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 사상적 기원
II . 아리우스의 생애와 사상
III . 아리우스의 주장에 대한 논쟁
IV . 아리우스 논쟁의 종식과 아리우스파의 운명
알렉산드리아의 사제였던 아리우스(Anius, 256?~336)의 사상에서 비롯된 삼위 일체론과 관련된 4세기의 이단.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여 결과적으로 성령을 부정하고, 성부만이 진정한 하느님이라는 주장이 아리우스 주의의 기본 사상이다.
I . 사상적 기원
〔용 어〕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Gregorius Nazianzenus, 329/330~389/390)가 처음으로 '아리우스주의' 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연설 21, 22), 그는 거의 모든 교회가 연관된 삼위 일체 논쟁에서 아리우스 또는 그와 실질적 · 추정적으로 견해를 같이하는 사람들의 학설을 설명하면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아리우스의 신학적 기원은 확실하지 않다. 그렇지만 아리우스는 오리제네스(Origenes, ?~254)의 영향을 받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신학적 전통을 이어받았으며, 중기 플라톤주의와 신플라톤주의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자신이 안티오키아의 루치아노(Lucianus, +342)의 제자라고 하면서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Eusebius Nicomediae, +342)를 '실루치아누스파' 로 묘사한 점에서, 학자들은 아리우스가 안티오키아 학파에 속한다고 추론하였다. 그러나 이 주장은 상세한 논증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안티오키아에서 신학적 · 성서 주석적 학파는 4세기 중엽에 생겨났기 때문이다.
〔아리우스 이전의 신학〕 로고스론 : 고대 그리스도교의 중심이 2세기에 팔레스티나에서 그리스로 옮겨졌는데, 이때부터 그리스도교 복음이 헬레니즘과 혼합되면서 성서적 표현 방법이 점점 더 존재적 ·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스 사상의 영향은 우주론과 구원론을 그노시스주의적으로 결합한 발렌티누스의 발췌문에 가장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은 나아가 유일신론의 관점에서 계시자의 보편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철학적 로고스론에 관심을 나타낸 여러 그리스도교 신학 작품들(유스티노, 《호교론》 Ⅰ , 13 ; Ⅱ , 6, 1-3 ; 아테나고라스,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탄원》 6-10 ; 안티오키아의 테오필루스, 《아우톨리쿠스에게》 I , 3 ; Ⅱ , 4)에서도 발견된다. 이 작품들에서 호교론자들은 '아버지' 로서의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숙고하였고, 존재적 · 형이상학적 자주성의 의미에서 성부와 성자의 관계 및 차이점을 명백히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이단의 발생 : 3세기에 로고스론에 이의를 제기한 그리스도 양자설(adoptianismus)과 모달리즘(modalismus)이 나타났는데, 이 두 이단은 내용적으로는 서로 달랐지만 로고스론에 대립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하였다. 그래서 교의사에서는 그리스도 양자설과 모달리즘을 '모나르키아니즘' (monarchianismus)이라라라고 부른다. 모나르키아니즘은 유대교에서 물려받은 유일신론을 바탕으로, 하느님을 유일하고 나눌 수 없는 하나의 근원으로 선포한 모든 이론을 가리킨다.
그리스도 양자설은 2세기 말 성자에게 하느님의 명칭을 부여하지 않은 비잔틴의 주교 테오도투스로부터 유래하며, 안티오키아의 주교 사모사타의 바오로(?~260/270?)와 시르미움의 포티누스(4세기 중엽)에 의해 계승되었다. 테오도투스는 선재하는 하느님의 아들과 창조의 중재자인 로고스를 부인하였으며,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고 세례 때 하느님의 능력과 영이 그에게 와서 신적 활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하느님이 아니라 영에 의해 하느님의 아들로 받아들여졌다. 이로써 신(神)의 단원성(單元性)은 보존되었으나, 하느님-아버지와 하느님-아들 사이의 본원적인 일치는 깨어지게 되었다. 사모사타의 바오로도 동정녀 마리아가 선재하는 로고스와 하나가 된 인간 예수를 낳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결합을 실체적 일치가 아니라 단지 의지적 또는 은총에 의한 일치로 보았다. 한편 모달리즘은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을 한 분이신 하느님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2세기 말 스미르나의 노에투스와 프락세아스가 이 학설을 로마에 전하였고, 사벨리우스는 로마에서 이 학설을 받아들여 3세기에 북아프리카에 전하였다. 사벨리우스는 한 분의 하느님이 시간적 현현 방식으로, 먼저 창조주와 입법자인 아버지의 위격으로, 그 다음에 구원자인 아들의 위격으로, 마지막으로는 승천 이후 성령으로 활동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현현 방식 또는 아버지의 위격으로 이해될 경우, 성부가 수난한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 아버지가 육화되거나 수난한 것이 된다.
이단에 대한 반응 : 모나르키아니즘에 대한 교회의 신학적 반응은 테르툴리아노(160~223) , 히폴리토(170~236), 노바시아누스(200?~?), 오리제네스 등에게서 나타났다. 테르툴리아노가 삼위의 실체(substantia)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성부 · 성자 · 성령을 '위격' (persona)이라는 용어로 표현한 반면에, 오리제네스는 중기 플라톤주의와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성부 · 성자 · 성령에 각각 하나의 '위포스타시스' (ὑπόστασις, 위격)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모나르키아니즘적인 의미에서 하느님을 일치시키고 성부 수난설(patripassianismus)에 맞서서 삼위의 구별을 강조하기 위하여, 성자와 성령을 성부에게 종속시킨 성자 종속설(subordinatianismus)을 주장하였다.
