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신학자. 베네딕도회 회원. '팔레에서 온 페리파토스 학도' (peripateticus palatinus) , '스콜라학의 박사' (doctor scholasticus) , 또는 '스콜라 신학의 아버지' 라고도 불린다.
[생 애] 1079년 브르타뉴(Bretagne) 지방 팔레(Pallet)에서 기사였던 아버지 베렌가리오(Bernggmis)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기사가 되길 원한 아버지의 뜻과는 달리 철학 특히 논리학을 공부하는 길을 택하였다. 15세 때 유명론자 로셀리누스(Roscelimus de Compiègne, +1125)로부터 논리학 공부를 시작한 후 유명한 논리학 교사들을 찾아 다니며 공부하였고, 당시 파리 노트르담 주교좌 성당 학교의 교장이었던 상포의 기음(Guillaume de Champeaux, 1070-1121)으로부터도 배웠다. 기름은 그 학교를 베크(Bec)의 베네딕도회나 랑(Laon)과 샤르트르(Chatres)의 주교좌 성당 학교보다 학문적으로 뛰어난 곳으로 만든 인물이었지만, 그의 학문은 극단적인 관념 실재론에 가까웠다.
학생 신분이었던 아벨라르는 그 당시 명성을 떨치고있던 스승 기음을 공적인 토론장에서 패배시킴으로써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큰 명성과 함께 많은 추종자를 얻은 반면에, 유명한 스승을 공개 석상에서 모멸감을 느끼도록 공격함으로써 많은 적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 승리를 이용하여 아벨라르는 우선 플링(Melun) 근처에, 후에는 코르베유(Corbcl)에 자신의 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1108년에 파리로 돌아와 기음으로부터 다시 수사학을 공부하였으며, 공적인 토론을 통해서 스승 기음의 극단적인 실재론에 대한 입장을 바꾸도록 하였다. 34세 때 랑의 안셀무스(Amsclmus)에서 신학을 배운 아벨라르는 그의 교육 방법에서 결함을 발견하고, 짧은 시간 안에 스승을 능가하는 강의를 하여 학생들로부터 관심을 사게 되었다. 안셀무스가 개인적인 감정에 호소하는 교부들의 전통을 따른 반면, 아벨라르는 논리학 연구에서 얻은 체계적인 질문 방식을 이용함으로써 학생들의 호응을 얻었던 것이다.
그 후 다시 파리로 돌아와 파리 교외에 위치한 '생트주네비에브 산 (Mont Sainte-Geneviève) 학교에서, 그리고 1113년에는 노트르담 주교좌 성당 학교에서 신학과 논리학을 가르쳤다. 많은 학생들의 호응으로 명성을 얻은 아벨라르는 주교좌 성당의 참사회 회원인 풀베르토(Ful-bertus)의 요청으로 그의 조카딸 엘로이즈(Halose)의 개인 교사가 되었다가 그만 사랑에 빠져 그녀를 임신시키고 말았다. 이에 그는 그녀와 함께 몰래 고향 브르타뉴로가 아들 아스트랄라비우스(Astalami)를 낳고 비밀리에 결혼 생활을 하였지만, 이러한 사실이 풀베르토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아벨라르는 그녀를 생 아르장퇴유(St.Argenteuil) 수녀원으로 보냄으로써 풀베르토의 분노를 피하려 하였지만, 그의 행동에 진노한 풀베르토는 사람을 시켜 그의 생식기를 거세해 버렸다. 이 사건으로 아벨라르는 그의 철학이나 신학 작품으로보다는 엘로이즈와의 사랑으로 더 유명해졌다.
