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기원전 384/383~322/321)

〔그〕Aristote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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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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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생 애〕 기원전 384/383년 그리스 칼키디키 반도의 스타게이로스에서 마케도니아 왕가의 시의(侍醫)로서 왕가와 친분을 갖고 있던 아버지 니코마코스와 칼키스 출신으로 역시 의사 집안에서 자란 어머니 파이스티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순수 그리스인이었지만 태어날 당시 마케도니아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훗날 그는 친(親)마케도니아계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의사 집안의 혈통을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생물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소년 시절 부모를 여읜 뒤 그의 친척 프록세노스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18세 되던 해 아테네로 가서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427~348/347)의 아카데메이아(Ἀκαδήμεια) 학원에 들어가 플라톤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20년 동안 그곳에서 공부하였다. 스승 플라톤의 철학은 그의 사상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플라톤 역시 그를 '학원의 지성(知性)'이라고 칭송할 정도로 인정해 주었다. 학문 활동 초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저작을 모방한 대화 형식의 작품들을 저술하였다고 하나, 현재까지 전해지는 작품은 없다.
플라톤이 사망한 후 그의 조카 스페우시포스가 아카데메이아 학원 원장이 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학원 동문인 헤르미아스가 통치하고 있던 소아시아의 아소스(Assos)로 가 아카데메이아를 본딴 학원을 세웠다. 이때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유한 자연학적 연구 활동이 시작되었고, 형이상학 첫 강의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형이상학 첫 강의에서 그는 플라톤의 '이데아론' 을 비판하였는데, 《니코마코스 윤리학》(Ethica Nicomachea)의 유명한 글귀인 "진리와 우애는 함께 사랑할지라도, 우애보다는 진리를 더 존경할 것을 경건은 우리에게 요구한다"( I , 6, 1096 a 16~17)는 입장에서 스승의 사상을 비판하였던 것이다. 아소스에서 3년 동안 머무른 뒤 그의 제자 테오프라스토스의 고향인 레스보스 섬의 미틸레네로 옮겨 생물학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기원전 343년에는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 II 세(기원전 359~336)의 초청으로 당시 13세였던 왕자 알렉산드로스(기원전 356~323)의 교사가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왕자에게 무엇을 가르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원전 336년에 왕이 된 알렉산드로스가 동방 원정 이후 그리스 문화를 널리 보급하였던 것은 그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고향에 머무르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왕이 되던 해 다시 아테네로 가 마케도니아 정부의 관리 안티파트로스의 도움으로 학원을 세웠는데, 아폴론 뤼케이오스에게 봉헌했던 숲이 있는 곳이라고 해서 학원 이름을 '뤼케이온' (Λύκειον)이라고 지었다. 그는 오전에는 제자들과 함께 가로수 길(peripatos)을 거닐거나 숲 속에 앉아 난해한 철학 문제들을 논의하였고, 오후에는 일반 수강자들을 대상으로 덜 어려운 철학을 가르쳤다. 훗날 아리스토텔레스의 학파를 '페리파토스 학파' 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뤼케이온 학원에서 그때까지 쌓아 온 연구를 체계화하였는데, 오늘날 남아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집》(Corpus Aristotelicum)은 주로 뤼케이온에서 한 강의록들을 바탕으로 구성한 것이다.
뤼케이온 학원에서 교육과 연구에 전념하고 있을 때인 기원전 323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의 급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어 곧바로 아테네에서 반(反)마케도니아 감정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 시민이면서 가장 우수했던 제자 테오프라스토스에게 학원을 넘겨준 뒤 어머니의 고향인 칼키스로 돌아가 그곳에서 기원전 322/321년에 사망하였다.
