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로에스 (1126~1198)

〔라〕Averroë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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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로에스.

아베로에스.

이슬람 철학자. 아랍어 이름은 아불 왈리드 무함마드 이븐 루슈드(Abil Walid Muammad Ibn Rushd).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이슬람 신앙을 통합시키고자 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에 방대한 주석을 함으로써 중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사상에 대한 연구를 활성화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생 애] 1126년 스페인 코르도바(Cordoba)의 유명한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이슬람 학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습득하였으며, 이슬람 신학과 법학을 심도 있게 공부하였고 문학 · 수학 · 철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1154년부터는 철학자 이븐 투파일(Ibn Tufail, +1185)의 소개로 아부 야굽 유수프(Abixiqbbiaust의 궁정에서 일반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아리스토텔레스의 전 작품을 주석하는 작업을 하였는데, 이러한 인연으로 1171년에 유수프에 의해 세비야의 법관으로 임명되었다. 1173년경 전임되어 다시 코르도바로 돌아온 그는, 공적인 책임 때문에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이때부터 자신의 저술들을 편집하는 데 몰두하였다. 많은 여행을 한 후 1182년에 이븐 투파일에 이어 유수프의 주치의가 되었으며, 유수프를 계승하여 통치자의 자리에 오른 그의 아들 야굽 알 만수르(Ya'qb al-Mansir)로부터도 신뢰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신학자들로 인해 총애를 잃었으며, 급기야 잡다한 이단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고소당함으로써 코르도바 부근에 있는 루케나로 추방되었다. 만수르는 약학 · 수학 · 천문학 분야를 제외한 그의 모든 작품을 불사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후 이 명령이 철회되면서 아베로에스는 명예를 되찾았지만,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1198년에 모로코 남부 마라케시(Marakresh)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저 서] 아베로에스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엄청난 분량의 저서들을 남겼는데, 크게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주석과 독창적인 저술들로 나누어진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을 주석하는 데 자신의 학문 생활 대부분을 바쳤던 그의 주석서들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서방 세계에서 '에피토메' (Epitome) 또는 '대전'(大全, Summa)이라고 불리는 소 주석서' 로, 아베로에스는 이 주석서에서 스스로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들을 요약했다. 둘째는 '탈리스' (talbis)라고 불리는 중 주석서' 로, 전체 본문의 첫 단어들만을 나열한 후 본문을 단락별로 주석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 내용을 소개하고 자기 나름의 해설과 해석을 덧붙여 전개하였으나, 어느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이고 어느 것이 아베로에스의 것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셋째는 '타프시르' (tafsi)라고도 불리는 '대 주석서' 로, 본문을 단락별로 완전히 인용한 후 철저하게 주석한 것이다.
이 주석서들은 그가 주석서를 쓰는 것에 대한 관심, 주석의 범위, 풍부한 자료와 정교함 때문에 여러 학교에서 철학 분야의 기본 도서로 이용되었으며, 대부분 외국어로도 번역되었다. 먼저 히브리어로 번역된 뒤 나중에 라틴어로 번역되어 서유럽 사상계에서 많은 독자를 얻었는데, 애석하게도 아랍어로 쓰여진 주석서 원본들은 절반 정도 소실된 상태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 중 아베로에스가 한 38개의 주석 가운데 아랍어 원본으로 남은 것은 28개 정도이고, 히브리어 번역으로는 36개가 남아있다.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427~348/347)의 작품 중에서는 《국가》를 주석하였다.
아베로에스의 독자적인 작품으로는 《파괴의 파괴》(Tahafut at-tahafut)가 유명한데, 그는 여기에서 알가잘리(al-Gazzali, 1058~1111)가 자신의 저서 《철학자들의 파괴》(Tahafut al-falasifa)에서 철학자들을 비판하였던 것을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이외에 《종교적 교의에 관련된 방법 해설》(al-Kaif a manahig al-adilla)과 《종교와 철학의 조화에 관한 근본 연구》(Fasl al-makil) 등이 있다. 그의 철학 작품들은 다방면에서 맹렬하게 공격을 받았는데 현대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오해를 받은 때도 많았다고 한다.