그 후 아벨라르는 생 드니(St. Denis)에 있는 베네딕도회에 입회하였으나 계속해서 동료 수도자들의 생활 방식을 비판하고, 수도원의 수호 성인이 디오니시오 아레오파지타(Dionysius Areopagita, 6세기)와 동일 인물이 아님을 증명함으로써 그를 적대시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들었다. 그리고 1121년 수아송(Soissons) 교회 회의에서 삼위 일체에 대한 그의 가르침이 단죄받을 때까지 파리에서 가르치다가 단죄 후에는 수도원에 유폐되어 지냈다. 그 후 그는 은수 생활을 하고자 하였으나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요청에 못 이겨 결국 파리 근교의 작은 마을에 다시 · 학교를 세웠으며, 1125년에는 자기 고향인 브르타뉴의생 질다(St. Gildas) 수도원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다른 수도자들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몇 차례 생명의 위협을 받은 끝에 1136년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한편 아벨라르는 수녀원의 총원장이 된 엘로이즈를 위해 수도원의 생활 방식에 관한 규칙을 마련해 주고, 종교적인 서신을 주고받기도 하였다.
파리로 돌아온 아벨라르는 생트 주네비에브 산 학교에서 열정적으로 가르치며 많은 글을 써서 명성을 얻었지만, 다른 교사들을 비판하고 신학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수정함으로써 많은 신학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마침내 생 티에리(St. Thierr)의 기음(1075/1080-1148)은 아벨라르의 가르침이 이단이라고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Ber-nardus de Clairvaux, 1090~1153) 성인에게 고발하면서, 아벨라르가 삼위 일체를 지성주의적으로 접근하여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당시 교회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녔던 베르나르도는 교황 인노천시오 2세(1130~1143)와 많은 주교들에게 아벨라르와 그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편지를 썼다. 그리고 1141년에 열린 상스(Sens) 교회 회의에서 아벨라르는 자신의 입장을 변호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이미 확정되어 버린 판결문을 들어야만 하였다. 이에 항의하기 위하여 로마로 가던 길에 그는 베드로 존자(Petrus Venerabilis, 1092~1156)에 의해 부르고뉴에 있는 클뤼니(Clun) 수도원에 받아들여졌다. 베드로 존자는 그에게 투쟁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는 한편, 베르나르도와의 화해를 중재하고 여생을 클뤼니 수도원에서 보내도록 교황의 허가를 얻어 주었다. 아벨라르는 1142년 4월 21일 클뤼니 수도원의 분원이 있는 살롱쉬르손(Chalm-ar-Same)에서 사망하였다.
[저 서] 현존하는 아벨라르의 주요 저술들은 주로 논리학이나 신학과 관련된 것들이지만, 설교문 · 시 · 서한 등과 자신의 생애를 1129년경까지 정리한 《환난의 역사》(Historia calamitatum)도 전해지고 있다.
논리학 : 포르피리우스(Pwphyinus, 232/233~304/305) · 1스토텔레스(기원전 384/383~322/321) · 보에시우스(A.M.T.S. Boetius, 470/475?~524)의 논리학 저서들을 초보자들에게 가르친 내용을 요약한 《초보자를 위한 입문》(Introductiones parvulorm)과, 포르피리우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과 《해석론》에 대한 매우 정교한 해설을 포함하고 있는 <심화 과정을 위한 논리학》(Logica ingre-dientibus), 그리고 그의 가장 발전되고 완성된 논리학 저서인 《변증론)(Dialectica) 등이 있다. 그렇지만 실재론의 입장을 공격하고 있을 <변증론》의 서두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신학 : 《삼위 일체 신앙에 대한 논고》(Tractatus de fide Trinitatis, 1124)는 수아송 교회 회의 이전에 그가 행한 신학 강의록을 토대로 엮어진 것으로, 교부들의 인용은 적지만 삼위 일체 신비를 지성적으로 설명하고자 한 것 같다. 《그렇다와 아니다》(Sic et Non)는 성서와 교부들의 가르침 중 모순된 것처럼 보였던 인용구들을 수집해 놓은 것인데, 학교 내에서 이루어졌던 다양한 신학 주제들에 대한 토론을 활성화시켰다. 이것은 교부들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던 이들에 대한 답변인 동시에, 교부들 사이의 차이를 해명하기 위한 지성적인 작업의 필요성에 대한 증명이기도 하였다. 또 《그리스도교 신학》(Theologia Christiana)은 《삼위 일체 신앙에 대한 논고》를 교부와 성서 인용들을 첨가해서 보충한 작품이고, 《신학 입문》(introductiones ad theolo-giam) 제1~2권은 초기 신학 저서들을 수정한 것이며, 제3권은 그의 사고의 발전된 형태를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1136년경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된다. 윤리 신학을 다른 《윤리학》 또는 《너 자신을 알라》(Scito te ipsum, 1136)라는 책에서는 죄의 개념을 분석하였는데, 하느님 편에서 볼 때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의도이며, 인간 행위의 결과는 인간을 더 선하게 하거나 악하게 하지 않는다는 과감한 결론을 제시하였다. 《철학자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대화》 (Dialogous inter philosophum, Judaeum et Christinum)는 그의 생애 마지막 시기의 작품으로, 이성과 신앙 문제에 대한 그의 최종적인 사유를 제시하였다.