그 후 토착의 '아시아적 · 모나르키아니즘적' 전통 이외에, 특히 '아리우스 이전의 아리우스' 로 여겨지는 안티오키아의 루치아노로 대표되는 알렉산드리아 · 오리제네스 전통이 안티오키아에도 있었다. 그러나 루치아노는 오리제네스파였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반면에 소아시아에서는 그와 같은 시대의 인물인 올림포스의 메토디우스(Methodius, +311)가 알렉산드리아파 사람들의 정신적 유산 아래, 특히 로고스론에 해당하는 오리제네스의 개별 주제(영혼의 선재, 유심론적 종말론)를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하지만 그 역시 루치아노와 마찬가지로 오리제네스의 사상에 종속되거나 오히려 더 강화된 경향을 보였다.
II 아리우스의 생애와 사상
〔생애와 작품〕 256년경 리비아에서 태어난 아리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의 박해가 시작되자 몇 년 뒤 이집트 지방의 수도인 알렉산드리아로 이주하여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베드로(300?~311)로부터 부제품을 받았지만, 멜리티우스(Melitus) 이교 때 리코폴리스의 멜리티우스파들을 옹호하였다고 하여 파문되었다. 그러나 후임 주교 아킬라스(311~312)에 의해 다시 공동체에 받아들여져 사제 서품까지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사가 소조메노(S. H. Sozomenus, 380?~?)만이 전하고 있기 때문에 확실한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믿을 만하며, 알렉산데르 주교 재임(312~328) 때 '바우칼리스' 라고 부르는 교회의 장로로 활동하였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는 성서의 해석과 관련된 이 직책을 수행하는 동안 재능 있는 신학자 · 뛰어난 변증가 · 유창한 설교가였으며, 특히 열심한 사목자로서 주교 · 동료 장로들 · 교양 있는 부인들에게서 상당한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
아리우스의 작품으로는 318년경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에게 보낸 편지, 자신의 정통 신앙을 증명하기 위하여 320년경에 여러 장로와 부제가 함께 서명하여 알렉산데르 주교에게 보낸 편지, 327년 말 알렉산드리아의 부제와 훗날 여러 해 동안 동반자로서 같은 길을 걸은 에우조이우스(Euzoius, +375)와 함께 콘스탄틴 대제(306~337)에게 쓴 편지, 그리고 오늘날 일부만 남은 그의 주저 《향연》(Thaleia)이 있다. 그러나 그의 학설을 완전하게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의 신학이 부분적으로 왜곡되었고, 알렉산데르 주교와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295-373)가 편파적으로 전한 증언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학 사상〕 아리우스는 성자와 성부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신학을 318년 이전부터 전개하기 시작하였던 것 같다. 그의 신학은 하느님의 초월성과 불변성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중기 플라톤주의와 신플라톤주의의 원리를 논거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플라톤주의에서는 존재에 하나(το ἔν)의 근원만 있다고 하였는데, 이 존재는 시작이 없으며, 본래의 의미 또는 자주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실체에만 적합하다. 아리우스는 이 개념을 성부에게 전용(轉用)하였다. 즉 성부만이 모든 것의 근원이며 '시작도 없고' , 곧 '태어나지 않고' '창조되지 않으며' , 따라서 '영원하고' '변하지 않으며' 달라지지 않는 한 분 하느님이라고 하였다. 성부에게만 유일한 신적 위격(ὑπόστασις), , 곧 신성이 적합하다. 이 사고 도식에 따르면, 이러한 신적 속성은 이신론(二神論)을 배제한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으로 철학적 신 개념을 받아들인 첫 번째 인물은 아리우스가 아니라 이미 2세기의 호교론자들에게도 이러한 모방은 있었다. 그렇지만 이 부정 신학을 첨예화하고 극단화한 것은 아리우스였다. 이러한 부정 신학을 바탕으로 아리우스는 당시까지 해결되지 않았던 오리제네스의 삼위 일체 신학을 달리 설명하였으며, 성자를 명백히 피조물 자리에 놓았다. 하느님 자신-이는 성부만을 나타낸다-이 아닌 것은 모두 그에게서 창조된 것 곧 하느님의 의지에 따라 무(無)에서 생긴 것으로 여겨졌으며, 하느님 이외의 모든 것은 비신적인 것 곧 피조물에 속한다고 하였다. 하느님에게는 생성 · 유출 · 신적 실체의 분할 또는 배가가 없다. 이러한 것은 비물질성 · 불변성을 지니는 하느님을 없애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리우스에게 있어 '태어나지 않은' 과 '태어난' 은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 된다. 아들은 시작이 있는 반면에 하느님 자신은 본질적으로 시작이 없기 때문에, 아리우스는 아들을 피조물의 영역으로 옮겨 놓았다. 아들은 모든 비신적 존재와 같이 아버지 의지의 순수한 행위를 통하여 무에서 생겨났다. 성자는 '태어났으며' , 따라서 필연적으로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아리우스와 관계 있는 모든 문헌에 "성자가 존재하지 않은 시대가 있었다" 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고, 이는 또 그의 신학의 핵심에 해당되는 상투어가 되었다.
