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미국 가톨릭 교회 내의 개혁 운동. 넓은 의미에서는 미국적인 사고와 미국적인 문화를 의미하지만, 교회사에서는 19세기 말 미국의 가톨릭 교회 내 일부 인사들이 당시의 미국 사회에 가톨릭 교회를 적응시키려는 목적에서 여러 가지 교리의 단순화를 제안한 시도 또는 운동을 말한다.
당시 이 운동을 이끌어 간 사람들은 네 가지를 주장하였는데, 첫째 사람들을 교회와 신앙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규율과 교리를 완화 내지는 단순화하여야 하며, 둘째 완덕을 지향하는 사람에게 교회의 지도는 중요하지 않으며, 셋째 수동적인 복종 · 겸손 · 금욕보다는 능동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하고, 넷째 자유를 속박하는 수도 서원은 철폐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빠른 속도로 변화되는 미국 사회에 적극적인 자세로 적응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선교 단체인 바오로회(Paulists)의 창립자 헤커(I.T. Hecker, 1819~1888)에 의하여 시작된 아메리카니즘은, 19세기 말에 '아메리카니스트'(Americanist)라고 불리는 소수의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신부들에 의해 더욱 활성화되었다.
〔배 경〕 19세기 말 절정에 이른 '아메리카니즘 위기'(Americanism crisis)는 이미 오래 전부터 뿌리가 내려져 있었고, 미국의 역사적인 주요 단면들과 밀접하게 연루되어 있었다. 아메리카니즘은 크게 미국 가톨릭 내부의 반대되는 두 그룹, 즉 전통을 고수하는 보수주의자들과 미국 가톨릭 교회가 미국적인 방식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진보주의자들 사이의 충돌이라고 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 독일계가 가장 큰 세력이었는데 특히 중서부의 독일인들과 보수적인 아일랜드계 성직자들이 주를 이루었던 반면에, 후자는 헤커 신부와 바오로회의 노선을 따르는 성직자들이 주를 이루었다. 보수적 입장의 지도자는 코리건(M.A. Corrigan, 1839~1902) 뉴욕 대주교와 교구 학교의 모델을 제시한 로체스터의 대주교 맥퀘이드(B. McQuaid, 1823~1909)였다. 그리고 진보적 입장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볼티모어 대주교이자 1886년에 추기경이 된 기본스(J. Gibbones, 1834~1921) 신부, 가톨릭이 미국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아이얼런드(J. Ireland, 1838~1918) 대주교, 아메리카 가톨릭대학교(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초대 학장이었던 킨(J.J.Keane, 1839~1918) 주교, 로마의 북아메리카 신학원(North American College) 원장 오코늘(D. O'Conell) 신부 등이었다.
이 두 입장 사이의 충돌은 185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1850년대 미국은 역사상 가장 많은 이민자들이 들어왔고, 이와 더불어 가톨릭 이민자의 수도 급증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항하는 토착주의 역시 더욱 거세어졌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헤커 신부는 1858년에 바오로회를 창립한 뒤 미국 내의 가톨릭 교회는 미국 민주주의 발전에 동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남북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 내의 가톨릭은 자신이 사는 지역과 정체성을 같이하였다. 즉 북부에 사는 가톨릭은 북부 진영으로, 남부에사는 가톨릭은 남부 진영으로 합류하였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가톨릭 교회는 북부와 남부가 다시 통합되고 2개의 대교구와 10개의 교구에 대주교 7명을 비롯하여 주교가 38명에 이를 정도로 매우 빠른 성장을 보였다. 그러나 독일계 신자들과 아일랜드계 신자들 간의 갈등이 더욱 첨예해지면서 "아메리카니즘 위기"가 시작되었다. 남북 전쟁 이후 대부분의 교구를 차지한 독일계 성직자들은 독일어를 통해서만 교리의 내용이 정확하게 전해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교구 학교를 설립하였다. 또 거절되기는 하였지만, 1886년 11월에 밀워키(Milwakee) 대교구의 애벨렌(P.M. Abbelen) 신부는 교구 영역에 관계없이 독일 평신도들이 교회 운영의 책임을 맡도록 해달라는 청원서를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 복음화성)에 제출하기도 하였다.