기타 : 그 밖에 그가 남겨 놓은 개인적인 편지나 자서전은 역사가들이 12세기의 사회 생활과 지성 세계를 탐구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자료들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정보는 19세기 역사학자들이 중세 시대의 지성적 자유에 관해 만들어 낸 잘못된 전형을 파괴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사 상] 철학사적으로 아벨라르의 중요성은 보편 논쟁에 대해서 그가 제시한 해결책과 관련되어 있다. 그는 플라톤(기원전 428/427~348/347) 철학의 전통을 따라 보편이 개체에 선행한다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실재론과, 개체에 후행하며 '말의 떨림' (flatus vocis)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유명론의 중간 입장을 취하였다. 아벨라르에 의하면, 보편적인 용어는 의미를 가진 말이고 따라서 개념을 표시한다는 것이다. 이 보편 개념은 현실적인 사물의 본질을 뜻하는 것이므로 그 본질은 수많은 개체 속에 있다고 하였다. 결국 그에 의하면, 보편 개념은 오직 정신 안에만 존재하지만, 개체들이 공통으로 공유하고 있는 본성을 의미한다. 이런 설명은 형상과 질료의 관계를 논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따른 것으로, 당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 아직 서유럽 세계에 전해지기 전이었다. 그러므로 이는 아벨라르 스스로 이런 결론을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스콜라 철학 창립기에 주도적이었던 플라톤적 관념 실재론이 아벨라르에 의하여 아리스토텔레스적 실재론으로 수정됨으로써, 극단적인 실재론과 유명론 사이의 논쟁은 일단락되었다.
그는 또 신학에 있어서 스콜라학의 방법론을 발전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논리학자이자 예리한 언어 철학자였던 아벨라르는 《그렇다와 아니다》의 서문에서, 학생들이 의미상의 명백한 모순들을 조화시키고 여러 세기에 걸쳐 사용되어 왔던 단어들의 다양한 의미를 구별할 수 있도록 기초적인 규칙들을 체계화시켰다. 그는 전통적인 원천에 친근감을 드러냈고, 교부들의 다양한 의견들을 신학적인 종합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생 티에리의 기음은, 아벨라르가 논리학에서 배운 방법을 그대로 신학에 적용해서 "신앙의 제자가 아니라 감독관 노릇을 하고, 신앙을 모방하려는 것이 아니라 개혁하려 한다" 고 고발하였던 것이다.
[사상적인 영향] 아벨라르의 사상은 변증론을 신학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비록 그가 실제로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통 신학으로부터 멀어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실제로 그의 많은 제자들 중에서 라테란 대성전의 참사 회원 아담(Adam)이나 포레의 질베르(Gilbert de la Porrée, +1154)는 스승이 가르친 오류를 계속 가르쳐 이단자로 단죄받기도 했다. 한편 샤르트르의 주교였던 요한(Joan-nes Saresberiensis, 1115~1180)과 푸아티에의 피에르(Pierede Poitiers, +1115)는 아벨라르의 가르침을 그리스도교와 조화를 이루도록 수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그의 사상은 1141년의 단죄 이후에도 큰 영향력을 가지고 거대한 학파를 형성하였다.