확실히 성자가 태어난 시점은 "모든 시간과 모든 시대 이전"이다. 그러나 아리우스는 예수에 관한 성서의 증언에 대하여, 하느님의 아들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탁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성자는 창조 이전에 창조되었고, 다른 모든 것은 단지 그를 통하여 창조되었다. 그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첫째이다(잠언 8, 22-31). 아리우스에게 있어 첫 피조물인 아들은 하느님 창조 사업에서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하느님의 중개자이며 도구였다. 아들이 창조의 중개자이듯이 그는 구원자도 된다. 그는 영혼이 없는 육체에 들어가 육체를 취함으로써 로고스인 아들은 복음서에서 전해준 지상 예수의 주체가 된다. 고난받고, 울고, 배고프고, 두려워하는 사람의 모든 감정은 인간의 영혼이 아니라로고스인 아들에게 돌려져야 한다. 이를 통하여 아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유일한 아버지의 영광에 도달하지 못함을 드러낸다. 아리우스에 따르면, 아들은 다른 의미로 로고스와 지혜이다. 본래의 로고스와 지혜는 하느님의 고유하고 나눌 수 없는 본질에 속하기 때문이다. 곧 그는 '하느님' · '로고스' · '소피아' · '능력' 이라는 명칭도 지니지만, 이러한 명칭은 본성 때문이 아니라 은총 때문이다. 하느님은 그리스도가 '변하는' 본성을 가졌지만 우리처럼 자유 의지로 당신의 의지와 늘 결합한다고 예견하였다. 이 때문에 하느님은 인간이 삶의 검증을 통해서만 얻어야 하는 영광을 처음부터 그리스도에게 주셨다. 따라서 이러한 구상은 성자가 모든 피조물보다 위에 있음을 강조하나, 한편으로는 하느님 아버지와 성자 사이의,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모든 피조물과 성자 사이의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차이를 거의 나타내지 못한다.
아리우스의 학설 체계에 따르면 성자는 하느님이나 성부의 본성(οὐσία, ὑὑόστασις)에 관여하지 않고, 따라서 서열 · 권위 · 영광에서 종속적이기 때문에 '참된 하느님' 이 아니다. 성자는 우시아(οὐσία)의 분할로 물질적인 표상들을 지니며, 성부와 성자는 시작이 없는 다른 두 본질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동일 본질' 과 '동일 영원' 과 같은 개념은 부인된다. 성자는 "모든 점에서 성부의 본질과 특성에 걸맞지 않으며 같지 않다." 이 학설의 추종자들이 본원적 의미에서 비유사파(아리우스파, 안호모이스파)이다. 그러나 아타나시오는 이 명칭을 아리우스의 학설에만 한정하지 않고, 넓은 의미에서 니체아파가 아닌 모든 종파를 총칭하는 데 사용하였다.
Ⅲ . 아리우스의 주장에 대한 논쟁
〔논쟁의 발단〕 아리우스 논쟁은 318년경 알렉산드리아 교회 내부의 투쟁으로 시작되었다. 이 논쟁은 당시 주교와 비교적 독자적인 장로 사이의 사소한 다툼이 일조하였으나 이것이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멜리티우스파가 아리우스의 교의가 혁신적이라고 주교에게 고발하자 아리우스는 로고스와 성부가 '동일 영원' 하다는 알렉산데르 주교의 가르침을 논박하였다. 처음에 알렉산데르 주교는 매우 주저하면서 회칙과 데살로니카 또는 비잔틴의 알렉산데르에게 보내는 편지만으로 대응하였다.
신학적 이성주의의 산물인 아리우스의 학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었지만 동시에 그 반대에도 부딪혔다.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는 318/319년에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알렉산드리아 교회에서 쫓아냈고, 이러한 알렉산드리아에서의 논쟁은 이집트를 넘어 동방으로 확산되었다. 이른바 실루치아누스파 사람들, 특히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는 아리우스의 보호자이자 대변자로 활동하였다. "창조된(만들어진) 것은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하지 않는다. 만들어진 것은 자체의 존재에 시작이 있다" 라는 자신의 정식을 논리적으로 비판의 여지가 없는 정통적인 것으로 여긴 그는, 이러한 내용을 아리우스에게 편지로 보냈을 뿐만 아니라 티루스의 바울리노(Paulinus Tyrus, +358)처럼 견해를 같이하는 사람들에게도 아리우스를 지지하도록 설득하기도 하였다. 또 같은 시대의 인물인 가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Euse-bius Caesariensis, 260?~339)는 발라네아의 에우프라티온과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데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들 이전에 아버지의 선재"에 관한 아리우스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로고스를 "실재와 능력에서 아버지와 구분되는"것으로 묘사하였다. 그에게 있어 아들은 "참된 하느님의 모상"이며, 따라서 "유일하게 참된 하느님"과 동일한 하느님이 아닌 참된 하느님 자체였다. 그 밖에 아리우스에게 우호적이었던 비티니아 교회 회의(320)는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로부터 영향을 받아 아리우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한편, 그를 교회에 다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데르는 이 제의를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콘스탄틴 대제 시대의 아리우스 논쟁〕 아리우스가 순식간에 이집트를 포함한 다른 지역에서 대중적 인기와 지지를 얻자,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323)에서는 그를 파문하였다. 그렇지만 이 파문은 논쟁을 종식시키지도 못한 채 오히려 아리우스의 반대자와 옹호자 사이에 분열만 심화시켰다. 이 논쟁의 신학적 의미를 모른 콘스탄틴 대제는 단지 이 논쟁을 국가를 위해 중요한 교회의 일치를 방해하는 교회 내적인 의견의 차이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 논쟁이 교회와 국가의 분열에 관련이 있다고 확신하고, 이를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324년 9월 자신의 조언자인 코르도바의 주교 호시오(Hosius, 256~357/358)를 알렉산드리아에 공식 평화 사절로 파견하였으나, 호시오는 중재 노력에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안티오키아를 거쳐 황제의 관저가 있는 니코메디아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그는 알렉산드리아를 포함한 그 밖의 지역에서 이 논쟁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돌아오는 길에는 공석 중인 안티오키아의 주교좌로 인해 일어난 복잡한 상황을 체험하기도 하였다. 324년 말 또는 325년 초에는 그가 의장으로 주재한 안티오키아 교회 회의가 개최되어 팔레스티나 · 아라비아 · 페니키아 · 철레시리아 · 가빠도기아에서 50명 이상의 주교가 참석하였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공석 중인 주교좌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아리우스의 신학에 대해 태도를 바꾸어 아리우스와 함께 그의 추종자들, 곧 가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 라오디게이아의 테오도투스, 네로니아스의 나르치수스가 단죄되었다. 그러므로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와 안티오키아 교회 회의는 새롭거나 독자적인 신학을 전개한 것이 아니라, 단지 아리우스의 신학을 배척하고 전통적인 세례 신앙을 강화하였을 뿐이다.
