배되었다. 이 결정에 불만을 품은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콘스탄틴 대제에게 다시 상소하였으나, 황제는 316년 10월 밀라노에서 더욱 더 완고하게 이들을 단죄하였다.
〔결정 내용〕 이 교회 회의에 참석하였던 교부들은 도나투스주의자 문제뿐만 아니라 교회와 관련된 24개의 규정들을 제정하였다. 우선 교황이 부활 대축일 날짜를 통일된 한 날로 고정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고(1조), 이단자들이 거행한 세례에 대해서는, 치프리아노(?~258)가 주장하고 도나투스주의자들이 실천한 입장보다는 로마의 입장을 선호한다고 결정하였다(9조). 즉 다시 교회로 돌아오고자 하는 이단자들은 삼위 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지 확인하고, 확실한 경우 다시 세례를 받지 않고 안수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8조). 또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환자들의 경우 병이 다 나을 때까지 기다리기보다는 예식을 거쳐 예비 신자로 받아들일 수 있음을 명백히 하였으며(6조), 도나투스주의자들의 입장과는 달리 배교자들이 행한 서품도 유효하다고 결정하였다(14조).
성직자의 의무에 있어서는 성당을 바꾸는 것(2조, 21조)과 이자 놀이를 하는 것이 금지되었고(13조), 배교한 성직자들은 파문하도록 결정하였으며(14조), 로마를 거쳐가는 주교들에게 로마에서의 미사 집전을 허락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19조). 주교 축성식에는 7명, 적어도 3명의 주교가 참여하여야 하며(20조) 부제의 미사 집전을 금하였다(16조).
또 평신도에 대해서는 마차 경기자(4조)와 배우(5조)등의 직업을 갖는 것을 금하였고, 주교 허락 없이 공무원이 되는 것을 금하였으며(7조), 병역의 의무를 기피하거나 탈영한 자들에게는 파문에 처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3조). 아울러 죽음의 위기에 처하였을 때 예비 신자가 되는 조건(6조)과 배교자들을 다시 받아들이는 조건(22조)을 명백히 하였다. 정기적으로 통교의 편지를 보내도록 하였고(10조), 부인이 바람을 피워 혼자 된 젊은 남편들에게 간음죄를 저지른 부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재혼하지 말 것을 권장하였다(11조). 이러한 결정 사항을 통하여 교회 회의는 사목적이고 교회 규율적인 관심을 드러내었으며, 이 가운데 많은 부분들이 제1차 니체아 공의회(325)에서 재천명되었다. (→ 니체아 공의회 ; 도나투스주의)
※ 참고문헌  F. Boncompagni, Dizionario dei concili I , Citttà Nuova, Roma, p. 83/ F.L. Cross E.A. Livingstone eds.,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Oxford Univ. Press, 1997, p. 105/ W.H.C. Frend, Donatismo, 《DPAC》 I , pp. 1014~1025/ C. Munier, Arles, 《DPAC》 I, pp. 365~366. 〔邊宗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