[사 상] 지성적이고 이론적인 경향을 지녔던 아베로에스는 아리 스토텔레스야말로 지성의 화신(1L身)이라고 주장하였다. 중세 아랍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학자였던 아베로에스는, 보편 관념과 인과율을 확실한 철학적 · 자연 과학적 지식을 얻기 위한 근거로 간주하였다. 그에 의하면, 신(神)은 초월적인 인과 관계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즉 신은 '제1 동자(動者)' 이며 다양한 본질들을 직접적으로 창조하는 것이지, 아비천나(Avicenna, 980?~1037)가 생각한 것처럼 그 사이에 있는 독립적인 지성들을 통해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신은 단지 보편적인 것만을 안다고 한 아베로에스의 주장은 코란의 주장과 상충되는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신은 세계를 영원으로부터 창조하였으며, 이미 제1 질료 자체가 영원한 것이었다. 그의 형이상학은 가장 낮은 단계인 제1 질료에서 가장 높은 단계인 순수 현실(actus purus) 즉 신에 이르며, 또 그 사이에 가능태와 현실태로 구성된 대상들을 포함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이슬람 신앙에 머물려던 그는 어쩔 수 없이 정통 이슬람 신학과의 조화를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를 위해 발전시킨 것이 독특한 '이중 진리(duplex veritas)설' 이었다. 이 설을 통하여 아베로에스가 주장한 것은 한 명제가 철학상으로는 진리이면서 신학상으로는 허위일 수 있다거나 또는 그 역일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한 진리 혹은 같은 진리가 철학에서는 이론적으로 명백히 이해되고 신학에서는 비유적(allegonice)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그는 코란의 해석 방식을 필연적인 논증을 요구하는 철학적인 증명 · 신학자의 비유 해석 · 백성들의 단순한 이해라는 세 범주로 구분하였다. 그에 따르면, 어떤 내용이 어느 범주에 속하며, 또 어떻게 그런 내용들이 해석되어야 할 것인지는 철학이 결정해야 할 사항들이었다. 철학자만이 비유의 껍질을 벗겨 내고 표상의 꾸밈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베로에스의 주장은 신학을 철학에 종속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슬람 정통 신학자들에게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라틴 아베로에스주의] 지성에 대한 그의 이론은 특히 서방 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에 의하면 인간 전체에는 하나의 '능동 지성' (intellectus agens)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능동 지성이 관념을 받는 경향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는 개별 인간의 수동 지성과 접촉함으로써 어떤 결합 상태, 즉 '질료적' (materialis) 지성을 이룬다. 단순히 능동 지성만이 분리되고 개별적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수동 지성도 인격적인 성격을 가지지 못하며, 신체와 함께 소멸한다는 것이다.
신학을 철학에 종속시키는 아베로에스의 이중 진리설은 이슬람 신학자들의 적의를 불러일으켜 마침내 신학과 철학의 극한적인 대립이 점점 심해졌다. 이슬람 문화권에 있던 스페인에서는 그리스 철학 연구가 금지되었으며, 철학 서적들이 소각되기까지 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베로에스의 사상은 서유럽 세계에 받아들여져 13~16세기에 걸쳐 중세 철학에 큰 영향을 미친 '라틴 아베로에스주의' 를 형성하였다. 이 학파는 많은 찬성과 반대를 불러일으키면서 다양한 토론을 발전시켰다.
1230년 이래로 스코투스(Michael Scotus, +1235)의 번역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뿐만 아니라 아베로에즈의 방대한 주석들도 서유럽 세계에 알려졌다. 1240년대부터 서유럽인들에게 아무런 설명 없이 사용된 '철학자 (philosophus)라는 용어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지칭하는것처럼, '주석가' (commentator)라는 용어는 아베로에스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또 1250년대까지 서유럽 학자들은 아베로에스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대 알베르토(Albertus Magnus, 1200~1280)는 1254~ 1257년 사이에 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 주석》(Quastioness super de animalibus)에서 "우리는 아베로에스와 매우 미소한 부분에서만 차이를 보인다" 라고 하면서 아베로에스와의 의견 일치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1260년과 1270년사이에 질료적 지성의 일치와 유일성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 일로 알베르토는 자신의 주장을 수정했고, 1267년에 저술한 《지성의 단일성에 대하여 논함》(De unitate intellectus)에서는 아베로에스를 반박하였다.