325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소집한 제1차 니체아 공의 회의 회의록이 남아 있지 않아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콘스탄틴 대제는 공의회의 심의와 결정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 같다. 그는 보편적 신앙 고백을 정식화하면서 '동일 본질' 이라는 개념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신학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은 공의회가 결정한 교의를 요약한 신경을 만장 일치에 가까운 찬성으로 채택하였다. 그리고 아리우스의 정식을 변론하는 사람들을 "보편적이고 사도들로부터 이어 내려오는 교회가 파문한다" 라는 신경을 보완하는 파문문을 통하여 이러한 신앙 고백의 반아리우스적 경향을 강조하였다. 니체아 신경 가운데 그리스도론과 관련된 부분에서 '동일 본질' 개념은 반아리우스 고백의 핵심적인 표현이 되었으며, 성자를 성부와 명백히 동일시한 이 표현을 위해 공의회 교부들은 다른 모든 정확한 개념을 덧붙였다. 이로써 당시까지 동의어였던 '태어난' 과 '창조된' 의 개념이 명백히 구별되었는데, '태어난' 은 성자가 성부의 의지에서가 아니라 본질(οὐσία)에서 영원 전에 태어났음을 의미하며, '창조된' 은 피조물성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전의적 의미에서만 하느님이 아니라 "참된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된 하느님"이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379~395)와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가 최종 승인한 '동일 본성' 의 개념은 두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첫째, 니체아 공의회에서는 이 '동일 본성' 이라는 말이 이미 268년 안티오키아 교회 회의에서 사모사타의 바오로와 함께 단죄받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이를 받아들였다. 358년에 안치라의 바실리오가 이 문제점을 밝히자 니체아 공의회의 결정을 따랐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논증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둘째, 268년의 단죄는 실제로 신학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이 개념은 '사벨리우스주의' 곧 성부와 성자의 위격적 차이를 없애는 것으로 이해되었는데, 실제로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362)와 가빠도기아 사람들의 신학에 이르기까지 4세기의 논쟁은 '우시아' 와 '위포스타시스' 의 개념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였다. 우시아를 '본질' 로, 위포스타시스를 '실체' 로 이해할 경우, 하느님의 세 위격에 관한 오리제네스의 표현 방식은 성립될 수 없었다. 그러나 신적 위격들을 구분하는 용어의 결핍은 '동일 본성' 에 관하여 사벨리우스적 오해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다. 따라서 니체아 공의회의 결정을 따른 이들은 이 비난을 받아들여야만 했고, 바로 이 때문에 안치라의 마르첼루스와 시르미움의 포티누스가 단죄를 받았다.
니체아 공의회의 결정으로 교회의 일치가 이루어지는 듯하였으나, 논쟁은 그치지 않았고 콘스탄틴 대제의 뜻대로 끝나지도 않았다. 논쟁이 수그러들지 않자 콘스탄틴 대제는 제1차 니체아 공의회의 결정보다는 제국의 내적 일치라는 정치적 필요성에 따라 교회와 제국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최고의 목표를 두었다. 그러나 문제 해결을 위해 콘스탄틴 대제가 취한 정책은 아리우스의 운명을 여러 번 바꾸어 놓았다. 그는 327년 말 또는 328년에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추방 명령을 취소하고 알렉산드리아 교회 공동체에서 아리우스를 다시 받아 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에서는 328년 6월 8일 아타나시오가 알렉산데르 주교의 후계자로 임명되었는데, 이러한 조치는 콘스탄틴 대제에게 비타협적이었던 아타나시오에 대한 화해의 표시였다. 아타나시오는 니체아 신경에 관하여 어떠한 타협도 승인하지 않은 철저한 옹호자로 에우세비우스파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황제의 종교 정책을 방해하는 인물로 인식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가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가 의장으로 활동한 안티오키아 교회 회의(328/329)에서는 아리우스를 복권시킨 반면에, 철저하게 니체아 공의회의 입장을 따른 안티오키아의 에우스타티오(Eus-tathius, +337?)와 가자의 아스클레파스(Asclepas, +337?)는 면직하였다. 한편 황제는 333년에 아리우스의 작품들을 태워 버리라는 칙령을 반포하였고, 에우세비우스파 주교인 안티오키아의 플라칠루스(Flaccillus, +343?)가 의장이었던 티루스 교회 회의(335)에서는 가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와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의 부추김으로 아타나시오를 면직하였다. 그러나 며칠 뒤에 열린 예루살렘 교회 회의(335. 9. 17)에서는 콘스탄틴 대제와 두 명의 에우세비우스가 참석한 가운데 아리우스에게 교회 회의의 기대에 부응하는 신앙 고백서를 제시하게 한 다음 교회에 받아들였으며, 알렉산드리아와 이집트 교회에는 분열을 끝낼 것을 촉구했다. 그렇지만 아리우스는 이러한 결정이 나기 전인 336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사망하였다.