〔저 작〕 아리스토텔레스는 깊이와 규모에 있어서 심오하고 방대한 철학자였다. 그는 오늘날에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철학의 각 분야를 인식을 목적으로 하는 이론학(θεωρητική), 행위를 대상으로 하는 실천학(πρακτική), 제작의 원리를 다루는 제작학(ποιητική) 등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형이상학》 E 1, 1025 b 이하). 그리고 이론학을 다시 "질료와 운동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실체"를 다루는 자연학(제2 철학)과 "질료와 분리할 수 없으나 운동과는 분리할 수 있는 것"을 다루는 수학, 그리고 "질료와 운동 양자를 다 분리할 수 있는 것"을 다루는 제1 철학(형이상학) 내지 신학으로 구분하였다. 또 실천학은 탐구 대상이 국가인가 가족인가 아니면 개인인가에 따라 정치학 · 가정학 · 윤리학으로 구분하였으며, 제작학은 연설과 저술의 기술에 따라 수사학과 시학으로 구분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체계적으로 또 모든 분야에 걸쳐 강의하였지만, 그의 저작은 그가 죽은 후 200년이나 사장되어 있다가 기원전 1세기 말엽 뤼케이온 학원의 마지막 책임자였던 로도스의 안드로니코스(Andronikos)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집》으로 엮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원본이 유실되어 10세기 이후의 사본만 보존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집》에는 논리학 · 자연학 · 형이상학 · 윤리학 · 정치학 · 제작학에 관한 저술들이 차례로 편집되어 있다. 오늘날 주로 사용되는 자료는 1831~1870년에 걸쳐 프러시아 왕립 학술원에서 다섯 권으로 간행한 《아리스토텔레스 전집》(Aristotelis Opera, ed. Acade-mia Regia Boussia, Berlin)을 기본으로 수정 · 보완한 것인데, 이것 역시 안드로니코스가 편찬한 저작집과 같은 배열로 되어 있다. 그리스어 원전인데도 중세 이후부터 저서명이 라틴어로 바뀌었고, 베커(I. Bekker)에 의해 쪽수와 좌우 단락 옆에 작은 알파벳이 매겨졌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 모순되는 부분들이 간혹 발견되는 것은 그의 유고(遺稿)들이 200년 뒤에 편찬되었고, 또 예거(W.Jae-ger)가 지적하였듯이 아카데메이아 시대의 것과 편력 시대의 것과 뤼케이온 학원 시대의 것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철학 용어와 학문적인 방법론〕 기체(substratum) 또는 주체(subjectum)라고 번역되는 '히포케이메논' (ὑποκειμένων)은 '히포' (ὑπο, 밑에)와 '케이메논' (κειμένων, 가로놓인 것)의 합성어인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든 신조어로서 생성과 소멸이 일어나는 바탕을 의미한다. 또 실체(substantia)라고 번역되는 '우시아' (οὐσία)는 '에이나이'(ἐιναι, 있다)의 여성 분사형으로 피타고라스(Pythagoras, 기원전 582~497/496)로부터 플라톤에게로 계승된 용어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감각적 개체(제1 실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본질' 이라고 번역되는 '토 티 엔 에이나이' (τὸ τι ἐν ἐιναι)는 '있었던 것' (τι ἐν)과 '있음' (τὸἐιναι)의 합성어로, '있었던 바의 무엇' 즉 '무엇이 있었던가 하는 것' (quod quid erat esse)을 뜻하는 말이다. 범주(categoria)는 '진술하다' · '소송하다' (κατηγορέιν)라는 동사에서 유래되었는데, 가령 '인간' 이라는 주어와 '이성적 동물' 이라는 술어가 합쳐져 형성된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는 명제에서 술어(praedicatio) 혹은 진술이 범주에 해당한다. 완성태(perfectio) 또는 현실태(actus)라고 번역되는 '엔텔레케이아' (ἐντελήχεια)는 '목적(τἐλος)을 안에(ἐν ἔχειν) 갖고 있음(ἔχειν)' 을 뜻하는 '온전히 나타냄' 을 의미한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들을 통하여 그가 어떻게 철학하는 길을 모색하였는지를 알 수 있고, 그가 이룩해 놓은 개념 규정의 궤도를 따라 그 후의 철학이 전개되어 나갔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10개의 범주 명칭들은 그리스인들의 일상어였다. 즉 그는 ① 실체는 '무엇인가라는 것' 으로, ② 분량은 '어느 만큼 많은가' 로, ③ 성질은 '어떤 것인가' 로, ④ 관계는 '무엇에 관여하는 것' 으로, ⑤ 장소는 '어느 곳에' 로, ⑥ 시간은 '언제' 로, ⑦ 상태는 '놓여 있음' 으로, ⑧ 소유는 '갖고 있음' 으로, ⑨ 능동은 '행하는 것' 으로, ⑩ 수동은 '되는 것' 으로 표현하였다. "어떤 것이 어느 만큼 많이, 언제, 어느 곳에, 무엇에 관여하는가?"