한편 아벨라르는 사망 후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변증론을 신학에 적용시켰다는 이유로, 《프랑스의 네 괴물들에 대한 논박》(Contra quatuor labyrinthos Franciae)이라는 책에서 프랑스의 대표적인 악인들 가운데 하나로 거명되었다. 하지만 바로 그 시대에 아벨라르의 논리학은 스콜라학에 의해서 확실하게 수용되어 신학의 진보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고 13세기의 스콜라학을 쉽게 체계화할 수 있었던 것은 변증론을 신학에 적용하였기 때문이었는데, 이처럼 그가 《그렇다와 아니다》에서 사용하였던 방법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에서 드러나듯이 스콜라학 전체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학문 탐구 방법이 되었다.
〔평가와 의의] 여러 가지 다양한 해석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점은 확실하다. 첫째, 아벨라르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질 정도로 이성을 강조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엘로이즈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성 바오로를 거슬러 철학자이고자 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아리스토텔레스이고자 하지도 않는다"라고 명시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둘째, 상스 교회 회의에서 단죄되었던 많은 내용이 그 표현 그대로 그의 : 작품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신학 체계 안에서 그의 진정한 의도가 새롭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아벨라르의 신학적 견해가 정통인지에 대해서 베르나르도를 포함한 당대의 많은 신학자들은 의심을 품었고, 결국 수아송 교회 회의와 상스 교회 회의에서 오류로 단죄되었다. 하지만 신앙과 이성의 관계 및 삼위 일체에 관한 그의 학설의 발전 과정을 주의 깊게 탐구한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J.Cotiaux, J.Rozycki 등)은 그의 입장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 주었다. 생존 당시 아벨라르는 몇몇 추종자들에게서만 가장 위대한 사상가요 교사로 인정받았지만, 금세기에 들어와서는 일반적으로 '12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라고까지 칭송받고 있다. 또 현대 언어 철학자들에 의해서 중세의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로 인정을 받고 있으며, 최근에 와서는 수많은 연구 논문과 새로운 편집을 통하여 집중적으로 연구되고 있다. 그러므로 아벨라르 사상의 가치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아직도 열려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 보편 논쟁 ; 스콜라학 ; 신학 ; 신학사)
※ 참고문헌 정의채 · 김규영, <중세 철학사》, 도서출판 벽호, 10판, 1994, pp. 159~162/ F.C. Copleston, 박영도 역, <중세 철학사-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스코투스까지》, 서광사, 1988, pp. 203~207/ 효. Gilson, 김기찬 역, <중세 철 학사》, 철학과 지성사, 1997, pp. 226~240/ J. Hirschberger, 강성위 역, 《서양 철학사》 上(고대와 중세), 이문출판사, 1983, pp. 481~4891 J.R. Weinberg, 강영계 역, 《중세 철학사》, 민음사, 1984, pp. 77~951 B. Geyer, Peter Abaelards philosophische Schriften, 《BGPhMA》 XXI/ R. Thomas Hrsg., Petrus Abaelaradx(079-11142) : Person, Werk, Wirkumg, Trier, 1980/ M. Tweedale, Abailard on Universals, Amsterdam, 1976/ L.M. de Rijk, Peter Abelard's Semantics and His Doctrine of Being, Viavarim 14, 1986, pp. 85~127/ -, Peter Abaelard, Sprachphilosophie, Hrsg. von M. Dascal . D. Gerhardus · K. Lorenz · G.Meggle, Berlin-New York, de Gruyter, 1992, pp. 290~296/ B. Geyer, Die Stellung Abaelards in der Universalienfrage nach neuen handschriflichen Texten, 《BGPhMA》 Suppl. 1 , 1913, Pp. 101~115/ S.R. Smith, 1, Pp. 15~17. [朴勝燦]
아벨라르, 피에르 (1079~1142)
〔프〕Abelard, Pie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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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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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을 능가하는 강의로 학생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은 아벨라르.