〔이후의 아리우스 논쟁〕 국가 정책적 관점에서 보면 콘스탄틴 대제 이후의 아리우스 논쟁은 황제의 교회 정책이 초래한 불행의 역사였다. 337년의 정권 교체는 아타나시오의 유배 생활을 끝나게 하였으며, 새로운 교회 정치적 상황을 야기하였다. 동방에서 콘스탄티우스 2세(337~361)는 콘스탄틴 대제가 취한 정책을 지속시켰으나, 서방에서의 콘스탄스(337~350)는 니체아 공의회의 결정을 따르는 이들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펼쳤다.
신학의 발달은 341년 1월 6일에 열린 안티오키아의 '교회 축성 교회 회의' 에 이르러서 이루어졌다. 이 교회 회의에서 가결된 세 가지 정식 가운데 두 번째 정식은 훗날 '제2차 안티오키아 정식' 으로 불리면서, 신학적으로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정식은 과격한 아리우스주의와 니체아 신경을 엄격히 고수하는 니체아파 사이에서 중용의 길을 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비유사파를 단죄하였으나, '동일 본성' 개념은 간과하였다. 또한 제2차 안티오키아 정식은 성자의 신성을 강조하였으나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다소 종속적으로 이해하였으며, 하느님안의 세 위격에 관한 오리제네스의 학설을 받아들였다.
서방의 콘스탄스 황제가 세계 공의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자 동방에서는 '제2차 안티오키아 정식' 을 수정한 이른바 '제4차 안티오키아 정식' 을 제시하였다. 이 정식이 어느 교회 회의에서 작성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제2차 안티오키아 정식을 계승한 것으로 동방과 서방에서 폭 넓은 신학적 논의의 토대가 되었다. 이 정식에서 반아리우스적 구절들은 니체아 신경과 밀접히 관련되어 표현되었으며, 오리제네스의 학설 특히 세 위격에 관한 학설은 삭제되었고, '동일 본성' 개념도 사용되지 않았다.
동방 교회의 지도자였던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가 341년에 사망하자 콘스탄스와 콘스탄티우스 2세는 342/343년 가을에 제국 동쪽에 있는 세르디카(현 소피아)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한 뒤, 자신들의 세력 범위 안에서 교회의 긴장을 완화하고자 하였다. 이때 서방에서는 90~100명의 주교가, 동방에서는 75~80명의 주교가 참석하였다. 그런데 대부분 아리우스에게 우호적인 동방의 주교들은 아타나시오와 마르첼로와 이들의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의 면직이 당연하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으나, 서방의 주교들은 이에 반대하였다. 급기야 양측이 분리되어 개최된 교회 회의에서는 서로 상대편을 파문하기에 이르렀다. 동방의 주교들은 온 교회에 보내는 방대한 내용의 서한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변론하였으며, 제4차 안티오키아 정식에 파문 내용을 첨가하고 그들의 신앙 고백을 수정하였다. 마찬가지로 서방의 주교들도 아리우스의 학설뿐만 아니라 동방 전체의 삼위 일체 신학에 단호히 반대하면서, 위격의 단일성과 성부와 성자의 일치를 주장하는 신앙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장문의 편지에서 기술하였다. 신학적으로 양측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서술될 수 있다. 니체아파는 그들의 반대자들이 사벨리우스주의로 이해한 하나의 위격론을 주장한 반면에, 반니체아파는 그들의 적대자들이 아리우스주의와 삼신론(三神論)으로 추정할 수 있는 둘 또는 셋의 위격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 교회 회의는 교회의 일치보다는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분열을 촉진시켰는데, 양측의 주요 논점 가운데 하나가 니체아 신경에 관한 교의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아타나시오와 마르철로 등의 복권 문제였다. 서방 교회의 주교들은 동방 교회의 주교들이 도착하기 전에 아타나시오와 마르첼로를 이미 교회 공동체에 받아들였기 때문에, 양측이 참가한 공동 회의는 열리지 않았다. 양측은 따로 교회 회의를 열어 서로 상대방을 파문하였다. 그러므로 실질적인 협상이 시작되기 전에 동방의 주교들이 필리포펠로 떠났기 때문에 동방과 서방의 주교들이 만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세르디카 교의 서한은 교의사에서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344년에 열린 안티오키아 교회 회의에서 이듬해 밀라노 교회 회의에서 제기된 '장행(長行)의 신앙 고백' 이라는 문서가 작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기에는 제4차 안티오키아 정식 · 세르디카 교회 회의에서 파문받은 사람들의 명단 · 신학에 관한 일곱 조항의 선언이 언급되어 있다. 또 '세 위격' 과 같은 논의의 여지가 있는 개념들을 피하고, '사물들' 또는 '위격들' 과 같은 명확한 개념으로 대체하였으며, 신성의 일치를 어떤 공간이나 중재 없는 결합으로 뚜렷이 강조하였다. 그렇지만 이 제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편 제국의 정책은 서방의 상황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페르시아인들로부터 압박을 받았으며, 콘스탄스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동방에서 니체아파가 더 이상 박해를 받지 않도록 조처하였다. 