라고 묻는 일상어가 곧 철학 용어가 되었던 것이다. 철학하는 일이 경험적인 일상성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선택한 언어들은 중요한 뜻을 갖는다. 그의 철학 언어는 플라톤처럼 현실을 떠나 비상하지 않았으며, 문체는 플라톤처럼 시적 감격을 주지 못하여 언뜻 무미건조한 듯이 보이기는 해도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보편성을 겨냥함으로써 '학문하는 안전한 길' 을 따라 철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현대인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철학적 방법과 태도이다. 인간이 제기하는 물음들에 대하여 그가 무엇이라고 답하였느냐 하는 것보다 그가 어떤 과정을 밟아 가며 논구하였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는 먼저 '이데아' 를 가지고 그것을 적용하여 증거를 찾는 방법으로 철학하지 않고, 선행자들의 전통적인 의견들이 지니고 있는 모순과 허점들을 분석하고 비판함으로써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보편성을 찾아 그것을 단순히 명제로 두지 않고 '사물의 지식' 으로 살리는 방법을 택하였다. 따라서 그는 전통적인 모호한 견해들과는 대조적으로 술 취하지 않은 맑은 정신'의 이론들을 세워 나갔다. 그의 사유의 특색은 '분석적'이지만, 그의 분석적 사고는 자기 철학의 전체적 윤곽과 틀을 언제나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래서 한 분야의 지식은 다른 분야의 지식과 연관되어 전개되었다.
〔논리학〕 논리학적 저작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집》 맨 처음에 나오는 이유는, 학문하는 일에 있어서 어떻게 탐구하느냐 하는 방법론이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이 여섯 편의 저작들은 논리학이 사고의 도구이며 철학자들을 위한 도구라는 의미에서 6세기경부터 《오르가논》(ὄργανον)이라고 불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λογική)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고 분석학(ἀναλύτικε)이라고 하였는데, 논리학이라는 명칭은 그가 죽은 뒤 페리파토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간에 벌어진 논쟁 이후에 생겨난 말이다. 《오르가논》의 첫머리에는 비복합적인 낱말들을 문제 삼은 《범주론)(Caegoniae)이 있고, 한 명제를 형성하는 두 낱말들의 조합과 더불어 그러한 명제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직접적인 추론을 다른 《명제론》(De Interpretatione)이 이어진다. 그 다음에는 논증을 구성하는 세 낱말들의 배열 즉 추론(삼단 논법)을 문제 삼은 《분석론 전서》(Analytica Priora), 그리고 어떻게 이 세 낱말들을 가능한 최선의 방법으로, 다시 말하면 논증 과학을 산출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배열할 수 있는가를 문제 삼은 《분석론 후서》(Analytica Posteriora)가 나온다. 이어 또 하나의 추론 방법인 변증법적 추론을 논의한 《변증론》(Topica)이 나오고, 그것의 보조적 저술로서 논리의 오류들을 거론한 《소피스트적 논박론》(De Sophisticis Elenchis)으로 끝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리에 대하여 논의하는) 사람들은 특정한 연구에 들어가기에 앞서 미리 이것(분석론)을 터득하여야 한다"(《형이상학》 Ⅳ, 3, 1005 b 4)고 역설하였다. 칸트가 인간 인식의 "확실한 진로인 논리학"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한 발자국도 진전이 없었다(《순수 이성비판》 제2판 서문 B Ⅷ)고 말할 정도로 그가 논리학에 기여한 공로는 대단히 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변증론》(100a 25~b18)에서 학문적 탐구에 기본이 되는 추론을 크게 둘로 구분하였는데, 통념을 출발점으로 하는 '변증법적 추론' 과 정립된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필연성을 지닌 결론을 도출해 내는 '논증적 추론' 이 그것이다. 후자가 필연성을 지니고 있는 데 반하여, 전자는 개연성밖에 지니고 있지 않다(《분석론 후서》 74 b 5). 하지만 '통념에 의한' 변증법적 추론과 '필연에 의한' 논증적 추론은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으로 보아야 한다. 통념에 의한 추론의 경우, 궤변론자들이 했던 것과 별로 차이가 없다는 약점이 있다. 가령 "비가 내린 후(전제) 대지가 습하기(귀결) 때문에, 대지가 습하면 비가 내린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속단일 수 있다. 