또 신학자 페캄(Johannes Peckham, 1210/1225~1292)과 킬워드비(Robert Kilwardby, 1210~1279)는 이단적인 학자로 규정된 아베로에스를 강도 있게 공격하면서 단일 영혼론으로 논쟁의 결말을 이끌고자 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자신의 저서 《아베로에스주의자들을 거슬러 지성의 단일성에 대하여 논함》(De unitate intellectus contra Averroistas, 1270)에서 본래적이고 중 대한 문제점을 밝혀 내었다. "이 사람이 인식한다" (hichomo intelligit)라는 진술이 최종적인 형이상학적 귀결까지 이르지 못한다면, 심리학과 윤리학의 기본 진리들은 의문에 처해진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영혼론이 철학의 시금석이 될 정도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베로에스주의는 1270년과 1277년에 파리의 주교 탕피에(Etiene Tempier, +1279)에 의해서 오류라고 판결되었으며, 특히 세계의 영원성 · 지성의 단일성 · 세계 내 사건의 보편적인 결정론 등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라틴 아베로에스주의를 대표하였던 브라방의 시제루스(Sigerus e Brabantia, 1235~1282)는 1270년까지 아베로에스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들을 강의하였지만, 비판이 심해지자 그 후 자신의 이론들을 변형시켰다. 하지만 결국 그는 다른 두 교수와 함께 1276년에 교수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라틴 아베로에스주의에 의해 신앙과 이성은 긴장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1277년 라틴 아베로에스주의에 대한 단죄 회칙의 서문에서는 '이중 진리설' 이 시제루스 이론의 신학적인 귀결이라고 하였다. 시제루스의 이론은 신앙의 인식과 철학의 논증적 지식이 서로 일치하는가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한편 아베로에스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 진리와 명백한 모순 관계에 놓여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베로에스의 주장들을 증명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지만, 학설들에 대한 단죄와 학자들에 대한 제재는 파리 대학의 인문학부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베로에스의 작품들을 더욱 주의 깊게 읽고 심리학과 윤리학의 문제들을 세분해서 탐구하도록 하였을 뿐이다. 스페인의 페란도(Feranus Hispanus), 오를레앙의 에지디오(Aegidius) 등은 아베로에스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을 옹호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조화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반대하였다. 라이문도 룰루스(Raimunds Lullus, 1235?~1315)는 아베로에스의 학설들 안에서 일반적인 결정론과 인간의 포괄적이고 자연적인 지식의 두 기본 이념에 기초한 체계를비판하였다.
14세기 전반기에도 계속하여 아베로에스주의자들은 파리 대학에서 아베로에스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이 정통적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교 진리와의 실제적인 충돌을 의도하지는 않았는데, 괴팅겐의 요한네스와 파르마의 안토니우스 등은 모순된 관계를 조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였고,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와 장둔의 요한네스 등은 극단적으로 아베로에스의 해석을 따랐다. 파리 대학 신학부에서 존경받던 영국인 교수 월턴(Thomas Wilton, 1312~1322)과 버를레이(Walter Burleigh, 1275~1343?)는 철학적인 관점에서 아베로에스의 극단적인 명제들을 받아들였지만, 철학적인 증명 과정과 그리스도교적인 신앙 진리 사이의 질서는 뚜렷하게 구별하였다. 지성과 인식에 관한 아베로에스적인 형이상학과 심리학에 대하여 파리의 아베로에스주의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해석과 토론은 주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고 인식론의 지속적인 발전은 지성이 인식의 내적인 작용 원리, 복잡한 인식 행위의 형상적인 힘, 주체의 구성 요소일 수 있는가 혹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에 대해서 설명하려는 노력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 스콜라학 ; 아리스토텔레스 ; 중세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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