이러한 서방의 정치적 우위 덕분에 아타나시오도 346년에 알렉산드리아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콘스탄스가 사망하자 곧바로 교회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일인 통치자가 된 콘스탄티우스 2세는 니체아파에 대한 조처를 취하기 시작하였으며, 제국 이념의 관점에서 일치된 신앙 고백으로 정치적 일치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또 이러한 목적에 방해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국가 권력으로 굴복시켰을 뿐만 아니라아를 교회 회의(353) · 밀라노 교회 회의(355) · 베지에-비테라 교회 회의(356) 등에서 자신에게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던 아타나시오를 단죄하였다. 아타나시오의 지지자인 카랄리스의 루치페로(Luciferus, ?~370/371?), 푸아티에의 힐라리오(Hilarius, 315~368) , 코르도바의 호시오, 로마의 리베리오(Liberius, ?~366)도 함께 단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콘스탄티우스의 강권 정책은 뜻하지 않게 교의 발전에 긍정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는데, 동방으로 추방된 일부 주교들은 동방의 신학적 문제점들과 니체아의 '동일 본성' 에 대한 동방의 신학적 입장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를 니체아 신경과 일치시키려는 논쟁의 실질적인 중재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350~360년대 신학 논쟁에서 아리우스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던 이들은 국가 평화 정책의 희생자가 되어 니체아파의 에우스타시오, 마르철로, 아타나시오와 비슷한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아리우스주의의 부활과 관련이 있는 중요한 인물은 시리아인 아에티우스(Aetius, ?~365)와 에우노미우스(Eunomius, 325?~394)였다. 성향이 매우 급진적이었던 안티오키아의 주교 레온티우스(Leontius)의 제자 아에티우스는, 콘스탄티우스의 일인 통치 시대까지는 논쟁의 전면에 나서지 않고 오로지 철학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아에티우스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타나시오가 동방에서 단죄되고, 안티오키아 · 콘스탄티노플 · 알렉산드리아 등 중요한 주교좌가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넘어갔을 때였다. 뛰어난 신학 교사이자 논쟁자였던 그는, 처음에는 그가 350년경 부제품을 받았던 안티오키아에서, 그리고 356/357년경부터는 자신의 제자인 가빠도기아 사람 에우노미우스가 합류한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하였다. 또 그는 연설가이자 토론의 명수로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능력이 특출하였는데, 안치라의 바실리오와 세바스티아의 에우스타시오를 상대로 벌인 공개 토론에서 이들의 논거를 매우 조리 있게 논박하였다고 한다.
훗날 키지쿠스의 주교가 된 에우노미우스는 355년경부터 과격한 비유사파 학설을 다시 받아들였다. 아리우스의 신학과 다르기 때문에 '신아리우스파' 또는 '비유사파' 라고 불리는 이 학설은, 특히 두 가지 관점에서 다음과 같은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첫째로, 그들은 매우 합리적인 신론을 전개하였다. 하느님의 본질은 인간이 성서적 · 교의적 전제를 논리적으로 정확히 사유하고 적용하는 경우에만 인식할 수 있다. 둘째로, 그들은 개념과 실재의 일치를 주장하여 표현된 실제성의 본성을 개념에서 확실히 추론할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다른 개념들로 표현된 사물들은 그들의 본성에서도 서로 다르다. '태어나지 않은' 이란 속성은 성부의 본질에만 속하며, 성자는 '태어난' 이란 속성을 지닌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의 본질들은 필연적으로 다르다. 그러므로 신아리우스파의 주장은 성자가 "본질의 관점에서 아버지와 비슷하지 않다" 는 것이었다.
안티오키아의 주교 레온티우스의 후계자 에우독시우스(Eudoxius, +370)는 시리아 지방에 있는 게르마니치아의 주교였는데, 전임자의 비유사파 경향을 철저히 추구하였다. 즉 그는 아에티우스와 그의 제자 에우노미우스의 과격한 발언, 다시 말하면 성자는 모든 점에서 성부와 같지 않으며, 실제로 성부에게서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입장을 지지하였다. 이러한 과격한 아리우스파 노선은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화해 정책에 방해가 되었고, 이로 인해 에우독시우스는 358년 자신이 소집한 안티오키아 교회 회의에서 면직되었다. 360년에 열린 콘스탄티노플 교회 회의에서는 아에티우스를 단죄하는 동시에 에우노미우스를 주교로 임명하였으며, 이후 아에티우스와 에우노미우스는 작품 활동을 통하여 자신들의 학설 체계를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등 끊임없이 영향을 미쳤다. 특히 에우노미우스의 작품에는 니체아 교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담겨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가장 저명한 신학자들인 바실리오(Basilius Magnus, 329~379), 알렉산드리아의 디디모(Didymus Caecus, 313?~395/399?), 라오디체아의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315~390?),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Theodorus, 350?~428) 등도 이 학설 체계를 쉽게 반박하지 못하였다.