그것은 "징후에 의한 논증을 귀결에 의하여 이루어 나가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다. 즉 그 귀결은 필연성을 결여하고 있다. 필연적인 결론을 내리려면 전제와 귀결 사이에 중간 개념이 있어 명제 사이를 연결시켜야 한다. 다시 말해 "만일 A가 모든 B에 속하고 또 B가 모든 C에 속한다면, A는 모든 C에 속한다" 고 할 때, 이때 B는 논리적으로 연결시키는 중간자로서 "필연성으로의 도출"을 제공한다. 이것이 그의 논증적 추론이다. 하지만 그가 논증적 추론인 삼단 논법을 생물학적 저작을 포함한 개별 과학의 탐구에 거의 적용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논증적 추론이 그의 유일한 학문 추구의 방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의 추론은 언제나 인식론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현대 논리학이 기본적으로 논증의 타당성만을 문제 삼는 데 반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논증의 일관성과 정확성만이 아니라 진리의 인식에도 관심을 두었다. 그는 "모든 경우에 있어 '사실이 무엇인가 하는 것과 '그것이 왜인가 하는 것은 명확하게 같다"(《분석론 후서》 II , 2, 90 a 15)고 기술하였다. 학문적 추구는 단지 이론적 전개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적인 것이 고려되어야 한다. 학문의 방법이 우리에게 진리를 가져다 주지는 못한다. 진리가 논리나 방법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양한 세계 현상에 대하여 하나의 방법만을 고집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이론을 수정하고, 새로운 각도에서 고찰하였다. 그는 또 논증적 추론만을 학문 추구의 방법으로 삼지 않았으며, 변증법적 추론과 논증적 추론이 갖고 있는 제각각의 기능을 잘 알고 있었다. 변증법적 추론은 각 개별 과학이 성립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원인들의 발견을 위하여 적용되었고, 논증적 추론은 학문 탐구에 있어 완결된 학문이 제시하는 모델을 보여 주는 데 사용되었다.
〔자연학〕 진리 탐구자의 자세에 대하여 기술되어 있는 《형이상학》(Mataphysics) 제2권은 3장(章)으로 된 짧은 논문이다. 진리에 대한 연구는 어떤 의미에서는 곤란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진리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모든 사람이 대체로 진리를 파악하는 데 있어 어느 한 부분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의 일면을 파악한 여러 사람들이 서로 협력함으로써 진리 탐구에 많은 성과를 얻을 수 있다. "누구인들 그 문제 앞에 이르지 못하랴"라는 그리스 격언처럼 진리에 전혀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으며, 진리 탐구의 어려움은 사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속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학문의 길은 "우리에게 더 알려지고, 더 명석한 것에서 출발하여, 자연에 있어 더 명석하고 더 분명히 알려진 것으로 나아가는"(《자연학》 I , 1 , 184 a 16~18)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가장 존귀한 학문은 '신적인 것' 을 다루는 학문이었는데, 즉 독립적이고 움직이지 않고 영원한 실재를 다루는 제1 철학(형이상학)이 가장 존귀하다(《형이상학》 Ⅵ, 1, 1026 a 21)고 하였다. 그러나 학적 탐구의 출발은 제2 철학인 자연학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자연학이란 그것의 운동과 정지의 원리를 자기 속에 갖고 있는 실체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 (《형이상학》 1025 b 21~22)이다. 제1 철학이 질료와 분리되는 실체를 다루는 데 비하여, 제2 철학은 질료와 분리될 수 없는 실체를 다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자연학》을 통하여 자연 그 자체가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것에서부터 자연의 본질인 운동 또는 변화의 고찰을 중심으로 그 조건과 관계 그리고 원인에 대하여 논하였으며, 그것과 더불어 무한과 장소(공간) 그리고 시간을 다루었다. 이 《자연학》은 모두 8권으로 되어 있는데, 제1~4권에서는 자연에 관한 기초적 문제를, 제5~8권에서는 특히 운동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자연학》은 사물의 생성 소멸과 질료적 구조에 대하여 기술한 《생성 소멸론》과 함께 오늘날의 과학 철학에 해당되는 저작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자연이란 한편으로는 자연적 사물 전체를 뜻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적 사물 속에 내재하는 운동과 정지의 원리를 뜻하였다. 