〔전개 및 종결〕 미국 내의 가톨릭이 크게 성장을 하자 1884년 11월 9일부터 12월 7일까지 개최된 제3차 전국 공의회에서는, 미국에서 종교 교육의 기본적 수단으로 채택된 볼티모어 교리서의 준비 및 모든 본당 내에 초등학교를 설립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1889년 위스콘신(Wisconsin)에서는 아이얼런드 대주교의 주장에 따라 모든 어린이는 각 구역에 있는 공립 학교에 다녀야한다는 내용의 법령이 통과되었다. 그는 가톨릭 교구 학교가 아니라 공립 학교 제도에 의해서만 이민들의 복지가 향상될 수 있다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또 그는 주 정부와 교회 간의 협력을 강조하면서 각 시 정부가 그 구역의 교구 학교를 양도받아 교육을 실시하고, 대신에 공인된 가톨릭 교사들에게 봉급을 지급하며, 정규 학교 시간 이후에만 종교 교육을 허용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1891년에 아이얼런드 대주교는 이러한 안에 대하여 교황의 허가를 받아 냈으나, 프로테스탄트의 반대로 실행하지는 못하였다. 그 뒤 1896년에 아이얼런드 대주교가 갑자기 해임됨으로써 진보적인 아메리카니스트들에게 큰 타격을 안겨다 주었다. 그의 해임은 아메리카니스트와 프로테스탄트의 관계가 가까워졌기 때문인데, 그는 1890년에 하버드 대학교 총장 초청으로 대학 예배 시간에 설교를 함으로써 당시 보수 진영으로부터 비난을 받았었다. 한편 교황청에서는 오래 전부터 미국에 교황 대사를 파견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가톨릭을 "외국인 군주에 의한 종교" 라고 비난하는 프로테스탄트를 의식하여 실행에 옮기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교황 레오 13세(1878~1903)는 사톨리(Francesco Satolli) 신부를 개인 특사 자격으로 파견하였고, 미국에서 활동하던 중 추기경이 된 사톨리 신부가 아메리카니스트들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자, 교황청에서는 그들이 이끄는 개혁 운동에 대해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1884년에 교황이 비밀 상조회(secret societies)에 대한 지원을 금지하는 문헌을 발표한 것이 그 한 예이다. 당시 비밀 상조회를 적극 지원하는 입장이었던 아메리카니스트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이민자들이 이 조직을 통하여 경제적 · 사회적으로 상부상조한다고 판단하였고, 또 노동 조직인 노동 기사단(Knights of Labor)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하였다. 그러나 미국 내의 보수적 입장들이 교황의 노선을 따를 것을 촉구하면서 노동 기사단을 비방하자, 미국의 아메리카니스트들은 드러내 놓고 보수주의자들에게 대항하였다. 결국 이 사실이 교황청에 알려졌고, 이로써 아메리카니스트들에 대한 견제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91년에 발표된 엘리엇(W. Elliott) 신부의 《이사크 헤커의 생애》(The Life of Isaac Hecker)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하여 교황은 1895년에 <론젠과 오체아니>(Longenqua Oceani)를 통하여 미국의 안정과 번영은 인정하지만 교회와 국가의 분리는 잘못이라고 단정하였다. 이는 당시 미국의 발전상을 고려해 볼 때 매우 보수적인 내용이었다. 교황은 또 그 해 오코늘 신부를 로마의 북아메리카 대학 학장직에서 해임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킨 신부를 아메리카 가톨릭대학교 학장직에서 해임하였다. 이어 1897년에는 프랑스에서 엘리엇 신부의 책이 프랑스어로 번역 · 출판되었는데, 이 책 머리말에서 아이얼런드 대주교는 헤커 신부가 자신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고 소개하였다. 이 책은 미국과 프랑스에서 찬사와 비난을 함께 받을 정도로 큰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가톨릭 교회가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권위적이라는 비판이 일자 교황 레오 13세는 1899년 1월 22일 교황 교서 <테스템 베네볼렌시에>(Testem Benevolentiae)를 발표하여 아메리카니즘이 오류임을 지적함으로써 이 "위기"는 막을 내렸다. 교황은 이 교서에서 영원한 교도권을 배제한 점, 초자연적인 덕보다 자연적인 덕을 예찬한 점, 수동적인 덕보다 능동적인 덕을 선호한 점, 수도 서원을 거부한 점, 비가톨릭인에 대한 접근과 호교론의 새로운 방법 적용 등 다섯 가지를 오류라고 지적하였다. 결국 이로써 아메리카니즘 위기는 일단락되었으나, 이는 미국 교회 내부의 한 입장이 국제적으로 문제화되었던 첫 번째 사건이었다.
〔평 가〕 아메리카니즘은 미국 가톨릭 교회 내에서 큰 지지 세력을 얻지 못한 소수에 의한 운동이었다. 미국 대다수의 주교와 성직자들이 아메리카니즘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아메리카니즘은 교황 교서 발표 이후 크게 위축되었다. 물론 교서의 발표로 미국 가톨릭 교회의 사회 운동에 어느 정도 제동이 걸렸지만, 그로 인해 가톨릭 교회의 사회 활동이 적극성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 레오 13세 ; 미국)
※ 참고문헌 A.I. Abell ed., American Catholic Thought on Social Questions, Indianapolis, Bobbs-Merrull Co., 1968/ 一, American Catholicism and Social Action : A Search for Social Justice, 1865~1950, Garden City, New York, Hanover House, 1960/ S.E. Ahlstrom,A Religious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 vol. 2, New York, Doubleday & Co., Inc., 1975/ R.D. Cross, The Emergence of Liberal Catholicism in America, Cambridge, Mass, Harvard Univ. Press, 1958/ T.T. McAvoy, The Great Crisis in Americam Catholic History, 1895~1900, Chicago, Henry Regnery Co., 1957/ J.H. Moynihan, The Life of Archbishop John Ireland, New York, Harper & Row, 1953/ C. Shields, Democracy and Catholicism in America, New York, McGraw-Hill Book Co., 1958/ J. Duchesne-Guillemin, 《NCE》1, pp. 443~445. 〔黃惠聖〕
아메리카니즘
〔라〕Americanismus · 〔영〕Americanism
글자 크기
8권

아메리카니즘은 바오로회의 창립자 헤커 신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