이후의 모든 교회 회의는 교의의 발달을 이루지 못한 채 아타나시오에 대한 찬부(贊否) 결정만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교회 정책과 신학의 발달은 시르미움 교회 회의(357)에 이르러 다시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는데, 그는 제국을 통일한 뒤 제국 전체에 구속력을 갖는 신앙 정식을 만들고자 하였다. 황실 주교인 발렌스(Valens), 우르사치오(Ursacius), 제르미니오(Ger-minius)의 주도로 열린 시르미움 교회 회의에서는-351년의 '제1차 시르미움 정식' 이후에- '제2차 시르미움 정식' 을 결의하였고, 본질(usia)과 실체(substantia) 개념에 관한 모든 사변과 이 개념들에서 파생된 '동일 본성'과 '유사 본질' 이란 낱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오직 성서에서 증언된 진술만 유효하였으며, 이러한 진술들은 성자와 성부의 관계가 종속적이듯이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명백히 구별하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그렇지만 성자도 하느님이다. 이 교회 회의에서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이와 같이 구별하여 니체아 신경의 중심 개념인 '동일 본성' 을 처음으로 파기하였다. 그러나 문제점 자체를 은폐하면서 제국의 일치를 이루려는 그의 첫 시도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안치라 교회 회의(358)와 리미니 · 셀레우치아 교회 회의(359)는 콘스탄티우스 2세가 361년 사망할 때까지 행한 일치 노력의 총결산이었다. 안치라의 바실리오는 교회 축성을 기회로 358년 부활절 이전에 교회 회의를 소집하였으나, 날이 추워 12명의 주교들만 참석하였다. 이들은 비유사파와 니체아파 주교들을 면직하면서 처음으로 성자는 성부와 "본질의 관점에서 비슷하다" 는 유사 본질파의 중용적 신앙 고백을 제시하였다. 바실리오는 니체아 신경의 '동일 본성' 개념이 268년 안티오키아 교회 회의에서 이미 단죄받았음을 내세워 유사 본질파의 입장에 동조하도록 황제를 설득하였다. 그는 우시아를 개별적 실체로 이해하였으므로 신성에 세 위격과 세 본질이 있다고 주장하였고, 성자의 본질이 신성을 나타낼 경우 성부의 본질과 유사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옹호로 동방에서 짧은 기간이지만 폭 넓은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 2세에 대한 바실리오의 영향력이 줄어들자 황제는 유사파 입장을 정치적으로 관철시켜 이에 저항하는 70명의 주교를 면직하고 추방시켰다. 이어 359년에는 서방의 리미니와 동방의 셀레우치아에 서방의 '동일 본성' 파 주교들과 동방의 유사 본질파 주교들이 따로따로 참석한 교회 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이 회의에 참석한 모든 주교들은 실제로 황제의 뜻을 따르지 않고 각각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양측의 주교들에게 트라키아 지방의 니케에서 황실 주교들이 제안한 일치 정식에 서명하라고 강요하였다. 성자가 성부와 "성서의 말씀에 따라 비슷하다"라는 이 일치 정식은 중립적인 것이었지만 별반 내용은 없었으나, 그 뒤에 열린 콘스탄티노플 교회 회의(360)에서 추인(追認)되었다. 그렇지만 361년 율리아누스 황제(361~363) 때 열린 파리 교회 회의에서는 이 결정에 반대하면서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동일 본성으로 고백하였다. 물론 이 개념은 유사 본질 개념과 같은 화해적 의미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한편 361년에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의 사망으로 '배교자' 율리아누스가 등극하자 신학적 논쟁은 국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대립이 중재될 수 있었다. 즉 이듬해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가 열릴 수 있었던 것은 율리아누스가 교회의 모든 사건에 대해 철저히 무관심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회의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열리기 전 아리우스 논쟁에 궁극적인 방향을 제시하였으며, '안티오키아인들에게 보낸 교의 서한' 을 통하여 대 바실리오와 그의 동료들이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때까지 정통적인 해결책으로 계속 발전시킨 신학적 중재 방법을 처음으로 제시하였다. 성령의 신성을 강조한 이 교의 서한은, 하느님 안에 하나의 위격에 관한 진술 외에 세 위격에 관한 정식을 처음으로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단지 실체가 아니라 위격으로서의 '위포스타시스' 에 관한 서로 다른 이해를 처음으로 제시하였다. 362년 알렉산드리아의 협상으로 동방에서는 하나의 위격론과 세 위격론 간에 타협의 길이 트이기 시작하였다. 특히 '가빠도기아 세 교부' 인 가이사리아의 바실리오(330~379) 니사의 그레고리오(335?~395?),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가 이러한 타협을 위한 이론적 · 용어적 기초를 마련하였기 때문에, 논쟁들의 종말은 단지 시간 문제였다. 그러나 성령의 신성에 관한 새로운 교의 문제가 다시 교회의 분규를 일으켰고, 서방과 동방 사이의 화해 노력은 특히 안티오키아 분열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아리우스 논쟁에 관한 이러한 신학 발전에서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 이후 중요한 교회 회의는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발렌스 황제(364~378)가 리미니 · 셀레우치아 교회 회의의 유사파 일치 노선을 전적으로 지지하였고, 니체아파뿐만 아니라 유사 본질파에게도 일치 결정을 따르도록 정치적 조치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또 379년부터는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379~395)가 정치적 차원에서 이 논쟁을 마무리하였다. 키지쿠스의 에우노미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비유사파 또는 '신아리우스파' 는 니체아파, 특히 대 바실리오와 니사의 그레고리오와 함께 신학 논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교회 정치적으로 보면 단지 하나의 종파에 지나지 않았다. 발렌스 황제는 콘스탄티우스 2세처럼 유사파를 계속 지지하였으며, 특히 주교들의 임명을 통하여, 더 나아가서는 공공연한 압력과 위협으로 이들을 위해 모든 조처를 취하였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 황제(364~375) 때 서방 교회는 교황다마소 1세(366~384)와 대립 교황 우르시노(366~367) 사이의 논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니체아파에 머물러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그라티아누스 황제(375~383)의 재임 기간에도 마찬가지였다.