즉 그는 "자연이란 자신이 애당초, 그리고 우연적인 것이 아닌, 즉자적(卽自的)으로 소속해 있는 것 중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의 운동과 정지의 원리이고 원인이다"(《자연학》 II , 1 , 192 b 21~22)라고 하였다. 엄밀한 의미에서 자연이란 인간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자연물이 아니라 현상 세계에 내재하는 생성 소멸과 변화의 운동력이고, 또 그 유기적 생명력이다. 자연은 흙 · 물 · 불 · 공기와 같은 자연물속에 내재할 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는 모든 인공적 사물 속에 내재한다. 그 이유는 어떤 자연물 아닌 것도 그것을 구성하는 흙 · 물 · 불 · 공기의 원소로 환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자연은 실체를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은 언제나 기체 속에 있다" '(Ⅱ , 1 , 192 b 34)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기체란 보통 질료를 말한다. 따라서 자연은 질료와 결합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자연이라는 것에는 형상과 질료라는 두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고찰한 대로 자연은 들창코의 본질을 연구할 때와 같은 것을 고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들창코와 같은 것은 질료 없이는 정의되지 않으며, 또 질료만으로도 정의되지 않는다" (Ⅱ, 2. 194 a 12~14)고 한다. 자연학은 형상과 질료라는 두 요소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 두 가지를 다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의사는 건강(형상)과 건강이 그 속에 깃들어 있는 담즙이라든가 점액이라는 '질료' 를 알아야 하고, 건축가는 집이라는 '형상' 과 '질료' 즉 기와나 목재를 알아야 하는 것처럼, 자연학자도 양자를 다 알아야 한다( II , 2. 194 a 13~27).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모든 것이 그것 때문에 존재하는 목적이고, 모든 것의 종말은 이런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고 보았다. 만사가 요행이고 우연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것은 '부수적인 원인' 일 뿐, 자체적인 원인에 앞설 수는 없다. 요행과 우연은 정상적이고 규칙적인 향목적적(向目的的)인 행동의 틀(정신과 자연)을 전제하고 있다. 자연은 무슨 일이든 무엇인가를 '겨냥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齒〕를 예로 들어 보면, 앞니는 날카롭게 돋아나 있어 물어뜯기에 알맞고, 어금니는 평퍼짐하여 음식물을 씹기에 알맞게 되어 있다. 이것은 어떤 목적에 부합함을 말한다( II , 8, 198 b 24). 그는 자연의 합목적(合目的)을 지적하면서 "자연은 어떤 것도 헛되이 만들지 않는다" 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였다. 자연의 목적성은 인간보다 동물에게서 더 명확히 확인된다. 제비가 제비 집을 짓고, 거미가 거미줄을 치고, 또 식물의 잎사귀가 돋아나는 것은 열매를 보호하기 위함이요, 그 뿌리가 위로 치솟지 않고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양분을 섭취하기 위함이라면, 분명히 이런 원인(목적인)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가 내린 결론이 "자연이라는 말은 양의적(兩義的)이어서 질료로 여겨지기도 하고, 형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가 목적인이 되는 데 반하여 다른 것은 그 목적을 겨냥하는 것이므로, 형상 그 자체가 다른 것들이 겨냥하는 원인(목적인)이어야 한다" ( II , 8, 199 a 31 ~33)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질료보다는 형상이 자연이다" (Ⅱ , 1 , 193 b 6~7)라고 지적하였는데, 이는 자연이 형상과 동일시되고, 형상은 목적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에게 있어 생성 · 변화 · 운동은 질료가 그 목적인 형상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해석되었다. 운동을 일으키는 것도, 운동을 이끌어 가는 것도 결국은 목적으로서의 형상에 불과한 것이다(《자연학》 Ⅲ. 7. 198 a 24~26).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자연은 단순히 세계에 내재하는 운동의 원리일 뿐만 아니라, 세계와 사물에 있어서의 목적을 위한 활동의 원리이기도 하였다.
