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중서부 텔아비브에서 동쪽으로 12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대 가나안의 도시.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들어와 정복한 도시 가운데 하나로, 예루살렘에서 약 50km 정도 떨어져 있다.
[지리적 배경] 아벡은 "샘의 우두머리"라고 불리는 수량이 매우 풍부한 샘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다. 유다 산악 지대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지하수가 2억 년 전에 형성된 트리아스 암석층에 고여서 형성된 이 샘에서는 하루 평균 16만 4,000㎥, 연중 6,000만㎡의 물이 지하 3~4m에서 솟아나오고 있으며, 1리터당 염소 성분이 100~200mg 정도 섞여 있어 수질이 매우 뛰어나다. 또한 이곳은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는 야르콘(Yarkon) 강의 수원지(水源地)이며, 이 샘에서 지중해까지의 직선 거리는 14.5km이지만 야르콘 강의 전체 길이는 27 5km에 달한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F. Josephus, 37/38~100)가, 헤로데 왕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 위치해 있으며 주위에는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있고 많은 하천과 나무가 우거진 곳이라고 할 만큼 아벡은 농사와 목축에 적합한 곳이었다. 또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한 국제 무역로를 통제할 수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벡과 에벤에젤 사이에는 폭이 2km밖에 안되는 좁은 통로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를 "아벡 "라고 한다. 따라서 아벡은 고대부터 근처에 물과 경작지가 있고 대로변에 위치해 있어 지정학적으로 최상급의 요충지였다. 비록 낮은 지대여서 방어하기에 불리하였지만, 성벽을 높이 쌓고 주변 샘물을 이용한 해자(垓字)의 건설과 자연적으로 형성된 늪지대 때문에 외적의 침입에도 쉽게 견딜 수 있었다.
[역사적 · 성서적 배경] 아벡은 기원전 19세기 이집트에서 기록된 "저주 문서"에 처음으로 나오지만, 정확한 지리적 위치는 투트모세 3세(기원전 1479~1426)의 가나안 지역 도시들의 목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아벡은 로드(Lod)와 오노(0no) 사이에 있었으며, 예후드(Jehud) 북쪽, 소코(Socoh) 남쪽에 있었다고 한다. 아멘호테프 2세(기원전 1428?~1400)의 기록, 신아시리아의 에사르하돈(기원전 680~669) 왕의 기록, 기원전 600년경 이집트의 사카라(Sakama)에서 기록된 아람어 파피루스에도 아벡이 이집트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성서에서 아벡은 여호수아가 정복한 도시로 처음 등장하고 있다(여호 12, 18). 기원전 11세기 불레셋 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이 전쟁을 벌일 당시 말이 끄는 전차를 이용한 불레셋의 주력 부대는 아벡에 진을 쳤고, 대부분 보병들로 구성된 이스라엘 군대는 평지로 내려오지 못하고 아벡과 가장 가까운 산악 지대인 에벤에젤에 진을 쳤다(1사무 4, 2). 그리스 시대에 아벡은 '샘' 이라는 의미의 "페게" (mm)로 불렸는데, 헤로데 대왕(Herodes Magnus,기원전 73~4)이 이곳을 요새화한 다음 자신의 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하여 안티파트리스('Avomaopy)로 바꾸었다. 한편 바오로는 로마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항구 도시인 가이사리아로 끌려가던 도중 안티파트리스에서 하루를 머무른 적이 있었다(사도 24, 31-32).
[고고학적 배경] 1923년 텔 아벡에서 지표 조사를 하던 올브라이트(W. Albright, 1891~1971)에 의해 중기 · 후기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의 토기들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1934년에 야르콘 강의 물을 상수도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이곳에 취수장 건설이 계획되면서 2년 동안 행한 구조 발굴을 통해서 초기 청동기 I 시대와 중기 청동기 Ⅱ시대의 성벽이 드러났다. 그 뒤 1961년의 구조 발굴에서 후기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의 유적이 추가로 발견됨에 따라 아벡의 주거 역사를 좀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텔아비브 대학의 코카비(M. Kochavi)를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발굴단이 1972년부터 1985년까지 13차례에 걸쳐 체계적으로 아벡을 발굴하였는데, 이를 토대로 아벡의 주거 역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벡에는 기원전 3500년경 동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으며, 기원전 3100년경 초기 청동기 1시대에는 돌로 기초를 쌓고 흙벽돌로 상부 구조를 얹은 2.5m 두께의 성벽이 건설되었다. 400년 정도 도시로 지속되다가 기원전 2700년경 폐허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랜 주거 기간의 공백이 지난 후 기원전 2000년경부터 4m 두께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로 재건되었는데, 기원전 1900년경 세워져 700년 간 지속적으로 재건축이 이루어졌던 궁전 건물이 이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특히 기원전 13세기경 궁전 터에 새로 세워졌던 건물은 이집트 총독의 관저로 추정되며, 이를 입증하는 여러 기록물들도 발견되었다. 모두 400㎥에 달하는 이 건물 안팎에서 발견된 기록물들은 각각 이집트 상형 문자로 기록된 행정 문서 외에도 히타이트 상형 문자가 선명한 불라(도장 자국), 수메르어와 아카드어가 나란히 쓰여진 단어 비교표, 그리고 우가리트에서 보낸 무역 관계 편지 등 모두 10여 점에 달한다. 이 도시는 기원전 1230년경에 파괴되었는데, 아직 해독하지 못한 지중해 영향권의 선 문자가 새겨진 토판 조각과 람세스 4세(기원전 1151~1145)의 스캐럽 도장으로 미루어 기원전 12세기에 불레셋 민족이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10세기부터는 이스라엘 민족이 거주한 것으로 보이며, 왕정 시대에도 성벽을 쌓은 도시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거주했었다. 바빌로니아 시대와 페르시아 시대의 주거 공백을 거친 후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인들이 정착하면서 아벡은 "페게" 로 불렸다. 당시 전형적인 그리스적 도시 계획인 히포다모스 양식에 의해 바둑판으로 잘 짜여진 구역과 도로로 구성된 페게에는 가장 높은 아크로폴리스에 성채가 자리잡고 있었다. 유다 지역의 영토 분배를 상의하기 위하여 로마로 파견된 하스모네 왕조의 대표단이 페게를 포함시켰던 것으로 보아 당시 이곳에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9년 항구 도시 가이사리아를 로마 제국 최대 규모로 건설한 헤 로데 대왕은, 수도인 예루살렘에서부터 지중해 항구로 이어지는 무역로 중간에 위치한 페게를 중요한 정거장 도시로 만든 뒤 안티파트리스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리고 남북으로 이어지는 중심 도로인 "카르도"를 만드는 등 기본적인 로마식 도시로 정비했다. 그리고 신약 시대인 68년 봄에 예루살렘의 유대인 반란을 진압하러 가던 로마의 장군으로 훗날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에 의해 함락되었다.
※ 참고문헌 : A. Eitan, Aphek in Sharon, 《NEAEHL》 1, pp. 62~641 P. Beck . M. Kochavi, Excavations in the 1970s and 1980s of Aphek, 《NEAEHL》 1, pp. 64~721 M. Kochavi, Aphek in Canaan : The Egyptian Govemor's Residence and its Finds. Jerusalem, Israel Museum, 1990. 〔金 聲]
아벡
〔히〕אפק · 〔라〕Aphec · 〔영〕Aph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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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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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에 아벡에 세워졌던 성채( 왼쪽)와 가나안의 궁전 터에서 발견된 점토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