Ⅳ. 아리우스 논쟁의 종식과 아리우스파의 운명
국가와 교회는 이단을 극복하거나 적어도 제한하려는 동일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지만, 근본적인 동기는 서로 달랐다. 교회에서는 신앙의 교의적 명확성이 중요하였지만, 황제에게는 사회의 평화와 국가의 일치가 더 중요하였다. 이 때문에 이단자들에 대한 국가의 법률은 정치적 상황과 밀접히 연관되었다. 즉 입법 조치는 교의적 차이에서가 아니라 각 이단의 정치적 위험성과 구조적 특성에 따라 이루어졌다.
아리우스 논쟁의 최종 국면은 379년 1월 19일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즉위함으로써 이루어졌는데, 그는 즉위 직후 니체아 신경을 제국의 종교로 선언하였다. 이는 개인 신앙의 배경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의 이념인 하나의 일치된 신앙만 제국에 있어야 한다는 자의식(自意識)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또 그 해 8월 3일 국민들에게 니체아 신경만 받아들이도록 명령한 데 이어 이듬해 2월 27일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는 칙령을 제국 전역에 공포하였다.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교의 결정들은 공식적인 종점이 되었다.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의 규범 규정 제1조는 모든 이단, 특히 에우노미우스파 또는 비유사파, 아리우스파 또는 에우독시우스파, 절충적 아리우스파 또는 성령 적대론자(381년 이전에 성령의 신성과 '동일 본성' 을 반대한 사람들), 여러 이단적 경향, 곧 사벨리우스파, 마르첼루스파, 포티누스파(276년 사망한 마르첼루스의 제자였던 시르미움의 포티누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아폴리나리우스파를 단죄하였다. 또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며 같은 해 7월 19일과 30일에 공포된 황제의 칙령은, 에우노미우스파 · 아리우스파 · 아에티우스파에게 도시 안곽 어디에서든 교회를 지을 수 없다고 금하였을 뿐만 아니라 집회와 강의도 금하였다. 그리고 만일 이를 어길 경우 이단적 비밀 집회가 열리는 지역의 토지는 물론 그 건물까지 몰수하였다. 반면에 현존하는 모든 교회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결정의 의미에서 '정통 교회' 의 주교들에게 즉시 넘겨졌다.
이단에 대한 국가의 법률이 내용에 따라 이루어졌다면, 조직화된 아리우스파의 모든 교회와 전례는 명맥을 잇지 못하였을 것이나 실제로 이러한 조치는 철저히 시행되지 않았다. 오히려 황제는 383년 6월 제국의 수도에서 '종교 대화' 를 개최하여 두 명의 니체아파 주교 이외에 성령 적대론자의 대표자 키지쿠스의 엘레우시우스, 유사파의 대표자 데모필루스(에우독시우스의 후계자이며 이전의 콘스탄티노플 주교), 급진적 아리우스파의 지도자 에우노미우스를 초대하였다. 이때 에우노미우스가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제안하였으나 거부되었다. 이러한 일치 시도가 실패한 뒤 비가톨릭 신앙 공동체에 대하여 일반적인 집회 금지가 포고되었다. 그리고 이 금지는 종종 되풀이되었는데, 특히 매우 위험한 것으로 여겨진 에우노미우스파에게 주로 행하여져 이들의 공동체는 지속적으로 약화되어 갔다. 5세기 중엽 테오도레투스(Theodoretus, 393~466)는 아직도 몇몇 도시에 에우노미우스 공동체의 사람들이 극소수 있다고 보고하였으나, 6세기 초 그들에 관한 흔적은 모두 사라졌다.
이러한 운명은 서방 아리우스주의에서 더 일찍 일어났다. 361년 콘스탄티우스 2세가 사망한 뒤 그의 후계자들인 율리아누스, 요비아누스(363~364), 발렌티니아누스 1세 황제가 교회의 고유한 문제에 대한 규제를 교회에 맡김으로써 서방 교회의 압도적인 다수는 니체아 정통 신앙으로 돌아왔다. 단지 북이탈리아(밀라노)와 국경 지역인 일리리아에서만 유사파 아리우스주의가 유지되었으나, 유사파 주교 밀라노의 아욱센티우스(Auxentius, ?~374)의 후계자로 암브로시오(339?~397)가 선출된 뒤에는 북이탈리아도 니체아 정통 신앙으로 돌아왔다. 다마소 1세 교황은 밀라노의 암브로시오와 함께 가톨릭을 옹호한 발렌티니아누스 1세 황제와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 치하에서 이탈리아 북부와 일리리아 지방의 유사파 주교단을 니체아파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아리우스파 주교인 울필라스(Ulfilas, 311~383)의 게르만족 선교 활동으로 게르만 정복자들이 아리우스주의를 받아들이면서, 국가 교회에서 라틴 아리우스주의가 잔존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 반아리우스주의 ; 성자 종속설 ; 아리우스 ; 에우노미우스주의 ; → 그리스도론 ; 그리스도 양자설 ; 모나르키아니즘 ; 모달리즘 ; 삼위 일체론 ; 이단)
※ 참고문헌 H.R. Drobner, Lehrbuch der Patrologie, Freiburg ·Basel · Wien, 1994/ A.M. Ritter, 《TRE》 3, pp. 692~719/ Justo L. González, 이형기 · 차종순 역, 《기독교 사상사》 I ,대한 예수교 장로회 출판국, 1988. 〔河聖秀〕
아리우스주의
— 主義
〔그〕'Αρειανισμός · 〔라〕Arianismus · 〔영〕Arianism
글자 크기
8권

325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소집한 제1차 니체아 공의회에서는 아리우스주의를 이단으로 선언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