〔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저로 알려진 《형이상학》의 제목은 그의 저작을 편집한 편찬자가 붙인 것으로, 직역하면 '자연적인 것들 다음에 오는 것들' (τα μετὰ τα φύσικα)이 된다. 그리고 이것이 '메타퓌지카' (μεταφουσικα)라는 명칭으로 고정되었는데, 이 책을 유학자들이 《주역》(周易)에 있는 형이상자(形而上者)라는 글귀를 따서 '형이상학' 이라고 바꾸었고, 이것이 오늘날 그의 저작 명인 동시에 학문 명으로 정착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원래 존재의 문제를 다루는 하나의 독립된 학문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학문을 '제1 철학' 이라고 불렀다. 그렇지만 간혹 그는 그것을 '지혜' (sophia)라고 부르기도 하였고, '신학' 이라는 명칭도 사용하였다. 그가 존재 문제를 다룬 이 논문들이 '메타퓌지카 라는 이름으로 엮어진 것이다.
《형이상학》 제4권의 처음(Ⅵ , 1 , 1003 a 20)에 "존재를 존재로서 연구하고 또 그것에 자체적으로 속하는 것들을연구하는 하나의 학문이 있다. 이 학문은 이른바 부분적인 여러 학문들 중의 어느 하나와도 같지 않다" 고 기술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그는 "옛날에 있어서도 지금에 있어서도 또 언제나 영원히 묻게 되는 것은 '존재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인데, 이것은 '실체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로 귀결된다" (Ⅶ , 1 , 1028 b 2~4)고 하였다. 이렇게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그는 "실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대체시켰다. 그는 《형이상학》의 어의(語義) 편 중 존재를 다룬 장(V , 8 , 1017 b 10~26)에서 실체에 대하여 거론하였다. 실체란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탈레스(Thales, 기원전 640~546)처럼 물과 불 같은 단순한 물체로 보기도 하고,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기원전 585~525)와 그 후계자들처럼 동물에 있어서의 정신(ψυχή)과 같이 내재하는 존재의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 또 피타고라스(Pythagoras, 기원전 582~497/496)의 후계자들처럼 모든 것을 수(數)와 같이 규정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플라톤처럼 그 개념이 정의(定義)이므로 본질로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 네 가지 의미를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것의 술어가 될 수 없는 최후의 주체와, 개체적인 성격을 주면서 독립적인 성격을 지닌 '형상 이렇게 두 가지로 요약함으로써 실체의 양의성(兩義性)을 드러내었다.
실체의 양의성은 《범주론》 제5장( V , 2 a 11~13)의 실체에 대한 논변에서 가장 뚜렷이 나타난다. 그는 여기에서 실체를 제1 실체와 제2 실체로 나누었다. 제1 실체는 "어느 기체에 대하여 진술되는 것도 아니고, 또 어느 기체 가운데 있는 것도 아니며, 이를테면 어떤 특정한 인간 내지 어떤 특정한 말〔馬〕이라고 하는 따위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특정한 개별자가 가장 우월하고 일차적이며, 가장 많이 얘기되는 본래적 의미에 있어서의 실체"라는 것이다. 한편 제2 실체는 "일차적 의미에 있어서 실체를 그 안에 포섭하고 있는 종(種) 개념이요, 다시 또 이와 같은 종 개념을 그 안에 포섭하고 있는 유(類) 개념이다. 이를테면 어느 특정한 개인이 인간이라는 종 개념에 속하고, 이 종 개념은 다시 동물이라는 유 개념에 속하거나, 이와 같은 것, 인간 내지 동물, 다시 말해 종 개념 내지 유 개념이 제2 실체이다"(《범주론》 2 a 14~18) .
《형이상학》 제7권 1장(1028 a 11)의 용어에 의하면, 제1 실체는 개물(個物)이고, 제2 실체는 본질에 해당된다. 종 개념과 유 개념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이고 같은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지계와 감각계를 분리하였던 플라톤의 입장을 비판하고, 개별적인 사물들의 본질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아 이것을 구명하였으며, 또 본질을 경험적 사물에 일치시켰다. 또한 "각각의 식물과 그것의 본질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고 우연한 것이 아니며, 결국 각각의 사물을 인식하는 일이란 그 본질을 인식하는 일이다. 사물에서 본질을 노정시키는 일은 있어도 이 양자는 반드시 하나여야 한다는 것이 분명하다"(《형이상학》 Ⅶ, 6, 1031 b 18~22)라고 강조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실체가 반대의 것을 용납할 수 있다 하더라도 '동시에' 반대의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건강하다"와 "소크라테스는 병들었다"는 두 명제가 동시에 참일 수 없듯이, 어느 하나가 참이면 다른 것은 거짓이다. 그러나 '본성상 동시에' 주장되는 것이 있다. "같은 유에서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서 분할되어 나오는 것은 본성상 동시에 주장된다"(《범주론》 Ⅶ, 14 b 29~30)는 것이다. 가령 동물이라는 유 개념에서 "날개 있는 것"과 "육지에서 사는 것과 "물에서 사는 것"이라는 종 개념이 분할되고, 그중 어느 것도 앞서거나 뒤서는 일이 없다. 그들 종 개념은 동물이라는 유 개념에 본성상 동시에' 존재한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라고 말할 때, 여기에는 개체(소크라테스)와 본질(인간)이 '본성상 동시에' 존재한다. 개체와 본질 중 어느 것을 일차적인 것으로 보든지 이 양자는 본성상 동시에 있다. "인간이 있다"는 객관적 사실 때문에 그 명제가 참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인간이 있다" 는 명제가 참이기 때문에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플라톤은 그 점에서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는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질료와 형상은 서로 공존하여야 실체가 성립된다. 그가 말하는 '형상' 은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초월적인 것이 아니고, 사물 속에 내재한다. 그에게 있어 "형태와 형상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고, 개념에 의해서만 있는 존재이다." 어떤 경우에는 생산자와 피생산자가 같다. 사람이 사람을 낳고 말이 망아지를 낳는다고 해서 형상과 실체가 같다고 보는 것은 속단이다. 그 같은 생물학적 유형에도 형상의 원인성이 자료 속에 있는 것이 확실하다. 따라서 형상과 개체와의 관계는 연장적(延長的)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논리적 상하 관계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추상 작용에 의한 종의 상위 개념인 유 가 산출된다.
《형이상학》의 실체 편이라고 불리는 제7~9권과 신학 편이라고 일컬어지는 제12권의 상호 모순은, 전자가 후기 저작이고 후자는 중기 저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 12권의 첫 구절은 "이 고찰은 실체에 관한 것이다" 라는 말로 시작된다. 즉 실체의 원인과 원리를 탐구하는 것이 실체 편의 주제이면서 동시에 신학 편의 주제라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실체 편과 신학 편 중 어느 것이 먼저 쓰여졌든지 간에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신을 "영원하고, 부동의 어떤 실체"라고 규정한 것은 그의 신관이 실체에 대한 이해와 직결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로스(W.D. Ross)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신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제12권이 영원한 원동자(原動者)의 존재를 주장하려는 목적으로 쓰여진 독립된 논문이라고 하였다. 각각 독립된 논문들이 쓰여진 두루마리들로 이루어진 신학 편은 그의 <형이상학> 전체 구조 속에서 필요 불가결한 것임에 틀립없다. 왜냐하면 제12권의 신학적 정점이 무너지면 그의 체계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 책의 편집자가 존재론을 다룬 제7~9권 다음에 신학 편을 위치시킨 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의 계층적 정점으로 최고 존재의 개념을 자기의 결론으로 삼으려고 했을 것이고, 그럼으로써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demiourgos)를 대신하고 신의 이데아를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전 시대의 철학자들이 '아르케'(ἀρχη)라고 불렀던 것이 우주의 운행 원리가 되고, 인간에게 행복을 주는 제1의 원동자 곧 가장 신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이 최초의 원동자, 가장 신적인 것이 플라톤처럼 세계 밖에서 독립적으로 작용하는가, 아니면 세계안에 내재하는 질서인가? 그 속에 내재하면서도 그 위에서 통괄된다는 것이 그의 답이다. 즉 군(軍) 지휘관이 군에 예속되면서도 그 위에 서서 지휘하는 것과 같다( XII , 10, 1075 a 13~15)고 보았다. 자연의 목적인은 자연과 무관한 존재가 아니고, 서로 연관을 가진 이른바 '공동적인 질서 세움' 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운동인과 목적인은 같은 것이었다. 우주는 전체적 통일을 유지하는 궁극의 원리 없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우주 운행의 원리를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타자(他者)를 움직이는 "제일의 부동의 원동자"라고 이름붙였다 ( XII , 8, 1073 a 26). 이것이 가장 '신적인 것' 이다.
〔철학사적 위치〕 스콜라 철학에서는 '철학자' 라는 보통 명사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지칭하는 말이었고, 오늘날에도 철학을 논의함에 있어서 빠지지 않고 인용되고 있다. 가톨릭 신학에 미친 그의 영향 때문에 13세기 초까지 파리 대학에서는 그의 저작을 금서화하였고, 14세기에는 인문학 학위 취득자들이 그의 철학과 상반되는 견해가 없다고 맹세하면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1624년에는 파리 의회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모순되는 사상을 가진 학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의안을 통과시키기도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으로 이어지는 철학의 본줄기를 이어나간 상속자이면서 동시에 이들의 철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그리스에서 시작된 서양 철학의 기초를 확고하게 수립한 철학자였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삶을 위한 잠언들을 적었고,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통하여 진리 탐구의 길을 가르쳤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저작도 남기지 않았다. 플라톤은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남긴 대화들을 기록하였으나 그것들은 서술적인 저작들이 아니었다. 이에 비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전 시대의 철학자들이 시와 음유로 표현하였던 사상을 명료한 철학적 개념으로 밝혀 놓았다. 서양 철학사에서 그는 처음으로 학문의 방법론을 명확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제별로 철학의 문제들을 다루었던 최초의 서양 철학자이다.
그는 철학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던 서양 철학 형성 초기에 철학하는 방법을 세우고, 그 주제들을 제기하여전 시대의 철학자들의 견해들을 고찰하고 비판하면서, 자신의 철학적 견해를 피력해 나갔다. 철학하는 일은 올바른 사유와 정확한 언어로써 기술하는 일이다. 철학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함축하고 있는 진리에 비하여 사용상의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통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면서 철학하였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많은 철학 용어들, 즉 실체 · 기체 · 본질 · 형상 · 질료 · 가능태 · 현실태 · 완성태 · 범주 · 대전제 · 소전제 · 개념 · 보편자 등이 그가 창안해 낸 말들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철학 용어들이 대부분 그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그가 철학을 정초하는 데 얼마나 많은 기여를 하였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 그리스 철학 ; 논리학 ; 《니코마코스 윤리학》 ; 보에시우스 ; 스콜라학 ; 신학 ; 신학사 ; 아베로에스 ; 자연학 ; 토마스 아퀴나스 ; 플라톤 ; 형이상학)

※ 참고문헌  Aristotle, The Loeb Classical Library, vol. 23, London, Heineman-Harvard Univ. Press, 1933/ D.J. Allan, The Philosophy of Aristotle, Oxford Univ. Press, 1970(장영란 역,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이해》, 고려원, 1993)/ J.L. Ackrill, Aristotle the Philosopher, Oxford Univ. Press, 1981(한석환 역,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서광사, 1992)/ 조요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경문사, 1988/ W. Jaeger, Aristoteles-Grundlegung einer Geschichte seiner Entwicklung, Berlin, 1923/ D. Ross, Aristotle, London, Methuen, 5th ed., 1956/ M. Grene, A PortraitofAristole, Univ. of Chicago Press, 1963. 〔趙要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